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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족하게 하지 말라(마18:5-10)
지난 시간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있는 모습 그대로 믿고 따르는 순수한 믿음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좀 복잡합니다. 살아오면서 너무나 많은 경험과 지식이 우리를 얽어 메고 있기 때문에 말처럼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돌이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완전히 돌아서야 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말합니다.
회개는 지금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 슬퍼하고 가슴아퍼하는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죄에서 떠나 예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다시 시작해야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한 가지를 더 요구하십니다. 5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1.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라"고 권면하십니다(5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어린아이와 예수님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나이가 어린 아이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 어린아이와 같이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소외된 이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당시에 어린아이는 숫자에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숫자에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힘이 없고 연약한 존재, 천한 신분으로 사람들에게서 소외된 작은 자를 소중하게 여기고 돌봐 주고 인격적으로 대해줌으로 이웃사랑을 진정으로 실천한다면 그것은 곧 주님을 대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처럼 작은 자들의 친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에서도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그들 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도 (막 2:17)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당시에 죄인의 대명사는 세리와 창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소외된 사람들을 찾으시고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셨습니다.
복음은 저들을 예수님과 하나로 묶어 주었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말씀에서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적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 의인들이 "주여, 우리가 언제 주님을 대접하였나이까? 그런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예수님은 "너희가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외로운 자, 헐벗은 자를 도운 것이 곧 내게 한 것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악인들이 "언제 우리가 주님을 대접하지 않았습니까?" 하였을 때, 예수님은 "너희는 주린 자 목마른 자를 돌보지 않았고 헐벗은 자, 옥에 갇힌 자를 돌보지 않았고 나그네를 거절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곧 나를 거절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나그네, 병든 자, 소외된 자, 힘없는 자, 무능한 자, 옥에 갇힌 자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횐옷을 입고 빛이 나는 그런 예수님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시고, 헐벗은 자들 속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해야 할 객관적인 대상으로 여기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자신을 한 몸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도 "나는 포도나요 너희는 가지"라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생명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단순히 사랑해 줘야 할 불쌍한 존재, 동정해 주고 병 고쳐 줘야 할 존재로 보신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실제로 아픈 것처럼 고통을 느끼는 관계로 우리를 보신 것입니다. 내가 거리를 지나가다가 불쌍한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헐벗은 사람이 있으면 옷을 벗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아애 자식처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을 돌보는 것하고 불쌍한 사람 구제해 주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한 거지를 동정해 주듯이, 헐벗은 한 사람을 동정해 주듯이 돌봐 주는 관계가 아니라, 자기 몸에서 태어난 자식처럼 떼어버릴 수 없는 관계로 사랑하시고 돌보십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힘없고 돈 없고 권력없는, 세상적으로 볼 때 보잘 것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들이 그렇게 가난하고 처절한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고귀한 존재로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선교사님들을 통해서 이것을 배웠습니다. 어느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는 아프리카의 오지에 버려진 아이들, 그들도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 중국에, 러시아에 가려고 하는가? 사람들이 가지 않으려는 그 곳에 왜 모든 문화적인 혜택을 거부하고 가려고 하는가? 그것은 그 곳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복음 안에서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생을 그렇게 희생하는 것입니다.
국내에서도 가난한 자와 함께 열악한 환경에 스스로 들어가고자 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리고 아무도 그들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그들을 감싸 주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 주려고 그런 곳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버림받은 무능한, 아무 것도 아닌 소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라. 잊혀진 사람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서 기억하라. 벌거벗은 사람을 감싸 안아 주어라.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이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2.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6-7절).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여기서 '실족케 하다'는 말은 '넘어지게 하다'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넘어지게 하는 경우가 우리들에게 참 많이 있습니다. 무심코 생각 없이 던진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다행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면 상대방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먼저 말로서 상처를 다 주고서 "나는 뒷 끝이 없는 사람이야, 나는 누구처럼 질질 끌지 않아 화끈하게 한번 말하고 그 뒤로는 잊어버리는 스타일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로 이미 상대방은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상처를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더 큰 상처를 주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연자맷돌은 보통 우리가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맷돌이 아닙니다. 이 맷돌은 소나 당나귀가 원을 그리며 끄는 맷돌입니다. 그러면 그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처럼 큰 맷돌을 목에 매어서 바다에 빠뜨리는 사형법은 부모를 상해하거나 사회를 문란케 한 중죄인에게 가했던 형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왜 연자맷돌에 비유해서 말씀하시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곧 형제를 실족케 하는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 그 죄의 심각성에 대해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자주 범하는 죄 가운데 하나가 연약한 자들에 대해서는 힘있는 사람만큼 신중하지도, 깊은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런 사람들이 우리로 인해 실족케 되는 경우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관심이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런 자들을 실족케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자들이 실족하게 만듭니까? 그것은 내가 남보다 높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마음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크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낮아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남들에게 인정받고자 한다면 먼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낮아지고 어떻게 겸손해질 수 있습니까? 나보다 연약하고, 나보다 어렵고, 나보다 가난하고, 나보다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취하는 행동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기 어려운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이런 상황에서 이 정도면 나도 할 만큼 했어'하면서 내 자신을 합리화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7절에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얼핏보면 우리의 그런 생각에 동의하는 말씀인 듯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실족케 하는 일을 합리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실족케 하는 경우와 원인들이 우리 주위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을 보면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도처에 우리를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실족케 만드는 덫을 놓았습니다.
