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인의 이야기 - 이상 김해경 · '금홍아, 금홍아!' |
'금홍아, 금홍아!'
이상 (李箱. 1910~1937. 본명 金海卿)
1932년 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야수파 곱추 화가 구본웅은 귀국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친다. 여기서 이상을 만나 인생의 동반자로 콤비를 이루지만 그의 무절제한 삶에 회의를 느끼고 갈등한다. 그후, 이상은 폐렴 삼기의 중병에 걸리고 백천 온천에 동행하게 된다. 그 곳에서 구본웅은 기생 금홍을 만나게 되나 이상에게 금홍을 빼앗기고 마음 한구석에 간직한다. 그러나 이상은 금홍과 무절제한 성관계를 맺게 되는데 ...< 영화스토리 >...
20세기의 한국인들은 대단히 불행했다. 그러나 한국문학의 20세기는 역설적으로 행복한 세기였다. 식민지 체험과 전쟁, 분단을 겪은 한국인의 불행을 예술로 승화하는 과정에서 한국문학은 풍성해졌다. 시대의 불행은 문학이 우량아로 자랄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지난 세기의 한국문학 생산자들은 우리가 헤쳐 나온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언자들이다. 그들은 작가라는 불행한 운명에 포박되어 온몸으로 온몸을 밀며 한국문학을 일궈냈다. 그들은 착종과 파행으로 얼룩지고 가위눌린 삶에서 터져나오는 혼미한 언어들을 토해내었다. 그들의 삶의 정면이 아니라 응달에 묻혀 있는 이면을 들여다보는 시리즈 "한국문단 비사"를 주 1회 싣는다. ..............................................................................................
1933년 늦여름 어둑어둑해질 무렵. 백단화(白短靴)에 평생 빗질 한 번 해본 적 없는 듯한 봉두 난발, 짙은 갈색 나비 넥타이, 구레나룻에 얼굴빛이 양인(洋人)처럼 창백한 사나이, 중산모를 쓴 키가 여느 사람의 반밖에 되지 않는 꼽추, 키가 훌쩍 큰 또 다른 사나이, 이렇게 셋이서 종로를 걸어간다.
"어디 곡마단 패가 들어왔나 본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기묘한 일행을 보고 한 마디씩 던진다. 백구두의 사나이가 갖고 있던 스틱을 들어 공연히 휘휘 돌려대다가 느닷없이 "카카카.!"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스스로 생각해도 일행의 몰골이 우스꽝스러운 까닭이다.
그들이 백천 온천에 갔을 때도 경성에서 곡마단 패가 왔다고 애들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세 사람 가운데 백단화에 구레나룻의 사나이가 바로 이상 (李箱.1910~1937)이고, 중산모를 쓴 꼽추는 화가 구본웅이다.
의탁하고 있던 백부의 가세마저 기울자 이상은 학교에서 현미빵을 파는 고학을 하며 어렵게 보성고보를 졸업한다. 그가 식민지 건축 기술자 양성을 위해 세워진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공대의 전신)에 들어간 것은 백부의 소망 때문이다.
"해경(이상의 본명)아, 앞으로 너는 건축과를 가야 한다. 나도 병들고 네 아비도 늙고 가난하지 않느냐. 적선동(해경의 친가)은 식량이 떨어질 때도 많은 모양이더라. 세태가 아무리 바뀌어도 기술자는 배는 곯지 않는단다. 그러니 가난한 환쟁이는 안 돼" 백부는 그를 설득한다.
이상이 "오감도" "삼차각 설계도" "건축 무한 육면각체" 등 건축과 깊은 관련을 지닌 표제어를 자주 쓰고 아라비아 숫자와 기하학 기호 등을 시어로 차용하고 수식(數式)보다 난해한 시들을 쓰게 된 것은 바로 이 고등공업 시절의 영향이다.
1933년 이상은 백부의 양자로 들어간 지 23년 만에 가족과 합치나 불과 보름을 견디지 못하고 나와버린다. 이상은 폐결핵 요양 차 구본웅과 함께 백천온천으로 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술집 여급 금홍을 만난다.
"몇 살인구?" "스물 한 살이에요" "그럼 내 나이는 몇 살이나 돼 뵈지?" "글세, 마흔? 서른 아홉?" 이 때 금홍은 겨우 스물한 살이고, 금홍의 눈에 마흔이 넘은 것으로 비치던 이상은 알고 보면 스물세 살이었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오자 백부의 유산으로 청진동 조선광무소 건물 1층을 전세내어 "제비" 다방을 개업한다. 금홍을 불러들여 마담으로 앉히고, 아울러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한다. 이상은 "나는 추호의 틀림없는 만 25세 11개월의 홍안 미소년 (紅顔美少年)이다. 그렇건만 나는 노옹(老翁)이다" 라고 쓴다. 이상은 찰나적인 행복감에 젖었다.
"우리 내외는 참 사랑했다. 금홍이와 나는 서로 지나간 일은 묻지 않기로 하였다. 과거래야 내 과거가 무엇 있을 까닭이 없고 말하자면 내가 금홍이의 과거를 묻지 않기로 한 약속이나 다름없다" 고 했다. "제비" 는 당대의 일급 문인들인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정인택. 윤태영. 조용만 등이 단골이었다. 다방의 경영은 여의치 않고, 금홍은 외간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곤 한다. 이상은 금홍이의 "오락" 을 돕기 위해 가끔 P군의 집에 가 잤다.
