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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내 음악의 깊은 샘”
칠십년대, 유럽 또는 미국여행을 다녀온 이들은 “외국인들이 ‘한국’이라는 나라는 몰라도 바이얼리니스트 鄭京和는 알고 있더라”고 말하곤 했다. 정경화는 13세 때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줄리어드의 명교수 갈라미언의 제자가 되었으며, 20대에 이미 세계 음악계를 지배하고 있던 철통 같은 유대인 아성을 뚫고 하이페츠, 아이작 스턴에 비견되는 바이얼리니스트가 되었다. 36세에 결혼하여 두 아들의 엄마가 된 그는 정트리오 연주를 위해 귀국하는 비행기안에서 “아줌마”라는 소리를 들었다며 웃음을 참지 못한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영국 남자와 결혼해 런던에 살면서도 국적을 바꾸지 않은 ‘한국인’ 정경화가 털어놓은 42세 여인의 삶과 예술.
●결혼했을 당시 소감은 어땠습니까?
신부로서 입장할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해요. 그런데 나는 1백% 만족스러운 결혼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식장에 들어갈 때부터 그렇게 좋을 수 없었어요. 하여간 내 일생에 음악을 제외하고는 결혼하는 날이 가장 기뻤어요. 하고 보니까 그렇게 좋은 것도 없는데 그놈의 결혼이…(웃음). 두 사람 다 나이 들어 결혼했으니 얼마나 고집불통들이겠어요. 그런데도 시작이 좋아서 그런지 둘 다 아주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결혼한 뒤 음악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많이 바뀌었습니다. 젊어서는 연주가 아니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서 바이올린에 미쳐 살았는데 한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다른 세계를 알고 있는 지금은 모든 면에서 넉넉해졌습니다. 제가 연주할 때도 옛날에는 기계처럼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밥도 안 먹고 울고 야단법석을 떨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의 연주에 대해서도 까다롭게 평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젊은 연주가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나이를 먹을수록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은 더욱더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성공하기 위해서 연습했지만 요즈음은 연습하는 그 자체가 그냥 즐겁습니다. 연주를 안해도 연습만으로 정말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35년 동안 바이올린을 했지만 아직도 바이올린 소리가 그렇게 신비스러울 수가 없어요.
●세계 최정상의 바이얼리니스트로 활동하다가 84년 6월29일 당시 36세에 결혼하셨습니다. 그때 가정과 음악, 어느 한쪽도 소홀함이 없이 해나가겠다고 말했는데, 잘 되고 있습니까?
두 아들을 낳고 기르다 보니 지난 4년 동안에는 연주 횟수를 많이 줄이고 대신 레코딩에 주력해왔지요. 리사이틀을 많이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협연할 피아니스트를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유명 피아니스트는 이미 연주 스케줄이 다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제 일정에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명훈이가 계속 피아노를 했으면 좀더 자주 리사이틀을 할 수 있었겠지만… 아이들 커가는 것을 보면서 연주 횟수를 점차 늘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연주회 스케줄은 2~3년 전에 정해야 하기 때문에 2~3년 후의 아이들의 상황과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집안에서는 주로 어떻게 지내십니까?
아내로서, 엄마로서 아주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이올린을 하는 누군데 손을 아껴야지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얼마 전에 런던 남쪽 시외에 있는 큰 정원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갔어요. 정원사가 있지만 남편과 함께 정원 가꾸는 일에 재미가 붙어 직접 나가서 장갑도 안 끼고 가시에 찔려가면서 정원을 가꿉니다. 워낙 모든 걸 내 손으로 하다 보니까 식구들도 으레 엄마가 알아서 하려니 해요. 피로해서 좀 쉬고 싶을 때조차… 그럴 때는 후회가 된다니까요.
●여섯살짜리 재곤과 세 살짜리 유진. 두 아들이 연주생활에 방해되지 않습니까?
둘째를 낳고는 몸이 약해져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도 ‘늙어서’ 아이를 낳아서 그런지 아이가 무슨 짓을 해도 예쁘기만 해요. 세 살짜리 막내가 올해부터 유치원에 가는데 그것도 섭섭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스튜디오에 문을 잠궈놓고 혼자 연습하겠다고 열쇠까지 준비해놨지만 “엄마”하고 잉잉 우는데 도저히 안되겠기에 아예 문을 열어놓았어요. 연습하고 있는 중에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왔다갔다 해도 신경을 안 써요. 애를 낳은 후 한동안은 연주가로서의 나와 엄마로서의 내가 도무지 구분이 안 되었는데 이제는 저절로 구분이 됩니다.
