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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영한대역 만화 삼국지 제9권
창천이사 황천당립(蒼天已死 黃天當立) – 새 나라가 서고, 천하가 크게 갈림.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이 죽고 노란 하늘이 일어나니,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해지리라)“
창천(蒼天 Azure Sky)이란 한(漢)왕조를 상징하고, 황천(黃天 Yellow Sky)은 태평도(太平道 the Way of Supreme Peace)를 일컫는 말로 갑자년(184년)에 새 나라가 서고 천하가 크게 길하다는 뜻이다.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
(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이 죽고 노란 하늘이 일어나니,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해지리라.
The Azure Sky is already dead; the Yellow Sky will soon rise.
When the year is jiǎzǐ, there will be prosperity under Heaven!
1. 삼국 시대(三國時代)
삼국 시대(三國時代)는 후한이 멸망한 3세기 초부터 서로 다투던 위(魏), 촉(蜀), 오(吳)를 서진(西晉)이 통일한 3세기 후반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사전적인 의미로는 위(魏)가 세워진 220년부터 오가 진에게 멸망한 280년까지를 삼국시대로 본다. 하지만 후한(後漢)의 통치력은 이미 훨씬 전 황건의 난을 계기로 이미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황건적(黃巾賊)의 난과 그 이후 펼쳐진 군웅할거의 시대 역시 삼국지대의 전초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대중들에게도 오히려 삼국 정립 이후보다 후한 말의 군웅할거 시대가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의 다른 국가들과 이름을 구별하기 위해 역사가들은 이 시대의 삼국들을 각각 위는 조위, 촉은 촉한, 오는 동오 또는 손오라고 부르곤 한다.
비록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동아시아 문화에 큰 영향력을 끼친 시대이다. 삼국 시대는 후대 많은 사람들에게 구전되었고, 오늘날까지도 TV, 영화, 비디오 게임 등 다양한 2차 창작물로 끝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명나라의 나관중이 쓴 삼국시대에 기반을 둔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이다. 삼국지 연의의 인기는 그야말로 엄청나서 오늘날까지도 한자 문명권에서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읽혀지고 있다.
창작물이 아닌 권위있는 정통 역사 기록으로는 진수가 쓰고 배송지가 주석을 단 삼국지가 있다. 이 밖에도 후한서, 산양공일기, 영웅기 및 조만전 등이 당대의 시대상을 해석할 수 있게 도와주는 다양한 관점의 당대 기록들이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아무래도 하나의 강력한 단일정부가 중국을 통치했던 시대가 아니었던 만큼 기록 측면에서는 각각 다양한 관점의 다채로운 해석들이 풍부하게 남은 시대였다.
삼국 시대는 중국 역사 상 가장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운 시기 중 하나였다. 후한 말 인구조사에 집계된 중국의 전체 인구는 약 5천만 정도였으나 중국을 재통일한 서진이 전국 규모로 다시 실시한 인구조사로 파악된 인구는 약 천 6백만 정도에 불과하였다. 단 이것은 100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에 3천만이 넘는 인구가 증발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워낙 정국이 혼란스럽다 보니 많은 인구가 재산을 버리고 도적이나 유랑민이 되었고 혹은 지방 유지들에게 신변을 바치고 농노가 되었기 때문에 인구의 상당 부분이 중앙정부의 행정력을 벗어났던 것이다. 물론 백만이 넘는 사상자를 야기한 이각 곽사의 난처럼 조직적인 대학살도 빈번하게 벌어졌으며 전국 각지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은 만큼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중국 전역이 전쟁터로 전락하면서 생산력이 급감하고 행정력 역시 마비되었기 때문에 굶주림이나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도 많았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삼국정립의 시점을 기준으로 당대 중국의 인구는 약 3천만명 정도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2. 황건적의 난(Yellow Turban Rebellion)
후한은 화제의 재위기 이후 부터 눈에 띄게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내.외부적으로 수많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부딪치게 되었다. 많은 황제들이 최소한의 판단력도 갖추지 못한 어린 나이에 재위에 올랐으며 황제권은 외척의 전유물이 되었다. 황제들이 성년에 이르러도 외척들은 권력을 내주길 꺼려했기 때문에, 황제는 권력을 찾기 위해 환관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한나라 최후의 100년은 환관과 외척 간의 궁중 정쟁이 잠시도 쉬지 않고 이어진 시대였으며 이 100년 간 후한 정부는 사태를 개선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보여주지 못하였다.
반면 지방에서는 관료직을 독점하고 무너진 중농층들을 농노로 거둬들이며 대지주가 된 호족세력들이 실력자로 등장한지 오래였다. 이들은 각자 긴밀한 학연, 지연, 혈연으로 서로 묶여 있었으며 이들의 협조없이 지방을 통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으며 모든 관직들을 이들 호족들이 독점했던 만큼 정부 관료의 수준은 갈수록 저하되었고 유능하지만 명문가 출신이 아니라 출세의 길이 막혀 버린 야심가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 세력으로 변해갔다.
대외 요건도 좋지 않았는데 이 시기 즈음부터 시작된 소빙하기 현상으로 점차 농업 생산력이 감소하였으며 악화되는 기후를 피해 중국으로 이주하려는 이민족들이 빈번한 침입으로 안보 위협도 계속 높아지는 추세였다. 후한이 아직 건재할 때에도 이미 흉노족이 중원의 중앙인 황거강까지 습격해 들어오는 일이 빈번했으며 서쪽의 강족. 저족은 이미 반 독립세력을 갖추어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난지 오래였다.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선 더 많은 군대를 변방에 배치해야 했지만 이미 자영농이 몰락해 버린 후한은 그럴 돈도 인력도 부족했고 결국은 가난한 빈농 혹은 변방의 반 이민족들을 용병으로 사용하는 가장 쉬운 길은 택했다. 비슷한 실수를 저지른 로마제국과 마찬가지로 결국 후한 역시 결국은 사병으로 전락한 이들 용병들로 인해 엄청난 재앙을 겪게 된다.
이러한 후한의 침체기는 환제와 영제의 대에 이르자 극에 달했다. 황제를 좌지우지 하는 환관들과 관료조직을 장악하고 있던 호족 지식계급 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는데, 환관들은 대표적인 명문 호족들을 관직에서 추방하는 일명 당고의 금으로 맞섰다. 단 이런 억압적인 대책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었는데 아무리 환관들이 중앙정부를 장악하고 있다고 해봤자 이미 지방권력과 지식 패러다임을 장악하고 있는 호족들 없이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당고의 금은 당장은 환관의 승리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이 시대의 대표 기득권이 정권을 본격적으로 불신임하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이런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184년 2월, 도교적 교단 태평도의 지배자였던 장각이 형제였던 장보와 장량과 함께 정부를 상대로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장각은 뛰어난 조직력과 상상력의 갖춘 인물이었으며 의지할 곳이 없었던 빈농들을 도교 사상을 종교적으로 덧칠하고 민간 공동체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사로잡았다. 이는 중국 역사 상 최초의 종교 반란이기도 하였다.
난은 급속도로 퍼져 수십만에 이르렀고, 중국 곳곳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36개의 요새를 가지고 있었고, 큰 요새는 만명 이상, 작은 요새는 6~7천명 정도의 군사를 가져 규모만 놓고 보면 한나라 공식 군대보다도 더 규모가 컸다. 그들은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이 죽고 노란 하늘이 일어나니,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해지리라)"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당황한 한나라는 당고의 금을 해제하고 지방의 호족들에게 무장을 하고 황건적에게 대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각지의 실력과 야망은 있으나 신분이 미천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던 숨은 잠룡들도 바로 이 때를 계기로 처음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삼국지연의는 바로 이 시점부터 시작된다. 황건적은 결국 패배하고 중국 각지로 흩어졌지만, 제국의 혼란스러운 상황때문에 살아남아 각지에서 도적으로 살아갔고, 이로 인해 시대의 혼란은 더욱 커졌다.
중국 곳곳으로 퍼진 도적떼들을 다 처리할 능력이 한나라 군대에는 없었다. 188년, 유언은 지방관들이 직접 그 지방을 통치할 수 있게 해달라 영제에게 건의했고, 영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기존에는 제한된 행정권만을 가지고 있었던 지방관들이 사실상 자기 관할지역의 전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는 도적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는 효율적이었으나 야심을 품은 지방관들이 결국엔 군벌화 하면서 중국의 혼란은 더욱 가속되었다.
3. Yellow Turban Rebellion
The Yellow Turban Rebellion, also translated as the Yellow Scarves Rebellion, was a peasant revolt in China against the Eastern Han dynasty. The uprising broke out in 184 AD during the reign of Emperor Ling. Although the main rebellion was suppressed by 185 AD, pockets of resistance continued and smaller rebellions emerged in later years. It took 21 years until the uprising was fully suppressed in 205 AD.[1] The rebellion, which got its name from the colour of the cloths that the rebels wore on their heads, marked an important point in the history of Taoism due to the rebels' association with secret Taoist societies.[4] The revolt was also used as the opening event in the 14th-century historical novel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4. Causes
Further information: History of the Han dynasty and Society and culture of the Han dynasty.
