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겪은 6.25 동란 전후의 이야기(22) 청학 동 버스 종점에서 고갈 산 쪽으로 비스듬한 경사 길을 한참 올라와 후생주택 맨 끝 쪽 못 미쳐 로타리에서 왼편으로 틀어 돌계단을 내려와서 우리는 청학 동 후생주택 27호에 짐을 풀었다. 돌계단을 내려오면서부터 왼쪽으로 내려가면서 23호 24호 25호 그리고 25호 오른쪽 옆으로 26호 그 위가 27호 우리 집 위쪽이 28호였다. 여섯 집이 후생주택 거대단지와 동떨어져 아늑히 모여 있어서 윗동네 사람들이 우리 동네 여섯 집을 가리켜 별장 섬 마을이라 하였다. 새로 이사 온 집은 좁은 부엌 하나에 안방 하나 건너 마루방 하나 이렇게 되어 9평짜리 집이었다. 요새로 치면 7식구가 살기엔 좁은 집이었지만 나는 새집이 너무도 좋았다. 그렇게 좋은 집은 지금껏 처음이었다.
더더구나 집 앞에 서서 동쪽을 향하여 바라다보면 시원한 푸른 바다가 눈앞에 광활히 전개되고 바로 마주보이는 좀 떨어진 신선대에서 오른쪽으로 띄엄띄엄 늘어진 작은 돌섬이 선명히 보였는데 처음엔 무슨 섬인지 이름도 몰랐으나 그 섬이 노산 이 은상 선생의 노래에도 있을 만큼 저 유명한 오륙 도라 하였다.
이사 짐을 푸는 둥 마는 둥 아버지는 나를 데리시고 나지막한 뒷동산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집 뒤 공터를 이용할 구상을 나와 의논하셨다. 자그만 한 바위돌이 쌓이다 시피 한 뒷동산은 그 다음 날부터 틈이 나는 대로 아버지와 나의 황무지 개간 일터가 되었다. 일하는 것이 너무나 신나고 재미가 있었다. 집 뒤로 30m 넘게 떨어진 곳에 묘소가 한 장 있었는데 그 묘소 앞 오솔길 앞까지를 경계로 하여 아버지와 나는 집 뒤에 돌담 울타리를 쌓기 시작 하였다. 주변에 널려 있는 바윗돌이 울타리 쌓는데 좋은 재료가 되었다. 한달이 좀 넘는 동안에 내 허리 위까지 올라오는 꾸불꾸불한 길이가 40m 정도 되는 돌담장이 나타나 우리 집의 경계는 정하여 졌다. 돌담 안으로 잔돌들은 모두 다 치우고 땅속에 있는 돌까지 거의 파내고 보니 2단 정도의 밭이 생겼고 밭 위 높은 곳은 그대로 야산으로 두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여러 가지 씨앗을 구하여 밭에 뿌리고 야산엔 온통 코스모스씨를 뿌려 가꾸었다. 고구마도 많이 심었는데 이때에 고구마 넝쿨도 꽃이 핀다는 사실도 알았다. 집 앞 마당은 동네사람들이 공유하는 길인데 우리 집 앞쪽으로 타원형의 화단을 만들어 꽃씨란 꽃씨는 닥치는 대로 구해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뿌렸다. 내 일생 온갖 꽃을 좋아하고 지금도 꽃밭 가꾸기를 좋아하는 습관은 온전히 아버지께서 몸소 나에게 가르치신 결과 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집 남쪽 바깥벽에는 널찍한 광을 지었다 아버지는 구상만 하시고 톱질 못질 등은 내가 다 하였다. 아버지는 망치만 드셨다 하면 못 대가리를 내리 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엄지손가락부터 먼저 내리 때리셔서 멍이 퍼렇게 되시기가 일쑤 이셨다. 그런데 나는 절만 지으시는 대목이신 외할아버지를 닮아서 인지 연장을 가지고 나무를 다루는 일은 참으로 재미있고 지루해 하지 않았다. 