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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그 환상적 상징의 세계
----박해성의 {판타지아, 발해}의 시세계
황치복
1. 세계상, 시간의 파괴적인 힘이 작동하는
박해성은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후 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리토피아, 2012)와 루머처럼, 유머처럼(현대시학, 2015) 등의 두 권의 시조집을 발간한 바 있다. 그동안 시인은 첫 번째 시조집에서 시절가조(時節歌調)라는 시조 양식의 특성을 충분히 살려서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주조로 하는 작품 경향을 보이다가 두 번째 시조집부터는 좀더 존재론적 조건과 존재에 본질 탐구라는 형이상학적인 주제로 경사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관심의 흐름과 시적 사유의 깊이가 세 번째 시집인 판타지아 발해에 이르러 ‘발해’라는 상징의 숲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박해성의 세 번째 시조집인 판타지아 발해는 시집 전체가 ‘발해’라는 하나의 상징의 숲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시조사에 기록될 만한 작품집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그동안 현대시에서는 조정권의 산정묘지라든가 황동규의 풍장, 그리고 장석주의 몽해항로 등의 시집을 통해서 독특한 상징의 세계가 구축된 바 있지만, 시조집을 통해서 하나의 상징적 세계가 완성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 편의 시집은 시편들의 집적을 통해서 어떤 시적 경향성이나 방향성, 혹은 시적 특성을 지니기 마련이지만 그것들이 반드시 어떤 상징의 유기적 세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시집이 상징의 세계를 이룬다는 것은 시의식의 집중이 전제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시인 고유의 유기적이고 체계적이며 근원적인 하나의 세계가 형성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문학적 사건으로 기억할 만하다. 더구나 시절에 대한 감회나 신념에 대한 확인, 혹은 자연에 대한 서정을 주된 시적 대상으로 삼아서 ‘노래’라는 형식을 고수했던 시조에서 하나의 상징적 세계를 접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에 속한다. 한 권의 시조집이 하나의 상징적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은 시조가 더 이상 파편적인 일상과 시절에 대한 감회를 노래하는 양식이 아니라 존재론적 세계를 궁구하고 삶의 근원적 형식에 대해 천착하는 ‘탐구’로서의 양식임을 실증한 사건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박해성이 구축한 환상적인 ‘발해’라는 상징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현실 속에 작동하는 ‘시간’이라는 기제와 시인이 집중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섬’이라는 고립된 장소로서의 이미지를 통과해야 한다. 먼저 시인의 현실 인식은 「新 호랑이 설화」라든가 「매미는 파업 중」, 「와중에」 등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유한한 존재로서 실존적 인간이 처한 한계상황에 대한 관심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유한한 존재가 처한 한계상황이란 파괴적 시간의 자장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낡아가면서, 마모되면서 희미해져 간다는 것, 결국 소멸과 무화의 길을 벗어날 수 없다는 운명이다.
잃어버린 소를 찾아 헤매는 한여름 밤
시간을 가두려다 되레 볼모잡혔는가,
금속성 늙은 뻐꾸기 초침만 내 쪼아댄다
노련한 자객인 듯 저벅저벅 다가서는
1.5볼트 냉혈심장 그만 확, 들어낼까?