A major cause of the rebellion was an agrarian crisis in the north of China. Famine, along with smaller floods along the lower course of the Yellow River, forced many farmers and former military settlers to seek employment in the south, where large landowners took advantage of the labour surplus and amassed large fortunes.[citation needed] The peasants also suffered from high taxation, imposed to fund the construction of fortifications along the Silk Road and garrisons against foreign infiltration and invasion. The strain led to landowners, landless peasants and unemployed veterans forming armed bands (around 170[citation needed]) and eventually private armies.
At the same time, the Han central government was weakening internally. The power of the landowners had become a long-standing problem, but in the run-up to the rebellion, the court eunuchs in particular gained considerably in influence over the emperor, which they abused to enrich themselves. Ten of the most powerful eunuchs formed a group known as the Ten Attendants, and Emperor Ling referred to one of them (Zhang Rang) as his "foster father". The government was widely regarded as corrupt and incapable and the famines and floods were seen as an indication that a decadent emperor had lost his Mandate of Heaven.
Political discontent, as well as droughts and plagues, fuelled public resentment against the Han government. The Taoist sect of Zhang Jue took advantage of public sentiment to further their plans for a new beginning. Zhang Jue sent disciples out to gain support and organize followers throughout north China in preparation for a revolt. The rebels even had allies in the imperial court, and most government officials were either ignorant of their intentions or intimidated by their power.[5] Zhang Jue intended to launch an uprising throughout the Han Empire, but the plan was betrayed before he was ready. Rebel sympathizers in Luoyang were arrested and executed, and the revolt in the provinces had to begin ahead of time, in the second month of 184. Despite the inevitable lack of co-ordination and overall preparation, tens of thousands of men rose in rebellion. Government offices were plundered and destroyed and the imperial armies were immediately forced on the defensive.[5]
5. The rebels
(1) Founders
The rebellion was led by Zhang Jue (also referred to as Zhang Jiao, known to his followers as the "General of Heaven") and his two younger brothers Zhang Bao (張寶) and Zhang Liang (張梁), who were born in Julu Commandery. The brothers had founded a Taoist religious sect in present-day Shandong. They were healers, usually accepting patients pro bono who could not afford to pay them. The brothers saw how the local government abused the peasants through harsh labour and heavy taxes, leaving them overburdened and hungry.
(2) Taoist sect
The rebels were the first followers of the Way of Supreme Peace (太平道; Tàipíng Dào) and venerated the deity Huang–Lao, who according to Zhang Jue, had given him a sacred book called the Crucial Keys to the Way of Peace (太平要術; Tàipíng Yàoshù) based on the Taipingjing. Zhang Jue, who was said to be a sorcerer, called himself the "Great Teacher" (大賢良師). When the rebellion was proclaimed, Zhang Jue created a 16-word slogan:
The Azure Sky is already dead; the Yellow Sky will soon rise.
When the year is jiǎzǐ,[c] there will be prosperity under Heaven!
(蒼天已死,黃天當立。歲在甲子,天下大吉。)
Since all the three brothers were healers, they easily spread the slogan among the peasants through their patients.
(3) Religious practices
Zhang Jue used a form of Taoism to cure the sick by confession of sins and by faith healing. The religion and the politics of the Zhang brothers were based on belief in an apocalyptic change in the order of the world. They told their followers that in the jiazi year, the beginning of the new sexagenary cycle, the sky would become yellow, and that under this new heaven the rule of the Han dynasty would end and a new era of government begin. The characters jiazi became a symbol of the coming change and, later, when the followers of Zhang Jue went to battle they wore a yellow cloth bound about their heads as a badge. From this came the term Yellow Turbans.
Nearly all of the religious practices of the sect were communal activities (e.g. collective trances, fasts). A typical worship service consisted largely of music and chanting, the burning of incense, and sermons or anecdotes that could be given by any member of the congregation including women and those perceived as barbarians. Several Xiongnu leaders such as Yufuluo are known to have at least lent their support to the sect and a number of scholars have theorised that Zhang Jue may have derived some of his teachings from shamanism as he appeared as a mystical healer with a direct link to the heavens.
While many of the beliefs of the early Path of Supreme Peace have been lost, it is very likely that they had some relation to the Way of the Celestial Masters, considering Zhang Jue claimed to be a descendant of Zhang Daoling. Many of the writings found in the 52 surviving chapters of the Taiping Jing that are found in the Daozang have a direct relationship to the Way of the Celestial Masters. Regardless, it is quite likely that any discrepancies found within the Way were suppressed by later Taoist sects.
(4) Zhang Jue's plans for rebellion
Before the rebellion started, Zhang Jue had sent Ma Yuanyi (馬元義) to recruit followers from Jing and Yang provinces and gather them in Ye. As Ma Yuanyi frequently travelled to Luoyang, the Han imperial capital, he managed to build connections with Feng Xu (封諝) and Xu Feng (徐奉), two members of the influential eunuch faction in the imperial court, and convince them to secretly collaborate with Zhang Jue. They set 3 April 184 as the date for the rebellion, but before the plans was set in motion, the Yellow Turbans were betrayed. One of the founders of "The Way of Peace" movement, Tang Zhou (唐周) had been left out of the Zhang brothers' further plans, so he reported Ma Yuanyi to the authorities. Ma Yuanyi was arrested and executed by dismemberment in Luoyang.[9][5]
After Emperor Ling learned that Zhang Jue was plotting a revolt, he ordered Zhou Bin (周斌), Prefect of the Palace Parks (鉤盾令), to conduct an investigation and capture all the conspirators. Hundreds of people were arrested and executed during this time.[10]
(5) The yellow rebellion
When Zhang Jue heard that the Han government had caught wind about his plans to rebel, he quickly sent messengers to contact his allies throughout China and take action immediately. Sometime between 29 February and 29 March 184, Zhang Jue started the Yellow Turban Rebellion with some 360,000 followers under his command, all of whom wore yellow headscarves or turbans. He called himself "Lord General of Heaven" (天公將軍), while his brothers Zhang Bao and Zhang Liang were respectively called "Lord General of Earth" (地公將軍) and "Lord General of People" (人公將軍). The rebels attacked government offices, pillaged counties and villages, and seized control of commanderies. Within 10 days, the rebellion had spread throughout China and caused much alarm to the Han imperial court in Luoyang.
The rebels were mostly concentrated in Ji, Jing, You and Yu provinces. The group led by Zhang Jue and his brothers gained their support in Ji Province, located just north of the Yellow River, near Zhang Jue's home territory of Julu Commandery (around present-day Pingxiang County, Hebei) and Wei Commandery (around present-day Handan, Hebei). A second major uprising took place in Guangyang Commandery (around present-day Beijing) and Zhuo Commandery (around present-day Zhuozhou, Hebei) in You Province. The third centre of the rebellion was in Yingchuan Commandery (around present-day Xuchang, Henan) and Runan Commandery (around present-day Xinyang, Henan) in Yu Province, and Nanyang Commandery (around present-day Nanyang, Henan) in northern Jing Province.
On 1 April 184, Emperor Ling appointed his brother-in-law He Jin, the Intendant of Henan (河南尹), as General-in-Chief (大將軍) and ordered him to supervise the imperial armies to suppress the rebellion. At the same time, Emperor Ling also appointed three generals – Lu Zhi, Huangfu Song and Zhu Jun – to lead three separate armies to deal with the rebels. Lu Zhi went for Zhang Jue's base in Ji Province, while Huangfu Song and Zhu Jun headed to Yingchuan Commandery.[14] They had a total of about 40,000 troops.
6. 권력을 잡은 동탁(董卓)
이듬해에 영제가 죽자 한나라의 조정은 황제가 교체될 때마다 언제나 그랬듯이 외척과 환관 간의 싸움터가 되었다. 환관 건석은 외척이었던 대장군 하진을 죽이고 왕세자자리에 올라있던 유변을 대신해 유협을 왕세자로 바꿀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유변은 황제가 되어 소제가 되었고, 하진은 당시 대표적인 명문집안이었던 원씨 일가의 젊은 동량이었던 원소와 함께 그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장양이 수장으로 있던 환관 무리 십상시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하진은 또한 양주의 동탁과 병주의 정원에게 병력을 보낼 것을 명했다. 그러나 십상시는 이를 알아차렸고,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기 전에 하진을 암살했다. 그러자 원소는 궁을 급습해 십상시와 2천여명의 환관들을 살해했다. 이로써 외척들과 환관들의 긴 싸움은 끝났지만 이는 중앙정부의 몰락과 군벌 들간의 전쟁이라는 훨씬 심각한 혼란의 시대를 열었다.
