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억년 지구생성의 시간이 빚은 자연,
1500년 신라 고려 조선 대한민국 문명의 역사를 가진 내연산
이름도 5가지나 된다.
종남산(終南山-중국 화엄종 제2조 지엄 스님 문하에서 해동화엄종 의상조사가 유학한 절인 지상사가 있는 산인데, 화엄종 계열의 사찰인 보경사가 있는 산 이름도 종남산으로 불렸다.),
내영산(內迎山)/내연산(內延山-내영산이 내연산으로도 불렸다. 영과 연 두 글자는 소리와 글꼴이 닮아서 통용하였다.),
신구산(神龜山 13세기 고려 원진국사탑비문에 신구산이라고 이름이 나타난다.
동국여지승람 등의 지지, 조선시대 19세기에 제작된 지도에는
응봉에서 남북으로 갈라져 동해로 뻗어내리는 두 산줄기를
내연계곡을 중심으로 남쪽 줄기를 신구산,
북쪽 줄기를 내연산이라고 구분하였다.
신구산의 하늘재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언젠가부터 천령산이라는 이름이 쓰이고 있다.
신구산에서 청하읍쪽으로 뻗은 산을 호학산(회학산)이라고 하고 청하읍의 진산이다.
호학산 정상부 아래 7-8부 능선에 상태사터가 있다.)
소금강산(小金剛山, 삼용추를 중심으로 하는 내연계곡의 경관이 금강산을 방불하기에 붙은 속칭.)
현대의 내연산 등산도
속칭 선바위(立巖), 내연산의 랜드마크인 삼동석이다.
시명리 지나서 내연산 수목원 삼거리 못 미쳐서 높이 서 있다.
전국에 선바위(입암)이 많이 있지만
포항에는 두 곳의 선바위가 유명하다.
본래 영천 땅(1914년 일제에 의하여 포항 땅으로 행정구역 재편)이었던
죽장면 입암과 내연산 입암(삼동석)이 대표적이다.
죽장면 입암과 계구대 입암정사, 소로잠, 수어연, 상두석 등
죽장 입암과 주변 경관 명소에
여헌 장현광 선생이 입암28경을 명명하고 그에 대한 인문학적 의미 부여의 기문인 입암기가 있다.
여헌을 대신하여 노계 박인로가 한글 가사의 노래인 시조 입암곡 29수가 있다.
여헌의 입암기를 읽고 영천 호연정에서 입암을 찾아 친구(안후정 자 군경 , 박성세 자 호여)와 같이 여행하고 남긴
대학자 병와 이형상 선생의 여행기 입암유산록.
입암 옆의 바위 아래에 있는 건물은 입암정사(일제당, 열송재, 우란재)이다.
문화재 관리 당국자와 사람들은 입암정사를 일제당이라고 잘못 부르고 있다.
죽장 입암28경을 유산한 병와 이형상의 <입암유산록>(1700),
청하와 내연산을 유산한 해월 황여일의 <유내영산록>(1587).
향토사의 생생한 기록이자 뛰어난 기행문학인
두 명문을 나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번역을 하였지만
전자는 워낙 출전이 많아서 아직도 석연하지 못한 구석이 수두룩하고,
후자는 문장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고 고졸한 맛이 있지만
등장하는 출전, 인명, 지명, 암자명을 거의 완전하게 확인하였지만
지은이도 알 수 없었던 몇 곳의 내연산의 경관 명소들은 확인하지 못하고 나에게도 숙제가 되어있다.
향토사 소재 수필과 두 기행문 번역, 사진들을 엮어서 포항의 향토사 인문학서를 펴내고 싶기도 하다.
작년 가을에 한 등산인이 내연산 수목원-삼거리에서 시명리로 내려오며 촬영한 선바위이다.
화전민들이 옛부터 흔히 선바위로 부르고 있는 이 바위가
바로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내연산의 랜드마크로 응봉 아래의 삼동석이다.
사람과 비교하면 삼동석의 높이를 짐작할 수 있다.
삼동석. 솥발모양으로 상중하에 삼각형으로 바위가 분포한다.
3개 바위 중 시냇가에 높이 솟은 이른바 선바위가 바로 삼동석을 대표하는 동석 곧 삼동석이다.
전체적으로 삼단으로 구성된 바위인데 맨 위의 바위가 보기에 위태로이 놓여있다.
성덕대왕 신종 처럼 큰 종(大鏞) 모양이다.
삼동석(三動石-삼정석三鼎石)
‘삼동석’은 3개의 ‘흔들바위’라는 뜻이다. 고문헌에서는 모두가 삼동석의 위치가 용추 상류에 있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산에는 대(大)ㆍ중(中)ㆍ소(小) 세 개의 바위가 솥발처럼 벌려 있는데, 사람들이 3동석(動石)이라고 한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조금 움직이지만 두 손으로 흔들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진평왕이 견훤을 피하여 내연산에 왔다.’는 정보와 함께 이 책에 실려 있는 내연산에 관한 인문지리 정보이다. 내연산의 가장 대표적인 자연경관을 삼동석으로 인식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이 1432년에 처음 간행되고 증보를 거쳐서 1530년에 완간된 점을 고려하면, 내연산에 대한 고려시대 이래의 정보를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매봉과 내연산 중간에 삼동석이 보이고 조경대에 누각이 그려져 있다.