불면의 옆구리에서 사산된 시편처럼
사랑인지 사상인지 매미소리 드높은데
노래인지 울음인지 목석같은 새 아닌 새
네 안에 너를 보아라, 뻐꾹뻐꾹 경을 왼다
―「뻐꾸기를 찾아서」, 부분
“금속성”, “노련한 자객”, “냉혈심장”, “목석” 등의 시어들이 시간의 냉혹하고 엄정한 속성과 그 파괴적인 성질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시조의 첫 구절에서 “잃어버린 소”를 등장시킨 것을 보면 심우도(尋牛圖)를 연상시키는데, 그렇게 본다면 자신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시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는 시인의 인식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시간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시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에 대한 사유에 붙들리는 순간 우리는 시간의 속성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을 장악하고 정복하려고 하는 순간, 오히려 우리는 시간에 붙들려 시간의 포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은 우리가 의지로 제어하거나 통어할 수 없는 엄정한 외부의 힘으로 인식되고, 우리는 그 파괴적 얼굴을 확인하며 전율하게 된다. 그것은 빈틈을 보이지 않는 “노련한 자객”처럼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시간의 파괴적 국면을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존재 가운데 하나가 매미일지 모른다. 그것들은 대체로 7년의 유충기간을 거쳐 성충이 된 다음 대략 15일이라는 시간을 살다가 죽기 때문이다. 이 시에는 생명체의 울부짖음인 매미의 울음소리와 냉철한 자객과 같은 금속성의 소리를 내는 “목석같은 새 아닌 새”인 뻐꾸기 시계의 울음소리가 서로 충돌하면서 대립하고 있다. 물론 매미의 울음소리는 뻐꾸기 시계의 울음소리에 묻혀 사라질 것이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시간의 엄혹한 기율을 환기한 다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를 권한다. 내 안의 나란 곧 나의 본질일 터인데, 그것은 결국 시간의 포로라는 것, 시간의 파괴적 작용에 취약한 연약하고 나약한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자각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 셈이다. 더군다나 오늘날 기술문명의 발전은 시간을 더욱 빠르게 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시속 300킬로미터 불꽃같은 속도전”과 같은 삶을 강요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리하여 “저 세상 가는 길도 KTX를 타고 갈까”(「밤기차를 타고」)라고 반문하게 되는 시간 감각을 경험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은 우리의 삶을 근원적으로 규정하면서, 또한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항상 상기하도록 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다 늙은 냉장고가 앞 동에서 끌려나온다
온 식구 먹여 살리느라 마디마디 골병 든
그이는 이제 퇴출이다
치워야 할 쓰레기다
두 남자가 달려들어 트럭 위에 그를 묶는다
누구라도 퇴화가 용서되지 않는 세상
요양원? 아니 아니지…
고물 집하장인가?
남의 일인 양 흘깃흘깃 빨간 양산이 지나간다
목이 긴 접시꽃이 체머리를 흔드신다
현상과 현장 사이로 여우비가 스쳐간다
유언도 없는 마지막을 그저 지켜보는 이
종말을 예감했는가, 백악기 공룡처럼
지구를 꾹꾹 밟는다
최선인 듯, 달관인 듯
―「지압판을 밟은 동안」, 전문
이 시의 시적 공간에는 온통 죽음의 현장과 사건과 죽어가는 주체들로 들끓고 있다. 수명이 다해서 앞 동으로 끌려나온 냉장고,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정거장인 요양원과 고물집하장, 그리고 죽어가는 것들을 무연히 지켜보는 빨간 양산 쓴 이, 목이 긴 접시꽃도 곧 죽어갈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유언도 없는 마지막을 그저 지켜보는 이” 또한 “종말을 예감”하고 있는 죽어야 할 존재임에 틀림없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주체들의 태도는 수동적이거나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러한 모습들은 곧 불가피한 죽음의 성격과 그것에 대해 모든 존재자들이 체념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시사한다. 즉 수명이 다한 늙은 냉장고는 “끌려나오”고, 그러한 죽음을 목격하는 빨간 양산을 쓴 사람은 “남의 일인 양 흘깃흘깃” 보면서 지나간다. 또한 죽음은 “유언도 없는 마지막”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은 무기력하게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죽음은 모든 존재자들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현상으로서 누구도 거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어떤 의지와 노력도 무화시키는 니힐의 극치를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현상의 근원에는 시간이 있다. “퇴출”이라든가 “퇴화”, 혹은 “골병 들다”, “지나간다”, “스쳐간다” 등의 어휘들이 존재자들의 죽음의 근원에 시간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시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백악기의 공룡”은 한 종족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보편적 속성과 그것의 불가피성을 상징적으로 표상해준다. 그런데 이를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태도는 어떤가? “최선인 듯, 달관인 듯” “지구를 꾹꾹 밟”아보는 것이 전부이다. 시간의 파괴 작용과 죽음의 도래를 피할 수 없는 유한한 인간의 무기력한 행보가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보통은 이럴 때 억지를 부려 불로장생을 꿈꾸어보기도 하지만 대체로 종교에 귀의하여 내세를 꿈꾸는 것이 일반인들의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시적 상상력과 환상을 통해서 그러한 파괴적 국면에서 벗어날 논리를 찾거나 대안을 마련하려고 한다. 박해성 시인은 존재자들이 지닌 시간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대안을 모색해 본다. 그중 하나가 자연 속에서 순환하는 시간의 발견일 것이다.