하진을 부름을 받고 진군해 온 동탁은 수도 인근에서 이러한 정국을 살피고 있다가 수도가 혼란에 빠지자 갑작스럽게 행동에 나서 황제의 신변을 차지하고 정권을 훔친다. 당시 중국은 북서쪽 국경에서 창족과 전쟁중이었고, 이로 인해 동탁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잘 훈련된 군대를 사병으로 가지고 있었다. 동탁은 순식간에 수도를 장악했고 하진이 죽어 머리를 잃은 중앙군마저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 장악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정원이 이끌던 병주군을 군내 2인자였던 여포를 꼬득여 정원을 죽이게 하는 방법으로 흡수해 버리니 더이상 동탁에 대항할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그는 소제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유협을 헌제로 즉위시킨 뒤 새 황제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동탁은 처음에는 한나라의 권위를 세우고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힘과 카리스마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변방의 군벌로써는 뛰어났을지언정 훨씬 더 교묘한 조종 능력이 요구되는 정치가로써는 낙제 수준이었다. 그의 행동은 점차 폭력적이고 권위적으로 변했으며, 그에 반대하는 사람을 모두 처형하거나 멀리 유배를 보냈고, 황제에 대한 존경 역시 점차 없어졌다. 그는 왕실의 예절을 모두 무시했으며, 궁궐에 무기를 가지고 다녔다.
이에 대한 반발로 동탁을 피해 도주했던 원소의 주도 하에 190년에 반동탁 연합군이 조직되었다. 191년 5월, 손견에게 패배해 휘하 부하 중 화웅을 잃는 등 상황이 악화되었으며 계속된 패배에 결국 동탁은 헌제를 데리고 장안으로 도망쳤다. 도주하는 과정에서 동탁은 낙양에 살던 수백만의 거주자들을 장안으로 강제이주 시키면서 그의 정치적 무능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그는 반동탁 연합군이 낙양을 점령하지 못하게 낙양을 불태웠고 결국 그 당시 중국에서 가장 큰 도시를 불태우는 일을 저질렀다. 게다가 그는 군사들에게 지나가면서 보이는 마을의 주민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했다. 군사들은 주민들의 목을 베어 장안으로 가져왔고 이를 전쟁에 승리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전리품으로 사용했다. 끊임없는 폭정 끝에 동탁은 왕윤과 여포의 쿠데타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었다.
7. 조조(曹操)의 대두
191년, 연합군 사이에서는 황실의 친척이었던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점점 연합군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몇몇 군주들을 제외한 나머지 연합군주들은 한나라의 재건보다는 자신의 힘을 더 강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 결국 중국은 수많은 야심가들이 각각 한 조각 씩 땅을 차지하고 패권을 다투는 군웅할거의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원소는 업의 북쪽 지역을 그의 상관이었던 한복으로부터 빼앗아 차지했으며 십상시를 제거했고 동탁에 맞서면서 쌓은 정치적 위명과 특유의 뛰어난 정치력으로 빠르게 세력을 키워갔다. 북쪽 국경지대에는 강력한 기병을 거느리고 있어 군사력만 놓고 보면 동탁 이상이었던 공손찬이 버티고 있었다. 장양은 갈 곳 잃은 유랑민들을 모아 백만 명에 가까운 흑산적을 조직했다. 원씨 집안의 적통 후계자였던 원술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부유했던 남양 일대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으며 유표는 지방 유지들과 연합세력을 구축하여 형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강동의 호랑이라고 불렸던손견은 비록 비명횡사 했으나 그가 남긴 충실한 측근들의 도움으로 아들 손책은 강남 일대에서 세력을 열심히 키우고 있었다. 서쪽은 유장이 익주를 손에 쥐고 왕 노릇하였으며 그 북쪽에는 마등등 수많은 군웅들이 자기 사병을 키우고 있었다.
동탁은 여포와 사도 왕윤에게 살해당했다. 하지만 여포는 동탁의 부하들(이각, 곽사, 장제, 번조)의 연합군에게 반격을 당했고 여포는 천하를 종횡하였다.
195년 8월, 헌제는 이각과 곽사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장안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위험한 방랑을 하면서 자신을 지지해줄 사람을 찾았다. 한나라의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에겐 어떤 권위도 권력도 없었으며 탈주한 그를 따르는 백관은 고장 백여 명 남짓에 불과했으며 식량도 구하기 어려워 그날 그날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군벌들은 황제를 돕는데 소극적이었는데 대부분 한나라 황실의 보호자라는 명망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장기적 이익보다는 당장 눈 앞의 이익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여전히 막강했던 이각 곽사의 군대와 대결하는 것 역시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도 황제를 보호하고 군벌들 위에 서려고 하는 순간 다른 모든 실력자들의 공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황제 호위는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조조는 모사 순욱의 제안에 따라 군을 이끌고 이각 곽사와 대결하여 승리하고 황제의 신변을 확보하게 된다.
조조는 189년 겨울에 군사를 일으켰다. 뛰어난 군 지휘관이자 전략과 전술에 밝았던 조조는 황건 잔당을 격파하며 세력을 키워갔고 이후 장막, 진궁등과 의기 투합하면서 연주 지역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다. 이후 그는 자신이 격파한 황건 잔당 중 정예 병사만을 모아 청주병이라는 특수 부대를 조직하였다. 군대의 규모보다 질을 중요시했던 조조는 평시에도 모든 것을 공유하는 생활 공동체 형태의 군대인 청주병을 조직했고 이들은 이후 수년 간의 집중적인 훈련과 실전경험을 통해 당대 가장 전투력이 높은 정예부대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194년, 조조는 서주의 도겸을 상대로 전쟁을 했는데, 이는 도겸의 부하였던 장개가 조조의 아버지 조숭을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도겸은 유비와 공손찬의 도움을 받았으나, 조조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서주가 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조조는 자신이 없는 동안 여포가 연주에 침략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도겸에 대한 전쟁을 잠시 미루고 후퇴했다. 도겸은 그해 사망했고 서주를 유비에게 물려줬다. 이듬해인 195년, 조조는 여포를 연주에서 쫓아냈다. 여포는 서주로 도망갔고, 유비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이번엔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갈취한다.
196년, 헌제의 신변을 확보한 조조는 파괴된 낙양 대신 허창으로 수도를 바꾸고 파산한 빈농들에게 빈 땅을 나누어 주고 집단 농장으로 운영하는 둔전제를 시행했다. 비록 높은 세금(농산물의 40~60%)을 부과하기는 했지만, 농부들은 안정적으로 군사들에게 보호를 받으며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둔전제의 성공으로 조조는 빠르게 전후 재건에 성공하면서 경제력으로 주변의 경쟁자들을 앞서게 되었다.
조조가 황제를 등에 업고 정치적 명분을 차지하자 197년에 원술은 중 (후한)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다른 군벌들의 분노를 불러온 실수였고, 또한 그의 부하였던 손책과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손책은 장굉과 공동으로 격문을 작성해 원술에게 스스로 황제가 되기를 중단하라 했으나 원술이 이 조언을 듣지 않고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자 손책은 이것을 명분으로 삼아 원술에게서 독립하였다. 이후 손책은 양주의 군주들이었던 유요, 왕랑, 엄백호를 차례로 물리치고 강남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게 된다. 이에 조조는 손책, 유비, 여포 등과 연합을 하고 원술을 격파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적을 하나씩 무너뜨리려는 조조의 계책이었으며 애초부터 손책, 유비, 여포 모두 조조에겐 굴복시켜야 할 정적들일 뿐이었다. 이번엔 조조는 여포에게 배신을 당했던 유비를 이용해 서주를 공격했다. 여포는 조조의 치밀한 계략에 빠져 자기 실력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고 결국 조조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한다.
원술과 여포가 멸망하자 이제 중원 지역에서 조조에게 맞설 수 있는 상대는 없었다. 조조는 하북을 장악한 원소와의 대결을 준비하며 조정에 대한 영향력을 보다 확고하게 다지는 한편 둔전제를 중원 전역으로 확대 실행하였다.
200년, 외척이었던 동승은 헌제로부터 지나치게 권력이 커진 조조를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았다. 그는 유비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했으나, 조조에 의해 발각되어 유비를 제외한 공모자들은 모두 처형되고, 유비는 북쪽의 원소에게로 도망쳤다.
황건 잔당들의 반란과 궁 내부의 위협들을 처리한 뒤, 조조는 공손찬을 상대로 승리한 원소에게로 눈을 돌렸다. 본래 명성도 세력도 조조보다 몇 수나 위였던 원소였으나 지난 몇년 간 무서운 기세로 성장한 조조에 대한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원소는 10만이 넘는 군대를 조직해 남하를 강행한다.
