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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맛들이기] 기도란? 하느님과의 수다입니다!
‘기도 맛들이기’ 코너를 통해 부족하지만 제 삶과 기도 생활을 나눌 수 있어 큰 기쁨이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나름 기도한다고 발버둥치지만 어느새 게을러지고 타성에 젖는 저를 일으켜 세우는 은혜로운 초대로 여기며, 기도 속으로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여러분들은 기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에 깊이 몰두했던 신앙 선배들은 대체로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인간과 하느님과의 연결, 하느님과의 소통, 하느님과의 만남, 하느님 안에 머뭄, 하느님과의 일치…. 저는 이 모든 정의를 통틀어서 조금 생뚱맞은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기도란 바로 ‘하느님과의 수다’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수다는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여성들만 수다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정년 퇴임하신 형제님들도 “라떼는 말이야~” 하면서 말씀 한 번 시작하면 끝낼 줄을 모릅니다. 젊은 형제들도 또래끼리 모이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한번 앉았다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깔깔대며 수다를 떱니다. 그러다가 저 같은 ‘왕꼰대’라도 나타나면 개울 속 피라미 떼 도망가듯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런데 수다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적절한 환경이 필요합니다. 혹시 자매님들은 수다를 나눌 때 주로 어떤 상대를 선택하십니까? 과묵한 시아버지나 잘 알지 못하는 먼 친척 어르신과 수다 떠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수다는 마음 편하고 허물없는 사이, 아주 가까운 사이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실패하는 중요한 원인 하나가 있습니다. 기도의 주체이자 전부인 하느님을 너무 어려운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과는 멀리 동떨어져 계신 분, 나와는 별 상관없는 분이 되다 보니, 자연스레 기도는 부담스러워집니다. 기도를 ‘하느님과의 수다’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편안한 친구’처럼 여겨야 합니다. 하느님을 다정다감한 존재로, 사랑하는 연인처럼 여겨야 참된 기도가 시작됩니다. 기도는 우리가 마음 편히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좀 더 편안해져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대한 대대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두려움의 대상, 멀고 먼 당신이 아니라 생각만 해도 달려가고 싶은 친구 같은 하느님, 자상한 아버지 같은 하느님, 다정다감한 어머니 같은 하느님…, 그런 관계의 재설정이 필요하겠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친아버지나 친오빠처럼, 때로 사랑하는 임처럼 대합니다. 저는 기도를 하느님과 저 둘 사이에 오고가는 친밀한 우정의 나눔이라고 생각합니다.”(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도 맛들이기] 활기찬 기도 생활의 첫걸음, 하느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 수정 작업
열차 탑승 시간도 넉넉한데다 마침 배꼽시계의 알람소리가 연신 울리는 바람에 홀로 역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자리마다 사람들로 빼곡했습니다. 쭈뼛거리는 저를 발견하신 사장님께서는 한 어르신 앞의 빈자리로 안내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생면부지의 어르신과 겸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르신과 마주 앉아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 눈길을 피하며 설렁탕을 한 그릇 넘기는데, 세상에 그런 고통이 또 없었습니다. 너무나 어색했던 저는 훌훌 말아먹고 빨리 일어섰습니다. 5분 남짓한 시간이 그렇게 길고 지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있으면 어떻습니까? 두세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시곗바늘이 좀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앉는 시간, 다시 말해서 기도 시간도 그런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의외로 많은 분이 기도 시간을 지루해합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니고 있는 그릇된 하느님 상(像) 때문이 아닐까요?
활기찬 기도 생활의 첫걸음은 ‘하느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수정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구약 시대 하느님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뵙는 사람은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조차도 그분 얼굴 뵙기를 꺼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상(像) 역시 본질에서 많이 벗어나, 지나친 경외심과 두려움, 진노와 심판에 대한 이미지가 우세했습니다.