천 년 전
꽃상여가 타령조로 떠난 길 위
개망초꽃 흐드러지다
일장춘몽 나비가 날다
흰나비
날아간 쪽으로
바람이 흘러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닌」, 전문
천 년 전에 한 유한한 존재자가 죽음으로 걸어갔던 길에 다시 개망초가 흐르러지고, 흰 나비가 날아간다. 시적 절제와 압축의 표현을 풀어보면, 길 위에서 이루어진 존재자의 죽음과 새로운 존재자들의 탄생은 천 년 동안 반복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그 “길”은 바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시간은 존재자의 소멸과 탄생의 반복이라는 형식을 내포하고 있으며, 하나의 “길(道)”로서 존재자들이 걸어갈 근원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길 위로 개망초라든가 흰나비 등이 “일장춘몽”처럼 흘러왔다 흘러가고, 이러한 현상에서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탄생과 죽음과 같은 현상은 하나의 극적인 사건으로서 전율과 공포를 야기할 만한 것이지만, 그러한 사건들의 명멸에 대해서 시간은 태연하며 바람처럼 흘러갈 뿐이다. 시조의 제목처럼 그러한 드라마틱한 사건에 대해서 시간은 “아무 일도 아닌”것처럼 바람처럼 흘러갈 뿐이다.
박해성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현상, 즉 인간의 유한성과 파괴적 시간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문제의식에 비추어 보면, 이처럼 하나의 자연으로서의 ‘시간’ 관념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과 파괴적 시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자연으로서의 시간성에 있다면, 모든 인간적인 것들의 포기와 자연으로서 귀의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적 유의미성을 지니면서도 시간의 파괴적 국면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시인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해방의 길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발견한 것이 바로 ‘화석’이라든가 ‘미라’, 혹은 고대나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들이 간직하고 있는 거대한 시간성인데, 그것들은 몇 천 의 시간을 내포한 채 현현해 있다는 점에서 ‘영원한 현재’로서 파괴적 시간을 파괴하면서 시간성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발해’의 발견 또한 이러한 인류학적, 혹은 고고학적 상상력이 빚어낸 하나의 상징적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막’ 이라고 뱉으면 와락 과격해지고
‘막막’이라고 되씹으면 문득 숙연해진다
사는 게 너무 막막해 아라연*꽃 보러 가는 길
눈부신 지느러미를 퍼덕이는 햇살 아래 이제 막 끝물 연들이 전생을 되씹는 곳 막 살까, 혼자 웃는다 붉은 꽃잎 뚝뚝 진다
각본 없는 이 연극은 언제 막을 내리려나 차안과 피안을 건너 칠백년을 걸어온 이, 몸도 넋도 다 비우고 진흙탕에 주저앉아
저 봐라, 부르튼 입술로 게송을 읊조리신다
―「막」, 전문
잘 알려져 있듯이 아라연꽃은 2009년 5월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발굴된 고려시대의 씨앗에서 발아한 연꽃으로 700년이라는 시간을 씨앗의 형태로 견뎌오다가 드디어 꽃을 피운 연꽃이다. 그러니까 아라연꽃의 씨앗 속에는 700여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는 셈인데, 그것이 다시 700년 후에 발아하고 개화했다는 점에서 아라연꽃은 피안과 차안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700여 년이라는 피안의 시간을 뚫고서 차안으로 들어왔다는 점에서 그것은 피안과 차안의 경계를 왕래한 셈이 된다. 시인은 이를 ‘막’이라고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막은 각본 없는 연극의 막이라는 점에서 ‘한살이’로서의 한 유기체가 형성한 완결된 생의 존재자 내부에 형성된 막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피안과 차안을 가르는 큰 막을 중심으로 해서 다시 700년이라는 전생이라는 수많은 시간의 막을 형성하고 있으며, 다시 이후에 이어질 내생으로서의 수많은 막을 잠재적 형태로 지니고 있다. 아득하고 그윽하여 막막해지는 경계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가져와 현현하고 있는 대상은 아라연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펴낸 앞의 시집 루머처럼, 유머처럼에서도 「소녀 ‘22-01’」에서는 창녕 15호 고분에서 사랑니도 나지 않은 열여섯 소녀가 1500년 전 비화가야의 권력자 인근 무덤에서 백골상태로 발견된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이 소녀의 백골은 1500년의 시간을 함축하고 있는 시간의 저수지이기도 하다. 또한 「구천(九泉) 나들이」에서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나 있는 철갑을 입은 사냥꾼의 모습을 부조하고 있는데, 이 고구려의 사냥꾼 역시 소녀의 백골처럼 헤아리기 어려운 시간의 막을 통과해서 현재에 도달해 있는 시간의 승리자인 셈이다. 그러한 반열에 ‘발해’라는 상징의 세계가 나란히 도열한다.
