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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사상 여행 스크랩 노비출신 `유극랑` 전라좌수사되다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56 14.07.25 01:3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노비출신 '유극랑' 전라좌수사되다 

 

 

 

 

1566년의 어느 아침

말로만 듣던 재상집 솟을대문은 높기도 했다. 미관 말직의 무관이 어찌 재상과 교분이 있을쏘냐. 유극량(劉克良; ?~1592)은 다시 한번 망설였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 아니었던가. 노비출신이라는, 그 미천한 신세를 이렇게 털어놓아야 하는가. 그러나 자신이 몰랐다면 또 모를까 알고서도 그냥 숨길 수는 없었다.

더구나 숨기다가 발각되면 그 수모는 더욱 심할 터이다. 청지기를 불러 유극량은 집주인을 뵙기를 청했다. 청지기는 만날 수 있다는 장담을 하지 않았다. 반나절이 지나도 주인은 나오질 않았다. 유극량은 청지기를 물리치고 사랑방 문 앞에 꿇어앉았다. 또 그러길 일각. 마침내 사랑방 문이 열렸다.

“너는 누구냐?”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누구인가. 홍섬(洪暹; 1504~1585). 이미 그의 아버지 홍언필이 영의정을 지낸 재상 가문에다 홍섬 그 자신도 지금 종1품 좌찬성의 자리에 있어 곧 정승의 반열에 오를 사람이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저절로 위엄이 배어나왔다.

“유극량이라 하옵니다. 무과에 급제한지 얼마 되지 않아 관직이랄 것도 없는 신세올씨다.” 유극량의 목소리는 저절로 떨려나왔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만나려 고집을 피웠는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 것인가? “죄를, 죄를 청하러 왔습니다. 과거 저의 어미는 대감의 댁에서 노비의 신분이었습니다.” 홍섬의 얼굴엔 놀라움의 빛이 가득했다.

노비의 자식이라고? “대감께서야 어찌 기억하시겠습니까마는, 저의 어미는 이곳에서 노비로 있던 중 큰 술잔을 깨뜨렸다 하옵니다. 처벌이 두려워 그 길로 도주하였는데 어찌하다 운이 좋아 양민과 혼례를 치르고 정착을 하여 저를 낳았습니다.” 유극량은 점차 담담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이미 던져진 주사위, 모든 건 홍섬의 판단에 달린 터이다. “저는 양민의 자식으로 무과를 치렀고 다행히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제 신분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을 감히 숨길 수 없기에 고하러 왔나이다.” 홍섬은 한동안 말이 없다.

어미가 노비 출신이면 자식도 노비인 것이 법도였다. 게다가 주인집에서 도망친 노비라면 국법에 의해 엄하게 다스려야 했다. 그런데 도망친 노비의 자식이 과거에 급제하여 무관이라지만 관직에 나아갔다니,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더냐?”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생사를 도외시하였습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왔다는 말이었다. 장부다운 유극량의 기개가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홍섬의 고민은 깊어졌다. 찾아보면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극량의 어미가 이미 면천(免賤: 노비의 신분을 면하는 것)된 다음, 집을 나간 것으로 처리한다면 누가 감히 홍섬의 집안일을 갖고 물고 늘어질 것인가? 하긴 더 젊은 시절이었다면 그것도 문제가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종1품 좌찬성의 지위가 아닌가? 그러나 이후 유극량의 행동이 모두 홍섬의 이번 처사와 연관될 것임이 가장 걱정이었다. 만약 유극량이 악한 짓이라도 저지르게 된다면 그를 돌봐준 홍섬에게도 누가 될 것이다. 홍섬의 고민은 길었다. 유극량도 말없이 꿇어앉아 있었다. 너무 조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짧은 가르침이 있었다.

“내 이미 너의 어미를 면천시켰느니라.” 그리고는 사랑방 문이 닫혔다. 한 곳에서 나온 두 개의 주장 “전라 좌수영(전라도와 경상도에는 좌·우수영이라는 수군이 있었음)은 바로 적을 맞는 지역이어서 방어가 매우 긴요한 곳입니다. 따라서 책임을 맡는 대장은 반드시 잘 가려서 보내야 합니다. 새 전라좌수사(정3품 외관직, 수군절도사의 준말) 유극량(劉克良)은 인물은 쓸 만하나 가문이 한미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겸손합니다.

