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사탕
홍경나
쌍여닫이문에 묵매도가 붙어 있던 상할머니의 벽장 속에는
새실〔辭說〕같은 흰 눈이 내리는 삼동 노골노골 화롯불에 구운 가래떡을 찍어 먹던 조청과 명절날 쓰고 남은 상긋한 사과며 곶감이며 약과 도라지정과 연근정과 등속이 있었고 외할아버지가 고령장에 나갈 때마다 품고 오던 상할머니의 오랜 속증을 다스리는 까스활명수 뽀얀 설탕가루가 범벅된 박하사탕이 있었다 외할머니가 밤새 백자등잔불 아래서 두 무릎에 무명실타래를 걸고 두툼하게 감은 붉은 자개사패絲覇 오방색 감투할미 머리카락을 말아 넣은 목단자수 바늘겨레와 엄마와 이모 외삼촌들의 탯줄을 끊었다는 시커먼 무쇠교두각시 참죽나무자가 담긴 팔각반짇고리가 있었고 그 옆엔 젊어서부터 근동 사돈지를 도맡아 썼다는 상할머니의 두루마리한지와 구운몽 사씨남정기 장화홍련전 옥단춘전 오유란전… 언문 이야기책이 있었다 내 손이 안 닿는 맨 위 칸 안팎으로 바른 쪽물장지가 손때로 반질거리는 채롱에는 기미년에 돌아가셨다는 상 할아버지의 생원백패와 단계벼루 청화백자 무릎연적 삼동물림 백통연죽과 수복壽福은입사 연초합이 있었다 정월이면 ‘帝城을 두루 돌아다니니 천 개의 문이 열린다’ ‘장안에 삼월이 돌아온 봄빛이 마치 비단과 같다’ 권솔과 일가붙이의 신수점을 보던 토정비결과 석가모니부처님의 팔정도 새벽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명황빛 비단보에 싼 예경을 올리던 약사여래호신불과 보리수염주 손수 사경했다는 불경이 나란히 있었다
가끔 쌍림 큰이모할머니가 상할머니를 모셔갈 때면 나는 박하사탕을 꺼내 먹겠다고 벽장 앞에서 할머니 베개와 내 베개를 포개놓고 올라서 아등바등 까치발을 했다
다음
한눈도 팔지 않고 다음을 생각하네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을 먹고 영화를 보자고 할까
붐비는 술집 말고 공원에서 저녁 산책을 하자고 할까
네게 가려
여느 때처럼 청바지에 운동화 회색 패딩 점퍼를 입을까
내가 너보다 더 커 보일까 봐 신지 않았던
굽 높은 부츠에 레이스 스커트를 차려입을까
준비해 간 말은 반도 못했는데
호주머니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는데
너는 다음을 말하네
그 말 너무 환해
나는 더 가까이 다음을 생각하네
내가 먼저 다가가 전화를 기다렸다고 말할까
전화기를 꺼두었다고 너를 기다린 적 없었다고
매일매일 연습해온 시시한 표정을 지어볼까
너는 다음으로 있는데
아직 그렇게 있는데
너는 또 그러네
다음에 보자
너는 처음 말하는 것처럼 다음을 말하네
그 말 너무 생생해
나는 곰곰이 다음을 생각하네
먼눈팔다 들킨 사람처럼
네가 뒤돌아볼까 봐
내 시선에서 네가 사라질 때까지 그냥 있어보는 것처럼 환하게
홍경나 2007년 심상으로 등단.
(시현실 2018년 여름호에 띄어쓰기가 틀려 죄송합니다!. 가을호에 정정 게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