은혜롭게도 이 땅에 육화강생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오랜 세월 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하느님의 얼굴이 만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놀랍게도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얼굴을 지닌 분, 우리를 향한 자비와 연민으로 가득한 분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의 인생 안으로 들어오시겠답니다. 우리와 삶을 공유하시고, 우리의 슬픔을 당신의 슬픔으로 여기시고, 우리의 눈물을 당신의 눈물로 여기시겠답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번 한 주간 이런 노력을 해보시면 어떨까요?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짧게라도 우리의 머릿속에 자상한 하느님의 얼굴을 떠올려보는 것입니다. 내 깊은 상처를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주시는, 내 눈의 눈물을 손수 닦아주시는, 나를 꼭 끌어안고 토닥토닥 등 두드려주시는, 나를 위해 손수 커피를 내리시는, 나와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시는 그런 하느님의 모습을 말입니다.
“산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삶은 최고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는 일입니다”(조지 케이소릴).
[기도 맛들이기] 내 안의 성전, 내 안의 천상 예루살렘을 건설합시다!
많은 교우가 성전에 함께 모여 소리높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열심히 기도하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팬데믹 시대, 우리 앞에 다가온 현실은 큰 성찰거리 하나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무형(無形)의 성전, 내 안의 성전 마련의 필요성!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습니다. 성전 안팎은 수많은 환전상과 소와 양,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이 빼곡했고, 그들은 큰 목소리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속화되고 타락한 성전을 보신 예수님께서 분노와 슬픔 가득한 얼굴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동물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십니다. 환전상들의 금고를 쏟아 버리십니다. 탁자들을 뒤엎어 버리십니다.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거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거룩한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이어서 유다인들에게 치명타가 될 강력한 한방을 날리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새로운 성전, 참된 의미의 성전, 곧 당신 몸을 의미합니다. 아버지께서 늘 함께하시는 예수님 존재 자체가 새로운 성전이자 완전한 성전, 영원한 성전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례성사를 통해 예수님과 한마음 한몸이 된 우리, 성령께서 거처하시며 활동하시는 우리, 성체를 받아 모신 우리 역시 새로운 성전인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참다운 하느님의 교회입니다!”
물론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성전으로 나아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함께 기도드린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 그러나 시국이 시국인 만큼 우리 안에 이미 마련되어 있는 ‘불멸의 성전’ 안으로 더 자주 들어가야겠습니다. 그 안에 자리하고 계신 하느님을 좀 더 자주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사막의 교부들께서 즐기셨던 호흡기도는 기도를 갈구하는 오늘, 우리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우선 편안히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목이나 어깨를 좌우로 흔들면서 잠시 스트레칭을 합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머리도 똑바로 쳐듭니다. 눈을 감고 두 손을 펴서 하늘로 향하게 한 후 양 무릎 위에 얹습니다. 자세가 갖춰지면 평소보다긴 호흡, 즉 심호흡을 시작합니다. 입은 다물고
코로만 호흡합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잠시 멈춥니다. 그리고 천천히 날숨을 내쉽니다. 열 번 정도 심호흡을 한 다음에는 한 가지 작업이 추가됩니다. 숨을 들이마실 때 하느님의 숨결, 성령의 기운을 들이마신다고 생각하며 들이마십시오. 숨을 내쉴때는 내 안의 걱정과 근심, 용서 못하는 마음과 불평불만을 몰아낸다고 생각하며 내쉬십시오.
“기도는 우리를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고요의 공간으로 인도합니다. 그곳은 하느님께서 살아 숨 쉬고 계시는 감실이자 지성소,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할 평화의 공간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건강하고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기도 맛들이기] 성령께서 나와 함께 기도하시도록 힘을 빼십시오!
