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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네이버 지식in에서 퍼온 것입니다. 만드신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영화에 대해서 대단히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올해도 지난해처럼 남우주연상을 놓고 아카데미 심사위원회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지난해 출품한 작품들 중에서 감히 '주연상감'이라는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단연코 위대한 '재기'를 보여준 <레슬러>의 미키 루크를 비롯하여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브래드 피트, <프로스트/닉스>의 관록파배우인 프랭크 랑겔라, 그리고 우리들에겐 다소 낯설기는 하지만 주연보다는 조역배우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는 <비지터>의 리처드 젠킨스를 비롯하여 비록 지명조차도 받지는 못했지만 <다우트>의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과 수상자였던 <밀크>의 숀 펜 등이다.
만약 골든글로브의 여세를 몰았다면 미키 루크가 받을 만했지만 아카데미 위원회는 서툰 동정 따위에 더 이상 관대해지지 않으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다. 물론 숀 펜의 연기도 '역시 그다!' 라고 평가할 만큼 훌륭했지만 난 사실 <레슬러>를 보는 내내 당연히 미키 루크에게 돌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숀 펜은 이로써 2004년 <미스틱 리버>에 이어 두 번째 수상이다. 그의 사실적 연기 패턴을 볼 때 그는 매년 열리는 오스카 무대의 단골배우임에는 틀림이 없다.
오스카상! 연기파 배우들의 잣대가 되는 황금빛 트로피를 2개 이상 받은 배우들은 누가 있었을까?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숀 펜(Sean Penn)
그는 2004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미스틱 리버>와 2009년 구스 반 산트의 <밀크>로
남우주연상만 2개를 받았다. 그는 모두 5차례나 후보에 지명되었고 베를린영화제와 칸느에서도
주연상을 획득하며 명실공히 자타 공인 연기파 배우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Daniel Day Lewis)
그는 모두 4차례의 주연상에 지명되었다. 1990년 장애인인 크리스티 브라운의
삶을 다룬 <나의 왼발>과 2007년 미국개척시대의 황금만능주의에
찌든 인물을 완벽하게 연기한 <데어 윌 비 블러드>로 2개의 남우주연상을 가져갔다.
메릴 스트립(Meryl Streep)
도무지 연기 열정이 사라지지 않는 이 위대한 배우는 1980년 남편과 아들을
두고 가출한 비련의 어머니역인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로 조연상을, 1983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두 자식을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섰던 <소피의 선택>으로 주연상을 거머졌다.
그녀는 올해 <다우트>까지 무려 15차례나 지명을 받았다.
힐러리 스왱크(Hillary Swank)
보이시한 매력이 일품인 그녀는 2000년 <소년은 울지 않는다>와 2005년 클린트 이스트우드,
모건 프리만과 함께 한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지명된 두 번 모두 여우주연상을
품에 안은 행운아였다. 하지만 좀 성공하더니 남편도 차버리고 얼굴도 뜯어 고치는 등
사생활이 요즘 시끄럽단다.
잭 니콜슨(Jack Nicholson)
예순을 훌쩍 넘긴 이 능청맞은 노인네는 1976년 정신병동의 멀쩡한 이상주의자로
출연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와 1998년 편집증에 시달리지만 사랑에
굶주린 작가 역의 <이보다 더 좋은 순 없다>로 2번의 주연남우상을 받았고 1984년
<애정의 조건>으로 조연남우상을 받아 모두 세 차례나 본 무대를 밟았다. 그런 그가
2007년 <버킷리스트> 이후 종적이 묘연하다.
덴젤 워싱턴(Denzel Washington)
대표적인 지성파 흑인배우인 그는 1990년 <글로리>로 남우조연상을 받아
시드니 포이티에의 영광을 이었고 2002년 비열하고 잔인한 비리 경관역을 맡은
<트레이닝 데이>로 남우주연상을 받음으로써 흥행력을 갖춘 몇 안 되는 연기파 배우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지금도 컬러의 다변화를 시도 중이다.
매기 스미스(Maggie Smith)
미네르바 선생께서도 1970년 <미스 진 브로디의 전성기>로 제네비에브 부졸드,
제인 폰다, 진 시몬스 등을 따돌리고 첫 주연상을 쟁취했고 1979년 <캘리포니아 슈트>로
조연상마저 고향 에섹스로 가져갔다. 그러나 요즘은 너무 블록버스터 영화에만
등장하는 것 같아서 조금 낯설다.
