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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한상원목사
서로서로에게 자극제 역할이 되면서 살아요 = 사무엘상1;1-6(180527)
PW : 믿음 BIW : 자극을 주라 AG : 브닌나
TS : 믿음이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극제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전하...신은 늙어서 자연스럽게 죽는 방법을 선택하겠사옵니다.
옛날에 한 광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큰 실수를 저질러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그래서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왕은 그동안 광대가 자신을 위해 노력해준 것을 감안하여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기로 작정하고 광대에게 묻습니다.
“너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그동안 나에게 잘해준 정을 생각하여 너에게 선택권을 주겠다. 어떤 방법으로 죽기를 원하느냐?”
이에 광대가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요?
“사약을 내려주세요”라고 했을까요?
아니면 “단칼에 목을 베어 죽여주세요.”라고 했을까요?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죽여 달라고 했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죽여 달라고 했을까요?
가만히 멍하게 앉아만 있지 말고 생각 좀 해 보세요.
그 광대는 “전하, 신은 늙어서 자연스럽게 죽는 방법을 선택하겠사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이라는 말한 것입니까?
‘죽지 않고 사는 방법을 선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려운 상황을 이롭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믿음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생각의 틀을 바꿔주기도 합니다.
믿음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믿음은 고난의 순간에도, 역경의 순간에도, 고통의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줍니다.
P4.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이 태어나는 시대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혼란의 시대, 혼돈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 히브리민족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모세의 인도를 따라서 가까스로 출애굽하여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여 한 민족과 나라를 세우면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경배하고 제사 드리며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만 하는 민족이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될 히브리민족이었지만, 이들의 삶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애굽에서 살았던 삶의 흔적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청소하고 새로운 신세대가 되어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지만, 히브리민족들의 삶은 애굽에서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가나안의 일곱 족속과 그들이 섬기는 각종 신들을 철저하게 쫓아내라고 하신다.
만약에 그들을 쫓아내지 않으면 그들이 올무와 가시가 되어 커다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가나안의 전통종교들이 올무와 가시가 되어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과 재앙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민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들으면서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과 그들이 섬기는 온갖 신들을 쫓아내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는 백성이 되었어야 옳다.
그렇지만 히브리민족은 전혀 그렇게 살지 않는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을 쫓아내지도 못하고, 그들이 섬기던 가나안의 전통종교를 쫓아내기는커녕, 그들이 섬기던 온갖 전통종교들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섬기게 된다.
자연스럽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신앙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결국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사사기2:10에 보면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모세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하며 만났던 세대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서 본향으로 돌아간다.
40년 광야생활을 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생생하게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던 세대들은 그들의 뒤를 이어가야 되는 다음의 세대가 들어왔어야 했다.
그런데 다음의 세대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과 전혀 다른 세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다음의 세대가 아니라 전혀 다른 세대가 형성되면서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
다른 세대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세대이다.
다른 세대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신 놀라운 이적들도 전혀 알지 못하는 세대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고 만다.
그럴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히브리민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가나안의 족속들뿐만 아니라 모압, 블레셋, 암몬족과 같은 이방인들에게 큰 고통을 당하게 하신다.
이스라엘 민족들의 주변국들의 노략질과 온갖 수탈에 너무 힘들고 어렵게 되면 그때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면서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워서 이방인의 압제와 노략질에서 구원하여 주시면서 일시적으로 태평성대를 누리게 된다.
이런 삶은 근 400여 년 동안 계속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모습을 단적으로 사사기21;25에서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사기 시대의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생각에 옳다고 여겨지는 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정해진 어떤 규범이나 규칙이나 생활의 테두리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생각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 욕심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것이다.
정해진 규범이나 규칙이나 법칙이 없었기 때문에 혼란과 혼동의 시대를 사는 것이다.
사사기 시대는 혼란과 혼동의 시대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이렇게 사사시대를 걸쳐서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 사람은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징검다리 역할, 디딤돌 역할을 감당하면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바로 사무엘이라는 선지자이다.
보통 사무엘을 마지막 시사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는 아니다.