2. 섬, 시간을 알처럼 품고 있는
이번 시집에는 수많은 섬들의 이름이 제목으로 나열되어 있다. 비금도, 수섬을 비롯하여 청산도, 강화도, 울릉도, 제주도 애월, 보길도, 운염도, 계화도까지 유난히 많은 섬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섬의 환유물인 ‘연안부두’와 ‘군산항’ 등의 항구와 부두 등이 제목으로 수시로 출현한다. 이러한 현상은 시인의 의식 속에 어딘가를 향해 떠나고자 하는 의지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하나의 방증이되기도 하지만, 섬이 함축하고 있는 어떤 가치에 대한 지향을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추론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시인의 섬에 대한 시조 작품들이 곧장 ‘발해’라는 상징적 기표를 환기하고 호명하는 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이 창조한 섬의 이미지 속으로 들어가 보자.
폐경기의 외딴섬
시울 붉은 노을 아래
바람에 투항하는가,
백기 흔드는 삘기꽃
세월에 백기를 들고
나도 항복 할까보다
―「수섬」, 전문
공룡알 화석산지가 있는 경기도 화성의 수섬은 재개발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섬이다. 수섬은 그것이 처한 상황이나 또한 유적지의 특성으로 인해서 시인이 시간에 대한 상념에 붙들리도록 하는 곳인데, 시간에 대한 상념은 곧 존재의 본질로 향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곳은 곧 근원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시적 화자에게 포착된 수섬의 모습은 존재자의 끝물의 모습으로서 “폐경기의 외딴섬”이기도 하고 세월에 “백기를 흔드는 삘기꽃”이 장악하고 있는 섬이기도 하다. 파괴적인 시간의 힘과 그것이 행사한 폭력에 의해 그 결과가 선명히 드러나는 곳으로서 수섬이 설정되어 있는 셈인데, 이러한 정황에서 시적 화자는 세월에 백기를 들고 항복할 것을 생각한다.
그런데 세월에 백기를 들고 항복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 그것이 시간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기도 죽음을 향해 나아가거나 그것이 도래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월에 백기를 들고 항복한다는 것은 그것의 파괴적 힘을 인정하고 그것과 맞서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세월에 항복한다는 것은 시간에 귀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에 귀의한다는 것은 곧 시간의 가치를 발견하고 발굴하며, 시간의 자장 안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각성과 결단을 의미한다. 시간은 어쩌면 나를 파괴하고 무화시키는 기제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가치와 무한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허용하는 원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섬은 파도처럼 좀먹어 들어오는 시간의 파괴적 작용을 예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고립된 공간으로서 변화를 거절하며 시간의 지층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시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한 셈이다. 다음 시가 시간의 긍정적인 가능성의 공간으로서 섬을 잘 보여준다.
“나 요즘 연애시 써, 도통 잠을 못 잔다니까”
계절로 치자면 늦가을쯤이고 하루라면 저물녘인 K가 롤리팝 같은 나타샤를 사랑하노라 고백합니다. 듣고 보니 비밀 같아 먼 수평선으로 눈길을 돌리는 나, 거짓이거니 농담이거니… 슬쩍 엿본 그의 두 눈이 우련 붉어집디다. 아, 병이 깊었구나! 나는 그냥 알 것만 같아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걷습니다. K는 화난 듯 무안한 듯 저만치 앞서갑니다. 구부정한 뒷모습이 마치 나를 보는 듯해 눈물이 핑 돌았는데요. 나 또한 사랑에 빠져, 벼락같은 사랑에 빠져 발해를 놓지 못합니다그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함께인 듯 홀로인 듯 지치도록 명사십리를 걸었습니다.
나 또한 사랑에 빠져, 벼락같은 사랑에 빠져
―「비금도」, 전문
K라는 인물이 롤리팝 같은 나타샤에 대해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고, 이에 영향을 받은 시적 화자도 벼락같은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는 시상의 전개를 보여준다. 그런데 왜 갑자기 K는 사랑에 빠져 연애시를 쓰고, 그 비밀을 엿들은 시적 화자도 벼락같은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그리하여 시적 화자는 왜 ‘발해’를 놓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이 시의 제목인 ‘비금도’와는 또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한다.
