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8回 全國 漢詩公募展 要綱
남고서원: 1984년 4월1일 전라북도지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었으며 전라북도 정읍시 북면 도림리에 880-1에 위치해 있다
이 서원은 호남의 대성리학자 일재((一齋) 이항(李恒, 1499~1576) 선생과 임진왜란 때 의병장 건재(建齋)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며, 선비들의 학문을 닦는 도장이었다. 선조 10년 (1577)에 처음 세웠으며 숙종 11년(1685)에는 나라에서 이름을 내리고 후원하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8년(1871)에는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는데 후손들이 1899년에 다시 세웠다. 그 후 이항선생의 문인인 김점, 김복억, 김승적, 소산복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현재 이 서원에서는 사당을 비롯하여 내삼문, 외삼문, 강당 등의 건물이 있으며 이항의 문집목판을 소장하고 있다.
1. 시제(詩題) 및 압운(押韻)
○ 詩 題 : 『일재 이항 선생(一齋 李恒 先生)』
○ 押 韻 : 춘(春), 친(親), 진(辰), 신(新), 진(眞)
2. 원서제출요령(願書 提出要領)
○ 願 書 : 井邑文化院 所定樣式(2首 以上일 境遇 複寫 使用 可能)
○ 期 限 : 2017年 7月 31日까지(當日 도착 분까지 有效)
※ 作品解說은 반드시 첨부하시기 바랍니다(未添附時 考選에서 除外함)
3. 고선료(考選料) : 1首當 5千원, 송금계좌번호 농협 355-0021-5866-13(정읍문화원)
4. 시상(施賞) : 壯元 1名 × 1,000,000원
次上 1名 × 500,000원
次下 1名 × 300,000원
參榜 12名 × 50,000원
佳作 30명 × 30,000원
5. 고선(考選) : 斯界 權威者에게 委囑, 嚴正, 考選함
6. 입상자 발표(入賞者 發表) : 2017年 8月 中旬(個別通報)
7. 시상일시(施賞日時) : 2017년 11월 中旬, 상장 및 시고집 개인 우편 발송 예정
8. 시고집 발간(詩稿集 發刊) : 運營委員會에서 發刊 및 配付範圍決定
9. 참고사항(參考事項) : 별지(別紙) 시제자료 일재 이항선생(一齋 李恒先生)參考.
10.기타(其他) : 仔細한 事項은 井邑文化院 홈페이지(http://jeongeup.kccf.or.kr/) 또는 電子郵便 je0222@kccf.or.kr, 팩스 532 - 8723 로 접수 및 問議.
♧ 주최 : 井 邑 文 化 院
♧ 주관 : 全國 漢 詩 公 募 展 運 營 委 員 會
56160 全北 井邑市 조곡천 1길 1(연지동)
井 邑 文 化 院
☎ 063) 532 - 0222 /팩스 063) 532 - 8723
※ 參考事項: 入賞者 發表 및 施賞式은 本 文化院 事情에 따라 變更될 수 있습니다.
☻18회 전국한시공모전『일재이항선생(一齋李恒先生)』시제 참고자료
일재(一齋) 이항(李恒) 선생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남고학당(장의/훈장) 류 승 훈
태산가(泰山歌)
수운태산고 (誰云泰山高?)
자시천하산 (自是天下山)
등등부등등 (登登不登登)
자가도상두 (自可到上頭)
인기불자등 (人旣不自登)
매언태산고 (每言泰山高)
선생께서 40세 때 홀로 모시고 살았던 어머니를 모시고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태인 칠보산(七寶山) 아래에 숨어 사시면서 그 다음 해에 칠보산에 보림정사(寶林精舍)를 세우시고 정사의 편액을 한일(一)자 한자만 걸어두니 학자들이 일재(一齋)선생이라 일컬었다.
이 때에 태산가를 지어서 제자들과 자녀들을 경책하되 공부하는 선비의 목표는 성인(聖人)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교육관이었다.
참고로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작 태산가를 보면
태산수고시역산(泰山雖高是亦山)
등등불이유하난(登登不已有何難)
세인불긍노신력(世人不肯勞身力)
지도산고불가반(只道山高不可攀)
일재(一齋)는 연산주 12년 서기 1499~1576까지가 생몰 연대며 봉래(蓬萊)는 1517~1584까지가 생몰기록이다.