이외에도 보경사, 학산, 호학산, 도리산, 별래재, 육현(엿재), 강성산, 봉송정, 덕송, 달현산,
청하읍성, 송라도찰방역관, 향교 등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응봉-삼동석-내연산,
신구산-호학산-용추-호학제
용산(조경대), 강성산, 강성산, 달현산, 봉송정, 도리산(봉수대), 덕성산
서정천, 내연계곡
보경사-학산서원
청하읍성(객사, 아사, 연정, 해월루, 동문, 서문), 향교, 송라도찰방역관, 교통로
북면, 남면, 동면, 서면
이후 19세기에 국가가 편찬한 청하현 지지의 고지도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등의 고지도에도 삼동석이 나타난다. 고지도에서 응봉에서 발원하는 내연계곡의 북쪽 산줄기가 내연산이고, 남쪽 산줄기가 신구산이다. 응봉과 내연산 중간에 삼동석이, 신구산에 삼용추(용추)가 표시되어 있다. 고지도에서는 삼동석은 내연산의, 삼용추는 신구산의 랜드마크(landmark)로 각기 인식되었다. 심지어 1834년의 <청구도(靑丘圖)>에서는 내연산 대신 삼동산(三動山)이, 신구산 대신에 호학산(呼鶴山)이 나타난다.
내가 주연(舟淵)이라고 짐작하는 못. 주연의 특징이 삼동석 10리 하류에 있고 깊이를 알 수 없을만큼 깊다고 하였다.
은폭 상류 삼동석 하류에서 가장 깊은 못이고, 삼동석과 대략 10리 정도의 거리에 있어서 주연이라고 추정한다.
바로 위쪽에 높이 솟은 암벽이 있고 그 아래에 경사지긴 하였으나 평평하고 아주 넓은 암반이 있다.
오른쪽 암반 위로 암벽이 솟아 있고, 암반 아래쪽에 내가 주연으로 추정하는 깊은 못이 있다.
이곳의 평평한 암반과 암벽에는 이름이 없다. 이외에도 아직 이름이 부여되지 않은 폭포 등의 경관이 많다.
나는 불교의 업경대(業鏡臺)에서 취한 금강산의 명경대(明鏡臺)를 본받아 보경대(寶鏡臺)라고 명명하였다.
불교에서 거울은 마음을 비유하고 상징한다.
유흥섭(송화미술원 원로화가)의 금강산 명경대 실경화
보경(寶鏡)은 둥근 청동거울처럼 생긴 둥근 보름달(月印千江之曲)을 말하고, 보름달은 곧 부처님의 진리를 비유, 상징한다.
보경사 창건 연기설화의 8면경, 12면경은 8정도, 12연기의 비유, 상징물이다.
유식학에서 전식득지하여 아라야식을 대원경지(大圓鏡智-삼라만상을 왜곡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처럼 연기되어 있는 실재 모습 그대로를 인식하는 원융무애한 마음) 로 전환한다.
선어록에 宗鏡錄, 古鏡重磨가 있고, 현대의 대선사 鏡峰선사.
신수(神秀)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심시명경대(心是明鏡臺),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물사유진애(勿使有塵埃).”
혜능(慧能)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황여일은 용추 위의 20리 지점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주연이 있고, 그 상류 10리 지점에 삼동석이 있는데, 그 아래에 2곳의 승암(僧庵)이 있으며, 그곳에는 ‘입에서 물을 내뿜는’ 사람들이 산다고 하였다. 유도원은 계조암에서 몇 십리 떨어진 곳에 삼동석이 있다고 하였으며, 삼동석에 가보지 못한 그는 삼동석이 실재하는지를 의심하기도 하였다. 성대중은 ‘용추 위로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면 용추보다 기세가 다소곳하지만 더 아름다운 내연산의 제일가는 폭포가 있고, 그 위쪽에 삼동석이 우뚝 솟아 있는데 장관이다.’고 하였다.
내연산에 관한 지리정보 중 용추와 더불어 대부분의 문헌자료들에 삼동석이 나타나지만, 실제로 삼동석을 보고 기록을 남긴 사람은 유숙(柳潚)이 유일하게 확인된다. 그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읽고 삼동석을 찾았다. 그는 청하현의 봉산(封山) 표석이 세워져 있는 호학산(呼鶴山)의 산길과 봉우리를 넘어서 삼동석으로 접근하였다. 삼동석은 상하로 솥발처럼 3개가 벌려 있으며, 그 모양은 큰 종처럼 생겼다고 하였다. 삼동석 근처의 단풍숲가에 두 절이 있는데 흥폐를 거듭하고 있으며 주변에 두 벼랑이 높이 솟아 있다고 하였다. 유숙은 1625년 10월경에 삼동석 근처의 동석암(動石庵)에서 묵었고, 1636년 봄에 청하현감 심동귀(沈東龜)와 삼동석으로 유산하였다. 삼정석은 삼동석이 솥발 모양으로 3곳에 있어서 붙여진 별칭으로 추정한다.