개집도 그럴 듯 하게 지었다. 값이 비싸서 진도개는 구하지 못하고 똥개 잡종 암캐를 하나 구하여 키웠다. 거제도 연초에서 헤어진 에쓰가 자꾸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집안일을 처리 하실 때 항상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그때의 이 동행하심을 내가 장성한 뒤 자식을 키워보며 생각하여 보니 아버지는 참으로 이웃 모든 어른 분들처럼 자식 키우시는 데는 훌륭하신 어른이셨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불가항력이었지만 그 이후에도 아버지는 분수에 없는 재물에 집착하시기보다 당신이 직접 노력하신 결과에 만족하시고 명분과 순리에 즐겨 따르는 모습을 자식에게 보여주셨다. 세월이 조금 지난 이야기 이지만 지나칠 수 없는 아버지의 자식 가르침을 한 가지 말해보고자 한다. 1961년 서울로 이사 와서 대한극장 앞 충무로4가 인현시장 골목(지금은 세운상가)에서 살았는데 찢어질듯이 가난한 것은 따라다니는 우리 집의 운명이었던지 여전하였고 1962년 늦봄에 성북 동으로 이사를 가서 참으로 긴 세월 만에 법적으로 등기가 난 14평짜리 우리 집 소유인 집이 생길 때 까지 아버지는 참으로 많은 방황의 생활을 하시면서 가족을 이끄셨다. 1964년 1 월말 내가 평택에서 군 복무할 때였다. 설날이 임박하여 3일 외출증으로 집에 왔는데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더니 화곡아! 네가 복무 중 모처럼 외출을 하였는데 수고를 좀 해야겠다 하시었다. 아버지의 부탁 말씀은 이러하셨다. S대 사대 부속 국민학교에 책임 맡는 지위에 계신 학부형이 우리 집에 정리로 소갈비 한 짝을 선물로 사람을 시켜 가져 왔는데 이 물건을 되돌려 주어야겠는데 너의 힘이 필요 하다는 말씀이셨다. 그 다음날 아침 새벽에 아버지는 나에게 그 댁 약도를 그려 주셨다. 내가 군복을 입고 갈비 한 짝을 신문로 잘 싸서 어께에 매고 혼자 언덕길을 내려서려고 나서니 집에 계신다던 아버지가 못 미더우셨는지 같이 가자고 따라 나스셨다. 삼선 교를 걸어 내려가 돈암동 사거리에서 정릉으로 넘어가는 아리랑 고개를 한참 올라 오른쪽에 그 댁이 있었다. 같이 오시던 아버지가 먼발치로 저기 저 집인 것 같다 하셨다. 그 댁 앞에 도달해 문패를 보니 맞았다. 문을 두드리고 주인어른이 나와서 나는 거수경례를 하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이것을 되돌려 드리려 가져 왔습니다.’ 하였다. 주인이 붙들면서 ‘아니 정리로 내 마음을 표시하였는데 이렇게 하시면 어떻게 되느냐 선생님도 너무 하신다‘ 면서 되 가져가기를 원했으나 나는 인사를 드리고 그 댁 문 앞을 떠났다. 골목길에 숨으셔서 기다리시던 아버지는 돈 암동 뒷길 삼선교로 걸어오시면서 내 어께를 두드리시면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화곡아! 참 수고했다. 그 댁의 성의는 고마우나 너무 예의가 지나쳤다. 학교 선생에게 담배나 한 두 갑이면 몰라도 갈비가 무어냐? 지나친 예의는 사람 대하는 행실이 아니다. 그러니 화곡아! 학교 교사를 하는 아비를 이해해 다오. 미안하다.’ 하셨다. 나는 평소의 아버지 성품을 알고 있었지만 갈비를 어께에 메고 집에서 나올 때 집의 식구 분위기가 떠올랐다.