톰 행크스(Tom Hanks)
요즘 그의 걸음걸이가 느리고 서툴다. 하는 영화마다 졸평에 시달리고 흥행조차
시원찮다. 하지만 1994년 에이즈 환자로 열연한 <필라델피아>와 지능은 낮지만
열나게 빠른 사내로 분했던 1995년 <포레스트 검프>로 2년 연속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당연히 1990년대는 그의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좀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톰 크루즈 꼴 나기 때문이다.
케빈 스페이시(Kevin Spacey)
워낙 출중한 연기 탓에 잘하면 본전이고 상이라도 하나 건지면 당연하다는 반응들이다.
하지만 1996년 <유주얼 서스팩트>로 '절름발이가 범인이다' 라는 유행어를 남기며
조연상을 수상한 그는 2000년 현대 미국인들이 겪고 있는 염세적이고 타락한 가정사를
비꼰 <아메리칸 뷰티>로 주연상마저 거머쥐었다.
더스틴 호프만(Dustin Hoffman)
데뷔작인 <졸업>으로 될성부른 떡잎임을 입증했던 그는 강산이 변한 후인 1980년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의 의지 강한 아버지역과 1989년 톰 크루즈와의
공연작인 <레인 맨>으로 두 번의 주연남우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부턴
부침이 심한 편이라 좀 안타깝다.
엠마 톰슨(Emma Thompson)
센스로 똘똘 뭉친 이 당찬 여인이 시나리오 작가로도 명성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1993년 <하워즈가의 종말>로 첫 주연상을 받은 그녀는
1996년 자신의 집필 솜씨를 발휘, <센스 앤 센서빌리티>로 극본상마저 잡아채는
재주를 발휘하였다.
제시카 랭(Jessica Lange)
그녀도 그녀지만 더스틴 호프만의 완벽한 변신(?)으로 더 유명한 <투씨>는
1983년 그녀에게 조연상을 안겨주었고 군대 내의 불륜과 사회문제를 섞어서 큰
이슈를 낳았던 1995년 <블루 스카이>로 주연상까지 석권했다. 이제 킹콩의
옛 애인은 확실히 잊혀진 셈이다.
조디 포스터(Jodie Foster)
작품을 고르는 능력이 탁월한 그녀는 1989년 미국 내의 성폭력과 강간 문제를
다룬 법정 영화 <피고인>과 안소니 홉킨스와의 연기 호흡이 빛을 발했던 스릴러
<양들의 침묵>에서 침착한 수사관역으로 두 번의 주연여우상을 차지했다.
커밍아웃한 이후로 그녀는 자유로운 삶을 즐긴다.
진 해크만(Gene Hackman)
무슨 역을 맡겨도 안심이 되는 성격파 배우 진 해크만은 멀리 프랑스까지 건너가
1971년 <프렌치 커넥션>으로 주연상을 들고 왔고 1993년 절친한 친구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용서받지 못한 자>로 남우조연상을 차지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참 부담스럽게 생겼음에도 여전히 그는 캐스팅 감독들이 선호한다.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가 출연한 작품 중의 절반 이상이 걸작으로 남았고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1975년 <대부 2>로 돈 콜레오네의 젊은 시절을 연기하여 첫
조연남우상을 받았고 스콜세지의 페르소나로서 첫 대접을 받은 <성난 황소>로
주연상까지 가져갔다. 지금껏 6번 후보에 지명된 그는 90년대 중반 이후 작품성보다는
돈벌이 경향이 드문드문 드러나는 것 같아 찜찜한 기분이 든다.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
인디안 박해정책을 이유로 그가 수상을 거부했다 한들 50년대 이후의 연기
패턴은 그로부터 마련되었고 발전해 온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1955년
사부인 엘리아 카잔의 <워터프론트>로 첫 주연상 트로피를 받았고, 1973년 <대부>의
돈 콜레오네 역으로 생애 두 번째 주연남우상을 수상했다.
다이안 위스트(Diane Wiest)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여 크게 대중적으로 어필하지 못하는 그녀는 1987년
<한나와 자매들>과 브로드웨이와 미디어계의 이면에 도사린 문제점을
고발한 1995년 작 <브로드웨이를 쏴라>로 두 번의 조연여우상을 차지하였다.