2013년 3월 10일 필자는 현재의 선바위까지 1차 답사를 하였다. 선바위가 삼동석일 것으로 추정하고, 선바위 서북쪽인 내연산의 숯가마가 있는 화전민의 집터에서 백자 편 2점을 수습하였다. 3월 17일에 선바위를 지나 내연산수목원 경내인 삼거리까지 2차 답사를 하였다. 이 때 선바위 앞의 등산로에서 아주 작은 기와편 2점을 수습하였다. 선바위는 3단으로 되어 있으며 최상층부 바위는 큰 종 모양이며 위태로이 올려져 있었다. 선바위 위쪽에 두 바위들이 선바위와 삼각형으로 벌려 존재하였다. 선바위에서 삼거리로 가다가 내연계곡의 서북쪽 가에 높이 솟은 바위 절벽이 나란히 있었다. 19세기의 지지에 그려진 삼동석은 모두가 내연산 쪽에 있다면, 현장에서 확인한 삼동석은 내연계곡의 남쪽인 신구산 쪽에 있다는 점이 기록과 다른 점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내연산을 신구산이라고 하였던 점을 생각하면 산 이름 사용의 변동에서 생긴 혼동이라고 여겨진다.
선바위 주변의 식생은 단풍이 드는 활엽수림이었다.
필자는 현재의 속칭 선바위와 삼각형을 이루는 두 바위를 합쳐서 삼동석이라고 판단한다.
현대의 문헌은 일동석이라고 하며, 용추 하류에 있다고 하였다. 박일천이 편찬한 <<일월향지>>(1967)에는 ‘일동암(一動巖)’이 있다고 하였고, 이종익의 <<보경사의 사적과 사화>>(1983)에는 ‘일동석(一動石)이 상생폭 동쪽 20미터 지점에 우뚝 솟은 바위인데, 그 위에 움직이는 듯이 보이는 바위가 있었지만 현재는 없다.’고 하였다. 또 2동석, 3동석은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삼동석은 내연계곡 최상류에 있으며, 기본적으로 청하에서 호학산 고개를 넘어서 접근하였던 곳이다. 선바위, 삼거리 주변에 살았던 주민들도 호학산을 넘어서 청하로 내왕하였다. 보경사에서 출발하여 삼용추 또는 그 위쪽의 내원암, 대비암, 계조암, 선열대까지가 신라․고려․조선 시대의 보경사 산내 암자에 머문 승려들의 수행 공간이었으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유산 공간이었다. 따라서 내연계곡 상류에 있는 삼동석은 국가가 편찬한 지지와 지도에 용추와 더불어 랜드마크로 나타나지만 보경사에서 삼용추 주변 지역까지 유산하였던 후대인들에게는 그 위치가 잊혀지고, 급기야 20세기에 들어서는 내연계곡 중류의 용추 아래에서 기록에 나타나는 3동석을 찾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육기(六器)는 창벽(蒼璧), 청규(靑圭), 황종(黃琮), 적장(赤璋), 백호(白琥), 현황(玄璜)이며,
육지(六贄)는 벽(璧)과 백(帛), 종(琮)과 금(錦), 규(圭)와 마(馬), 장(璋)과 피(皮), 호(琥)와 수(繡), 황(璜)과 보(黼)이다.
하늘에는 창벽(蒼璧)으로 예를 하고,
땅에는 황종(黃琮)으로 예를 하고,
동쪽에는 청규(靑圭)로 예를 하고,
남쪽에는 적장(赤璋)으로 예를 하고,
서쪽에는 백호(白琥)로 예를 하고,
북쪽에는 현황(玄璜)으로 예를 한다.
천황대제(天皇大帝)가 북극에 계시다 하여 하늘의 예는 동지(冬至)에 하며,
땅귀신이 곤륜산에 있다 하여 땅의 예는 하지(夏至)에 하며,
동쪽에는 창정(蒼精)의 제(帝)가 있다 하여 입춘(立春)에 예를 올리는 데, 태호(太昊)ㆍ구망(句芒)이 예를 받고,
남쪽에는 적정(赤精)의 제가 있다 하여 입하(立夏)에 예를 올리는데, 염제(炎帝)ㆍ축융(祝融)이 예를 받고,
서쪽에는 백정(白精)의 제가 있다 하여 입추(立秋)에 예를 올리는데, 소호(少昊)ㆍ욕수(蓐收)가 예를 받고,
북쪽에는 흑정(黑精)의 제가 있다 하여 입동(立冬)에 예를 올리는데, 전욱(顓頊)ㆍ현명(玄冥)이 예를 받는다.