할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으나 어머니는 무엇 하러 되돌려 주는가의 의미가 안면에 가득하신 기색 이셨고 어린 동생 넷도 가져가지 말았으면 하는 표정이 아주 역력하여 지금까지도 그때의 동생들 표정은 지워 지지를 않는다. 당시 7살인 나보다 16살이나 아래인 막내 여 동생은 지금도 그 얘기만 나오면 그때의 아쉬움으로 열을 낸다. 나도 아버지의 말씀은 거역할 수가 없었지만 속으로 그만 놔두시고 집에서 한번 동생들을 먹게 하시지 하는 말이 목구멍 까지 나오려 했으나 말씀은 드리지 않았다. 그 갈비 사연은 지금도 명절 때 모이면 동생들이 빼 놓지 않고 말하며 한바탕 웃으면서 아버지를 추모하는 자식들의 단골 이야기 한토막이다. 그러나 지금도 연세 많으신 내 어머니의 생각은 아직도 그때의 고생스러움에 머물러 계신다. ‘찢어질 듯 가난한 마당에 무슨 체면치례냐!’ 그때에 명절인데도 고기 한 근 없이 지낼 판에! 너 들 아버지 바람에 나는 항상 죽을 판 이었다’ 하신다. 그러신 어머니가 당신 남편보다 한술 더 뜨는 교사 아들을 모습을 늘 지켜보시는 심회는 어떠하셨겠는가? 아버지의 이러한 생활 소신은 곧 우리집안의 전통이 되었다. 후에 교사를 하면서 아버지를 항상 생각하는 자식이기에 평생 나도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학교에서 나이를 떠나 동료교사들에게 참으로 많은 모범된 자세를 배웠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말은 없으셨지만 아버님 같은 신조 속에 묵묵히 교육활동에 임하시는 모습을 참으로 많이도 보곤 하였다. 그분들에게서 내 마음을 붙들어 주는 묵시적 표양을 만나곤 하였는데 나는 항상 감사했다. 정규 이동으로 학교를 옮길 때 마다 나는 가는 곳마다 훌륭하신 많은 선생님들을 만나 머리를 숙일 때가 많았다. 몇몇 수양이 덜된 이들이 있어 교육풍토를 흐리는 모습을 대하고 때론 통탄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은 한 가지 재주는 있어서 알랑 방구를 잘 뀌어 이에 넘어간 학교 경영자들이 그 못된 자를 오히려 두둔하는 짓거리를 볼 때는 울화통이 치밀어 여러 교사들과 분통터지는 술도 꽤나 마셨던 것 같다. 사람들은 참으로 약한 존재라 생각했다. 사도상이 아무렇게 수여 되지 않는 다는 것임을 나는 말할 수가 있다.
아버지는 자식을 인자로이 키우셨으나 이런 문제에서는 그렇게 단호하셨다. 촌지는 분수에 맞게 표하면 미풍양속이 될 수 있고 스승 존경 교육 풍토에도 일조가 될 수 있으나 지나칠 때에 문제가 생겨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 여겨진다. 우리 집에서 큰 마을 쪽으로 계단을 오르면 부산항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제일부두 제이부두 제삼부두... 참으로 배도 많고 항구 경치가 그저 그만 이였다. 청학 동에서 긴 방파제가 나가고 적기에서 긴 방파제가 마주보고 들어와 부산항을 싸고 배가 지나는 방파제 양끝으로 하얀 등대위에서 깜박거리는 불빛도 이채로웠고 청학 동 종점에서 동삼 동 아치 섬 태종대로 넘어가는 차가 지나가면 진흙먼지가 부옇게 일곤 하는 먼발치 왼쪽 넓섬 바위 꼭 대기 야산에 있는 해군기지위의 깜박거리는 안테나도 밤에는 구경 거리였다. 부산항은 청학 동에서 들여다보는 야경이 제일 볼만 하였다. 그 해군기지 너머로 바다 건너 바라다 보이는 신선대 해변의 아름다운 모습은 액자에 넣을 수 있다면 그대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으리라. 왼쪽으로 넓 섬 바위 그리고 오른쪽 저 멀리 아치 섬 그 사이로 전개되는 부산 외항의 아름답고 광활한 푸르른 기상은 그 이후 내가 추구하는 이상에 항상 푸르름을 안겨주는 동기가 되어 주었다. 이 전경은 오륙 도를 너머 하늘과 맞닿는 바다의 수평선과 더불어 동해안 경치의 진수라 생각된다. 넓섬 바위 건너편 동삼동쪽의 해변의 조약돌 속엔 나의 사춘기의 꿈들이 고스란히 뭍혀 있다. 친구와 몇 차례 그 해변을 찾았는데 서로가 들추는 돌마다 그 자리에서 동심의 묻어 놓은 이야기 사연들이 마구 튀 쳐 나오는 것은 어이된 일인가? 두 여동생은 청학국민학교에 다니고 나는 아버지와 버스도 타지 못하고 걸어서 그 먼 보수 동 청구중학교까지를 매일 왕복하였다. 코스코 길은 평지였으니 돌아가는 길이였고 지름길인 청학국민학교 옆으로 언덕을 넘어가서 조선소를 지나 봉래 동 부두 길을 지나 영도다리를 건너는데 오후에 돌아 올때 영도다리의 다리 올리고 내리는 모습은 과연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별난 구경 거리였다.