전쟁이 임박했을 때 원소의 승리를 점치는 의견이 다수였다. 비록 조조의 세력이 무섭게 커졌다곤 하지만 여전히 가용 가능한 자원에서 원소가 우위였다. 공손찬을 멸망시키고 당대 최강의 기병대를 손에 넣은 것 역시 원소의 장점이었으며 전국 각지에는 원소와 학연과 지연으로 묶여 있는 호족들이 널려 있었다. 또한 사방이 안정되어 있었던 원소와 달리 조조는 서쪽에는 마등, 남쪽에는 유표와 손책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가지고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원소와의 대결에 전 병력을 동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단 조조에겐 다행히도 손책은 내부 반란자의 암살 시도에 걸려 사망했고 유표는 끝끝내 무엇이 유리한지를 놓고 재기만 하다가 기회를 놓친다.
조조는 관도 대전에서 원소와 충돌했다. 군사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승리했는데, 특히 원소의 군량창고에 불을 질러 군대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이때 조조는 불과 5천명의 병력만을 거느리고 자신이 직접 사지에 들어가는 과감함을 보여주었다. 유비는 형주의 유표에게로 도망쳤고, 원소의 군대는 궤멸되었다. 202년에, 조조는 원소의 죽음과 이후 원소의 아들들의 내분을 기회로 삼아 황하 북쪽으로 진격했다. 그는 204년에 업을 함락시키고, 기주, 병주, 청주, 유주를 차례로 점령한다. 207년에는 이보다 더 나아가 오환을 상대로 한 북방 정벌에서 승리를 거둔 후 화베이 평원에 대한 확실한 지배권을 얻었다. 이로써 북중국 전역이 조조의 손에 들어가게 되니 사실 상 중국의 절반을 조조 한 사람이 제패한 형국이 되었다.
8. 적벽대전(赤壁大戰) Battle of Red Cliffs
208년에, 조조는 제국을 통일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유표의 아들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하고 형주를 넘겼으며, 조조는 거대한 수군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장강 남쪽을 지배하고 있던 손책의 후계자 손권은 여전히 저항을 계속했다. 손권의 모사 노숙은 북쪽에서 도망쳐 온 유비와 동맹을 이끌어냈고, 주유는 손가를 섬기던 노장 정보와 함께 손권의 해군 제독에 임명되었다. 그 해 겨울,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 5만 군대는 적벽에서 조조의 대함대와 20만 군대와 격돌했다. 압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황개의 거짓 투항과 화공계의 성공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조조는 패배해 북으로 후퇴했고 이 때 생겨난 힘의 공백을 틈타 유비와 손권은 각각 촉과 오를 세울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된다.
북쪽에 돌아 온 후, 조조는 회복기를 거쳐 다시 세력을 복구했고 211년에는 다시 팽창정책으로 나서 북서쪽 강족.저족을 병합하였다. 217년에는 그가 조종하는 헌제에 의해 위왕에 올랐다.
한편 유비는 적벽대전의 승세를 입고 형주의 태수들이었던 한현, 금선, 조범, 유탁을 물리치고, 214년에는 유장이 통치하던 익주를 점령하면서 천하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된다.
어린 후계자였던 손권은 적벽 전투를 계기로 당당한 지도자로써의 권위를 획득하였다. 하지만 형주의 소유권을 두고 유비와의 갈등은 깊어져 갔고 둘의 연합은 갈수록 위태로워진다.
219년, 유비가 조조에게서 한중을 빼앗자 조조는 더 이상 유비의 세력확대를 두고 볼 수 없었기에 몰래 손권과 동맹을 맺고 형주를 쳤다. 손권의 장수여몽에 의해 관우는 잡혔고 결국 처형당했다.
9. 삼국의 정립
220년 1월, 조조가 죽고, 그해 10월 조조의 아들 조비가 헌제에게 황제 자리를 내놓을 것을 강요했고, 결국 한나라는 멸망했다. 조비는 낙양에서 자신이 황제임을 선언하고, 국가의 이름을 위로 했다. 221년, 유비는 멸망한 한을 재건하기 위해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했다. 같은해에 위는 손권에게 오왕의 자리를 수여했다. 1년 후에, 촉은 관우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으로 오에 전쟁을 선포했다. 유비는 손권의 지휘관 육손에 의해 대패하고, 촉으로 후퇴한 뒤 곧 사망했다. 유비가 죽은 후, 오와 촉은 위를 상대하기 위해 다시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222년, 손권은 조비가 내려준 직책을 거부했고, 229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북쪽은 완전히 위가 점령했고, 남서쪽은 촉이, 남쪽과 동쪽은 오가 지배했다. 국경 외부는 중국 사람들에게는 제한된 곳이었다. 예를 들어, 촉의 정치적 지배권은 남쪽(현재의 윈난성과 미얀마)의 남만에 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10. 안정
223년, 유비가 패배하고 사망하자 유선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패배한 후 촉과 오의 적대기간은 끝났으며, 두 국가 모두 내부 문제와 외부의 적(위)에 집중하기를 원했다. 손권은 이 전쟁의 승리로 촉이 형주를 노릴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났고, 이후 남동쪽의 원주민이었던 백월에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224년, 제갈각은 약 십만명의 백월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면서 3년간에 걸친 전쟁을 끝냈다. 그들 중 약 4만명 정도가 오의 군사에 편입되었다. 그동안 촉 역시 남쪽의 원주민들에 의해 골치를 썩고 있었다. 남만은 촉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익주의 도시들을 점령했다. 제갈량은 남쪽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촉군에게 남쪽으로 진격할 것을 명했다. 그는 남만의 대장 맹획과 몇번의 전투를 벌였고, 결국 맹획은 항복했다. 남만인들은 촉의 수도였던 성도에서 사는 것이 허락되었고, 또한 군대에도 남만부대가 생겼다.
11. 제갈량의 북벌
제갈량의 남만 정벌이 끝나자, 촉은 북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227년에 제갈량은 촉의 주력 군대를 한중으로 이동시켰고, 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듬해에 제갈량은 조운과 함께 기산을 공격했다. 그러나 선봉이었던 마속이 가정 전투에서 전략에 의해 패배를 하고 만다. 그 후 6년동안 제갈량은 몇번의 공격을 더 했으나, 물자 공급문제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 234년 제갈량은 마지막 북벌을 감행했고, 웨이허남쪽의 오장원에서 전투를 했다. 그러나, 그해 제갈량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한번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12. 오(吳)와 남쪽
제갈량이 북벌을 할 동안, 오나라는 위나라가 침입하는 것을 계속해서 막고 있었다. 특히 합비근처는 적벽 대전 이후부터 계속해서 오와 위 사이의 긴장이 계속되고 있던 지역이었다. 계속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합비의 거주자들은 결국 장강 남쪽으로 이사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갈량이 죽은 뒤, 화이허남쪽에 대한 위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는 오의 수비선을 쉽게 뚫을 수 없었다.
손권의 긴 재위기는 오나라의 전성기로 여겨지고 있다. 북쪽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과 백월족 이주민들로 인해 농사를 지을 인력이 풍부해 졌다. 또한 바다를 통한 운송업도 발전해 만주나 타이완등으로의 바다 여행도 가능해졌다. 오의 상인들은 현재의 베트남 북쪽 지역이나 캄보디아 등과도 교역했다. 경제가 번영한 것과 같이 문화나 예술 역시 발전했다. 낙양남쪽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 역시 이때였다.
13. 삼국 시대의 끝
230년대 후반부터 조씨 가문과 사마씨 가문사이의 긴장감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조진이 죽은 후, 조상과 사마의간의 파벌싸움이 시작되었다. 조상은 그와 가까운 사람들을 요직에 앉혔으며,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사마의를 배척했다. 위나라에서 땅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던 가문 중 하나였던 사마씨 가문은 사마의의 군사적 성공에 힘입어 그 세력이 커졌다. 게다가 사마의는 매우 능력있는 전략가이자 정치가였다. 238년에 사마의는 공손연의 반란을 진압하고 랴오둥 반도를 정부의 직접통치하에 두었다. 결국, 그는 조상과의 힘싸움에서 이긴 셈이었다. 조상과 그의 가족들이 고평릉으로 간 틈을 타 사마의는 낙양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사마씨 가문에 대해 대항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죽림칠현이었다. 죽림칠현중 하나였던 혜강은 조상의 몰락 이후에 사마의에 의해 처형당했다.