신에게 예를 하려면 반드시 그 유형에 맞게 해야 한다.
즉 벽(璧)은 둥글어 하늘을 상징하고,
종(琮)은 여덟 모가 져서 땅을 상징하고,
규(圭)는 끝이 예리하여 봄에 물건들이 처음 나오는 것을 상징하고,
장(璋)은 반쪽 구슬인데, 여름에 물건이 절반 죽은 것을 상징하고,
호(琥)는 맹수로 가을의 엄숙함을 상징하고,
황(璜)도 반쪽 구슬인데, 겨울이면 모든 것이 폐장(閉藏)되어 지상에는 아무 것도 없고 하늘만 절반쯤 보이는 것을 상징한다.
*오구(奧區) : 산이 높고 골이 깊어 풍수지리상으로 명당(明堂)인 곳을 가리키는바, ‘오구(隩區)’라고도 한다.
*검각: 아주 험한 요충지.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검각이 우뚝 험준하게 서 있으니, 한 사내가 지켜도 만 사내가 열지 못한다.
[劍閣崢嶸而崔嵬 一夫當關 萬夫莫開]” 하였다.
*與興海太守洪養素 靌,寧海太守高晴沙 用厚,主人太守柳龜巖,盈德太守之子韓生 梲,興海廣文金公 就英。遊龍湫
흥해태수 홍양소 보, 영해태수 고청사 용후, 청하현주인 태수 류귀암 사경, 영덕태수의 아들 한생 탈, 흥해 광문리 사람 김공 취영과 더불어 용추에서 노닐며
香爐峯上夕陽遲。翠柏丹楓畫障奇。향로봉 위의 저녁해 더디 지고, 푸른 솔과 짙붉은 단풍숲의 병풍그림 곱다
冠蓋入林幽鳥怪。姓名題壁老龍知。벼슬아치 숲에 드니 산새가 괴이하게 여기고, 바위벽에 이름을 쓰니 늙은 용이 알아본다.
蘇門獨發三聲嘯。樵洞旁觀一局棋。소문은 홀로 세 번 휘파람 불고, 초동은 한 판 바둑을 방관한다.
願見謫仙沈醉後。倒流飛瀑寫新詩 적선을 만나보고 싶어 취한 뒤에 물에 빠지고,
거꾸로 쏟아지는 폭포에 새로운 시를 쓴다.
*청사는 고경명의 아들이며 영해태수 高用厚이다. 흥해군수 홍보, 영덕현감 아들 한탈, 청하현감 柳思璟(귀암), 흥해 김취영이 어울렸다. 고용후는 1631년에 조흥빈의 고변에 연루되어 詩句가 문제되어 죄를 받았으나 충신의 아들이라 하여 영덕에 유배되었다.
*소문산(蘇門山)의 긴 휘파람 : 진(晉)나라 때 은자(隱者) 손등(孫登)의 휘파람 소리를 가리킨다. 진나라 때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이 소문산에서 은자 손등을 만나 선술(仙術)을 물었으나 손등은 일체 대답을 않고 휘파람만 길게 불면서 가 버렸는데, 그 소리가 마치 암곡(巖谷)에 메아리치는 난봉(鸞鳳)의 소리와 같았다고 한다. 《晉書 卷49 阮籍列傳》
*적선:신선계에서 지상으로 귀양 온 신선-이태백
8) <<江左先生文集>> 권10 <祭文(堂姪正宅)>.
보경사에서 1리 거리의 첫 길목 낙호암(落虎巖) -산신제터
무풍계(舞風溪)-대체로 보경사에서 문수대 또는 사자폭까지의 내연계곡
문수대(文殊臺)-문수암으로 올라가는 길과 사자폭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
승선교(昇仙橋, 太平교-落霞교)로 짐작되는 곳(옛날에는 소나무 다리가 걸쳐져 있었다.)
멀리 보현암 뒤 칠성등 바위(구암龜巖). 내연산에서 가장 좋은 바위능선.
낙호암(落虎巖), 무풍계(舞風溪)를 지나서 문수대-승선교(昇仙橋, 太平橋, 落下橋) 지나서 사자폭 아래의 너럭바위,
1587년 8월 6일 황여일 일행이 머리감고 결명배(전복껍질 술잔)에 술을 따르고 시를 낭랑히 읊조리며 쉬어 갔던 곳이다.
사자폭(獅子瀑), 그 위에 시원하게 열린 활연문(豁然門)
사자폭- 밤낮으로 부처님의 설법, 사자후를 토하는 무정(無情-식이 없는 식물, 광물)의 설법.