전남 신안군 비금면에 있는 작은 섬으로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비금도(飛禽島)라는 이름이 붙은 섬. 하지만 굳이 K가 사랑에 빠져 사랑을 고백하고, 시적 화자도 사랑에 빠져 발해를 놓지 못하는 장소가 비금도일 이유는 없을 것이며, 섬이라는 공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왜 섬이라는 공간은 “계절로 치자면 늦가을쯤이고 하루라면 저물녘인 K가” 사랑을 고백하고, 시적 화자도 덩달아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섬이 지니고 있는 고립적인 공간적 특징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간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다윈이 진화론을 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갈라파고스 섬이 상징적으로 대변해주고 있는 것처럼 섬은 시간의 침입으로부터 자유로운 곳, 달리 말하면 시간이 지층처럼 쌓여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생태학적으로도 그렇지만, 사회·역사적 의미에서도 그곳은 뭍의 역사적 사건이나 흐름에서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것이다.
늦가을의 저물녘에 도달한 K가 사랑을 고백하고, 그 고백에 영향을 받아 시적 화자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러니까 세속적 규율이나 도덕 등의 피상적인 가치에서 벗어나 삶의 본질적 국면을 발견한 어떤 선언이나 결단으로 읽을 수 있다. 황혼의 나이에 사랑에 빠지고 연애시를 쓴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행위에 동의하고 동참한다는 것은 비본질적인 삶의 형식과 허영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삶의 가치를 향해 결단하는 하나의 사건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어떤 삶의 가치를 ‘발해’라는 기표가 대변해주고 있다. 벼락같은 사랑에 빠져 놓지 못하는 ‘발해’라는 기표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에 어떤 힘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존재를 형성하는 어떤 근원이나 본질과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발해’라는 기표의 중요한 척도 가운데 하나는 시간성일 것인데, 섬이라는 공간이 시간성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음을 다음 시가 선명히 보여준다.
파도가 지울 수 없는 그대 거기 있습니다.
돌담에 앉은 그리움은 늙을 줄도 모르는데
바다가 보이는 동산, 반쯤 삭은 초분草墳 하나
유채꽃에 감염 된 부스럼 같은 그 풀무덤
죽은 이의 긴 적막을 겹겹이 덮은 이엉자락 눈비바람에 시르죽어 시나브로 주저앉네요. 얼기설기 묶은 새끼줄 힘줄이 느슨해져 허물 벗은 누룩뱀처럼 능글능글 꿈틀꿈틀 꽃밭을 기어 다니다 길인 듯 세월인 듯 어느새 굽이굽이 바닷가로 흐릅니다. 그 길 위 울아부지 새끼 밴 암소 몰고 발해까지 가시려나, 구불구불 느릿느릿 백팔 년째 걸어갑니다. 눈먼 소리꾼 피를 토해 한마당 풀어내는 서편제 북장단이 이명처럼 번지는 곳 처음 가본 그 땅이 왜 그리 낯익은지 목 메이게 정겨운지 청동기쯤이나 수세기 전 내가 태어난 마을도 같고 언젠가 나 초분에 누워 허허 막막 바닷바람에 휘파람 휘휘 불며 한 삼년 젖은 살집 곰삭히던 언덕도 같은
그 섬에 넋을 빼놓고 몸만 겨우 돌아왔죠.
―「청산도」, 전문
청산도는 파도가 지울 수 없다는 점에서 시간의 파괴적 힘이 미치지 않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시에는 “눈비바람에 시르죽어 시나브로 주저앉”는 “반쯤 삭은 초분(草墳)”이 등장하기도 하고, “힘줄이 느슨해져 허물 벗은 누룩뱀처럼” 허물어지는 새끼줄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상상적 장면이기는 하지만 “한 삼년 젖은 살집 곰삭히던 언덕”도 등장한다는 점에서 썩히고 삭히는 등의 시간의 파괴적인 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초분 자체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섬은 고대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이나 삼국유사에 고대의 장례절차로 등장하는 초분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청산도는 고대의 시간이 고스란히 고여 있는 시간의 저장소인 셈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청산도가 과거의 시간을 끌어오고, 미래의 시간을 미리 당겨서 영원한 현재를 실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동기쯤이나 수세기 전 내가 태어난 마을도 같고”라는 구절은 과거의 시간이 고여 있는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언젠가 나 초분에 누워 허허 막막 바닷바람과 휘파람 휘휘 불며 한 삼년 젖은 살집 곰삭히던 언덕”이라는 표현은 미래의 시간을 현재로 미리 당겨와 현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청산도는 이미 지나간 과거라는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라는 시간을 현재라는 시간에 중첩하여 시간의 계기성을 무화시켜버리는 신비로운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곳, 그래서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것이 곧 미래의 모습과도 통하는 곳, 바로 영원한 현재로서의 신화적인 공간이 청산도인 셈이다.