14. 촉(蜀)의 멸망
제갈량이 죽은 후, 그가 차지하고 있던 승상자리는 장완과 비위, 동윤이 차지했다. 그러나 258년 이후, 촉의 정치는 환관들에게 조종당했고 점차 부패하기 시작했다. 제갈량의 후임이었던 강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촉은 점점 무너져 갔다. 263년에 위는 세갈래로 공격을 진행했고, 촉군은 한중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강유는 황급히 검각에 수비진을 폈으나, 사람이 다니지 않았던 험준한 지역인 음평을 통해 진군해 온 위의 등애에 의해 측면을 공격당했다. 그해 겨울 등애에 의해 수도인 성도가 함락되고, 황제 유선은 항복했다. 결국 촉나라는 43년 만에 멸망했다. 유선은 낙양에서 위나라에 의해 "안락공"에 봉해졌다.
15. 위(魏)의 멸망
260년 조모가 사마소를 죽이려 했다가 오히려 사마소에게 살해당한 후, 그 뒤를 이어 조환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곧이어, 사마소가 죽고 그의 "진왕"직은 아들 사마염이 물려받았다. 사마염은 바로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품었으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신하들의 간언에 따라 조환은 조모와는 달리 황제의 자리를 내어 줄 생각을 하게 되었다. 265년, 사마염은 조환에게서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아 위를 멸망시키고 진을 세웠다. 이것은 46년 전 조비가 한을 멸망시킨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16. 오(吳)의 멸망
손권이 죽은 후 어린 손량이 252년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오는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촉의 멸망은 위나라가 오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선이 항복한 후 사마염(사마의의 손자)은 265년, 위의 황제를 몰아내고 진의 새로운 황제가 되면서 46년간 이어진 조위를 멸망시켰다. 진이 생겨난 후 오의 황제였던 손휴가 사망했고, 신하들에 의해 손호가 황제에 자리에 올랐다. 손호는 촉망받던 영재였으나,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급격히 포악해져 자신에게 간언을 하는 신하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269년, 진의 남쪽을 지휘하고 있던 양호는 왕준과 함께 지금의 쓰촨성 지역에서 오를 정벌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4년후, 오나라의 육항이 유능한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278년 말엽에 왕준을 비롯한 여러 중신들이 사마염에게 손호가 지배하는 지금이 아니면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없다고 조언했으며 사마염은 이를 받아들여 오토벌을 명령했다. 279년 겨울, 사마염의 명에 의해 진이 공격을 시작했고, 쓰촨 성 지역의 함대는 강을 따라 형주로 향했으며, 창 강을 따라 건업(현재의 난징시)에서 강릉까지 다섯군데를 동시에 공격했다. 이런 맹공에 결국 건업은 280년 3월에 함락당한다. 손호는 항복하고, 봉토를 받아 그 봉토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로써 삼국 시대는 끝났고, 약 300여년간의 혼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7. 인구
황건적(黃巾賊)의 난 이후에 중원에 심각한 기근이 왔다. "170년 봄에, 하내의 몇몇 부인이 남편을 먹었고 하남의 몇몇 남편이 부인을 먹었다"[출처 필요]라는 기록처럼 식인 풍습이 널리 퍼졌다. 동탁이 집권하고서 군대를 동원해 많은 여자를 납치하고 강간했다. 동탁 반대하는 연합이 결성되자 동탁은 낙양의 백성에게 낙양의 모든 궁궐과 절과 공관서와 민가를 불태우고 장안으로 이주하라고 갑자기 명령했고 인구는 결국 급감했다. 조조가 서주를 침략했을 때 백성 수십만 명을 생매장했고 강은 막혀 마을이 회복되지 못했다. 이각 (후한)이 관중 (지명)을 침략했을 당시 백성 수십만 명이 있었고 이각의 명령하에 군대가 약탈해 결국 서로 잡아먹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삼국시대의 인구 감소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후한 말기에서 서진으로 통일될 때까지 125년밖에 안 되는 기간이었으나 인구는 약 35%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 후 수 시대까지도 인구가 회복되지 못했고 인구 중에 군사 비율이 매우 높은 시기였다. 예컨대 촉의 인구가 900,000명이었을 당시 군사는 100,000명으로 군사가 전 국민의 10% 이상을 차지했다. 《삼국지》에 삼국시대의 인구가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다른 많은 역사 기록이 그렇듯이 이 인구 수도 실제 인구 수보다 적은 수일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은 인구조사가 부정확했을 수 있고 세금 회피자들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라서 《삼국지》 모든 시기(184년~280년)의 중국 인구 수는 3,000만 명에서 5,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18. 삼국시대의 인구
19. 경제
후한(後漢) 말기, 자연재해와 사회적 불안정때문에 경제 상황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고, 결국 많은 농지가 버려졌다. 몇몇 지방관리들과 귀족들은 그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요새를 세우고, 농사를 지어 점차적으로 자급자족 체제를 마련했다. 이런 요새와 영지체계는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왕실의 몰락으로 인해, 헌 동전을 녹여서 주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돈을 주조했기 때문에, 국가가 아닌 개인이 주조한 동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삼국시대에는 새로 주조한 동전은 화폐로써의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비단과 곡식들이 화폐의 역할을 주로 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지역적인 분열은 결국 후의 경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삼국시대로부터 약 700년이나 지난 북송시대에도 중국의 지역 경제권은 크게 3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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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영한대역 칼라 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제9권 P182 - P183) / 아래 스캔 자료 참조
- 저자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21st C.E.T.A.)
- 출판사 : (주)파우스트 칼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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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각(張角, ? ~ 184년) Zhang Jue
장각(張角, ? ~ 184년)은 중국 후한 말기의 종교 지도자로, 기주 거록군 사람이다.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1) 태평도(太平道 the Way of Supreme Peace) 창시
장각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사상에 심취하여 도교의 경전인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 등을 공부하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대현량사(大賢良師)라 칭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태평도(太平道)라 이름붙였다. 병든 이가 찾아오면 부적을 태운 물로 치료하고 잘못을 뉘우치면서 절하도록 했다. 병이 낫는 경우가 생기자 장각의 명성이 점점 높아져 장각을 신처럼 여기며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윽고 장각의 명성이 중국 북부지역에 널리 퍼지자 당시의 정치에 실망해 있던 백성들 중에서 태평도에 귀의하는 사람이 많아져 신도 수가 수십만에 달했다. 어떤 이는 가산을 처분하고 장각에게 오기도 했으며, 장각에게 병을 치료받으러 오다가 죽는 경우도 있었다. 사태를 심각하게 본 일부 신하들은 영제(靈帝)에게 상소를 올렸으나 이를 대수롭지 않게 본 영제는 별다른 손을 쓰지 않았다.
(2) 거병
183년, 장각은 규모가 커진 태평도를 이끌어갈 36명을 방(方)에 임명하였는데, 지휘하는 신도 수가 만여 명 정도면 대방(大方), 6~7천 명이면 소방(小方)이라고 했다. 태평도의 구호로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이 죽고 노란 하늘이 일어나니,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해지리라)>을 내세우고 백성들이 푸른 하늘에 해당하는 한나라가 망하고 노란 하늘에 해당하는 새 세상이 올 것이라고 여기게 했다. 또 대방 마원의(馬元義)에게 낙양의 환관인 중상시(中常侍) 봉서(封諝)와 서봉(徐奉)에게 장각의 거사에 맞춰 낙양에서 호응하도록 했다. 그러나 184년 초에 장각의 제자 당주(唐周)가 조정에 이 사실을 알리자, 마원의는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장각은 계획을 바꾸어 전국의 방(方)들에게 명령을 내려 한꺼번에 봉기하게 하고 병사들의 머리에 노란 수건을 두르게 했는데, 이로 인해 장각의 무리가 황건적(黃巾賊)으로 불리게 되었다. 장각 자신은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칭하고 형제 중 둘째 장보(張寶)는 지공장군(地公將軍), 셋째 장량(張梁)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이 되어 황건적들을 지휘하게 했다.
전국 각지에서 황건적들이 봉기하자 당황한 조정은 하진(何進)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노식(盧植), 황보숭(皇甫嵩), 주준(朱儁)에게 황건적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당고의 금으로 인해 쫓겨났던 사람들을 사면하고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처음에는 황건적이 우세했으나, 황보숭이 조조(曹操)와 함께 장사(長社)에서 파재(波才)가 이끄는 수만 명의 황건적을 무찌른 후 관군에게 밀리게 되었다.
한편 장각 자신은 북중랑장(北中郞將) 노식에게 연달아 패하여 하북의 광종(廣宗)에서 관군에게 포위당했다. 그러나 노식이 조정에서 감찰 나온 좌풍(左豊)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벼슬에서 쫓겨난 덕에 위기를 넘겼다. 조정에서는 동탁(董卓)을 노식의 후임으로 임명했으나, 동탁은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하여 황보숭이 장각과 맞서게 되었다.