제인 폰다(Jane Fonda)
배우이며 제작자이고 열성적인 여성인권 운동가인 제인은 1972년 <클루트>의
창녀역으로 첫 오스카 주연여우상을 받았고 7년 후인 1979년 월남전 전후의
일그러진 부부관계를 조명한 <귀향>으로 두 번째 주연상 무대에 올랐다.
마이클 케인(Michael Caine)
인자하신 알프레드 집사는 아주 오랫동안 헐리웃을 지켜온 정통 연기자이다.
그러나 다소 늦은 1987년 <한나와 자매들>로 첫 조연상을 받았고 2000년
<사이더 하우스>로 두 번째 조연상을 받으면서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은 셈이다.
샐리 필드(Sally Field)
1970년대 미국인의 '꽃'이었던 그녀는 방직공장에 다니면서 점차 노동운동에 눈을
뜨는 <노마레이>로 1980년 여우주연상 타이틀을 차지했고 경제공항기라는 비참한
상황에서도 따스하고 열정적이고 감성적인 여인으로 분한 <마음의 고향>으로 1984년
또다시 주연상을 받아 후보에 오른 두 편 모두 수상하는 이변을 연출하였다.
캐서린 햅번(Katharine Hepburn)
'오스카' 여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햅번은 남들은 노미네이트되는 자체로도
큰 영광을 누리는 그 자리에 무려 4번이나 섰다. 1934년 <모닝 글로리>를 시작으로
1968년 <초대받지 않은 손님>, 이듬해인 1969년 <겨울의 사자>, 그리고 1982년
오랜 친구인 헨리 폰다와 공연한 <황금 연못>으로 생애 모두 4차례나 주연여우상을
수상함으로써 전인미답의 기록을 세웠다. 아마 그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 덤으로
그녀는 통산 12회나 오스카로부터 후보 지명을 받았다.
잭 레몬(Jack Lemmon)
옆집 아저씨같은 푸근한 인상의 잭 레먼은 1956년 첫 지명된 <미스터
로버츠>로 조연남우상을 차지한 행운아였고 1974년 <세이브 더 타이거>로
남우상까지 수상하여 도시민들의 애환을 연기하는 데 있어서(월터 매튜와의
콤비극을 통해) 대중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제이슨 로바즈 주니어(Jason Robards, Jr)
비열한 악당이나 음모꾼, 그리고 야비한 전략가와 같은 역할에서 발군의 캐릭터를
창조하곤 했던 제이슨은 1977년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친 <모두가 대통령의 부하들>로
첫 남우조연상을 받은 이후, 1978년 <줄리아>로 다시 한번 조역배우의 연기 영역을
넓히며 두 번째 조연남우상을 거머쥐었다.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그 어느 누구보다도 역경과 고난이 많았던 잉그리드 버그만은 1945년
<가스등>으로 첫 여우주연상을 차지해서 고향 선배인 그레타 가르보의 한을
풀어주었고 1957년 <아나스타샤>로 두 번째 여우상을 차지하여 완벽하게 헐리웃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암투병 속에서도 열연을 펼친 <오리엔트 살인사건>으로
첫 조연상이며 3번째 오스카의 주인공이 되었다.
글렌다 잭슨(Glenda Jackson)
사실 그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1971년 <우먼 인 러브>와 1974년
<터치 오브 글래스>로 두 차례나 오스카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거라곤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를 본 기억뿐이다.
샐리 윈터스(Shelley Winters)
관능적인 외모와는 달리 드라마틱한 멜로물에서 강한 여성상을 표현했던
그녀는 1960년 <안네 프랭크의 일기>와 1966년 <패치 오브 블루>로 2번의
조연여우상을 쟁취하였다. 우리에게 그녀는 <젊은이의 양지>에서 비운의
'앨리스'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배테랑 연기파 배우다.
멜빈 더글러스(Melvin Douglas)
무성영화 시대 때부터 미남배우로 군림해온 그는 1964년 폴 뉴만과의 공연작인
<허드>로 조연남우상을 수상한 이후 1980년 <비잉 데어>로 또다시 조연남우상을
수상하여 80세의 나이에 오스카를 받은 특별한 기록을 수립하였다.