호남의 대학자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의 고가신번이십구장(古歌新翻二十九章)(1729-1791)에서 세전(世傳)되는 태산가는 일재선생작이라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와 같으며
태산수운고(泰山雖云高)
기불위천하산(豈不爲天下山)
일상우일상(一上又一上)
세상응무불상인(世上應無不上人)
갈지호불상상(曷之乎不上上)
도칭막고시태산(徒稱莫高是泰山)
또 세주(細註)에 세전일재선생가(世傳 一齋 先生歌)
차즉권인진학(此卽勸人進學)
무왈도원지의(無曰道遠之意)라고 기술하고 있다.
대동기문(大東奇聞) (강효석(姜斅錫)이 편집한 조선 시대의 기이한 인물들의 특이한 기행 사례를 모은 책)에 기술된 것을 보면 기절이 남다르게 출발하여 환골탈태한 삶을 살으셨던 것이 특이하다고 할만하다. -대동기문 일재 선생편-
大東奇聞一齋先生篇
李恒謝其黨銳意工夫(明宗朝)
李恒은 星州人이니 字는, 恒之오, 號는 一齋라, 器宇弘偉하고, 勇力絶倫하야 豪逸超凡이라.
自幼嬉戱에 懾服群童하고 長而驕逸하야 有橫騖萬里之志하고, 角觗弓馬冠一時하야 聞劇賊反奴면,必往制之리라. 早登武擧하야 如南致助, 南致勤, 閔應瑞輩로 相爲追隨하니 人이 目之爲狂荒하고 亦有知爲非常人也러라. 嘗更深月夜에 登崇禮門하야 手其上簷瓦端하고 飛廻數度라 一日에 其友南氏殺人하니 府官이 檢屍에 恒이 披圍突入調中하야 攫屍飛走하야 投之江中하고 卽日에, 往見完伯하야 以証當日不在京之事리. 檢官이 失屍하고 聞知其爲李某所爲하야 發關湖南追捕하니 完伯이 回報曰李恒이 伊日에 在本營云이라하야 恒與正犯으로 俱得免하니 盖其驍勇이 如此러라. 年至三十에 聞其伯父一言之戒하고 卽悔悟하야 立謝其黨하고 袖大學一卷하고 往道峯望月庵하야 銳意工夫나 然이나 家計零替하야 謂不力於農이면
無以供喪祭育家屬이라하고 乃奉慈母하고 南寓泰仁하야 董務農桑하니 數年에 宿負을 盡償하고 有裕어늘 乃曰足矣라하고 擧以付之幹奴하니 規制已定에 徑歲不匱라,
乃專意求道하야 遂成大儒하다 與退溪李滉,南冥曹植으로 同被臺黨하야 多進致治之策하니, 上이 嘉納하시고 超授林川郡守하시니 辭病歸에 拜掌令하되 屢召不至하다.
30세가 다 되어서 늦깎이 공부의 발심은 무서운 분발로 공부할 때는 심신을 재계하고 책을 펴는 것은 물론 성품이 엄숙하고 의지가 굳은 자품 그대로 바로 성인을 대하고 공부하는 듯 진실하여 표정에 거짓이 없었다고 한다.
명종실록에 수록된 선생의 모습에 양미간이 넓고 눈이 깊숙하며 수염과 모발은 반백인데 강직한 체질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의 사승관계에서도 학맥과 도맥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승관계를 보면 송당(松堂) 박영(朴英)을 스승으로 모셨고 송당은 신당(新堂) 정붕(鄭鵬)의 문인이요 신당은 한훤당(寒暄堂)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니 선생은 사림(士林)의 도맥을 백두대간으로 이었다고 하겠다.
송당이 기묘사화 전에 신당이 무오사화 이전에 일재선생은 을사사화 이전에 어지러운 세상을 뒤로 한 것도 뜻이 고매한 선비들의 공통점이라 할 것이다.
학문은 넓게 그러나 잡되지 않아야(입지가 굳어지기 전에 이것저것 섭렵하는 것)하며 간략 명확하되 편벽되지 않아야 한다는 송(宋)의 학자 호굉(胡宏)의 격언을 잘 수용한 듯 평생을 일관되게 사서(四書)를 중시하고 특히 대학(大學)에 침잠하며 역학도 깊이 연구하였으니 후학들에게 주는 좌우명(座右銘)과 이기설을 보면 지고지순한 학문과 사상의 뜻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서간(書簡)을 통하여 치열하게 논변하였던 사상과 학문은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남명 조식선생이 조정에서 불러도 나아가지 않다가 일재선생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에 한양에 올라가서“남쪽에 큰 도둑?(제자 욕심이 많다는 표현)이 왔다기에 여기에 왔노라”라고 하는 일화에서 보듯 사람이 제목이다 싶으면 교류하던 인물이든 제자로써 육영을 하던 간에 통 큰 행보를 하였던 것이다.