우리가 경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정신을 바짝차리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형제를 실족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족케 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룟유다의 행위에 대해 두둔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를 팔지 않았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일어날 수 있었겠느냐?"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룟유다를 시대의 영웅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한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가지고서 상황윤리를 들어 자신을 합리화시키려 해서는 안됩니다. 상황이 그렇다고 해서 잘못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여러 가지 변명들이 많습니다.
이유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변명이나 이유가 신앙생활의 나태함에 대한 나의 책임을 면할 수 있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로 인해서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케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3. 범죄한 지체를 찍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8-9절).
8-9절,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물론 이 말씀은 범죄한 손이나 발을 정말 찍어 버리고 눈도 빼어 버리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해야 한다면 우리가 찍어야 할 손과 발은 수도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말입니까? 내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내 손이라도 내 발이라도 찍어 버릴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경찰청 사람들'이라는 텔레비전 프로에서 도박을 하다가 패가 망신한 사람의 가정을 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도박에 미치다 싶이한 이 사람이 집에 있는 것 다 갖다 팔고 심지어 집문서까지 잡혀서 도박을 하다 다 잃어버리고 그 집에서 쫓겨나서 거지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제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겠노라면서 자기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엄지손가락 하나를 절단했습니다.
차라리 손가락 하나 없는 것이 도박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도박을 다시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결국 또 다시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손을 찍는다고 해서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받고 거듭나야만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는 이유를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까?
정말 주변환경 때문일까요?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일까요?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거의 대부분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저는 이렇게 해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이유 때문에 주일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그것이 정말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변명 그 자체는 이미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해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 보면 그것이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중 하나는 내가 성령에 충만해 있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내가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진정으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결단하지 못한다면 그것에 대한 책임도 내가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입니다. 요즘 지옥에 대해서 얘기하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옥'에 대한 얘기가 유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유치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 자신이 매우 잘 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지옥에 대한 얘기를 들을 만큼 자신이 악하다거나 남에게 몹쓸 짓을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지옥에 대한 얘기는 유치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계속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입니다. 그만큼 천국과 지옥은 우리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핵심이 천국과 지옥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범죄케 하는 것들은 찍어버리고, 빼어 내버리라고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지옥 불에 던지운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범죄한 자는 지옥불에 던져진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찌해서 지옥에 관한 말씀이 유치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찍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빼어내야 할 것은 또 무엇입니까? 그대로 두었다가 지옥에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찍어버리고, 빼어버리는 아픔을 감수하고서라도 영생에 들어가시겠습니까? 그 결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4.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10절).
이제 10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우리가 무시하고 돌보지 않는 그 한 사람의 영혼도 천하보다 귀하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동시에 이 이 작은 자를 보호하라, 이 작은 자를 섬기고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천국은 작은 자를 세워주는 나라입니다.
작은 자가 큰 자가 되는 나라입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을 달구었던 내용 중에 하나가 아르바이트 생들에 대한 손님들의 갑질입니다. 함부로 막말을 하고 반말로 메뉴를 주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놓은 아이디어가 티셔츠에 "남의 집 귀한 자식"하는 글귀를 크게 썼습니다. 그리고 안내판에는 "반말로 주문하면 반말로 주문을 받겠다"고 써놓은 것입니다. "야 커피 한 잔"하면 "알았다 커핀한 잔 내가 갖다 줄께 기다려" 반말로 받겠다는 것입니다.
갑질의 횡포가 여기에만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는 우리 교회 안에서부터 작은 자를 소중히 대하고 존중해주고 섬기고 사랑애야 하지 않겠습니까? 건강한 자식에게 보다는 약한 자식에게 부모의 마음이 배나 가듯이, 연약하고 보잘 것없는 버림받은 영혼에 대해 하나님의 관심이 더 많이 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하게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사랑이며, 우리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연약한 성도들을 시험들게 하지 않도록 하시는 사랑입니다. 로마서 14:1에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좋은 자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쉽게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기도가 서툴고, 예수 믿다가 죄짓고, 예배드리고 나가서 담배 한번 핀다고 그들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고 격려하며 어루만져 줘서 함께 가야 합니다. 한 영혼을 세우기 위해서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쉽게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 주는 여유도 필요합니다. 로마서 15:1에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비난의 내용으로 삼지말고 오히려 그 약점을 덮어 주어서 격려해주고 세워 주고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천국에서 큰 자의 태도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공동체의 지체들입니다. 이렇게 만나서 함께 교제를 나누고 일을 하다보면 관계속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하게 권면하십니다.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 오히려 작은 자를 예수님처럼 대접하고 온전하게 세워 주고 높여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나라 공동체의 사랑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작은 자를 멸시하고 큰 자로 행사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섬기는 자로서의 자세를 잃지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나의 십자가를 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이 가신 좁은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