사무엘상8;2에 의하면 사무엘이 자기의 두 아들을 사사로 세우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에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라고 할 수 있다.
사무엘선지자가 등장하게 되는 절대적인 요인을 제공했던 한 여인이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여인은 사무엘의 계모라고 할 수 있는 여인이다.
사무엘의 친모가 되는 한나 여인이 기도의 여인으로, 믿음의 여인으로, 은혜의 여인으로, 축복의 여인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 전환점을 맞이하도록 했던 여인이 바로 브닌나라는 여인이기 때문이다.
브닌나 여인이 아니었다면 과연 한나 여인이 기도의 여인으로, 믿음의 여인으로, 은혜의 여인으로, 축복의 여인으로, 사무엘을 낳는 여인으로 세워질 수 있었을까?
사무엘상을 시작하면서 엘가나라는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엘가나가 마치 에브라임지파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엘가나의 고향인 라마다임소빔은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성읍 중에 하나이다.
엘가나는 에브라임지파에 속한 땅에 살고 있었지만 레위지파에서 고핫 자손의 후손이다.
역대상6;31-38에 기록을 잘 살펴보면 엘가나는 고핫의 자손, 고라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사무엘은 에브라임지파 출신이 아니라 레위지파 출신이다.
레위지파 출신이기는 하지만, 제사장 그룹은 아니다.
제사장그룹은 오직 아론의 후손들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후손들도 고핫 자손의 후손들이지만 절대로 제사장이 될 수 없다.
오직 아론의 후손들만 상속받아서 제사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가나의 가정은 제사장의 가문은 아니다.
엘가나의 가정은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릴 때 찬양을 감당한 고라의 후손이기 때문에 찬양을 드리거나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를 도와서 협력하는 가문의 출신이다.
D4.
① 엘가나의 아내가 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
엘가나에게 두 아내가 있다. 한나 여인과 브닌나 여인이다.
하나님은 브닌나 여인을 비록 엘가나의 첫째 부인이 아니라 둘째 부인이 되는 길을 열어주신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제사 드리는 일에 협력하는 가정에서 두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느냐? 하면서 비난할 수 있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오늘날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거나 이해하려고 하면 많은 부분에서 부딪치는 내용들이 많다.
하지만 고고고고대시대의 여자라는 존재는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하지 못하고, 남자의 소유물로 인식하던 시절이다.
여자는 태어나서 자랄 때까지 아버지의 소유물로 인식하고, 결혼하게 되면 남편의 소유물로 인식하던 시절이다.
사사기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정해진 규범이나 규칙이 없었던 시대이기 때문에 마음먹는 대로 관행처럼 여자를 소유물로 인식하면서 많은 여인을 거느리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인식하던 시절이다.
그런 상황에서 여자를 많이 거느리게 되면 그 만큼 대단한 실력(?)이나 파워를 지닌 사람으로 인정하였다.
그런 사회적인 배경에서 두 여인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여인들도 얼마든지 취할 수 있던 시대이다.
엘가나에게 있어서 한나 여인이 첫째 부인이고, 브닌나 여인은 둘째 부인이다.
하나님은 브닌나 여인에게 엘가나의 아내가 되도록 역사해 주신다.
②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
첫째 부인 한나는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살았지만 아이를 출산하지 못한다.
둘째 부인 브닌나는 한나 여인에 비하면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살지는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브닌나 여인이 공교롭게도 엘가나의 아내가 되었을 때부터 곧 바로 임신이 되어 자녀를 출산하게 된다.
우리 한글성경에서는 2절에서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고 기록하면서 마치 자식을 단수로 기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자식들, 복수로 해석해야 옳다.
그러기 때문에 브닌나는 자식을 하나만 낳은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자녀들을 출산한 것이다.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브닌나 여인에게 여러 명의 생명을 허락해 주신다.
고대 중동지역에는 많은 자녀를 낳은 여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은 여인으로 인정해 주었다.
브닌나 여인은 많은 자녀를 출산했기 때문에 비록 육신의 남편인 엘가나에게는 많은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으면서 살았던 여인이다.
③ 한나 여인에게 자극제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
브닌나 여인은 많은 자녀를 출산했지만, 한나 여인은 자녀를 출산하지 못한다.
