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이제는 늙어야 한다"
사후 46년 만에 공개된 박목월 미공개 육필시 166편
시인의 아내가 따로 보관해온 육필노트 포함 80권 분석
'청록파' 시인의 시대·사람에 관한 시편들 새로운 면모
고치고 또 고친 뒤 엄선해서 발표했던 창작 과정 생생
"사랑 시편에서 느껴지는 쓸쓸하고 애잔한 깊은 감성"
그것이 失手(실수)였다./ 볼은 달아오르지 않아야 했다./ 돌에서 살아나는 숨결,/ 그것이 失手였다./ 돌은 돌의 푼수를 지켜야 한다./ 돌에서 살아나는 핏줄/ 그것이 失手였다./ 돌은 돌로서 굳어져야 한다./ 그것이 失手였다./ 눈에는 커틴을 쳐야한다./ 울리는 天上(천상)의 旋律(선율)./ 귀는 絶壁(절벽)으로 막혀야 한다./ 울렁이는 세계./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앉아야 한다/ 이제는 늙어야 한다.
시인은 자꾸만 '그것이 실수였다'고 되뇌인다. 가슴은 식어서 돌이 된 지 오래인데 피가 빠르게 돌고 숨결이 가쁘다. 돌은 돌의 푼수를 지켜야 하는데, 눈에는 '커틴'을 치고 귀는 절벽처럼 막혀야 하는데, 그만 볼은 달아오르고 그 사람 얼굴과 천상의 선율 같은 목소리에 세계가 울렁인다. 시인은 다짐한다. 그것은 실수였다고, 내 안으로 내가 가라앉아야 한다고, 이제는 늙어야 한다고.
▲ 박목월(오른쪽) 시인이 자신의 미공개 육필노트를 공개한, 생전의 자신보다 더 늙어버린 장남 박동규(왼쪽) 서울대 명예교수를 애틋하게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나무위키]
사후 46년 만에 공개된 박목월(1915~1978) 시인의 미발표 육필시 '訪問'(방문)의 일부다. 기발표된 같은 제목의 '방문'은 '白髮(백발)이 되고, 이승을 하직할 무렵에 한번 더 만나보려니 소원했던 사람을 이제 방문하게 되었다'고 서두에 밝히고 시작한다. 시인은 '사람의 인연이란/ 꿈이 오가는 통로에/ 가볍게 울리는 응답'이라고 짐짓 담담하게 정리한다. 겨우 그 사람을 하직했노라고, 썼다. 이번에 공개된 저 '방문'도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목월은 노트에 여러번 습작한 뒤 고치고 또 고쳐서 완성된 시편을 발표한 듯하다. 이번에 공개된 노트들에는 그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시편들과 함께 이러한 창작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목월의 장남인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와 박목월유작품발간위원회(박덕규, 우정권, 방민호, 유성호, 전소영)는 지난 12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박목월 시인이 남긴 미공개 육필 노트를 공개했다. 동리목월문학관에 기증된 18권에다 유족이 자택에 보관하고 있던 62권을 추가해 유품으로만 남아 있던 노트 80권의 내용을 분석해 발표한 것이다. 발간위원회는 육필 노트에 수록된 460여편 중 새로운 창작물로 확인된 290편을 검토해 완성도, 주제의 다양성, 작품 변화 과정의 의미 등을 따져 166편을 공개했다.
유족 대표로서 공개를 결심한 박동규 교수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노트들을 따로 보자기에 싸서 전쟁을 거치고 이사를 다니는 과정에서도 잘 보관해왔다"면서 "아버님이 밤에 글을 쓰실 때 고치고 또 고치고 고친 것들이 노트 속에 그대로 순서대로 다 들어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아버님이 노트에서 엄선해 발표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공개하는 것이 아버님 마음을 어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한편으로는 한 시인의 생애를 살피는데 필요한 자료라는 생각을 했고, 새로운 시도들을 한 실험적인 시들도 많아서 젊은 학자들에게 평가를 받아 공개하기로 한 것"이라고 취지를 밝혔다.