●10년 또는 20년 후에는 출산이나 양육의 부담이 없는 남성들에게 뒤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10~20년 후면 내가 50대나 60대인데, 그때 가봐야 알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내가 남자 연주가보다 뒤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애만 안 낳을 뿐이지 남자들도 음악인으로서 씨름하고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다만 애들이 너무 사랑스럽고 아내 노릇도 잘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이만큼 해온 것을 다 집어치워야 하나 하고 생각될 때는 아닌게 아니라 여자로 태어난 것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카라얀의 인생철학은 제게 큰 위안을 주었습니다. 카라얀은 “진정한 예술이란 기막힌 연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정도 가져보고 아이도 낳아보고 뭉개다가 인생의 그 힘든 과정을 다 극복한 뒤에 비로소 나온다”고 했지요. 그러나 선배로서 지금 음악공부를 하는 여학생을 보면 그렇게 애처로울 수가 없어요. 그들 앞날에 펼쳐질 결혼·출산이라는 과정이 대단히 힘든 건 사실이니까요. 남편이 아무리 잘해준다 해도 여자는 남편 뜻을 쫓아가기 마련인데 “결혼했으니 그만둬라, 며느리답게 시집살이해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한국 남자들은 여자 뒷바라지해주는 일을 째째하게 여기는 습성이 있지 않습니까? “남자가 어떻게 여자를 쫓아다니며 뒷바라지를 해주면서 살아” 하는…. 그런데 이제 나라가 이만큼 발전했고 물질적으로도 여유가 생겼으니 남자들 중에도 음악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더 많이 나와야 합니다.
●언니 명화씨나 동생 명훈씨의 경우, 남편 또는 부인의 절대적인 후원이 연주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봅니다. 남편 제프리 레케트(Jeffrey Leggett)는 어떤 사람인지 궁급합니다.
저보다 두살 윈데 영국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 문과를 나왔으며 현재 큰 광산을 갖고 있는 다이아몬드 회사 부사장입니다. 남편은 오페라를 좋아하고 취미로 비올라를 연주하는 음악애호가입니다. 때로 바이얼리니스트로서의 나와 엄마·아내로서의 나를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지 힘들어 하지만 나의 연주활동을 절대적으로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남편에게 미안하게 느끼는 것은 남편 탓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나 자신의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연주가로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을 들려주십시오.
1980년 빈 필하모닉 관현악단과 레코딩했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소련인 키릴 콘드라신 지휘로 베토벤 협주곡 D장조를 녹음하며 4일 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빈 필하모닉의 아름다운 소리에 그만 취해버렸습니다. 예술가로서는 더 좋을 수 없는 경험이었지요. 또 철모르고 연주했던 런던데뷔 무대에서 청중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70년 런던 데뷔 무대에서 앙드레 프레빈 지휘로 런던심포니와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협연했을 때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음악평론가 위데 콤베는 “하이페츠가 이음들을 더 정확하게 연주했는지 알 수 없고 또 오이스트라흐나 스턴이 협주곡을 홀륭하게 연주했던 것도 이미 지나간 일이다”라면서 정경화씨의 연주가 “최고 경지에 이른 최상의 연주였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후 크게 음악적 성공을 이루었는데, 지금까지 연주가로서의 길이 못견디게 힘들었던 적은 없었습니까?