10월에 황보숭은 장보가 이끄는 황건적에게 대승을 거두었는데, 그때 장각은 이미 병으로 죽어 있었다. 황보숭은 장각의 시체가 든 관을 부수고 부관참시하여 머리를 잘라 낙양으로 보냈다. 이후 황건적은 급속히 무너져 관군에게 진압당했으나, 각지에 남아 있던 잔당들은 수년 동안 저항을 계속하였다. 또 한 왕실의 위상이 무너진 데다가 황건적 진압을 구실로 거병했던 제후들이 황건적의 뒤를 이어 각자 봉기하여 군웅할거상태가 되었다가 세 개의 세력이 최후까지 남아 중국의 삼국시대가 도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3) Zhang Jue(died 184) was a Chinese military general and rebel. He was the leader of the Yellow Turban Rebellion during the late Eastern Han dynasty of China.[1] He was said to be a follower of Taoism and a sorcerer. His name is sometimes read as Zhang Jiao, since the Chinese character of Zhang's given name can be read as either "Jiao" or "Jue". "Jue" is the traditional or literary reading, while "Jiao" is the modern or colloquial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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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명작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
출생 – 사망 : 1162 ~ 1227
재위 기간 : 1206 ~ 1227
지역 : 아시아 대륙
왕조 : 몽골 제국
거대한 몽골 제국은 동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양사에 공포의 상흔을 남긴 징기즈칸, 그리고 몽골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1) 배경 - 동방 왕의 전설
리처드 왕의 십자군도 만족스러운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하고 유럽 세계가 이슬람과의 오랜 싸움에 염증이 났을 무렵, "적국 이슬람의 동쪽 저편에 기독교도들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왕은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즉 '사제 요한'이라고 한다"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방에서 이슬람과 싸우면서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노리고 있다는 이 왕의 이름은 서방의 '십자군' 사이에 하나의 구세주의 전설로서 사실인 양 퍼져 나갔다. 전설의 근원이 된 것은 당시 위구르와 몽골 고원의 일부에서 널리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派) 기독교(景敎)의 일부인데 그 실체는 전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이 허상을 바라고 있었다. 페쇄된 시대에 성스러운 왕이 동방에서 나타나 이슬람군을 격파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희망대로 동방에서 전설의 왕이 왔다. 하지만 그 왕의 이름은 징기즈칸이었다.
(2) 태생 - 몽골의 고아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13세기 초이다. 당시 몽골 고원에서는 위구르 유목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 3세기 반에 걸쳐 분열과 할거(割去)가 이어졌다. 요(遼)를 비롯한 주위 국가들은 모두 몽골의 유목 부족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흉노(匈奴), 돌궐(突厥)같이 하나가 된 부족 연합은 틀림없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유력한 부족이 나타나면, 그 대항마(對抗馬)를 지원하여 서로 싸우게 했고 그래도 안 될 때는 대군을 북벌(北伐)하게 하여 직접 격파했다. 경연(硬軟) 양면에서 간섭한 결과 유목 부족들이 통일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遼)가 금(金)에 쓰러지고 멀리 중앙 아시아에서 서요(西遼)가 된 이 당시에는 몽골 고원에 대한 압박도 다소 느슨해져 있었다. 사실, 이 시대에 이르면서 몽골 부(部)는 통일되었고, 칸도 3대째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목 부족 사이에서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몽골 고원 전체를 하나의 군단(軍團)으로 통일할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징기즈칸, 그의 어릴 때 이름은 테무진이었는데 초년 시절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쿠트라 칸의 뒤를 이어 몽골 부의 제4대 족장에 오를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으나 테무진이 어렸을 때 숙적(宿敵) 타타르 부(部)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러자 에스게이를 따르던 타이치우트 씨족은 손바닥 뒤집듯이 테무진을 배신했고, 테무진의 복수를 염려해 어린 그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난세에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을 배척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각별히 사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무진이 어리고 힘이 없을 때 제거하려 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테무진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호에른의 엄한 교육 때문에 테무진은 아주 가혹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테무진을 비롯한 4형제가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때 에스게이의 또 다른 아내의 아들, 이복형제 두 명이 찾아와서 그들이 낚은 고기를 빼앗았다. 테무진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데, 어머니는 형제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테무진은 남동생 카사르와 활을 들고 집을 나가 이복형제를 앞뒤에서 공격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집으로 돌아온 두 아들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어머니는 "같은 집안 사람끼리 싸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테무진을 꾸짖었다고 한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조용히 참으며 살 리가 없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눈에 불이 있고 얼굴에 빛이 있는' 소년 테무진과 소녀 보르테를 약혼하게 한 것은 아버지 에스게이였지만 정식 결혼은 그로부터 9년이 지나서야 성사되었다. 이때 보르테가 갖고 온 결혼 선물 크로텐(검은담비) 가죽옷이 테무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 크로텐 가죽옷은 매우 고가품이었고 유목민 사이에서 진귀한 옷이었다. 테무진은 이 털가죽을 가지고 케레이트 부(部)의 군주 토오릴 칸에게 찾아갔다. 토오릴 칸은 선친 에스게이의 친한 친구였고 그를 같은 편으로 만들면 100만의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테무진은 몽골 고원 최대의 군주를 우군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이용하려는 과감한 도박에서 결국 이겼던 것이다. 크로텐 모피에 기분이 좋아진 토오릴은 기뻐하며 말했다.
"답례로 너의 해산된 씨족 사람들을 모아 주마."
(3) 인격 - '유린하라'고 초원은 말했다
유목민의 생활은 가혹한 편이다. 으레 초원이라고 하면 초목과 바람, 끝없이 높은 하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기후는 1년 중 짧은 여름에 불과하며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혹독한 추위 속에 갇힌다. 1월의 평균 기온은 영하 26.1도. '눈에 방목된 소의 머리가 얼어서 깨지거나' '쇠꼬리가 얼어붙어서 뚝 잘려 땅에 떨어지기도' 하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유목민들이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확한 판단력과 단호한 행동력이 없으면 유목 생활을 해나갈 수 없으며 그것이 몽골 제국 전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가 쾌락과 기쁨으로 삼는 것은 모반인(謀叛人)을 유린하고 적을 정복하여 재산을 박탈하고 그 시종들의 눈, 코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며, 그들의 살진 말을 타고 그들의 아내를 나의 침상으로 삼아 그 장미 같은 뺨을 애무하고 진홍빛 입술에 입맞춤하며 끌어당기는데 있다"고 말했다.
징기즈칸의 이 잔학성은 젊을 때 겪은 여러 굴욕적인 사건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며 아내를 빼앗기고 아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들을 낳은('징기즈칸의 큰아들' 박스 글 참조) 데 대한 분노는 마음 속 깊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징기즈칸이 단순히 어두운 분노에 자극받아 행동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떤 분노에도 좌우되지 않는 냉철함, 그것이 징기즈칸이 무서운 진짜 이유였다. 그의 냉철함과 지략(智略)은 원정(遠征)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4) 징기즈칸의 큰 아들
징기즈칸의 아내 보르테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키드족에 의해 납치당했다. 그녀는 토오릴 칸이 9개월 동안 교섭을 벌인 끝에 징기즈칸에게 돌아올 수 있었는데, 돌아온 직후에 사내아이를 낳는다.
징기즈칸은 아들의 이름을 주치[朮赤]라 했는데, '객인(客人)' 즉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보르테가 남편에게 돌아오는 도중에 뜻하지 않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과 사실은 징기즈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5) 대서정(1) - 호레즘 샤와의 대립
1219년, 징기즈칸은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까지의 10년 동안 그는 몽골을 강력한 통일 국가로 통합하고 중국 북부의 금(金)을 침략하여 정복했다. 당초에는 유목민 특유의 약탈 행위로 시작된 이 침략은 해를 거듭하면서 토지를 제압하고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정복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혹독한 자연 속에 자란 유목민들에게 정착민들의 토지는 처분하기에는 너무 풍요로웠던 것이다. 지배를 하게 되면서 몽골 유목민들의 성격도 바뀌어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몽골의 서양 정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서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던 호레즘 샤 왕조는 1210년에 국력이 쇠퇴해 있던 서요(西遼)를 멸망시키고 북쪽은 카스피해 연안으로부터 남쪽은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힌두쿠시로부터 서쪽은 코카서스(카프카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징기즈칸은 몽골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호레즘 샤와 당초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15년에 징기즈칸은 호레즘 샤가 보낸 사절단에게 말했다.