그리하여 군관(軍官)이나 무뢰배들과도 서로 너니내니 하는 사이여서 체통이 문란하고 호령이 시행되지 않습니다. 비단 위급한 변을 당했을 때에만 대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방어하는 군졸을 각 고을에 보낼 때에도 틀림없이 착오가 생길 것이니, 이 일을 맡기는 것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그의 임명을 거두어주소서.” ― 선조 24년(1591년) 2월 8일 유극량의 전라좌수사 임명이 잘못되었다는 사헌부의 건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였음.

“임진왜란이 처음 일어났을 때 무장 중에 충절과 의기에 죽었다고 전해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임진강에서 싸울 때, 유극량은 적의 기세가 강해 미리 패할 것을 알고 극력 저지하였으나 대장이 들어주지 않고는 억지로 나아가 싸우게 하였습니다.

유극량은 ‘늙은 몸이 오늘 국사에 죽을 것이다’하고는 드디어 적과 상대하여 힘껏 싸웠습니다. 제군(諸軍)이 패하게 되자 제장(諸將)들이 바람에 쏠리듯 무너졌지만 오직 극량만은 꼿꼿이 선 채 움직이지 않고서 무수히 적을 향해 쏘았습니다. 힘이 다해 일어설 수 없게 되자 땅에 무릎을 꿇은 채 쉬지 않고 활을 쏘았는데 적도들이 빙둘러 싸고 마구 찔러대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 충절이 늠름하였음을 사람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인데도 포상의 은전은 아직도 없으니, 어떻게 인심을 고무하고 사기(士氣)를 격려하겠습니까. 유사로 하여금 특별히 포전(褒典)을 베풀어 충혼(忠魂)을 위로하게 하소서.” ― 선조 27년(1594년) 9월 25일 유극량에게 포상을 내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건의.

 

 

유극량, 칭송받다

 

1591년, 유극량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을 때 사헌부는 그가 한미한 출신임을 들어 반대하였다. 사헌부의 청은 받아들여졌고, 그는 조방장으로 전임되었다. 조방장이란 지역방어를 위해 중앙에서 파견하는 장군을 말하는 것이니, 그가 노비 출신이기에 한 지역을 통째로 맡기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무인으로서의 그의 능력은 인정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인물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다. 하긴 사헌부는 이순신도 적당치 않은 인물이라고― 너무 파격적인 승진이라면서― 반대를 했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방장 유극량은 죽령을 방어했지만 패배했다. 그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방어사 신할의 밑에 부장으로 들어가 임진강을 방어하였다. 대장 신할은 왜군이 임진강 남쪽에 몰려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자 강을 건너 공격하자고 주장하였다. 반면 유극량은 이것이 적의 유인책임을 간파하였다.

“적은 지금 우리를 유인하고 있습니다. 5, 6일간 군사력을 길러 사기를 키운 후 공격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할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유극량도 비록 뜻은 달랐지만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선봉에 나섰다. 예상대로 조선군은 강을 건너기도 전에 왜국의 복병을 만나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다. 유극량은 이 싸움에서 결국 전사했고, 신할 또한 전사하고 말았다. 노비로 태어나 장군의 자리에 오른 드문 인물, 유극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그 해 백발을 흩날리며 조선에 대한 마지막 충절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뒷사람이 보니

 

14세기 중엽 조선의 노비는 전체인구의 1/3이었다. 아비가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었다. 그러자 양반들이 노비의 숫자를 늘리려고 자기 집 노(奴 : 남자종)를 양민 처녀와도 강제로 결혼시키는 등의 폐단이 일었다.

그래서 이번엔 어미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인 종모법을 실시했다. 유극량은 이 법에 따라 당연히 노비로 일생을 마칠 뻔했다. 노비들의 삶을 현대인들이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권력·명예·부의 그 어느 것이라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삶이었다. 유극량은 그와 같은 조선의 노비들 중에 바늘구멍을 통과한 낙타 같은 인물이다. 다행히 홍섬 같은 아량 있는 인물을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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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7.25 08:42

    첫댓글 아량있는 인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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