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 구원/이동
제목 : 구원은 이동(移動)하는 것입니다!
성경 : 벧전 1:13~21
찬송 : 508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0212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벧전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벧전 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벧전 1: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벧전 1: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은 너무나도 소중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은 실로 풍성한 것입니다. 단순히 죄 용서함 받은 것이나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것 이상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구원을 이동(移動)으로 설명합니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출애굽이 아주 좋은 예입니다. 종 된 땅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듯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구원받았고,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교회가 이동 중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 이동은 두 번째 출애굽(second Exodus)입니다. 옛 이스라엘이 노예로 살던 땅 애굽에서 나와 약속된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듯이, 이제 부르심을 받은 교회도 출애굽을 합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다만 이제는 이 세상의 어느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나 하늘에 있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나라로 이동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출애굽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가르치고 있는 구원에 대해 가장 역행하는 개념은, 이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교회와 그런 신앙인 것입니다. 구원이란 세상 복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세상 복을 받은 상태로 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척교회에서 대교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에서 집사나 장로나 목사로 직분을 이동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짜 이동은 세상을 지나 하늘 보좌 앞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길을 따라 갈 때에만 그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 이동입니다. 구원은 이동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소망’(엘피스)입니다. 지금까지는 이 세상에서 여행자가 된 교회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견고한 것이며, 보장된 것이며,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설명했습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시작해서(2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따라 결국 약속의 땅, 곧 하늘에 간직된 영광의 나라에 이르는 길입니다(4,11절).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은 ‘소망’(엘피스)에서 시작해서(13절) ‘소망’(엘피스)으로 끝이 납니다(21절). 그만큼 소망은 이 땅의 교회의 삶에 중심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교회는 이 소망의 길을 어떻게 이동(移動)해야 할까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이동해야 합니다!
√벧전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영광스러운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받은 교회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본문에 의거해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즉, 당신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사는가? 여러분이 가진 소망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서 받아 누릴 복에 있다면,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소망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3절이 가르치는 소망의 삶이란, 곧 출애굽(exodus)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옛 이스라엘이 노예로 살던 땅 애굽에서 탈출해,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약속된 땅 가나안에 들어갔듯이, 그렇게 실제적으로 ‘이동(移動)’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요구하는 첫 번째 태도는 ‘당신의 소망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본문은 주께서 나타나실 때 가져오실 ‘은혜’에 모든 소망을 걸어 두라는 것입니다. 그때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은혜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서신에서 은혜를 8회나 언급합니다. 흩어진 여행자 같은 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와 평강입니다(1:1).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우리 교회에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5:10). 교회가 받은 구원의 복음은 ‘은혜의 복음’입니다(10절).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났고,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들로 제 기능을 하며 성장해 갑니다(4:10, 5:5). 아마도 베드로가 언급한 ‘참된 은혜’(5:12)는 교회로 하여금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킬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1:13; 참고, 3:7).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은혜로 시작했고, 은혜로 진행하고, 결국 더 큰 은혜를 받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며, 교회가 가는 길입니다.
옛 이스라엘이 온갖 두려움과 실패의 가능성을 떨치고 오직 믿음으로 홍해를 건너며,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고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뎠던 이유도 ‘살아 있는 소망’ 때문이었고 ‘더 나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12:11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출 12: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출애굽을 앞두고 유월절을 지키며, 양의 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을 때 그것을 어떤 자세로 먹어야 하는가를 지시한 말씀입니다. 보통은 허리띠를 풀고 음식을 먹습니다. 그런데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구원은 출애굽 사건처럼, 정신을 차리고 급히 이동하는 것을 그 핵심 내용으로 삼습니다. 구원이란 표현 자체가 어디에서 어디로 건져냄을 받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교회는 구원의 확신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구원이 이동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먹을지니’ 이 말씀은 유월절 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입니다. 그 유월절 양을 확신과 감사함으로만 먹고 출애굽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오늘날 신자들이 그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도 세상에서 빠져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월절 양의 피와 살은 구원을 상징함과 함께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속히 애굽을 떠나 새로운 땅, 약속의 땅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제 ‘흩어진 나그네’(초대교회)의 출애굽은 그저 장소적 이동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늘로 옮겨 가는 이동입니다(3:18~22). 그래서 그냥 허리가 아니라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의 허리’라 할 때 ‘마음’(디아노이아)은 단지 감정이적이거나 의지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생각, 가치관, 판단’과 같은 정신적 작용을 가리킵니다. 즉, 진리에 관한 판단입니다. 세상과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 가치관에 있어서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중요합니다. 생각이 잘못되면 말과 행동이 바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자동차의 핸들과 같습니다. 차에 엔진이 심장이라면, 핸들은 그 사람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2:11절 이후 세상 속의 교회에게 구체적 지침을 주기 전에, 그들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교회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충분히 소화해서 받아들이고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허리’를 질끈 동여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근신하여’(네폰테스)라고 말씀합니다. 근신한다는 것은 '술 취하지 않다, 정신 차리고 있다, 근신하다, 침착하다'를 의미합니다. 정신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에 취할까요? 세상에 취하는 것입니다. 술에 만취되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걸음이 비틀거리며 혀가 꼬이고 오락가락하게 됩니다. 음식이든, 돈이든, 쾌락이든, 명예이든, 처음에는 내가 통제력을 갖고 즐기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에 취하면 점차 내가 나의 통제력을 그 중독된 대상에게 내주고, 결국 그것에 매여 종노릇하게 됩니다. 근신하라는 말은 이런 위험성을 눈치 채고 분별하여 오직 ‘살아 있는 소망’(3절), 곧 주께서 나타나실 때 주실 큰 ‘은혜’를 바라는 소망(13절)이 자신을 통제하도록 깨어 있으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며 목적지를 향하여 이동해야 합니다. 썩어지고 없어지고 더럽게 되는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갖고 이동해야 합니다!
