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라는 허울 속에, ‘성적지향’의 비수(匕首)를 품은 자들에게 묻고 싶다. 먼저는 ‘인권’이다. 그들은 인권을 운운하지만, 실상은 인권을 격하시키는 자들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것과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것보다,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럼에도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위협하는 무신론·유물론적 인권 이론을 택하는가. 가장 좋은 것을 버리고 퇴보를 택하는 어리석음에서 돌이켜야 할 것이다. 다음은 성적지향의 혼란스러움과 급진성이다. 그들은 남·여의 성별을 인간이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기존의 성(性)은 학습된 것이라 전제하므로, 성을 선택할 문을 열어젖힌다. 성 정체성을 선택할 자유에 따라, 아침에는 남자 저녁에는 여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표류하는 정체성으로 인한 혼란스러움에서, 인간은 자유하기 어렵다. 역사와 문명 속에서 검증된 적 없는 급진적 사고가, 어떻게 진보일 수 있는가. 이어 ‘동성결혼과 진화론’을 살펴보자. 그대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성 간의 결혼 제도를 거슬러, 동성결혼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진화론적 성의 개념을 가져와, 인간은 원래 동물이니 동물의 본능에 따라 성을 즐기고, 여느 동물처럼 동성 교합도 괜찮다고 한다. 그런데 그네들의 선각자인 진화론의 ‘찰스 다윈’조차 “자연 도태는 유추에 근거한 추론” 이라며, 자신의 이론의 불완전성을 시인했던 것을 아는가. 건물의 반석부터 흔들리는데, 건물이 온전히 설 수 있겠는가? 또한 이성 간 정절을 지키는 것이 ‘성의 억압’인가. 남녀 간의 사랑은 연인 상호 간의 독점 소유권이다. 이성에 대한 소유권을 위협받은 개인은 ‘질투’로 불타오른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난다(아 8:6). 때문에 남녀 간의 깊은 사랑은 칼부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인 이성 간의 정절을, 억압된 성으로 치부한다. 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선(善)이라며, 악(惡)을 부추긴다. 침실의 혁명을 꿈꾸지만, 가정은 화마(火魔)에 휩싸일 뿐이다. 나아가 ‘종교개혁과 공산당 선언’에 대해 묻는다. 1517년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근대 서구 문명과 1848년 ‘공산당 선언’으로 시작된 공산혁명 중 무엇이 사람을 이롭게 했는가. 개인의 생명, 자유, 재산권은 어느 쪽에서 지켜졌는가? 그럼에도 유럽을 떠돌아, 전 세계를 생지옥으로 몰아넣은 공산주의를 추종하는가? 그 죽음의 이데올로기에서 자라난 ‘혁명’에 무슨 선한 것이 있겠는가. 모든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므로, 역사에서 검증된 성경적 권위를 배척하려 드는가. 끝으로 ‘가정과 교회’를 보자. 세상살이의 파고(波高)는 높지만, 부부는 이를 헤쳐 나간다. 둘이지만 한 몸이 된 사랑의 힘이다. 사랑은 역경을 딛고 일어서게 만든다. 교회는 코람데오의 삶으로 이끌고, 인간의 양심을 깨운다. 악을 멀리 하고, 선을 가까이 하도록 만든다. ‘하나님 앞에 선 개인’은 자유와 책임의식을 배운다. 이처럼 가정과 교회보다 인간을 고양(高揚)시키는 조직이 있는가? 불완전하다 해서, 해체돼야 할 공동체가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