▲ 육필시 '방문'의 일부(위)와 육필시 노트들. [발간위원회 제공]
우정권(단국대 교수) 발간위원회 위원장은 "박목월 시인은 '나그네'로 대표되는, 자연과 풍경을 목가적이고 서정인 내용으로 썼던 시인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번에 발굴된 작품에는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상당히 많다"면서 "한국 시문학사를 다시 써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그는 "광복의 기쁨이나 전쟁의 참혹함, 삶에 대한 내면적인 성찰과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들은 기존 시집에서는 많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들"이라면서 "단순히 삶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운율과 리듬을 살리기 위해 상당히 애를 쓴 시적 형상화 노력의 흔적들이 많이 보여 다시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감자는 주렁주렁 땅 속에서/ 하늘콩은 조롱조롱 울타리에서/ - 모두 자란다.// - 모두 자란다./ 감자는 땅 속에서 열두 형제/ - 한 탯줄에 주렁주렁 날마다 크고/ 하늘콩은 울타리에 열두 형제/ 한 탯줄에 조롱조롱 날마다 크고// 다만 햇님만 한 분 , 벙글벙글 나와서/ - 땅속의 아기야/ 잘 자라니? 물으면/ - 울타리의 아기야/ 잘 크니? 물으면// 네, 네, 네, 네 땅속 아기들의 대답소리/ 예, 예, 예, 예. 울타리 아기들의 대답소리// 오오, 그래. 오오, 그래./ 으하하 햇님이// 크게 웃었다./ 왜, 웃을까 까닭도 모르고/ 무논의 개구리도 걀걀걀/ 붓둑의 까치도 깍깍깍/ 다만 잎새들이 영문을 몰라서/ - 어쩐 일이랑께/ - 웬 일이랑께/ 햇득햇득 웃는다. _'하느님의 텃밭'
동시로 분류해도 될 듯한 이 시편은 "개신교 신자였던 시인이 자연을 신의 텃밭이라고 보고 거기에서 원초적인 생명력을 그려내고 있다"는 해설이다. 땅속 생명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 아기들이 '네, 네, 네, 네' 답하는 사랑스럽고 싱그러운 시편이다. 동시를 분석한 박덕규(단국대 명예교수) 발간위원은 "등단 시점부터 누구보다 앞장서서 동시를 많이 발표했던 목월의 이번 육필노트에서 기존의 동시들과 겹치지 않는 60~70편 정도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오늘은……// 참된 詩人(시인). 참된 詩人이/ 되어보리라. 이 어리고 측은한/ 소망을./ (…)/ 한줄기 햇빛에 醉(취)하고/ 한가락 바람에 황홀하고/ 이슬과 비를// 뉘우치고/ 맞서서 싸우지 않고./ 한방울 물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나를 主張(주장)하지 않고/ 또한 나를 버리지 않고./ 熱(열)띠지 않고 冷(냉)하지 않고/ 내 體溫(체온)만큼// 多情(다정)하고 안존하고. 넉넉한 것을/ 言語(언어)안에 모아/ 흔드리는 한방울 語彙(어휘)에도/ 울리는 한가락 音響(음향)에도/ 당나귀처럼 銳敏(예민)한 귀를 기우리고/ 내게서 넘치지 않게/ 또한 모자라지 않게// 그만큼 充實(충실)한/ 열매같은 詩를 쓰는/ 참된 시인 참된 시인이 되어보리라. 이 어리고 측은한/ 소망이/ 소망으로서 끝나/ 내 生涯(생애)가 꽃펴보지 못한 봉오리같은/ 것이기로니// 잎새에 맺힌 이슬이 피어오른/내가 떠난 후의 내 자리가/깨끗한/ 그것으로 나는 한없이 눈감으련만. _'무제' 부분
▲ 박목월 유작품 발간위원들. 왼쪽부터 전소영 (홍익대 초빙교수), 방민호(서울대 교수), 우정권(단국대 교수), 박동규(서울대 명예교수), 유성호 (한양대 교수), 박덕규(단국대 명예교수).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발간위원은 "충실한 열매 같은 시를 쓰는 참된 시인이 되어보리라고 다짐하면서 이를 어리고 측은한 소망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이 아주 감동적"이라며 "목월은 사람에 대한 시도 많이 썼는데 자신의 직분을 지키면서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많이 담겨 있다"고 평가했다. 이중에서도 "6.25 전쟁에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구두닦이 소년을 향한 마음이 담긴 '슈산 보오이'는 완성도도 높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따뜻하고 깊은 시선을 보여준다"면서 "동요라기보다는 시인으로서 어린 소년을 보는 연민의 마음이 잘 드러난 시편"이라고 보았다.