"내가 동방의 패자가 될 것이니 샤는 서방의 패자가 되시오. 우리는 서로 평화와 우호를 유지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징기즈칸의 진의는 다른 데에 있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1216년에 대금(對金)침략에 일단락을 지은 징기즈칸은 몽골 전군에게 2년간 휴식을 명령했다. 부족 전체적으로 대원정 준비가 진행되어 서방으로 첩보(諜報)·조략(調略)을 목적으로 통상단이 보내졌다. 표면상의 우호 관계는 적의 내정을 다 살필 때까지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219년에 호레즘 영(領)인 오트라르(시르다리야 강의 동안, 그 지류 아리스 강 남쪽에 있었으며 옛 명칭은 파라브. 호레즘 왕국 시대에는 그 국경 도시가 되고, 태수가 몽골의 대상을 살해했기 때문에 징기즈칸이 서부 정벌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에서 몽골 통상단이 첩자 혐의로 학살을 당했다. 문명국 사이에서 통상단이 파견되는 경우 그것은 보통 스파이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일지 아닐지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 방식이었다. 호레즘이 취한 방법은 그다지 문명적이지 못했다. 징기즈칸은 분노했고, 이것은 침략을 개시할 아주 좋은 빌미였다.
(6) 대서정(2) -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용의주도한 첩보 활동을 벌인 결과 호레즘에 대한 조사가 끝났다.
골 왕조,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이슬람 세계의 최대 패자(覇者)로 알려졌던 서방의 강국은 실은 겉보기보다 실속은 없었다.
호레즘 샤 왕조가 갑자기 대두하게 된 것은 아랄해(海) 북방의 사나운 유목 민족인 터키계 캉글리족(族)의 무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충성을 맹세한 것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의 생모, 캉글리족 출신의 테르켄 하튼이었고, 호레즘 왕조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캉글리족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염려한 무하마드는 병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몽골측에 바로 누설되었다. 몽골의 철저한 내부 교란(攪亂)의 결과, 공격의 손길은 무하마드의 어머니 테르켄 하튼에게까지 뻗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호레즘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개별적 도시 방위군으로 몽골 군대 전체와 싸워야 했고, 마침내 모조리 패하고 만다.
1219년, 징기즈칸이 이끄는 원정군은 오토라르 시를 공격하고, 이어서 마와라 안나르 지역을 침공했다. 나중에 제왕 티무르에 의해 번영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였고 수도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탐내던 곳이었다.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공격, 함락시킨 몽골군은 공성전(攻城戰)에도 뛰어났다. 오토라르를 공략하는 데는 5개월이 걸렸지만 부하라는 며칠 만에,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4일 만에 함락되었다. 금(金)과 서하(西夏)에서 등용한 기술자에게서 습득한 공성전 기술이 주효했음은 물론이고, 몽골군(軍)이 두려워 자진해서 문을 여는 도시들도 많았다. 사전에 조사한 대로 호레즘 샤 왕조의 행동은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몽골군은 강력하고 잔학한 군대임을 알려 전쟁 전부터 정보전에서 상대방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사마르칸트에 몽골군이 오기 직전에 국왕 무하마드는 도시에서 도망쳐 버렸다.
서양 세계에 이 사태는 전설의 구현으로 전해졌다. 프레스터 존은 다윗 왕으로 이름을 바꾸고, 페르시아를 석권하고 바그다드 근처까지 육박했다는 정보가 로마 교황청을 통해 유럽에 퍼졌다. 환상의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데 힘을 얻은 십자군은 아이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물론 동방으로부터의 원군(援軍)은 오지 않았다. 십자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서양 세계에 동방에서 온 군단이 루시(러시아)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7) 진격 - 러시아 공략전
사마르칸트에서 도망친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무하마드가 도망친 것은 몽골군을 내지(內地)로 유인, 공격하려는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국왕의 추태가 호레즘 샤 왕조의 해체를 앞당겼다는 설도 있다.
이 시기에 니샤푸르에서 징기즈칸이 낭독한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령관, 대관, 평민들이여. 신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지상의 제국을 짐에게 준 것을 알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는 불행을 당하여 처자(妻子), 평민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풍요로운 마와라 안나르를 제압한 징기즈칸은 세계 제패의 실현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징기즈칸의 군대는 이란 서부 여러 지역을 공략하는 한편, 장군 제베와 스베테이가 군대를 이끌고 루시로 향했다. 무하마드를 쫓아간다는 것이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한 침략 행위였다.
무하마드는 추격을 피해 카스피해 남안의 쿠르간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결국 몽골군에게 발견되어 카스피해 앞바다의 아바스쿤 섬으로 다시 탈출했으나 폐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1220년 12월의 일이다.
제베와 스베테이의 진군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그대로 카스피해 서안에서 북진하면서 도시들을 함락해 나갔다. 카프카스 지방을 지나 흑해 연안으로 들어간 원정군은 곧 칼카 해반(海畔)에서 루시군(軍)과 일전을 벌인다.
몽골군은 당초에 남러시아 초원에 분포하는 터키계 유목민 부족 킵차크족(族)을 정복하려는 계획도 있었는데, 킵차크족은 예전의 징기즈칸의 숙적 메르키드족과 교류하는 부족이기 때문에 제압해야 할 적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킵차크의 족장이며 루시와 인연이 있던 코치아는 루시측에 협력을 요청했고, 루시의 대공 게오르규는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게 된다.
루시 제후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드네프르 강 우안(右岸)에 진을 치고 몽골군을 기다렸다. 연합군은 8만 정도였고, 이에 비해 몽골군은 훨씬 열세였다. 첫 전투에서는 연합군의 가리치 공(公)이 몽골군을 압도했다. 기세등등해진 연합군은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했고, 몽골군은 연합군을 방어하면서 칼카 강 동안(東岸)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그것은 몽골군의 책략이었다. 몽골에 비해 기동력이 뒤떨어지는 루시군(軍)은 추격전에 지쳐 있었는데, 가루치 공은 혈기만을 믿고 칼카 강을 건너는 작전을 감행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고 루시군은 꼼짝없이 격파당하고 말았다.
가루치 공의 군단과 그것을 지원한 킵차크 군대는 괴멸되었고 몽골군은 제후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키에프 공, 체르니고프 공은 붙잡혔고 공전승(共戰勝)의 연회석상에서 함께 처형되었다.
칼카 강의 결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후 원정군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징기즈칸의 본군대와 합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루시 남쪽에 몽골군의 직접적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 패배는 루시 제후, 그리고 흑해 건너편의 비잔틴 제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상흔(傷痕)을 남기고 몽골은 이렇게 떠났다. 1227년 징기즈칸은 서하 정복전이 한창일 때 죽었는데, 그가 만든 제국과 정복에 대한 야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양 세계는 다시 한번 징기즈칸의 그림자에 떨게 된다.
(8) 재방문 - 유럽 침입
1236년, 루시인들이 몽골을 거의 잊어갈 무렵에 몽골은 다시 동쪽에서 왔다. 징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의 명령하에, 죽은 징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군을 이끌었다. 이번 원정의 목적 또한 킵차크족 지배, 호레즘 잔당의 괴멸, 그리고 서양 세계의 정복이었다.
바투 원정군은 우선 가까이 있는 킵차크족을 공격했다. 유목민 집단에 불과하며 몽골처럼 군단으로서 통일되지 않은 킵차크족은 몽골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어떤 자들은 서쪽으로 도망치고 어떤 이들은 투항하여 대부분이 몽골의 지배하에서 몽골군의 일원으로 재편성되었다.
새롭게 킵차크군을 얻게 된 바투 원정군은 그 다음으로 루시를 침공했다. 카스피해에서 북상하여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여러 도시를 장악하고 노브고로드를 위협한 후에 방향을 바꾸어 폴란드, 헝가리 방면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겁에 질린 두 나라는 동유럽의 비잔틴 제국과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전쟁에 패해 그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9) 압도 - 발슈타트 전투
유럽의 권력자들이 방관하고 있는 동안, 몽골군 별동대는 폴란드에 침입하여 폴란드 대공은 국내가 수습되지 않은 채 이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1241년 4월, 양군은 리그니츠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몽골군은 폴란드군을 괴멸했다. 이곳은 훗날 발슈타트라 불렸는데 독일어로 '시체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는 전투 후에 시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 전투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몽골군의 가차없는 살육은 러시아인들에게 이질적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은 확실하다.
그 무렵 바투가 이끄는 본대(本隊)는 헝가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의 군대는 유럽 최강으로 알려져 있었고, 국왕 베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전력상 몽골군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현 부다페스트)로 진로를 잡은 몽골군과 헝가리 국왕군은 사요 강의 하반(河畔)에서 대치했다. 몽골군의 노궁포(弩弓砲)가 빗발치듯 쏟아져 헝가리군 내부에서는 참전한 수도원장과 국왕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이 혼란을 틈타 몽골군은 헝가리를 격파했다. 참패한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추격을 받아 퇴로에는 여정 이틀에 걸쳐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10) 공포의 전설 - 타타르의 멍에
유럽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몽골군이 어디까지 공격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은 독일, 프랑스와 평원이 이어져 있었다. 라인 강 이외에 몽골군의 진격을 저지할 요충지는 없었다. 그대로 대서양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바투군은 헝가리 평원의 목초 지대에 주둔하며 전진에 대비하고 있었다. 만약 몽골군이 유럽을 정복했더라면 라인 강가의 구릉지대는 목초지대로 모습을 바꿔, 훗날 유럽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유럽을 구한 것은 1241년 12월의 오고타이 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정복 명령은 본래 오고타이 칸이 내렸으므로 그것을 계속할 것인지는 대회의를 열어 결정할 문제였다. 바투 칸은 빈을 눈앞에 두고 군사를 돌려 유럽을 떠났다. 그후에 몽골군이 유럽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지만, 루시 땅에서는 제후와 각 도시, 그리고 정교회(正敎會)가 몽골의 지배를 완전히 받아들여 이후 수백 년간 루시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를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라 불렀고, 이 말은 지금도 불행을 뜻한다.
