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나물 다량 입하라기에/김민정
있을 때 사둔다
무침으로도 버무리고 국으로도 끓이고
죽으로도 불린다
봄이 가면 냉이는 잡초 따위라지 않는가
봄처녀도 아니면서
나물 이름 보고 나물 이름 따라 읽는
한글 떼는 중에 아이도 아니면서
애나 개가 생기면 아꼈다 불러야지
지천으로 나물향이나 퍼뜨릴 욕심으로
냉이는 왜 냉이일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부르면 명찰이지
냉이야 쑥아 달래야 두릅아
개중 씀바귀는 씀바귀야 씀박아
호명으론 좀쌉싸래해서 별로다 싶고
손맛보다 이름맛이 나물맛이라
국산 냉이 두 움큼 크게 집어
달아주십사 하니 2,960원
산에가 뜯어봐야 할까나
장에 가 팔아봐야 알까나
싼 건지 비싼 건지 도통 가늠이 안 되는
냉이더미를 놓고 나물값을 매기는
플러스마트 나물 코너 아저씨가
조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 적에
냉이는 그냥 냉이네요
한자로는 제채라 부른다는데
보니까 겨잣과에 속한 두해살이풀이래요
겨자는 노랭인데 냉이 어디가 노린다
5월에서 6월에 흰 꽃이 핀다는데
아무리 봐도 그건 나도 모르겠네요
계산대 뒤로 줄 선 나를 끝끝내 찾아와
휴대폰 속 두산백과에 뜬 냉이를
굳이 보여줄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그러한 아저씨의 친절이
내일의 시나 될까 싶었는데
저기 저참으로 간 아저씨의
손으로 코 푸는 소리 들린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문학동네, 2016.
<시 읽기> 봄나물 다량 입하라기에/김민정
이름에도 뜻이 있다는데
이름에 어질 ‘인’과 빛날 ‘찬’을 씁니다. 그대로 풀자면 어질게 빛나라는 뜻이죠. 이름대로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뜻은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름이 갖는 효과가 참 대단하죠. 옛날 사람들은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고요. 이를테면 너무 좋은 이름은 오히려 좋지 않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일 거예요. 삶이 이름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불안하기도 한데요. 심지어 어디서 들은 바로는 제이름에 들어가는 빛날 찬 자도 이름에 쓰기에 그리 좋은 한자는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오히려 함부로 지은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죠. 흔한 이름이 액운을 막아주리라 믿으면서요. 개똥이라거나 하는 이름도 사실은 아이가 불행하지 않기를 바라며 붙여준 이름이라 생각하면 다정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이상한 이름 탓에 평생 불만과 불행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생물의 이름들을 찾아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별별 이름이 다 있어요. 너도밤나무, 나도 밤나무의 존재를 알게 되고서는 정말 놀라기도 했고요. 할미새사촌이나 사마귀붙이 같은 이름도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편한 대로 부르는 이름이 아닌, 생물학적 맥락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하더라고요. 밤나무나 할미새, 사마귀 등과 친연성을 가진 종에게 그렇게 붙인다고 해요. 이름의 본래 용도에 충실한 거죠. 사물을 가리키기 위해 붙였으니까요.
이름이라는 것은 두 가지 용도가 있는 듯합니다. 하나는 사물을 구분하고 가리키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사물에 대해 품는 기대와 마음을 드러내기 위함이겠죠. 방금 얘기한 할미새사촌이 전자이고, 제 이름 인찬이나 개똥이 같은 이름은 후자일 것입니다. 아프리카 기린은 상상 속의 동물 기린이 먼저 있었고, 그 기린과 닮았다는 생각에 그 이름을 붙인 거였으니, 이름의 두 용도가 모두 나타난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때로는 무언가와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흡족해질 때가 있어요. 사물의 정체를 알게 되기도 하고, 사물에 담긴 마음을 알게 되기도 하니까요. 한편으론 이런 말도 있죠. 이를 세 글자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름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도 그랫어요. 백과서전에 적힌 여러 동물과 식물의 이름을 보는 것을 좋아했고, 이름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 그 생물을 다 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요. 하지만 사실 그 생물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죠. 그래서 시인들은 이름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나 봐요. 왜 김춘수 시인의 <꽃>도 그랬고요.
김민정 시인의 <봄나물 다량 입하가리에> 역시 사물과 이름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생각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냉이, 두릅, 씀바귀…… 이런 나물의 이름들은 참 정겹기도 하죠. 시인은 그 이름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 말들을 곱씹어봅니다. 그렇게 곱씹어보는 것만으로도 나물 향이 나는 것만 같아요. 시인도 말하잖아요. “손맛보다는 이름맛이 나물맛이라”고요. 그래서 시 속에서 화자는 무심코 “냉이는 왜 냉일까요” 물어보기도 하죠.
그런데 또 나물 파는 아저씨도 그걸 열심히 핸드폰으로 검색해서 말해주죠. 냉이는 그냥 냉이라고요. 뒤이어 한자 이름도 말하고, 겨자과에 속한다고도 말하고, 겨자는 노란데 냉이는 노랗지도 않다는 말까지 덧붙이면서요. 참 정겹고도 재미있는 장면인데요. 한 꺼풀 들춰보면 이 장면이 사물과 이름이 무관함에 대해 은근하게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냉이는 그냥 냉이고, 그 이름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그 무엇도 설명되지 않는다고요. 냉이 두 움큼이 2,960원인 것도, 시의 화자는 그게 비싼 건지 싼 건지 알 수가 없어요. 그걸 알려면 산에 가서 냉이를 뜯어보고, 직접 장에 내다 팔아봐야 알까 말까 할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요.
정말 그래요. 이름만으로는, 숫자나 글자만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물의 이름과 그에 관련한 숫자를 안다는 것만으로 그에 대해 다 통달한 것처럼 굴고는 하지요. 시는 그 알 수 없음을 되짚어보는 양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함께 시를 읽어보는 일이 세계의 알 수 없음과 이 세계를 채우고 있는 사물들이 알 수 없음을 돌아보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걸 꼭 다 알아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요.
―황인찬,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안온북스,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