그 당시에는 여인으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서 세상을 떠날 때 그 여인이 살았었다는 증거는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다.
여인은 시집을 가면 당연히 자녀를 출산하는 것으로 인식하며 산다.
당연히 낳아야 될 자녀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삶, 죄악 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죄악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아이를 주시지 않는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자녀를 출산하는 브닌나 여인은 한나 여인에게 “형님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지 않는 거에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회개부터 하고 자식을 달라고 기도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브닌나 여인은 한나 여인에게
“나도 여자이고, 나도 남편의 사랑을 받을 줄 아는 여자에요.
똑 같은 여자인데 왜 형님만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거에요.
형님은 남편의 자식을 낳지 못했지만 난 남편의 자식까지도 낳았잖아요.
그러니 내가 더 많은 사랑을 받아야 되는 거 아닌가요.”라고 하면서 계속 한 마디씩 쿡쿡 찌르는 것이다.
한나 여인은 그렇지 않아도 자식을 낳지 못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삶을 산 것이 뭐가 있길래 이렇게 자식을 주시지 않나?’하면서 마음이 심란하고 아프다.
결혼한 여인들이 자식을 낳고 싶은데 불임이 되어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되면 얼마나 큰 스트레스와 압박을 받는지...
그래서 늘 마음이 심란하고 아프고 저리고 한스럽게 산다.
심란한 한나 여인에게 브닌나 여인은 “형님, 여기 내 아들, 딸이 재롱부리는 거 보세요.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하면서 자랑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도 한두 번이지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계속 하는 것이다.
한나 여인은 너무나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고 다가오는 압박과 스트레스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
이에 한나 여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남편을 따라 실로 성막으로 올라가서 기도하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나 여인은 브닌나 여인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 충동질하면서 자극제 역할을 해 주었기 때문에 남편 엘가나가 제사장들을 도와서 제사 드리러 갈 때에 동행하고 싶은 열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전에는 남편과 함께 실로성막으로 올라가서 기도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제는 실로성막으로 올라가서 제사 드리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
한나 여인은 하나님의 성막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축복을 사모하면서 자기 자신을 토해내는 기도를 하게 된다.
한나 여인은 너무나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서원하면서 너무나 간절하게 기도한다.
이처럼 한나 여인은 하나님의 성막에서 절박하게 서원하면서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응답을 받아서 민족의 지도자 사무엘을 낳는 축복을 입게 된다.
한나는 사무엘을 비롯하여 3남2녀를 더 낳을 수 있는 축복을 받게 된다.
이처럼 한나 여인이 기도의 여인, 믿음의 여인, 서원의 여인, 은혜의 여인, 축복의 여인이 된 것은 순전히 브닌나 여인 때문에 자극을 받은 결과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나 여인은 브닌나 여인을 미워하거나 비난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브닌나 여인에게 “자네 때문에 내가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입어서 아들을 낳게 되었네. 모든 게 자네덕분이네, 고맙네.”라고 감사할 수 있어야 된다.
그러면 왜 브닌나 여인이 한나 여인에게 자극제 역할을 감당해야 했을까?
브닌나 여인이나 한나 여인은 엘가나의 아내들이기 때문이다.
곧 한 남자를 사이에 둔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한 가족이 아니라면, 전혀 관계가 없는 사이라면 브닌나가 버럭버럭 화를 낸들 한나가 상처받을 일이 없지 않나?
한나가 브닌나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상처받고 아파야 하는 것은 한 가족이라는 울타리 때문이다.
어떤 관계로든 서로서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서로서로 자극제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죄악된 삶 때문이라는 인식을 하던 시절에 한나 여인이 아이를 출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브닌나 여인도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한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서로에게 자극제 역할을 감당하면서 사는 것이다.
D4 & L4.
브닌나 여인은 한나 여인에게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자극제 역할을 감당하는 여인이다.
브닌나 여인이 자극제 역할을 잘 감당해 주었기 때문에 한나 여인이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었다.