몽골인들의 지배는 몽골군의 가혹함과 잔학성에 비하면 훨씬 온후한 편이어서 기독교는 보호되었고 국내의 치안은 양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인으로부터 10분의 1세(稅)를 거두는 한편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했는데, 거역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학살했다.
러시아 제후는 이 타타르의 멍에 아래에서 단결을 결의했다.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주위의 제후에게 킵차크한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여 크리코보 전투에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역습한 킵차크한국에 패하여 모스크바는 황폐화되었고 1만 내지 2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에서 탈출하려면 이반 뇌제(雷帝) 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1) 몽골 제국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제국에게 몽골, 그리고 징기즈칸은 파괴와 약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몽골에 관한 저서들은 대부분 그들의 파괴와 약탈, 폭력과 살육만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서양 세계에 던져준 공포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몽골이 서양 세계에 준 또 다른 영향 ― 몽골이 동서의 교통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 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골의 지배자들은 '초원의 길'이라 전해지는 동서의 교통로에 역과 말과 숙사(宿舍)를 마련했고 그 때문에 외국 사절과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또한 금과 은으로 된 파이자라는 여권이 발행되어 이것이 있으면 외국인도 여행할 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중국을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크다. 파이자는 현재의 러시아 영(領)에서 여러 장 발견된 바 있다.
몽골인들은 통상을 통해 얻는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결국은 육로뿐 아니라 해상로도 열렸다.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통일을 회복한 중국 남부 항구에서 3층 갑판의 큰 배가 인도를 향해 항행(航行)했다. 몽골 제국의 보호하에 중국, 페르시아, 인도, 중앙 아시아, 흑해 주변에서 러시아까지를 포함한 거대한 통상 시장이 나타나 세계는 동과 서가 서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쇄술, 항해자의 나침반, 화기(火器), 사회생활의 매우 중요한······이것들은 유럽에는 없는 것들이며 몽골의 영향에 의해 극동(極東)에서 유럽에 이입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몽골 고원의 한촌(寒村)에서 태어난 소년 테무진, 징기즈칸은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상징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를 발전으로 이끈 공로자로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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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 명작 칼라 만화]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ii)
1. 죄와 벌[ Prestuplenie i nakazanie , 罪─罰] 개요
도스토옙스키 |
장편소설 |
1866년 |
1866년 잡지 《러시아 통보(通報)》에 발표된 세계 문학 걸작의 하나로 한국에서도 애독되는 작품이다. 근대 도시의 양상을 배경으로, 작중의 하급 관리 마르멜라도프의 말대로 ‘아무데도 갈 데가 없는’ 사람들로 가득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뒷거리가 무대이다.
가난한 학생 라스콜니코프는 병적인 사색 속에서, 나폴레옹적인 선택된 강자는 인류를 위하여 사회의 도덕률을 딛고 넘어설 권리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이(蝨)’와 같은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여버림으로써 이 사상을 실천에 옮긴다. 그런데 이 행위는 뜻밖에도 그를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하고, ‘인류와의 단절감’에 괴로워하는 비참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민감한 예심판사 포르필리가 대는 혐의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맞서나가면서도 죄의식의 중압에 견딜 수 없게 된 그의 심정은 자기 희생과 고뇌를 견디며 살아가는 ‘거룩한 창부’ 소냐를 찾아 고백한다. 또 정욕을 절대화하는 배덕자 스비드리가이로프의 수수께끼 같은 삶과 죽음에 자기 이론의 추악한 투영을 보고 마침내 자수하여 시베리아로 유형된다.
작자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입장에서 서구의 합리주의 ·혁명사상을 단죄하려고 한 것같이 보이지만 작품은 그러한 의도를 뛰어넘어 폐색적(閉塞的)인 시대상황 속에서 인간 회복에의 원망(願望)을 호소하는 휴머니즘을 표출하였다.
Crime and Punishment (pre-reform Russian: Преступленіе и наказаніе; post-reform Russian: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tr. Prestupléniye i nakazániye, IPA: [prʲɪstʊˈplʲenʲɪje ɪ nəkɐˈzanʲɪje]) is a novel by the Russian author Fyodor Dostoevsky. It was first published in the literary journal The Russian Messenger in twelve monthly installments during 1866. It was later published in a single volume. It is the second of Dostoevsky's full-length novels following his return from ten years of exile in Siberia. Crime and Punishment is considered the first great novel of his mature period of writing. The novel is often cited as one of the supreme achievements in world literature.
Crime and Punishment follows the mental anguish and moral dilemmas of Rodion Raskolnikov, an impoverished ex-student in Saint Petersburg who plans to kill an unscrupulous pawnbroker, an old woman who stores money and valuable objects in her flat. He theorises that with the money he could liberate himself from poverty and go on to perform great deeds, and seeks to convince himself that certain crimes are justifiable if they are committed in order to remove obstacles to the higher goals of 'extraordinary' men. Once the deed is done, however, he finds himself racked with confusion, paranoia, and disgust. His theoretical justifications lose all their power as he struggles with guilt and horror and confronts both the internal and external consequences of his d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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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의 학교 내신 및 필독서 시리즈 !
모든 가족이 한글 또는 영어로 함께 읽을 수 있는 가족용 세계 문학 시리즈입니다.
아래의 모든 만화 작품은 소년조선일보, 매일경제, 에너지데일리신문, 아시아일보, 용산신문, The Korea Times, The Korea JoongAng Daily 등에 100% 연재된 도서들입니다.
2. 영한대역 세계 명작 칼라 만화 : 총 20권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1) 돈키호테 Don Quixote /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2)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3) 우주 전쟁 The War of The Worlds / H.G. 웰즈(H.G. Wells)
(4)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5)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 다니엘디포우(Daniel Defoe)
(6) 파우스트 Faust / 괴테(Goethe)
(7)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8) 왕자와 거지 The Prince and the Pauper / 마크 트웨인(Mark Twain) - 사무엘 클레멘스(Samuel Clemens)
(9) 보물섬 Treasure Island / 스티븐슨(R.L. Stevenson)
(10) 백경(白鯨) Moby Dick / 허만 멜빌(Herman Melville)
(11) 슬리피 해로우의 전설 The Legend of Sleepy Hollow / 워싱톤 어빙(Washington Irving)
(12) 노트르담의 꼽추 The Hunchback of Notre Dame /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3) 정글 북 The Jungle Book /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4)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 스티븐슨(R.L. Stevenson)
(15) 크리스마스 선물 A Christmas Carol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6) 80일간의 세계일주 Around The World in Eighty Days / 쥴 베른(Jules Verne)
(17) 해저 2만리 20,000 Leagues Under the Sea / 쥴 베른(Jules Verne)
(18)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9) 모히칸족의 최후 The Last of the Mohicans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20)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ii)
3. 도서 구입 안내 : 각권 정가 15,000원 / 택배비 무료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1) 출판사명 : (주)파우스트 칼리지
(2) 저자명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21st C.E.T.A.)
(3) 도서 구입 전화 : 1599-9039(파우스트 칼리지)
입금 계좌 : 국민은행 024801-04-350812(예금주 (주)파우스트 칼리지)
(4) 이메일 : faustcollege@naver.com
(5) Blog : http://blog.naver.com/ceta21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6) Cafe : http://cafe.daum.net/21ceta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http://cafe.naver.com/ceta2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7) Web-site : www.faustcollege.com (주)파우스트 칼리지
(8) 판매처 : 교보문고, YES 24, 알라딘
4. 영한대역 칼라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 5권(각권 정가 15,000원)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5. 영한대역 칼라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나관중 / 20권 / 할인가 108,000원
6. 이솝우화 10권(오디오 CD 포함) : 할인 가격 30,000원
7. 10주 완성 영어 회화(1권 - 정가 15,000원)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8. 위 도서 관련 내용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 ㈜ 파우스트 칼리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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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 : faustcollege@naver.com / ceta211@naver.com
Blog : http://blog.naver.com/ceta21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Cafe : http://cafe.daum.net/21ceta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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