이렇게 유혹이 많고 걸림돌이 많은 세상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취하지 않은 채 살아 있는 소망에 온 마음을 두고 살 수 있을까요?
세상에 대하여는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같이 되는 것이 소원일 때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가는 길을 함께 간다면, 세상이 결국 도달하는 그 목적지에 함께 도달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 14~16절의 말씀은 교회의 부르심이 세상 속에 놓인 교회에게 어떤 방향을 정해 주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순종하는 자식처럼 살아야 합니다.
√벧전 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베드로는 이미 교회를 ‘택하여 부르심 받은 자들에게’(에클렉토이스)라 불렀습니다(1:1~2). ‘썩어가고 더럽고 쇠해가는’ 세상으로부터 불러 내셔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나라에 속하게 하신 것입니다(1:4). 특별히 그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주사 ‘거듭나게’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1:3). 그래서 ‘자녀’(테크나)라는 말이 나옵니다(14절). 세상에 속하지 않은, 죄와 죽음을 이긴 부활 생명이 그 속에서 숨 쉬는, 자녀 된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친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누구를 닮습니까? 아버지를 닮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음을 베드로는 역설하려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닮을 수 없습니다. 마귀를 닮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길을 가고, 다른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자식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벧전 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국제대회의 경우는 드물지만 국내 마라톤 대회의 경우 가끔씩 트랙을 벗어난 선수들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두 세 시간에 육박하는 길고 힘겨운 달리기를 하면서, 결국에는 자신이 트랙을 벗어나 실격 당했다는 사실을 알 때는 황당하고 이미 늦은 것입니다. 정 코스로 뛰지 않으면 아무리 죽을힘을 다해 스피드를 낸다 해도 결국에는 실격처리가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방향을 올바로 잡고 스피드를 올려야 합니다.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치명적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탄생하였습니다(1:2). 교회는 하나님의 뜻의 표현입니다. 탄생도 성장도 완성도 그러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교회와 세상의 온갖 것들을 다 총동원해서 열심히 ‘세상을 따라’ 갑니다. 그렇게 성장해서 무엇이 되었습니까? 세상이 되지 않았습니까! 세상을 따라 열심히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게 도리어 버림을 받고 짓밟히고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그 거룩과 영광을 목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편지를 받은 수신자들은 주로 세상에서 이방인이었다가 신자가 된 자들을 묘사하는 듯합니다. ‘알지 못함’과 ‘정욕을 따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상태를 묘사하는 두 가지 큰 방식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표현들과 정확히 트랙과 경주의 이미지에 들어맞습니다. ‘모르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의 트랙에서 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열심히 뛰게 하는 것은 정욕입니다. 사람의 정욕들, 예컨대 식욕, 성욕, 명예욕, 사랑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등은 자체로는 하나님의 ‘좋은 선물’입니다. 하지만 이런 욕구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에 대한 무지로 인해, 세상이라는 트랙에 묶여 세상과 함께 달리면서 잘못된 대상을 향해 잘못된 방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결국 돈을 사랑하며, 탐욕, 허영, 사치, 그리고 남과 다르다는 구별 짓기에 대한 강한 열망들을 쫓아가면, 결국 ‘썩어지고 더럽게’ 되어 죄와 사망이라는 결승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따라’의 문제입니다. 교회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따라 열심을 낼 것인가? 그것을 알고자 하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고 말씀에서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자신의 심령의 동기와 목적을 정직하게 살피는 훈련을 사모해야 합니다. 또한 어떠한 방식으로 달려야 할지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과 하늘의 순결한 지혜의 풍요한 조언을 받아야만 합니다(참고, 약 3:13~18).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아는 지식에서 먼저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뜨겁고 거룩한 열정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이런 경주의 결국은 ‘생명의 면류관’(벧전 5:4; 약 1:2)입니다.
