설국열차 영화평 글쓴이 대구 우리교회 이근호 목사
기차가 달린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냉기 속으로 달린다. 무작정 달린다. 목적지도 없고 멈추는 법도 없다. 가까운 미래인 서기 2031년, 지구 온난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기후 조절물질 'CW-7'을 하늘로 쏘아 올린 지 17년이 지난 시점.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지구는 오히려 '빙하기'가 찾아와 인류의 생존가능 지역은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1년에 지구 한 바퀴를 끝임 없이 도는 '순환열차'만이 인류의 마지막 유일한 생존 지역으로, 이 열차 안에는 하층민이 사는 꼬리칸 부터 상층민들의 앞쪽 칸까지 계급사회로 이루어진 승객을 태우고 질주한다. 영화의 큰 줄거리는 꼬리칸의 지도자 '커티스'가 하층민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열차의 심장인 엔진이 있는 앞쪽으로 한 칸 한 칸 전진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전진하는 과정에서 빈민굴 같은 꼬리칸의 정신적 지주인 연로한 지도자 길리엄과 젊은 지도자 커티스는 양갱같이 생긴 배급양식 속에서 밀서를 받으면서 이루어지는데 실은 그 밀서라는 것이 기차 제작자이자 기차의 절대적 권력자인 월포드가 의도적으로 보내준 밀서였다.
이 사실을 연로한 지도자 길리엄은 알지만 젊은 지도자 커티스는 모른다. 따라서 기차의 절대적 권력자 월포드는 사전에 끝 칸에 탄 사람들의 반란을 유도해서 반란 집압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살해할 수 없다는 타당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내면적으로 기차 전체에 소모되는 물자를 균형 있게 조절해 왔던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다 같이 죽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두고 이미 월포드와 길리엄을 사전에 은밀하게 조율해 왔던 것이다. 적당히 반란을 유발시켜 앞 칸과 뒤 칸의 인원수를 적절하게 감소시켜 온 것이다.
한칸 한칸 닫혀있는 문을 여는데 는 열차 중간쯤 감옥칸에 갇힌 보안설계자(송강호)를 꺼내는 것이 필요했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둘 다 기차 해방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고 그저 마약 중독에 빠져있는 듯 한 행동을 보이는데 그 마약이라는 것이 실은 인화물질이라서 기차를 강탈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차 밖으로 나아가 땅을 밟으려는 의도를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반란 측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는 엔진이 있는 제일 앞 칸에 타고 있는데 반란 측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는 그 월포드를 만나서 제거하고 기차를 반란민 위주로 운영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하지만 막상 월포드를 만나자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앞 칸을 탄 귀족들이나 맨 끝칸에 탄 하층민이나 모두 외롭게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이 인간 사회는 빙하기로 인하여 오직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이 기차 외에는 다 죽는다는 엄연한 현실성 때문이다. 따라서 이 냉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견뎌내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균형과 질서가 요구된다. 즉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켜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계속 연장된다. 앞 칸에 탄 자들은 지구의 빙하기를 먼저 간파하고 미리 돈을 비싼 돈을 내고 탄 자들이라서 그만한 자격이 있지만 뒤 칸에 탄 무수한 자들은 빙하기에 그대로 노출되어 얼어죽을 직전에 있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기차에 올라타게 된 그 자체만 해도 자비로 여기고 이 자비성을 품고 본디 자신의 자리를 지켜주기 바란다. 이것만이 우리가 다 같이 살 길이다. 이제 나도 늙었다. 반란투쟁 중에 나와 사전에 의견을 나누었던 끝칸의 정신적 지주인 길리엄도 죽었다. 젊은 커티스 네가 이 기차를 맡아주기 바란다.”
끝 칸에서부터 맨 앞 칸까지 우열곡절을 거쳐서 왔던 커티스이지만 이 엄연한 현실성에 다른 대안이 없음을 알고 울어버린다. 하지만 다른 계획을 가진 자가 있었으니 그 자는 보안설계자와 그 딸이다. 이들에 의해서 기차의 바깥문은 아예 폭파하고 기차 밖으로 나가 해방을 얻고자 한다.
과연 마약으로 사용되는 인화물질을 이용해서 바깥문이 폭파되니 그 진동으로 주변의 설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나면서 열차를 덮쳐 다 죽고 보안설계자의 17살 먹은 딸과 흑인 아이만이 하얀 눈이 덮인 지구땅을 생전 처음으로 딛게 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의 주제는 이러하다.
1. 지구는 대자연의 환경변화 안에 어쩔 수 없이 갇혀 있다.
2. 하지만 인간들은 각자 자기 살 궁리만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갈등과 폭력과 투쟁을 야기시킨다.
3. 국가는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욕망을 조절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잘난 자와 못난 자 사이에 계급을 지어 각자의 자리를 인정하는데서 균정과 질서를 그나마도 잡을 수가 있다. -플라톤의 국가론
4. 이러한 국가경영론은 모든 시민들이 인정하는 사회계약적 성질을 띠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민주국가에의 헌법 정신이다.
5. 따라서 누가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지도자가 되어도 균형에서 오는 질서만이 냉혹한 대자연의 요동 앞에서 그나마도 인류는 버티고 종족을 번식하고 미래로 이어갈 수 있다.
6. 하지만 인간이 본디 가지고 있는 해방과 구원욕구는 이런 국가의 한계마저 탈피하고자 하는 욕구로 작용하게 된다.
7. 이 해방욕구의 결말은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답답하면 탈출하게 마련인 것이 인간의 영원함을 찾는 본성이다. 국가 경영이라는 이 냉정한 현실 속에서 예술이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근원적 희망성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예술이 나름대로 자기 영역을 지킬 수 있는 이유다.
(복음적인 평) 인간 세상이 ‘폐쇄공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애초부터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피조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은 답답해 한다.
“나는 궁극적으로 나만을 사랑하고 싶은데 왜 주변은 그것을 방해하는가! 나는 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모든 간섭과 외부 의도로부터 탈출하고 또 탈출할 것이다. 희망하고 또 희망할 것이다. 그 누구도 나를 간섭하지 않고 그 누구도부터 간섭받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임을 나 스스로가 확실할 때까지…!”
갓난아기부터 모든 인간들이 이 욕망들로 단단히 마음 무장하고 살기에 사람들은 따지기 위해 교회 다닌다. “하나님, 저도 신이 되고 싶습니다.” 이런 욕망으로 인하여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렸다. “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갈 3:22)
봉준호 감독은 종교마저 답답함으로 본다. 종교마저 벗어난 종교. 종교 그 바깥에 나아가 신도 없는 인간들만의 세계를 꿈꾼 것이다. 모든 인간의 본래의 마음이 이러하다. 그러니 악마는 이 세상에서 매일 승리하고 있다.
p. s: 영화를 끝나고 밖으로 나가는데, 20대 아가씨가 영화 보러 같이 온 남자 친구한테 심하게 신경질 낸다. “이렇게 재미없는 영화는 처음 본다.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그렇다. 20대 시절은 그저 세상살이는 재미와 재미로 연속되는 이어지는 줄로 기대한다. 죽음의 힘에 갇힌 줄도 모르고…
자연산 싸리버섯
|
출처: 김형희산야초 원문보기 글쓴이: 김형희산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