이처럼 시간이 무화된 공간이기에 청산도는 발해에 이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원한 현재라는 신화적 공간인 청산도는 발해라는 어떤 근원적이고 원형적인 가치를 지닌 공간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길 위 울아부지 새낀 밴 암소 몰고 발해까지 가시려나”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청산도를 통해 갈 수 있는 발해는 “새끼 밴 암소”가 함축하고 있듯이 신비하면서도 생명력으로 충만된 곳임을 알 수 있다. 그곳은 파괴적인 시간이 작동할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이고 신화적인 곳으로서 우리에게 고향과 같은 포근함과 안식을 부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면서,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에너지로 충만한 곳이기도 한 것이다. 그곳은 또한 “빨치산, 빨갱이 새끼, 일곱 살 실어증이 발길질에 돌팔매에 붉게 물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두려울 때면 나 발해로 도망쳤지요. 허상의 국경을 넘어 꼭꼭 숨어 울었습니다”(「군산항」)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인위적인 이데올로기와 같은 얄팍한 것들의 폭력성을 무화시켜버리는 어떤 정화와 신생의 공간이기도 하다.
3. ‘발해’라는 상징이 의미하는 것
결국 우리는 박해성 시인이 세 번째 시조집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발해’라는 곳에 도착했다. 그 과정에는 지금까지 짚어온 것처럼 시간의 파괴적인 국면이 작동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서 인류학적이고 고고학적 상상력이 동원된 화석이나 미라, 그리고 고분이나 아라연꽃의 씨앗 같은 것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신화적이고 근원적인 의미를 지니고, 영원한 현재로서 존재하고 있는 ‘섬’이 등장했는데, 섬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시간과 아직 오지 않는 미래의 시간을 현재의 시간에 중첩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괴적인 계기적 시간성에서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섬을 통해서 도달할 것이 바로 ‘발해’이다. 잠깐 살펴보았지만, 발해는 시간의 파괴 작용에서 벗어나 있는 근원적이고 원형적인 공간으로서 우리의 본질적인 모습을 환기하고, 세속적 가치에 절은 현대인을 정화하며, 역동적인 에너지로 넘치는 생명력의 공간이었다. 시간이나 섬의 이미지를 통해 암시한 발해의 모습이 이러하다는 것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발해를 다룬 시편들을 통해서 그 상징적 의미를 확인해 보자.
둥 둥둥 북소리가 천궁 활짝 엽니다.
아사달 아사녀가 비손하던 신라의 달이 발해 주작대로에 엷은 깁을 펼칩니다. 달떴다, 어둠을 밀어내는 누군가 한마디에 나는 즉시 애마를 몰고 갈기 휘날리며 키 작은 풀꽃들이 꿈꾸는 초원을 지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말 타고 누볐다는 대륙의 바람 속을 적토마처럼 내달려 오래전 연암이 건넌 열하의 푸른 물에 부르튼 발을 씻으리니
참아도 터지는 울음, 방목해도 좋으리라
一「판타지아, 발해-발해시편1」, 전문
발해를 직접 다룬 작품이다. 초장의 묘사를 보면, 발해란 하나의 원만구족한 세계이자 우주임을 알 수 있다. 사설조로 이어진 중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곳은 “애마를 몰고 갈기 휘날리며” 달릴 수 있는 호방한 대륙적 풍모와 원시적 생명력이 넘치는 곳이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대대로 생명을 이어가던 어떤 신화적이고 근원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발해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근원적이고 원형적인 세계라는 것이다. 또한 그 곳은 ‘달’과 ‘초원’, ‘대륙의 바람’과 ‘열하’라는 강물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자연의 원형적 상징들이 그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발해는 “신라”라든가 “연암” 등의 기표가 표상해주듯이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하나의 유토피아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역사의 기록이나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서 흔적으로만 존재하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떤 곳에도 없는 이상향과 같은 곳인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인이 자신의 몸을 지칭하면서 “나는 발해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앓다」)라고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 민족의 유전자를 통해서 전달되고 있는 무형의 실체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것은 “마두금 첼로보다 그 울림 더 절절해 피아니시모 흐느낌이 발해까지 다 적시는, 심금”(「심금(心琴)」)처럼,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극적으로 등장하는 “참아도 터지는 울음”은 이처럼 가치 있는 하나의 세계를 잃어버린 상실감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일 것이며, 그러한 세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의 표상일 것이다. ‘발해’의 필요성과 의미를 다음 작품이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며칠째 체한 듯이 명치가 뻐근합니다.