헬렌 헤이스(Helen Hayes)
영화배우라기보다는 위대한 연극인으로 더 유명한 그녀는 1931년
토키 초창기에 출연한 <마델란 클로데의 대죄>로 첫 주연여우상을 차지했고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970년 <에어포트>의 화려한 배역진들을 따돌리고
여우조연상마져 넓고 평온한 뉴욕의 저택으로 모셔갔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
가수, 제작자, 연출가, 그리고 배우 등 다방면의 엔터테이너인 그녀는
1969년 자신의 기량을 살린 뮤지컬 영화 <퍼니걸>로 여우주연상을 건네받았고
1977년 <스타 탄생>의 음악을 맡아서 오리지날 음악상까지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전세계적으로 그녀의 음반 판매는 엘리스 프레슬리, 비틀즈와
버금간다고 하니 대단한 여장부임에는 틀림이 없다.
스펜서 트레이시(Spencer Tracey)
이웃집 아저씨가 같은 편안한 인상의 그는 1938년 <용감한 선장>과
이듬해인 1939년 <보이스 타운>으로 2년 연속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첫
사례를 만들었다. 그리고 생애 9번씩이나 오스카로부터 후보 지명을 받았다.
안소니 퀸(Anthony Quinn)
열정적인 라틴인 특유의 기질이 돋보이는 안소니 퀸은 1953년 <혁명아 자파타!>로
첫 조연남우상을 차지한 데 이어 1956년에도 폴 고갱의 삶을 연기한 <삶의 욕망>으로
두번째 조연남우상을 챙겼다. 그는 뛰어난 화가와 작가로도 명성이 높다.
피터 유스티노프(Peter Ustinov)
유난히 역사극이나 대하 드라마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1961년 커크 더글러스가
제작한 <스팔타커스>로 조연남우상을 쟁취했고 1965년에도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나
털거나 등쳐먹는 역할로 분한 <톱 카피>로 두 번째 조연남우상을 수상하였다.
베티 데이비스(Bette Davis)
그녀하면 먼저 '큰 눈'부터 떠오르지만 그녀는 스튜디오 시대 최고의
흥행력을 갖춘 대배우였다. 1936년 <데인저러스>로 첫 주연여우상을 받고
1939년 <지저벨>로 다시 한번 주연상을 차지함으로써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조안 크로포드보다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
명실상부한 최고 미녀배우였던 그녀는 동정표로 상을 받았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1961년 <버터필드 8>로 주연여우상 트로피를 집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1967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의 좀 더 신중한 연기 변신을 통해
지난 비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물론 두 번째 오스카 트로피마저 차지했다.
게리 쿠퍼(Gary Cooper)
늘 조각 같은 얼굴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던 그는
1942년 <요크 상사>로 첫 주연남우상의 감격을 맛보았고 1953년 거의 퇴물
취급을 받고 있을 무렵에 <하이 눈>으로 다시 한번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5회에 걸쳐서 오스카로부터 주연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프레드릭 마치(Fredric March)
장르와 상관없이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던 그는 항상 스펜서 트레이시와
비교되는 것을 불만이라고 털어놓았다. 1932년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로 첫
주연남우상을, 1947년 <우리 생애 최고의 해>로 두 번째 주연상 트로피를 차지했다.
비비안 리(Vivien Leigh)
생애 딱 두 번 오스카로부터 지명을 받았던 그녀는 두 번 모두 주연여우상이라는
최고 타이틀을 차지했다. 1940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은 영원히
그녀를 대변하는 애칭이 되었고 1952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에서 열연을 펼쳐 주연여우상을 받았다.
올리비아 디 해빌랜드(Olivia De Havilland)
본의 아니게 이미 오스카상을 먼저 받은 한 살 터울 동생인 조안 폰테인과
라이벌이 되어야 했던 그녀는 1947년 <투 이치 히즈 온>과 1950년 <상속녀>로
2번의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멜라니'로 널리 기억되고 있고 90이 넘은 지금도 생존하고 있다.
월터 브레넌(Walter Brennan)
주로 서부극에서 악당이나 모사꾼으로 자주 등장했던 그는 1937년 하워드
혹스의 <컴 앤 겟 잇>, 1939년의 <켄터키>와 1941년의 <웨스트너>처럼
서부극으로만 조연남우상을 세 차례나 수상한 전형적인 성격파 배우였다.
루이제 레이너(Luise Rainer)
독일에서 건너온 그녀는 자국영화보다는 헐리웃 영화에서 대부분의 커리어를
쌓았다. 그녀는 1937년 <위대한 지그필드>와 1938년 펄 벅 여사의 소설을 각색한
<대지>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2연패했다.
출처: 이승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