혜능(慧能) 선사는 유정(有情-식이 있는 사람, 동물로서 중생)만 불성(佛性)을 가졌다고 한데 대하여 선종이 발전하면서 무정도 불법을 강의하고 들을 수 있다며 불성의 범위를 확대하였다. <<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역대의 선사(禪師)들이 무정도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설법을 하고 들을 수 있다는 이치를 참구하여 깨닫는 과정이 실려 있다.
선불교에 조예가 깊었던 소동파(蘇東坡)가 황주(黃州)를 떠나 여주(汝州) 자사로 가는 유배길인 1084년에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벗, 상총(常聰) 선사를 방문하였다. 두 사람은 밤새 법담을 나누었다. 대화가 조동종(曹洞宗)을 창설한 동산양개(東山良介) 선사가 운암담성(雲巖曇晟)에게 묻는 공안(公案)을 언급하기에 이르렀고, 소동파가 그 때 자신의 견처(見處)를 표현한 시가 사자폭에 오면 나는 늘 생각난다.
溪聲便是長廣舌 계곡 물소리는 곧 부처님의 장광설인데,
山色豈非淸淨身 산빛은 어찌 아니 부처님의 청정법신이 아니리요?
夜來八萬四千偈 밤새 들려온 팔만사천 게송
他日如何擧似人 다른 날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할까?
사자폭 위의 활연문-해월 황여일 선생은 주자가 자신의 학문의 성취를 표현한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 중
九曲將窮眼豁然 桑麻雨露見平川 漁郞更覓桃源路 除是人間別有天에서 취한 것 같다고 하였다.
사자폭의 남쪽을 둘러싸는 4열의 층암
족보없는 상생폭은 버리고 사자폭이라는 본래 이름을 어서 되찾아야 한다.
낙구암(落龜巖) 좌우로 사자쌍폭이 사자담(구암龜潭, 기화담妓花潭)으로 쏟아진다. 수량이 많지는 않았다.
기화는 기생의 미칭. 해어화는 기생의 이칭.
청하현감 문장가 백운거사(白雲居士) 옹몽진이 은자 도연명처럼 무릉도원을 찾아왔다가 내연산의 비경을 발견하고
돌아가는 길에 경주부윤 구암 이정에게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당대의 명유(名儒)였던 이정이 밀랍 칠한 나막신 신고 산천의 아름다움을 트렉킹하기를 좋아하였던 사령운과 친구들과 형산 축융봉을 오르며 탁주 몇 사발을 들이키고 호쾌한 산행을 즐겼던 주자의 유산을 흉내 내어 1562년 내연산 유산을 하였다.
이후 조선시대 사대부 사회에 널리 알려진 내연산에 기생을 동반한 벼슬아치들(특히 조선후기에 권력을 장악하였던 노론 권세가들과 내연산 주변의 청하, 흥해, 연일, 영덕, 영해, 경주, 영천, 하양의 지방관들이 많았다), 시인묵객의 산놀이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의 이름이 지금도 용추 계곡 주변 바위에 많이 새겨져 남아 있다. 시인묵객들의 붓으로 썼던 이름이나 시들은 전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내연계곡에 기화대, 기화봉, 기하대, 기화담이라는 이름들이 붙었다.
사자항의 옛 등산로에는 지금처럼 계단식 사다리가 아니라 돌을 쌓아올린 석축이 있었다.
석축을 오르면 그곳이 사자대, 북쪽에서 바위가 뻗어내리는 사자암이 있다.
사자폭을 지나서 보현암 앞의 계곡
싱그러운 녹색 잎들이 사람의 마음을 정말 편안하게 한다.
자연은 최고의 힐링
보현폭이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내연산 계곡에서 이곳을 가장 사랑한다.
습득대(拾得臺) 보현암(한산대) 아래 길가, 계곡 벼랑 위.
당나라 승려들인 한산과 습득. 한산은 문수보살의 화신,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신으로 생각한다.
한산대(寒山臺)-보현암의 옛 석축
한산대(보현암). 전망이 트였고 터가 좋아 매우 안정감을 준다.
풍혈(風穴).-적멸암터, 적멸항 지나서 길가에 있다.
보현암 지나면 나무 정자가 있는 쉼터(대피소)가 된 곳이 적멸암터(적멸항)이다.
암자터는 엄연히 문화재로 국가와 지자체인 포항시, 보경사가 보호하여야 할 곳이다.
지금 문화재 안내문이나 문화재 보호 시설이 있기는 커녕
시에서 나무정자를 만들어 등산객의 단순한 쉼터로 만들어 놓았다.
적멸항이라는 경관명소의 이름도 안내하여야 한다.
서하굴(棲霞窟) 용추 동쪽 벼랑 아래에 있다. 사진에 석축이 보인다.
1587년 8월 7일 황여일 선생이 유산 중에 명명.
서하굴에 나딩구는 고철 건축자재 쓰레기를 어서 치우고 이 명소 안내판이라도 세우면 좋겠다.
상중하 삼용추(三龍湫) 중 상용추(내연폭, 연산폭, 여래폭). 폭포 위의 사람과 비교하면 높이를 짐작할 수 있다.