다리가 오르면 이때를 맞추어 중형 급의 배들이 다리 밑 바다로 지나가고 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멈춰 서있고 전차들도 쉬어 기다리다 배가 다 지나가고 그 커다란 다리가 내리면 기다리던 차들은 길이 미어지도록 오가고 덩치 큰 전차들도 댕 댕 댕 소리를 내면서 지나고 인도로 사람들이 빼곡히 난간을 붙들어 가며 양쪽에서 오갔던 어린 추억들은 지워질 수 없는 나의 아름다운 영도다리 모습으로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 다리를 건너면 오른 쪽으로 시청의 커다란 건물이 있고 그 옆에 5육군 병원 건물이 높다랗게 서 있었는데 아마 부산에서는 당시에 가장 높은 건물인데 지금으로 치면 왠만한 아파트 높이보다 작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한 칠층정도 되었으니까. 그러나 당시엔 어마어마하게 높은 건물이었다. 곧바로 남포동 거리! 오른쪽 한 블럭 넘으면 광복동 거리! 동광 동 거리에서 왼쪽으로 높다란 동아극장 오른쪽으로 돌아들면 대청 동 미 문화원 국제시장 보수 동 헌 책방 골목 그리고 헤일 수도 없는 많은 층층대 계단을 올라 보수산 중턱을 거처 애덕 고아원을 지나면 내가 다니는 중학교가 나온다. 나는 이 길을 거의 3년을 걸어서 다녔다.
보수동 헌 책방 골목 앞에서 국제시장 으로 들어서는 사거리는 번화하고 사람과 차들이 많이 지나 전국에서 제일 복잡한 거리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수신호로 교통을 정리하는 경찰들의 동작이 너무 절도가 있고 다양하여 지나가는 사람이나 차에 탄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고 커다란 즐거움을 주었다. 어떻게나 수 신호로 빨리 동작을 취하여 방향제시를 하는지 왠 만한 사람들은 흉내도 못내는 전광석화란 말이 딱 어울리는 그런 동작이었고 또 판단이 정확하여서 우리들은 국제시장을 건너기전 건널목에서 멀거니 한참동안 구경하다가 건너곤 하였다.
자갈치 시장을 향하여 국제 시장의 대로 우측인도 중간쯤 서편 골목으로는 계란을 파는 골목이 있었는데 그 골목 초입새 왼쪽에 내 친구 C M G(바로 아래 아우 C D C 님은 시인 ) 의 어머니가 좌판에서 계란 장사를 하셨다. 내가 일생동안 만나 뵌 어른 가운데 이분처럼 인자하시면서 위엄 까지 지니신 분은 다시 만나지 못한 것 같다. 친정 고향이 경남 하동이셨고 키가 작으시면서 어린 내가 뵙기로도 미모와 인품이 대단하셨는데 비유하여 말하자면 궁중 역사 이야기에 나오는 덕이 많으신 왕후 같은 그런 느낌의 인상 이셨다. 오가다가 자주 인사도 드렸고 그 아주머니는 나를 아주 반갑게 대해 주셨다. 그런데 이분은 시댁이 지금까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으셨지만 따져보면 아주 유명하신 댁의 며느님 이셨다. 일제때 1919년 9월 2일 일본의 사이또오(齎藤實)가 3대 총독으로 서울에 부임 할때 서울 역에서 폭탄을 던져 사이또오를 저격하는 대 사건이 있었다. 이를 주도한 분이 당시 65세 이신 강우규(姜宇奎) 선생이셨는데 선생과 함께 비밀리에 거사를 준비하신 분 중 지학(志壑) 최자남(崔子南) 의사란 분이 계셨다. 이 분이 바로 최자남 선생의 며느님 이셨다.