데뷔하기 전인 17세 때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집어치워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데뷔 이후에도 세계 중요도시를 돌아다니며 힘든 연주생활을 할 때 ‘세상 사는 게 이런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25세 때인데, 런던의 한 식당에서 엄마와 함께 식사하다가 갑자기 엉엉 울었습니다. 더 이상은 연주를 못하겠다고…. 그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당장 그만둬라. 바이올린이 뭔데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 그걸 하니? 바이올린보다 사람이 우선인데 그렇게 힘들다면 더이상 할 까닭이 없다. 너는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다” 딸이 그 지경이지만 어머니는 한국으로 돌아오셔야 했는데 비행기 안에서 저한테 편지를 쓰셨어요. 14장이나 되는 편지에는 나의 성장과정, 연주가로서의 길이 자세히 적혀 있었으며 다른 연주가들은 7년쯤 연주한 뒤에는 1년을 쉬니 19세에 데뷔한 너도 이제 1년쯤 쉬는 게 어떻겠냐는 말씀이 있었어요. 그 편지를 보니 1년을 쉰 것만큼이나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편지를 바이올린 통에 넣고 다니며 틈틈이 읽었습니다. 그 편지 덕분에 살았어요. 30대에 와서 결혼문제를 가지고 부모님이 압력을 줄 때도 힘들었습니다. 남들 하듯이 20대에 결혼할 줄 믿었고 또 무슨 일이 있어도 한국 남자랑 결혼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적당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니 얼마나 속상합니까? 그런데 막내딸 혼자서 힘든 연주여행을 다니는 걸 보고 “외국 남자라도 마음내키는 사람이 있으면 결혼해라”고 급히 서두르실 때는 ‘지금까지 혼자서 잘해왔는데 왜 이렇게 날 못살게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남편 제프리 레게트를 만났으니 어머니가 좋아하실 수밖에 없지요.
●어떤 음악인들을 좋아합니까?
연주가로는 성악가인 마가렛 프라이스를 사랑하고 지휘자로서는 카를로 마리어 줄리니와 리카르도 무티를, 작곡가로는 바흐와 모차르트를 좋아합니다.
●지난 17년동안 데카에서 많은 레코드를 냈고 88년부터는 새로 계약을 맺은 EMI에서 꾸준히 레코딩하고 계십니다. 레코딩 음악과 콘서트 음악 사이에 차이점이 있습니까?
음악을 전달해준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소리의 성격은 틀립니다. 콘서트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주홀 전체에 소리가 전달되게 하는 것으로, 연주가가 일평생 연구해야 할 과제입니다. 피아니시모, 피아니시시모, 피아니시시시모로 작아지는 소리를 제대로 , 몇 가닥으로 내는가를 보면 연주가의 실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녹음할 때 똑같이 그렇게 연주하면 너무 거친 소리가 납니다. 확대경을 보면 털 끝까지 다 보이듯이 레코딩 음악은 아주 섬세한 음향까지 녹음되기 때문에 콘서트 음악과는 또 다른 테크닉이 필요합니다.
●줄리어드의 갈라미언 교수에게 사사했고 유럽에서는 시게티에게 사사했는데 두 스승은 어떻게 달랐습니까?
갈라미언 선생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이올린 연습을 중요시하셨습니다. 바이올린만이 전부이기 때문에 제가 결혼하는 것도 반대하셨으니까요. 제가 갈라미언 선생님한테 공부할 때는 화장실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연습만 했어요. 화장실의 좁은 공간에 오직 나하고 바이올린뿐이었어요. 그것에서 하루종일 연습하다가 연주가 잘 되면 조그만 거울을 보고 웃고, 잘 안되면 혼자 울고…. 그 분의 위대한 점은 재주있는 여러 사람의 개성을 길러주었다는 점입니다. 그와 반대로 시게티는 폭이 넓은 음악가입니다. 바이얼리니스트도 바이올린만 해서는 안되고 스코어도 알아야 하고 오페라·오케스트라·소설·중국의 시까지 모두 알아야 된다는 거죠.
●바스티유 오페라 개막 연주회 때 눈물을 줄줄 흘리며 관람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생이 개관 작품을 ‘트로이 사람들’로 정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 엉뚱하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동생은 자신이 있어서 그렇게 결정했겠지만, 기왕이면 순조롭게 예술활동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 누나로서는 프랑스에서 한번도 무대에 올리지 않은 대작을 공연하겠다는 동생이 애처롭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연주회를 보려고 파리에 갔더니 동생이랑, 올케랑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더군요. 동생은 눈만 조금 붙이고 하루 20시간씩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생이 자신은 고민하면서도 단원들에게는 여유있게 대하고 격려해야 하는 지휘자로서의 자질을 타고난 것은 잘 알고 있지만 프랑스 사람들의 성격이 오죽 까다롭고 스타일이 독특합니까? 거기다가 오케스트라 단원간에 잡음은 말할 수 없고. 그런데 개막 첫날밤에 동생이 무대에 나오자 청중들이 그렇게 환영할 수가 없어요. 동생이 벌써 파리 관중을 꽉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세상에 여기가 어디라고 동생이 이렇게 하고 있나’ 하고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이상하게도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자꾸만 옛날 생각이 나요. 남들은 우리를 성공했다고 부러워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늘 스스로 모자란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정트리오가 연주할 때는 80% 이상을 서로 일치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정트리오는 어떻게 결성되었습니까?