용추는 폭포라는 일반명사이지만,
내연산에서는 용추는 삼용추 또는 상용추를 말하는 고유명사.
삼용추(용추)는 신구산의 랜드마크,
삼동석은 내연산의 랜드마크.
17세기의 유숙은 상용추를 장자(莊子)에 부끄럽지 않은 뜻을 담아서 적선담(謫仙潭)이라고 명명하였다.
적선은 이백의 별칭.
이백의 시,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 >는 유명하다.
日照香爐生紫煙 (일조향로생자연)
遙看瀑布掛長川 (요간폭포괘장천)
飛流直下三千尺 (비류직하삼천척)
疑是銀河落九天 (의시은하락구천)
향로봉에 햇빛 비치자 보라색 운무 자욱하게 일고,
아득히 바라보이는 폭포는 긴 강물을 걸었다.
아래로 날아 쏟아지는 물줄기 삼천 척인데,
밤하늘의 은하수 물이 떨어지는 것 같네.
햇빛이 들자 나타나는 상용추의 무지개
1587년 황여일의 유내영산록에도 무지개가 선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 무지개 서는 장면은 처음 보았다.
상용추 아래의 용담(龍潭). 물의 신령스러운 기운인 용이 깃들어 있는 용담 가의 관어대(觀魚臺).
용담 속의 맑은 물살에는 피라미가 헤엄치고 있다.
청하현감이 기우제를 지내던 곳.
입하 뒤 70일 동안 가뭄이 들자 1626년 청하현감 이립은 기우제를 지내고
그날 밤에 관어대 바위에서 한데잠(노숙)을 자며
근신(謹愼)하며 용담의 용신에게 비를 내려 주기를 빌었다.
물의 신령이 원님의 마음에 감응하여 비를 내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에너지를 보냈다(동중서의 天人感應說).
과연 그 뒤에 비가 흡족하게 내렸다.
용담 옆의 바위 구멍에 고인 물에 비추어진 학소대 위의 나무.
피우석 주변의 비단 개구리
용담 가의 바위 구덩이에 고인 물에 비단개구리 알이 부화하여 올챙이들이 떠다닌다. 이녀석들 개구리로 크면
올챙이 시절 잊고 내연계곡을 제 집으로 삼고 살아 가겠지...
상용추 옆의 바위에 비가 내려 젖자 더욱 선명히 선명하게 드러나는 벼슬아치들의 이름들, 어떤 이름들은 그 아래 웅덩이에 고인 탁한 물에도 얼비추어진다. 18세기 유도원은 상용추 주변에 벼슬아치들의 이름은 바위에 새기고 붉은 칠을 하였고,
시인묵객들의 이름은 붓글씨로 쓰였는데 그 이름들이 백개 천개가 된다고 하였다.
붉은 칠과 붓으로 쓴 이름들은 모두 씻겨나가고 지금은 없다.
상용추 옆의 피우석(避雨石).
상용추 옆의 물 웅덩이 옆의 바위 벽이 움푹 들어가서
유숙은 저곳에서 비를 피할 수가 있었기에 피우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는 내원암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용추 주변의 골짜기에서 약초를 캤다.
그리고 경주부윤이 보내준 구기자 술을 마셨다.
저녁 무렵에 비를 만나서 저 바위 아래에서 비를 피하였다.
용신의 신령스러움이라고 해석하며 이름을 피우석이라고 하였고
신선경에 구기자 술을 빚어서 마시는 사람들이 있다하여 용추 계곡을 구기동(枸杞洞)이라고 하였다.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며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처음 들여온 조엄,
풍양조씨 세도가 조인영(이조판서) 이름 밑에
'鄭敾 甲寅 秋'라는 각자가 비에 젖어 드러났다.
정선도 노론 계열의 인물.
피우석에서 올려다 본 손바닥 만한 용추의 하늘과 학소대 위의 나무들
선열대(禪悅臺, 백운대, 선열봉, 운주봉, 기화봉). 관음폭에서 촬영
위에 올라서면 선열대, 아래서 바라보면 선열봉=운주봉(운주암이 있어서)=기화봉(기생봉).
선일대는 선열대의 와전으로 어서 버리고 제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
청학소(靑鶴巢 학소두鶴巢竇-학소대 오른쪽 현수교 기둥 상부에 보인다.), 학소대(학소암),
학소대 위의 계조암(繼祖庵)터가 계조대
중용추(관음폭), 관음담(觀音潭-감로담甘露담), 관음굴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 신앙과 관련된 암자 이름이 월영대 서쪽, 계조암 남쪽의 대비암(大悲庵)
학소대 오른쪽 가파른 벼랑에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잔도(棧道), 조도(鳥道)를 타고 계조암으로 옛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길이 있었다.
월영대로 들어가는 청풍문(淸風門).
1587년 해월 황여일 선생이 '청풍명월'에서 따서 이 돌문을 淸風門으로 명명.