√3)경주의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교회가 해야 하는 경주는 시작과 끝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 출발선과 결승선은 모두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입니다. 그분의 부르심은 확정적입니다. 한 번에 결정된 부르심입니다. 그분의 ‘영광과 덕으로써’ 부르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걸려 있는 후회 없는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에게서 출발하고, 하나님과 함께 가고, 하나님께로 이릅니다. 그분이 이 후회 없는 부르심으로 부르신 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목표가 뭡니까? 하나님께 이르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주신 ‘거듭난 생명’이 온전히 성장하고 성숙하여, 아버지 하나님을 닮는 온전한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생각, 뜻, 의지, 정서, 지혜, 성품, 그 모든 것을 닮고 반영하는 그분의 형상으로 온전한 성숙의 자리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분의 나라, 곧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그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말하는 대로, ‘이 모든 행실들’ 보다 ‘거룩한 자들이 되십시오’라는 권면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사람은 변하지 않은 채, 교회에 속한 것 같은 행위들만 보이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니, 부족함을 넘어서 치명적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복을 받았는데, 간절한 기도 제목들을 놓고 기적적인 응답을 받았는데, 혹은 개척한 지 수십 년 만에 굴지의 교회가 되었는데, 그 사람 자신이 하나님을 따라 거룩함으로 변화되고 성숙해진 것이 없다면 그것은 다른 트랙에서 다른 경주를 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도 죽어라고 열심히 달려 다른 결승점에 도달했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이겠습니까!
(영상/예수이름을 선포하라)
√경외심을 갖고 이동해야 합니다!
신자가 세상의 방식을 따라가지 않으면 자주 두려움과 마주서게 됩니다. 세상은 세상을 따라가지 않는 신자와 교회를 두려움으로 위협합니다. 지금 베드로의 이 편지를 받아 보는 로마제국 변방의 흩어진 교회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도 아마 사방으로부터 몰려오는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소외감, 따돌림, 간헐적인 핍박이 점차 가중시키는 무거운 두려움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해 보라. 썩어져 가는 세상에서 부패한 방식을 따르지 않겠다고 해 보라. 모두가 정직하지 않아도 되는 관행 속에서 혼자 정직을 행하겠다고 해 보라. 모두가 침묵할 때, 하나님의 진리를 올곧게 선포한다고 해 보라.
진리는 때로 외로운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외로운 것이 마땅합니다. 세상과 같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의 방식을 찬동하지 않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대하여는 소외감과 불안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을 향하여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둘째는 교회는 세상보다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벧전 1: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셋째는 교회는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이기지 못하면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교회가 세상을 이길 수밖에 없는 근거들을 제시합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입니다. 베드로는 오직 심판하시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따라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 세상의 헛된 행실들을 따르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14~16절). 이 세상을 잠시 머무는 외국인처럼, 여행자처럼 지나갈 때에 ‘두려움’으로 살라는 것입니다(17절). 하나님에 대한 이런 두려움을 잃으면 세상을 따르지 않을 때 오는 위협과 소외감, 불안과 그로 인한 온갖 두려움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가 부패한 세상의 허망한 행실들을 따르지 않으면, 세상은 죽음의 권세로 위협할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가진 가장 큰 무기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십니까?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벧전 1: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교회가 무엇입니까? 믿는 자들입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습니까?
첫째,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부활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둘째, 그에게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이 두 가지 사실은 베드로전서 전체를 관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베드로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 사실, 이 두 가지 진리가 서로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핵심적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이 두 가지,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영광을 처음부터 연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지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그리스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도, 곧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받고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하실 때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참고, 마 16:16, 21-23). 이후에 주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새벽닭이 울고 크게 회개했지만, 나중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목양 사역을 부탁하실 때도 여전히 자신이 받을 고난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참고, 요 21:15-23).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심, 그 후에 부활과 영광의 이 당연한 순서가 베드로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는, 그래서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깨닫고 있습니다. 이 서신에서 베드로는 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함께 연결하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3:9, 17-22, 4:13; 5:1, 9-10). 그 길을 먼저 가신 분이 바로 베드로 자신이 세 번이나 부인했던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거듭난 성도,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고(3:21) 그리스도의 길을 갑니다. 특히 베드로전서에서 고난은 그리스도 자신의 것(1:2,11,19)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몫(1;6,7,17)입니다. 메시아와 그의 백성이 겪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출산하는 고통인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길은 곧 교회의 길이며, 교회의 길은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깨달은 목회의 길이며, 자신의 길이었고, 이 땅을 지나는 교회의 유일한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분명 그리스도의 영광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물론, 교회가 이 땅을 지나가는 길은 광야와 같기에 많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 길을 이동할 때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였습니까? 그러나 광야 40년이 끝나니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입성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소망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실로 놀라운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믿고 따라갑니다. 교회가 이 땅에서 갖는 믿음이란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경탄과 놀라움을 포함하는 두려움을 뜻합니다. 믿음이란 날마다 새롭게, 하나님께 대하여 감탄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권세와 능력, 그분의 지혜와 부요함, 그분의 끝없는 사랑과 긍휼 앞에서 ‘아!’라고 감탄하며 엎드려 감격하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동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분과 함께 나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