58년에 시공관에서 첫 번째 연주회를 열 때는 트리오가 아니라 오빠 명근(비올라), 언니 명소(플루트), 명화(첼로) 그리고 제가 함께 참가한 정패밀리 연주회였습니다. 그때 명훈이는 다섯살이었는데 우리가 연습할 때면 구석에서 혼자 피아노를 두드리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후 제가 리벤트리트 콩쿠르에서 1등한 직후인 68년에 시민회관에서 명소, 명화언니와 동생 명철(클라리넷)과 명훈(피아노)이 함께 모여 5남매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명훈이가 지휘를 하면서부터 오늘과 같은 3남매 트리오를 시작하여 해마다 1년에 한두번은 카네기홀에서 연주해왔습니다.
●오늘의 정트리오를 만든 것은 어머니의 공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의 음악적인 후원은 없었습니까?
아버지도 음악을 정말 좋아하셨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후원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앞장서서 레슨 선생님을 모시거나 음악적인 결정을 내리는 일은 어머니가 다했습니다. 하루종일 장사를 하시면서 7남매의 뒷바라지를 어떻게 다하셨는지 상상이 안돼요. 레슨 장소에 데려다 주거나 데리러 오시곤 했는데 한번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으니까요(그 당시 ‘고려정’이라는 음식점을 경영하느라 시간이 바빴던 어머니 이원숙씨는 지프를 타고다니며 학교에 가거나 레슨을 받는 자식들을 태워다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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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꼭지님, 감사합니다.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어요. 흥미로운데요.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 빈필과의 레코딩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고요, 좋아하는 지휘자가 쥴리니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네요. 그간 인터뷰에서 쥴리니가 너무 템포가 느려 잘 안맞았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리고 인터뷰성 멘트인지는 몰라도 항상 남편이 잘 도와주고 지지해줘서 연주생활에는 지장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결과적으로는 이혼으로 간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개인적인 사생활이지만요....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로 브람스를 많이 말씀하셨는데, 이번 인터뷰에선 바하와 모짜르트네요. 모짜르트 녹음이 하나도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연주회 갖기가 힘든 현상황에서 케너와 모짜르트 소나타 녹음이라도 하면 너무 좋겠는데, 선생님이 모짜르트에서 케너를 녹음상대로 생각한다면 가능하겠지요..... 몇년전에 바하, 소나타, 브람스 & 베토벤 협주곡 녹음계획을 말씀하실 때 더 이상 녹음은 안했으면 한다고 하셨으니 브람스와 베토벤 협주곡(?)이 마지막 녹음이 될 수도 있겠지만, 모짜르트 소나타는 녹음하면 너무 좋겠습니다.
정트리오가 일년에 한두번은 카네기홀에서 연주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정말 흥미로워요. 정트리오의 카네기홀 실황이 발굴된다면 정말 좋겠지요. 1980년경 정트리오 카네기홀 공연 모습이 아주 짧게 티비 뉴스에서 나왔는데 정말 신비로웠지요.
요즘 인터뷰보다 퍽 디테일한 인터뷰네요.
무티를 언급한 건 아마 새 드보르작 녹음 출반에 맞춰 립서비스 해주신 듯... 무티와의 녹음도 결국 그 하나로 끝났으니 말이죠.
피아노, 피아니시모, 피아니시시모...로 연주가의 자질을 평가할 수 있다는 언급도 흥미롭네요.
영국인들을 꽤 많이 겪어본 바로, 처음엔 진중하고 매력이 있는 듯 하다가 알아갈수록 복잡해지는 게 영국인 특징이더라고요. 열정적이고 감각적인 합을 중시하는 정샘 성격상 영국인과 살다가 속 터지는 일이 퍽 많았을 겁니다 ㅋㅋ
언니 분이신 정명화 샘은 손 다칠까봐 집안일도 조심해서 한다고 하는데 그 점과 대조적인게 인상깊네요.
매우 감사합니다, 토마토꼭지님!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