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 헤치고 원주민 마을 찾아 교리 교육
지구본을 놓고 볼 때 우리나라와 가장 반대편에 위치한 정글의 나라. 비행기를 타고도 만 하루가 더 걸리는 먼 이국 땅 남미에 선교의 발을 들여놓은 지도 벌써 20년이 다 돼간다. 이젠 스페인말이 우리말보다 더 익숙해질 정도로 고향처럼 친숙해진 남미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모두 원주민들에게 바친 셈이다. 현재 활동중인 아마존 유역이 어떤 곳인가를 쉽게 이해하려면 영화 ‘미션’을 떠올리면 된다. 하늘이 안보일 정도로 빽빽한 밀림과 뜨거운 태양, 거의 매일 거르지 않고 쏟아지는 소나기,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평화롭게 살아가는 순박한 원주민들. 남미와의 인연은 지난 81년 파라과이 한인교회에 파견되면서 시작됐다. 거기서 4년동안 교포사목을 하고 85년 콜롬비아에서 발생한 큰 지진으로 그곳 주교가 피해 복구 봉사자를 요청해 옴에 따라 오지 선교에 첫발을 내디뎠다. 처음 파견된 곳은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의 접경지인 ‘씨에라뻬리하’라는 지역이었다. 콜롬비아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이곳에는 세상과 단절된 채 떠돌아 다니는 인디오들이 살고 있었다. 한곳에 머물다가 먹을 것이 떨어지면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이들에게 정착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농사를 지을 줄도 몰라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인디오들에겐 병도 많았고, 영양실조에 걸린 이들도 적잖았다. 그냥 두었다가는 종족 자체가 멸종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들에게 정착을 유도하고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등 안정된 생활기반을 마련해 주는 데에 힘썼다. 아마존의 원주민들을 위해 일하다 99년 지금의 에콰도르로 옮겨왔다. 그러나 에콰도르의 선교활동도 이전 콜롬비아와 다르지 않다. 이곳의 원주민들은 대개 20여가구 정도로 밀림 곳곳에 흩어져 산다.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은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가 철저한 소공동체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고지식하고 착한 성격도 다들 비슷하다. 이곳에서의 선교는 마을마다 형성돼 있는 가톨릭 소공동체의 활성화와 이들이 좀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사회복지활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인 이곳 주민은 대부분 가톨릭 신자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교회와의 유대는 다소 느슨한 편이다. 다들 멀리 떨어져 사느라 교회와 신부를 접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일 일런지도 모른다. 이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것이 선교사의 첫번째 임무다. 이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교리도 가르치고 스스로 주일 전례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 때가 되면 사제와 함께 찾아가 세례도 베풀고 미사를 봉헌한다. 하지만 생활기반이 취약한 원주민들에게는 이와 같은 전통적 의미의 선교 외에 이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옷을 만드는 재봉기술 등 간단한 수공기술을 가르쳐 이들이 좀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도 단순한 원조가 아니라 자립에 필요한 실질적인 기술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주민 중에 누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들의 입장이 되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적극 나선다. 매사를 그들 편에 서서 함께 한다는 동료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처음엔 어려운 점도 많았다. 이질적인 환경과 풍습을 지닌 그들과 가까워진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토착어를 사용하는 그들에겐 어렵게 배운 스페인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이 냉랭한 반응을 보일 때는 정말이지 돌아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그들을 이해하게 되자 이곳에서의 선교야말로 하느님이 내게 주신 소명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루 한끼 내지 두끼가 고작일 정도로 이들의 생활은 열악하다. 풍요한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딴판인 이곳에서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는 것이 더 없는 축복으로 느껴진다. 나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 기뻐하고 좀더 나은 환경에서 사는 것을 볼 때마다 진정 하느님이 내 곁에서 도와주신다는 것을 절감한다. 또 이들의 삶을 보면 ‘가난한 이는 복되도다’는 성서말씀이 정말 옳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먹을 것이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이들이지만 처음 보는 손님에게 너무도 친절하다. 오랜만에 방문하게 되면 그 집에 있는 먹을 것을 다 내와 함께 나눈다. 감춰두었다가 나중에 몰래 먹는 그런 일은 이곳 사람들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신기한 것은 이곳에는 거지도, 고아도 없다는 사실이다. 나눔의 삶이 체질화된 원주민들 사회에서 먹을 것을 구걸하는 거지가 생길 소지는 아예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죽어 고아가 생기면 주위에서 이들을 데려가 자기자식처럼 키우는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에 우리나라식의 고아원은 없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도 아낌없이 나누고 서로 돕는 이들은 비록 물질적으로는 궁핍하지만 마음만큼은 참으로 부자인, 행복한 사람들이다. 어쩌다 한번씩 한국에 나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교회는 너무 풍요로운 것 같다. 물질적인 여유 자체를 나무랄 수 없지만 그것 때문에 정신적인 가치를 외면한다면 이는 분명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아울러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사회복지활동에 더 큰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행복하게 사는 원주민들과 오래 살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또 신앙인은 어디에 가치를 둬야 할 지를 반성하게 된다.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삶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모습이라고 확신한다. 오늘도 나는 원주민 마을을 찾아 길을 떠난다. 때론 차를 얻어 타기도 하고 아니면 하염없이 걷는다. 나를 반갑게 맞이할 그들과 며칠을 함께 보낼 것이다. 그들에게 봉사하면서 또 그들로부터 너무나 소중한 것을 배우는 것이 바로 선교사의 삶인 것 같다. 오지의 선교사 생활 20년 동안 하느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았다. 좀더 많은 한국의 신자들이 현재의 삶에 안주하지 말고 미지의 세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선교활동에 나서주길 부탁한다. 물론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하느님께서 살아계심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이신자 수녀 약력 이신자(로사·사진)수녀는 1942년 충북 괴산 출생으로 64년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에 입회했다. 71년 종신서원을 한 이 수녀는 80년 스페인에서 스페인어를 배운 뒤 81년부터 85년까지 파라과이 한인교회에서 교포 사목활동을 했다. 이후 86년 콜롬비아로 옮겨 원주민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친 이 수녀는 지난해 초부터 인근 에콰도르로 옮겨 계속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