당시 최 자남 선생은 강 우규 선생의 모든 거사자금 담당이셨고 또 투척할 폭탄까지 모두 비밀리에 준비 하시는 담당자 이셨다. 비밀리에 준비한 폭탄을 선생이 거주하시는 원산(元山) 자택 천장에 숨겨놓고 강우규 의사와 함께 선생 댁에 숨어 지내시다가 이후 상경하여 9월 2일 당일에는 거사 일행들과 서울 역 현장에서 강 우규 의사의 투척을 목격하고 원산으로 피신하였으나 곧 체포되시고 징역 3년으로 확정 판결되어 서대문 감옥, 함흥 감옥을 전전하며 옥살이를 하시다가 출옥후 요시찰인으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1928년경 협성학교 이사로 육영사업을 하셨으며 옥고의 후유증으로 1933년 병사하신 분이시다. 당시 지학 선생의 형량이 낮은 이유는 강 우규 선생께서 폭탄 준비등 모든 것이 단독 범행이라고 우기시고 끝까지 다른 분들을 두둔 하셨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강 우규 선생은 ‘늙은 내가 이 거사를 앞장서 하는 것은 젊은 당신들은 앞으로 할일이 많기에 이번일은 늙은이로서 충분히 할 수 있기에 앞장서는 것뿐이고 이후로 잡히더라도 왜놈들에게 함구할 터이니 당신들은 앞으로 나라 독립을 위하여 더 큰 일을 많이 하라' 고 하셨다 한다. 참으로 감동스런 말씀이셨다. 이런 분들 중 한분인 지학선생의 정신을 이어 받으신 집안 가문의 며느님이셨다.
내 친구 C M G 의 아버님은 지학 최자남 의사의 맏 아드님이신 최의준(崔義駿) 선생이시다. 나의 아버지 보다 10년 정도 위신 분이셨다. 38선 이북에서 1947년 김일성 우상화가 한참 진행될 때 이에 못 견딘 내 친구 가족은 함경남도 안변에서 아버지를 따라 이북의 학정을 피해 강원도 장성탄광 마을로 이사를 내려오신 분이시다. 어린 나 였 지만 나는 아버지와 최 의준 선생을 통하여 일본의 모든 것을 그 때에 상세히도 알았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피 눈물 나는 민족의 애환에 대하여 그때부터 눈이 떠졌다. 이때부터 아버지가 틈만 나시면 구해오시는 책 중 독립혈사, 항일운동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하여 일본에 항거한 독립운동 기록에 관한 책을 많이도 읽었다.
최 의준 선생은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후생주택 25호에 사셨다. 키가 크시고 체격이 아주 거대하셨고 배가 아주 많이 나오셨는데 이웃에 마실을 갈 때는 파자마 바람에 왔다 갔다 하신 때가 많으셨고 주로 우리 집에 오셔서 아버지와 담소를 많이도 하셨다. 그대로 오시는 것이 아니시다. 뚱뚱하신 배 앞 파자마에 각종신문을 무슨 무협지에 나오는 짧은 칼을 허리둘레에 꽂으시듯이 삥 둘러 꽂으시고 오셔서 당신의 아버님과 함께 안변 원산등지에서 조선일보 지국장을 하셨을 때 일어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말씀하실 땐 대단하셨다. 시간만 나면 역사서를 집필 하시는 아버님께 놀러 오셔서 원고 쓰시는 자그만한 책상대용 개다리소반 상머리에 바짝 다가앉으시면서 열을 내실 땐 볼만 하였다. 양팔소매를 걷어 부치시고 일본 놈들이나 그들의 앞잡이들을 혼내시던 무용담을 하시는데 당시의 그놈들에게 삿대질을 하시던 모습 그대로 방바닥에 앉으셔서 원고를 쓰시는 아버지 턱을 향하여 삿대질을 하셔서 자칫하면 얼굴을 맞으실 것 같은 내 아버지가 ‘네, 네! 하며 응답하시면서 선생의 주먹을 피해 고개를 연신 옆으로 피하시면서 원고를 쓰실라치면 피하는 자리에서 더욱 바짝 다가앉으시면서 더욱 아버지를 향하여 두 주먹을 내 휘두르시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우스웠었다. 어떤 때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실 때는 손재봉틀로 삯 바느질을 하시는 어머니 옆에 다가 앉으셔서 또 그러시는 바람에 어머니는 편히 일도 할 수 없었다고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신다. 선생은 가끔 무슨 중대한 일이 있으신지 기차를 타고 서울에 다녀오시곤 하셨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