브닌나 여인이 자극제 역할을 잘 감당해 주었기 때문에 실로성막에서 서원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하게, 절박하게 기도할 수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축복을 받아서 그동안 굳게 닫혀 있던 생명의 문, 자궁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을 잉태하고 낳게 된다.
하나님은 한나 여인이 서원하면서 낳은 사무엘을 영적으로 깜깜하게 어두운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사사로, 선지자로, 특별한 제사장으로 세우는 은혜와 축복을 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더 히브리민족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켜주신다.
이처럼 브닌나 여인은 한나 여인에게 좋은 자극제 역할을 감당하는 사명을 감당한 여인이다.
사사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자극제가 되어 준 민족들은 주변국들이다.
블레셋, 모압, 암몬, 미디안 등등 주변국에 있는 이방인 족속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략질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회개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자극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바벨론포로기 이후에 유대인들이 오직 토라와 말씀중심, 성전과 제사중심의 민족으로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유대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성전을 파괴시키고 70년 동안 포로로 끌고 가서 모진 고통을 준 바벨론제국이 자극제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바벨론 제국은 유대인들을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민족으로 세우는 자극제 역할을 감당한 제국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누군가에게서 자극제 역할을 받고 있는가?
인생에 자극제가 되는 것은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인생의 터닝포인트(Turning Point)가 되도록 자극제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들로 하여금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말씀의 자리로, 회개와 돌이킴의 자리로, 헌신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고 있는가?
누군가가 우리들에게 계속 충동질하면서 우리들을 고통의 자리로, 아픔과 상처의 자리로 내몰고 있다면 오히려 그 고통과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서 우리들이 찾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찾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면 우리들은 그 사람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의 인사를 드릴 수 있어야 진정한 믿음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우리들도 누군가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도록 좋은 자극제가 되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누군지는 몰라도 우리들 때문에 울어야 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우리들 때문에 가슴이 먹먹하고 너무너무 저리게 아파서 통곡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우리들을 향하여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느냐?
어떻게 목사라는 사람이 저럴 수 있느냐?
어떻게 사모라는 사람이 남의 사정도 알아주지 않고 매몰찰 수 있느냐?
어떻게 교회 장로라는 사람이, 권사라는 사람이, 집사라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등등 온갖 비난의 화살을 쏘다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으로 찾아오셔서 기도의 자리로, 말씀의 자리로, 은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자극제로 우리들을 사용할 때가 있을 수 있다.
자극을 줄 때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하나는 긍정적인 형태로 자극을 주는 경우가 있다.
긍정적인 자극을 주었을 때는 감사함과 고마움과 사랑의 인사를 받을 수 있다.
그런가하면 부정적인 형태로 자극을 주는 경우도 있다.
부정적인 모습으로 자극제 역할을 하게 되면 미움과 비난과 분노의 화살을 쏘다댈 가능성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긍정적인 형태가 되었든, 부정적인 형태가 되었든지, 이 모든 것들을 합력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시키고 연단시키면서 하나님의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
어쩌면 브닌나가 한나에게 준 자극제는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자극제역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브닌나가 보내는 부정적인 자극제를 가지고 한나 여인에게 긍정적인 자극제로 바꾸어주신다.
하나님은 한나 여인에게 믿음의 여인으로, 기도의 여인으로, 은혜와 축복의 여인으로 세워가는 자극제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누군가 나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누군가 나 때문에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면,
누군가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되었다면,
누군가 나 때문에 축복의 자리에 앉게 된다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마이너스(–)는 없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마이너스(–)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마이너스(–)를 사용하여 궁극적으로 플러스(+)로 만들어 가시는 분이다.
지금은 패배당하고, 사기당하고, 처절하게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상황을 바꿔서 궁극적으로 다시 일어서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성공하게 하시는 분이다.
우리들의 하나님은 전화위복에 능하신 분이다.
우리들의 하나님은 고진감래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들의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서로서로에게 깊은 자극제를 줄 수 있는 사랑의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
믿음의 사람은 긍정적인 자극제를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믿음의 사람은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좋은 자극제, 긍정적인 자극제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믿음의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칠전팔기의 자극제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믿음의 사람은 우리들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충격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믿음의 사람은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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