경명행수(經明行修)로 사축서사축(司畜署司畜)을 필두로 의영고영(義盈庫令)과 임천군수(林川郡守)와 장악원정(掌樂院正)등을 지냈으나 벼슬에는 크게 뜻이 없고 도학과 의리 및 육영에 천착(穿鑿)한 산림도학자이자 성리학자(性理學者)라 할 것이다. 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며 박문다견왈문(博文多見曰文)숙야경계왈경(夙夜警戒曰敬)이라 하여 널리 보고 듣고 본 것이 많은 것을 문(文),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경계하는 것을 경(敬)이라 칭하였다.
숙종 을축 서기(1685)에 사액된 남고서원에 주벽으로 배향되었으니 남고(南皐)라는 뜻은 한양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스승다운 스승은 일재(一齋)한 분이라, 고(皐)는 스승을 모시기 위해 호피(虎皮)를 깔거나 안석을 높이 고이고 선생의 강론을 듣기위해서 모시는 것이니 선생 그 자체이거나 선생의 자리를 뜻한다 할 것이다.
문열공(文烈公)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의병장이 사제로 합향 되었다가 불행히 조선말 고종시절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으나 1899년 서원 터에 강수재를 중창하고 단을 묻어서 제를 지내다가 1927년에 서원을 중건하고 김매당(金梅堂) 김율정(金栗亭) 김용암(金龍巖)등의 제자를 추배하고 1974년 소매헌(蘇梅軒)을 추가 배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란이 발발하자 안의(안의), 손홍록(孫弘祿)등의 제자는 경기전(慶基殿)의 태조 어진과 왕조실록을 정읍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겨 조선의 역사가 끊기 지 않게 했고 김천일, 김제민 등 의병과 후방 지원 제자가지 수백 명이 풍전등화 같은 종묘사직과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섰다. 일재선생의 생애를 평하는 후학의 들의 글 몇 편을 보면 퇴계는 호남이학(理學)의 으뜸이라 했으며 율곡은 실천이 독실하고 조예가 고명하다 했으며 계곡은 호남에 이항(李恒)이 나온 뒤 비로소 문명(文明)의 고을이 되었다고 했으며, 임당(林塘)은 근원을 찾고 도의 오묘함을 엿보며 꾸밈이 없이 수수함으로 돌아와 천진(天眞)을 감추었네 라 했으며 우암(尤庵)은 용기를 좋아하여 돌아오는 속도는 풍뢰(風雷)보다 빨랐고 이미 돌아온 후에 싫어하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아 마침내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쌓이는데 이르렀다고 개과천선의 치열한 삶을 칭송했고 남계(男溪)는 학문을 함은 오로지 공맹(孔孟)으로써 표준을 삼아 사서(四書)로 덕에 들어가는 문을 삼았고 평생 스스로 다스림은 거경(居敬)에 한결같아서 동정(動靜)에도 버리지 않아 방심(放心)을 수습하는 것으로써 공부에 힘쓰는 요체를 삼았다고 했으며 사액서원의 글에서 하늘이 호걸(豪傑)을 빼어내어 우연히 종사(宗師)가 되었네. 재능이 뛰어나고 위대한 그릇이여 굳세고 의연한 모양이로다. 호걸스런 습관을 갈고 닦아 정학(正學)에 귀의했네. 발분(發憤)하여 애써 연구하고 전심(專心)으로 힘을 다했네. 격물(格物)과 치지(致知)에 침잠하여 털끝을 나누고 실오라기를 분석했네. 실천의 학문이요 크게 변화한 공이라네. 옛날에 누구와 비슷한가? 송의 장횡거(張橫渠)와 더불어 같도다.
하였으며 더 붙여서는 또한 문장(文墻)을 넘으니 계속하여 위대한 선비가 있도다. 스승이 있고 제자가 있으니 백세(百世)가 다 우러러 보내라하여 선생과 그의 고재들의 치밀한 학덕과 충의(忠義)를 함께 기리고 있다.
추락하는 수레바퀴를 멈추게 하는 그 기백을 뉘라서 감히 말하랴!
첫댓글 성황을 이루시고
많은 발전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