P군은 소설가 박태원이다. 금홍의 문란한 남자 관계를 방임. 방조하던 이상은 때로 금홍의 난폭한 손찌검에 몸을 내맡긴 채 자학을 꾀한다.
"하루 나는 제목 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사흘을 돌아오지 못했다. 너무도 금홍이가 무서웠다" 그렇게 집을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금홍이는 집에 없었다. 때 묻은 버선을 윗목에 팽개쳐놓고 나가버린 것이다. "제비" 다방은 두 해 만인 1935년 9월 문을 닫았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는 연애까지 유쾌하오" 로 시작되는 소설 "날개" 는 바로 금홍과의 동거 체험에서 건져낸 작품이다. ................................................................................
장석주 = 시인.문학평론가.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됐다. 지금까지 10권의 시집과 6권의 문학평론집을 펴냈다. 2000년에는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전5권)을 엮어냈다. 청하출판사의 편집. 발행인으로 일했으며, 현재는 경기도 안성의 수졸재에서 글쓰기에만 전념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2002-01-29 16:44:40 - 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1) 중에서 -
이상 (李箱.1910~1937.본명 金海卿) 의 경력
1910 9월23일(음력 8월20일) 서울 통인동 154번지에서 이발업에 종사하던 부 김연창(金演昌)과 모 박세창(朴世昌)의 장남으로 출생. 본명은 해경(海卿). 본관은 강릉. 1912 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집에서 장손으로 성장. 1917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新明學校)에 입학. 이때부터 그림에 재질 보임. 1921 신명학교 4년 졸업.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그해 조선불교중앙교무원 경영의 동광(東光)학교에 입학 1924 동광학교가 보성고보(普成高普)로 병합. 이 해에 교내 미술전람회에 유화 '풍경' 입상. 1926 보성고보 5학년 졸업. 그해 동숭동에 있는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 입학. 미술에의 집착을 가지고 보낸 고공 1여년동안 회람지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 삽화와 시를 발표. 1929 경성고공 졸업.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취직. 관방(官房) 회계와 영선계로옮긴(11월)후 <조선과건축>회지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1등과 3등으로 각각 당선(12월) 1931 처녀시 '이상한가역반응', '파편의경치', 'BOITEUX·BOITEUSE', '공복'(7월) 일문 '오감도'(8월) '삼차각 설계도'(10월)을 각각 <조선과 건축>에 발표. 이 무렵 곱추화가 구본웅(具本雄)을 알게 됨. 서양화 '초상화'를 <선전(鮮展)>에 출품, 입선. 이 해에 백부 사망. 1932 단편 소설 '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 이때에 비구(比久)란 익명사용. 시 '건축무한육면각체' 를 발표하면서 필명으로 '이상(李箱)' 을 처음 사용. 1933 3월 심한 각혈로 총독부 기수직을 사임. 통인동 백부의 유산을 정리하여 효자동에 집을 얻고, 21년만에친부모 형제들을 옮겨옴. 백모는 계동으로 이사. 요양차 백천온천에 갔다가 그곳 기생 금홍과 알게됨. 서울 종로 1가에 다방 '제비' 를 개업. 동거생활 시작(7월). '꽃나무' 외 시 2편을 <가톨릭 청년>에 발표(7월). 1934 <구인회>에 가입 본격적인 문학활동시작.<매일신보>에 시 '보통기념' 을 발표. 시 '오감도' 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지만 난해시라는 독자들의 항의로 15회로 중단. '소설가 구보(九甫)씨의 일일' 의 삽화를 그림(8월). <중앙>에 시 '소영위제'를 발표 1935 <가톨릭 청년>에 시 '정식'(4월), <조선중앙일보>에 시 '지비' 를발표(9월). 다방 '제비' 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금홍과 헤어짐. 인사동에 카페 '학' 을 인수해 경영하지만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다방 '69' 를 설계하나 양도하고, 다방 '맥'을 설계, 중도 해약. 계속된 경영 실패로 그의 가족은 신당동 빈민촌으로 이사. 성천, 인천 등지로 여행. <매일신보>에 '산촌여정' 발표 1936 창문사에서 <구인회> 동인지 <시와소설>의 편집을 맡아 1집만 내고 그만둠. <중앙>에 '지주회시'(7월)를, <조광>에 '날개'(9월)를 발표. <조광>에 '동해' 발표(10월), <중앙>에 '지비 1,2,3', <가톨릭 청년>에 '역단', <여성>에 '명경' 등 발표. 전부터 알았던 변동림과 결혼. 새로운 재기를 위하여 일본 동경으로 감(음력 9월3일). 그곳에서 '공포의 기록', '종생기', '권태', '슬픈 이야기', '환시기' 등을 씀. '봉별기'가 <여성>에 발표됨(12월) 1937 사상 불온혐의로 일본경찰에 유치(2월). 병보석으로출감(3월). 4월17일 동경제대부속병원에서 객사. 향년 만26년7개월. 그 전날(16일) 부모와 조모 사망. 아내 변동림에 의해 유해는 화장되어 환국하여 미아리에 안장되었다가 후일 유실. 5월에 '종생기'가 <조광>에 발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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