6.25때/ 엄마 아빠가 다 돌아가신/ 슈샨보이./ 길모퉁이의 구두를 닦는 슈샨·보이.// 곱슬머리가 부룩송아지처럼/ 귀연 슈샨·보이.// 학교길에서 언제나 만나는 슈샨 ·보이./ 나만 보면 빙긋 웃는 그 아이 슈산 ·보이// 이밤에 어디서 자나 슈샨·보이/ 비가 오는데 , 잠자리나 마련 했을가. 슈샨 ·보이/ 누구가 학교를 보내주는 분이 없을가. 슈샨 ·보이/ 아아 눈이 동그랗게 아름다운 그애 슈샨 보이/ 학교 길에 내일도 만날가 그애 슈샨보이. _'슈샨보오이'
목월 시의 '고향과 타향'을 분석한 유성호(한양대 국문과 교수) 발간위원은 "고향에 와서도 고향을 떠나고 타향에 가서도 고향을 발견하는 이중성을 지니는 시들이 많이 보여서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듯하다"면서 목월이 제주에서 접한 '용설란'을 표제로 삼아 노트에 남긴 시를 거론했다. 용의 혀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 '용설란'을 통해 타향에 와 있는, 혀로 말을 다루는 시인의 어눌하고 고적한 모습을 투사한 작품이라고 보았다.
파도소리에 뜰이 흔들리는/ 그 뜰에 용설란// 반쯤 달빛에 풀리고/ 반쯤 달빛에 빛나는 육중한 잎새// 반쯤 안개에 풀리고/ 반쯤 안개에 살아나는 제주도.// 말 辯의 깃자락에 소나기가 묻어오는/ 그 낭낭한 모음의/ 하늘./ 에 한라산.// 어눌한 사투리로 가까스로 몸매를/ 빚어,// 안개에 반쯤 풀리고/ 안개에 반쯤 살아나는 용설란. _龍⾆蘭(용설란)
▲ 박목월 시인의 장남 박동규 교수는 "아버님의 노트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떨려서 제대로 못 읽는다"면서 "그래서 객관적으로 판단할 전문 연구자들에게 맡긴 것"이라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박동규 교수는 노트를 공개한 것을 두고 부친이 어떻게 평가할 것 같은지 묻는 질문에 " 뭐하러 했노? 이러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솔직히 겁도 난다"고 웃었다. 그는 이어 "유족으로서, 아버지의 아들로서 부탁하고 싶은 점은 아버님 전 생애가 시로 얽히지 않은 부분은 없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달라는 것"이라며 "암흑기에 시작해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시를 안고 살아간 중심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미발표 육필시들 중 제목이 따로 달리지 않은 시들은 일단 모두 '무제'라는 표제를 붙였거니와, 우정권 위원장은 "사랑에 관련된 시들을 보면 사람에 대한 감성이 굉장히 풍부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면서 그 대표작으로 낙원동 뒷골목이 등장하는 '무제'를 제시했다. 목월의 시에서 낙원동은 공간적인 장소로 자주 등장하는데, 이 시편에서는 한 여인을 만나고 헤어지는 무대로 활용된다. 그는 "화재가 나는 현장에서 모든 것들이 재가 되고 사라져버리는 상황"이라면서 "일반적인 연애시라기보다는 한 존재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하고 있는 시적인 형상의 백미"라고 상찬했다. 쓸쓸하고 뜨겁게 흐르는 그 시편.
바람에 날려버릴까./ 삭아서 재가 된./ 그럴 수 있을까./ 낙원동 뒷골목의/ 통용문처럼 무심한// 그녀와 나는// 결국 나는 혼자가 된다./ 그녀는 삭아서 재가 되고./ 火災(화재)와 키스가 지나간 뒤/ 덴 상처도 아물게 되고./ 달빛 幻燈(환등)은 저편만 비치고/ 창에는 하나하나 불이 꺼지고./ 낙원동 뒷골목의 통용문처럼/ 낮은 무심하게 입을 다물고.// 결국 그녀도 _'무제'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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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문학공간] "이제는 늙어야 한다" (upinew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