관음폭 위, 대비암 동쪽의 월영대(月影臺, 명월明月대, 중허中虛대, 기하妓賀대, 비하飛下대)는 내연산 최고의 승경에 든다.
옛 사람들은 월영대에서 바다에서 내연계곡으로 떠올라 오는 해와 달을 맞이하였다.
기하대를 비하대로 바꾼 사람은 대산 이상정이다.
영남 퇴계학의 정맥을 잇는 대학자 대산이 연일 현감으로 와서
1754년 봄에 농수 최천익 진사, 오암 의민 스님과 3인이 유산하였다.
대산은 계조암에서 논어 몇 장을 강의하였고 대비암으로 이동하다가 이 대 위에 올라서 이름을 묻자
의민 스님이 기하대라고 하자, 대산이 주자의 시, <취하축융봉醉下祝融峰>의 '낭음비하축융봉朗吟飛下축융봉'에서
취하여 비하대이었는데 비하의 소리가 와전되어 기하가 되었다며 비하로 바로잡는 뜻에서 비하로 개명한 것이다.
물론 주자학자 대산의 아전인수!
조부 대산이 연일현감으로 와서 명명한 지
60년이 지나서 청하 현감으로 온 대산의 손자 이병원이 농수선생의 문집을 읽고
비하대 명명 유래를 알고
감회에 젖어서 '대산선생 명명 비하대'라고 하는 글자와 당시 산행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비하대 정상 바위에 새겼다.
1587년 황여일의 유내영산록에 월영대로 분명히 나오고,
달 그림자가 지면 이곳이 하나의 불국정토가 되는 승경이라고 하였다.
1623-1635년 청하에서 귀양살이를 한 유숙은 명월대라고 하였으며
1688년에 보경사, 고문수암, 계조암, 내원암, 대비암을 방문한 원주의 대학자
정시한(丁時翰)은 암벽에 움푹 움푹 구멍이 있어서 중허대라고 하였다.
<고사의송견남산도>
월영대 위에서 남산을 바라보는 선비 모습
화제에
三龍湫瀑下
悠然見南山
이라고 하였다.
유연견남산은 말할 것도 없이 도연명의 시 飮酒의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에서 취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겸재의 아래 그림이 있다. 화제는 유연견남산이다. 도연명의 시 내용과
도연명의 은자적 삶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두 그림은 부채그림에다 여러 가지로 닮았다.
따라서 위의 월영대 부채 그림은 가을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렇다면, 현재 연산폭 옆의 바위면에 새겨진 '정선 갑인 추'라는 글자를 새길 때(1734년),
또는 이 그림을 그릴 무렵에 이 글자를 새겼을 것이다.
그래서 그림 제목은 <고사의송견남산도>라고 하여야 명실상부하다.
겸재 정선이 내연산을 그리기 위해 청하현감으로 부임하여(1733-1735) 그린 <고사의송견남산도(高士倚松見南山圖>
부채 속의 선비 모습은 겸재 자신을 모델로 한 것 같다. 겸재의 자택 자화상과 닮았다.
비하대 위의 저 소나무는 지금도 생존한다.
1587년 해월 황여일 선생의 유내영산록에도 이미 등장한다. 수령이 1000년을 헤아린다.
겸재가 청하현감으로 있을 당시에는
부채 그림 속의 저 대는 월영대(명월대, 중허대)로 불렀을 것이다.
대비암 앞의 이 대에서 선비들이 바다에서 떠오르는 달과 해를 맞이하였다.
실제로는 삼용추폭 아래가 아니라 위에 월영대가 있으나 겸재의 창의적 화면 구성, 전신(傳神) 화법.
선열대 가는 길목의 묘입문(妙入門)
충소교(沖宵橋)터
선열대로 오르는 길목에 묘입문(妙入門), 충소교(沖宵橋)가 있다.
두 곳의 이름은 1587년 황여일이 명명했다.
선열대 위에는 백운암(정상)과 운주암(남쪽 아래) 터가 있다.
이 두 암자를 합하여 선열암으로 불렀다. 그래서 선열대라고 하였다.
위에 올라서면 천하 제일의 비경이 펼쳐지는 선열대가 되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붓처럼 생긴 선열봉(운주봉, 기화봉)이 된다.
황여일은 선열대를 백운대로 개명하기도 하였다.
<스스로를 읊음 自諷>
오암당(鰲巖堂) 의민(毅旻) 선사(禪師, 1710-1792)
운주봉을 붓으로 삼고 雲住峯爲筆
용추를 벼루로 만들어서 龍湫作硯池
일만 폭으로 열린 바위 병풍에 巖屛開萬疊
뜻 가는대로 나의 시를 쓰리라. 隨意寫吾詩
이 시는 내연계곡이라는 위대한 자연 속에 사는 스님의 기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오암 스님은 세종 때 개성유수였다가 청하 소동리에서 유배살이를 한 김해 김씨 김운의 12세손이고
효행으로 천거되어 남해현감을 지냈으며 학산서원을 창건한 김석경의 손자이다.