산책을 나섰지요. 상경의 중심을 관통하는 주작대로는 이 도시의 등뼈이자 동맥입니다. 대낮 천천히 도심을 거닐다 한 사내를 만났어요. 어느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했는지 맨발로 절뚝이는 무장해제 패잔병, 봉두난발에 겹겹이 걸친 찌든 넝마조각이 그날 그 갑옷인 듯 참 버거워 보였습니다. 발해 변방 사투리인지 중얼중얼 히죽히죽 알 수 없는 혼잣말로 도깨비 허깨비처럼 흐늘거리는 젊은 사내 텅텅 비워 빈 눈동자 깊이를 잴 수 없는 먹먹한 그 어둠을 어쩌나, 나는 흘깃 훔쳐보고 말았는데요. 주변을 압도하는 장엄한 지린내 속에 시커먼 손가락으로 불어터진 국수발을 입속으로 쓸어 담는 아, 그도 한때는 천리마 잔등에서 활 쏘며 신출귀몰 이 산하를 주름잡던 용맹스러운 전사였을 터
여기는 어디입니까? 패배주의가 꽃피는
―「체하다-발해시편4」, 전문
상경의 중심을 관통하는 주작대로에 한 사내가 등장하는데, 그는 오늘날 광화문 대로를 배회하는 무기력한 현대인의 모습, 특히 길거리를 배회하는 노숙자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의 모습은 부상당한 패잔병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봉두난발”이라든가 “넝마조각” 등의 어휘들이 그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대변해준다. 또한 “중얼중얼 히죽히죽 알 수 없는 혼자말”이라든가 “도끼비 허깨비”등의 어휘들, 그리고 “텅텅 비워 빈 눈동자” 등의 묘사들은 그의 영혼이 건강하지도 그윽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주변을 압도하는 장엄한 지린내 속에 시커먼 손가락으로 불어터진 국수발을 입속으로 쓸어 담는” 모습은 그가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과 품격을 지니고 있지 못함을 웅변해주고 있다. “한때는 천리마 잔등에서 활 쏘며 신출귀몰 이 산하를 주름잡던 용맹스러운 전사였을 터”인 그 사내가 이처럼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물론 ‘발해’라는 유토피아, 어떤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생명력의 원천인 발해를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인용한 판타지아, 발해-발해시편1」의 종장에서 “참아도 터지는 울음, 방목해도 좋으리라”라고 오열한 까닭이나 이 시에서 “며칠째 체한 듯이 명치가 뻐근합니다.”라고 답답해하는 시적 화자의 태도는 바로 이러한 발해의 상실에서 오는 상실감을 대변해주고 있다. 발해의 상실은 육체의 피폐와 영혼의 고갈, 그리고 품격의 손상과 생명력의 상실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가 종장에서 “여기는 어디입니까? 패배주의가 꽃피는”이라고 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패배주의로 진단하는 모습은 민족적 차원의 위축된 분단 현실을 상기하면서 왜소하고 나약해진 현대인들의 삶의 자세와 심성에 대해 환기해준다. 이러한 현실 진단은 곧 시인에게 왜 ‘발해’가 필요한지, 왜 시인이 그토록 ‘발해’라는 상징적 세계에 집착하면서 복원하려고 하는지를 역설해준다. 유한한 존재로서의 존재론적 현실에 눈을 돌리거나, 아니면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야생적 생명력과 호방한 품격을 잃어버리고 나약한 일상을 버텨가는 왜소한 현대인에 눈을 돌리면, “눈도 코도 귀도 없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의심스러운 발해”이기는 하지만, 시인은 언제나 “밀서 같은 침묵 속에 움트는 신생 왕조”(「행운목」)」인 발해를 꿈꾸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