청하 월포 오두촌 태생인 스님은 속명이 족보에 창문(昌文)으로 나온다.
아버지는 준(浚-서운암의 탑비명과 문집의 행장),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
족보에는 김석경의 아들이고 의민 스님의 아버지인 河를 오암스님이라고 잘못 기록하고 있다.
부자의 정보를 혼합하여 잘못 기록하고 있다.
현재 유포되고 있는 오암스님 생애 정보에는
스님의 이름을 족보대로 하(河)라고 하고 모친을 이씨라고 하며,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하였다고 하고 있다. 잘못된 정보이다.
어머니가 달을 머금는 태몽을 꾸고 1710년 10월 2일 태어났다.
22세에 모친을 병으로 잃고 23세에 친척되는 보경사의 각신(覺信) 장로에게 축발(祝髮)하고
서산대사 8세 법손인 계영(桂影) 선사의 법을 잇고 구족계를 받아 지니어 서산의 9세 법손이 되었다.
호는 오두촌과 용산의 바위에서 취하여 오암이라 하였다.
32세에 주실(籌室, 방장, 강백)이 되었고
평생토록 아버지와 동생이 있는 보경사에 머물며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효행을 다하고 동생과 우애가 깊었다.
출가하여 줄곧 보경사 대비암(월영대 서쪽)에 머무셨다.
송라도찰방으로 왔던 당대 문단의 어른인
원중거(元重擧)는 오암스님과 농수 선생을 영남좌도의 위인(嶺左偉人)이라고 하였고,
규장각 학사로 문장가였던 흥해군수 청성 성대중이 스님의 문집에 서문을 썼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스님을 영남의 종장(宗丈-으뜸 가는 어른스님)이라고 하였다.
스님의 고족 제자는 회관(誨寬), 우홍(宇洪) 스님이고
문집 <<오암집>>이 있고, <<선문염송>>에 송을 덧붙였다.
저 선열대에서 반대편 계조암 옆의 기기묘묘한 암봉까지 200미터의 현수교를 놓고,
보경사 일주문에서 삼지봉까지 케이블카를 놓겠다고 하는 발상을 하는 사람의 멘탈리티가
도대체 궁금하다.
요컨대, 포항 사람들은 내연산을 모른다.
무지하기에 행정하는 당국자들이 어리석고 무지한 일을 계획하고 있다.
현수교든 케이블카든 제발이지 자손만대에 욕먹을 폭거일랑 하시지 말기를
내연산 산신령님과 용추의 용담에 깃든 용왕님과
보경사의 수승한 수행과 신행의 도량을 수호하는 가람신에게
빌고 또 빈다.
내연산의 보경사 가람과 많은 암자터와 암자들,
민속문화의 현장과 관개수로,
돌 하나 바위 하나,
계곡과 산 등성이의 맑은 물과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
깊은 오솔길, 시원한 바람과
바다와 해와 달과 별에 이어지는 풍경들
어느 것 하나 귀중하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내연산의 50여 곳의 경관 명소들과
보경사의 12 암자터에 이름을 바로잡고
자연유산, 문화유산 안내문을 세우고
암자를 복원하여
돈벌이를 위한 개발 사업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으뜸가는 정신문화 양성의 요람으로
시민과 국민들의 힐링과 휴식과 성찰의 공간으로
무한한 가치를 창조해내는 가치의 계발을 하시기를 바란다.
인간이 따라야할 길은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道法自然
-노자
자연의 질서를 부여 받은 것을 인간의 본성이라 하고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을 인간이 가야할 길이라고 하고
그 길을 닦는 것을 교육(문명)이라고 한다.
天命之謂性 率性지위道 修道지위敎
-중용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
-잡아함경
나는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고(無我相),
인간은 인간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고(無人상),
동식물은 동식물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無衆生상).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고 하는 수명이 있다는 생각은 인간이 지어낸 관념일 뿐이다(無壽者상).
-금강경
은폭과 오른쪽의 석문.
18세기 흥해군수 청성 성대중은 유내연산기에서
돌문이 곁에 있는 이 은폭을 내연산에서 제일 가는 폭포로 여겼다.
그는 이곳에 와 보지는 못하였다.
은폭 물결에 감도는 햇살이 영롱하게 아롱진다.
첫댓글
옛 사람들이 자연을 어떻게 대했는지,
그들의 삶에 자연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지,
산천경계를 완상하던 선비들과
땔나무나 하러 다니던 상놈들에게 산천은 또 어떻게 달랐는지,
오늘 우리와는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 비교를 해보게 되네요
산천은 의구(?)한데, 인심은 왜 흐르고 변하는 것인지...
상세한 사진과 설명 잘 보았습니다.
귀한 사진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랜 시간과 땀으로 밝혀낸 대단한 결과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