수도회 입회 전 청년 시절, 갑작스레 신앙의 불꽃이 확 타올라 뭐든 열심히 할 때였습니다. 한번은 3박 4일 일정의 성령묵상회에 참석했습니다. 강도 높은 세미나 과정을 이수하고 난 뒤, 참석자들이 둘러앉아 자신이 체험한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서로 나누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평소 엄청 과묵하셔서, 웬만하면 입 한 번 안 여시던 할아버님께서 완전히 달라지신 것입니다. 얼굴도 환해지고, 활기차게 말씀도 하시고, 자유기도도 일사천리로 술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혹시 할아버님께서 아침에 나오실 때, 실수로 할머님 틀니(^^)를 끼고 나오신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알고 보니 할아버님은 여러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말씀의 은사를 선물로 받으셨던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시는데, 주어지는 은사는 다양합니다. 말씀이나 믿음의 은사, 치유나 기적의 은사, 예언이나 식별의 은사,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와 그를 해석하는 은사(1코린 12,7-10 참조)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받았는지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그 소중한 은총의 선물을 땅에 묻어버리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성령께서 우리 삶 속에 언제나 현존하시고 밀착 동행하심에 대한 명료한 의식을 지녀야겠습니다. 성령께서는 보잘것없고 남루해 보이는 우리네 삶 한가운데 확실히 현존하십니다. 비틀비틀 굴곡진 내 인생길에 기쁘게 동반하십니다. 만사형통할 때도 현존하시지만, 비탄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현존하십니다.
고속도로를 주행하던 차가 연료 고갈로 인해 멈췄을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견인차를 부르는 일입니다. 영적 에너지가 고갈되어 기도할 수 없게 된 우리 역시 영적 견인차인 성령을 불러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끌어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하시는 분이고, 기도가 힘겨운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주시는 분입니다.
역동적이고 활력 넘치는 충만한 기도 생활을 꿈꾸십니까? 그렇다면 성령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성령과 함께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기도는 나홀로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기도는 내가 억지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기도하시도록 힘을 빼십시오. 성령께 생각과 의지, 감정과 삶 전체를 맡겨드리십시오. 오늘도 친절하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이름을 힘차게 부르기를, 함께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소서, 성령님, 저를 비춰주십시오. 제 모든 것을 받아주십시오. 기도할 줄 모르는 저와 함께 기도하여 주십시오. 저를 이끌어 아버지께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기도 맛들이기] 기도와 활동 사이에 조화와 균형을 유지시킵시다!
중독의 종류도 참 다양하더군요. 알코올 의존증, 게임 중독, TV 중독, 쇼핑 중독 …. 여러 중독 가운데 일중독(workaholic)도 무섭습니다. 저 역시 한동안 일중독에 깊이 빠져 산 적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기도 시간은 물론이고 수면 시간까지 줄여가면서 서류에 매달렸고 발로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녹초가 된 몸을 겨우 추스려 세면대 앞에 섰는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거울 안에는 영락없는 좀비 한 마리가 들어있었습니다. 퀭하고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못한 그런 얼굴이었습니다. 기도와 활동, 영적 생활과 일이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드러나는 전형적인 증세입니다. 수도공동체 안에도 별의별 유형의 형제들이 공존합니다. 어떤 수사님은 성당의 수호성인입니다. 거룩한 얼굴로 기도에 몰두하는 얼굴을 보면 막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일하는 것을 보면 젬병입니다. 덤벙덤벙, 우왕좌왕,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수사님은 완전 반대입니다. 묵상 시간 내내 꾸벅꾸벅 깊은 탈혼상태에 머뭅니다. 기도가 끝났으니 식당으로 가자는 신호가 울리면 세상 환한 표정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작업장에 들어서면 얼굴 빛깔부터 달라집니다. 전문가도 그런 전문가가 다시 없습니다. 민첩하고 성실하고 수준 높고 ….
여러분들은 어떠합니까? 주님 말씀을 경청하고 기도하는 생활과 적극적으로 봉사하고 구체적인 몸짓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 중 어느 쪽을 선호합니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언뜻 보기에 예수님께서 활동가 마르타보다는 관상가 마리아의 판정승을 선언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봉사활동을 무시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그 사랑의 실천은 언제나 기도가 전제되어야 하고, 기도와 굳게 결속되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의 방향이 기도나 활동, 어느 한쪽으로만 깊이 치우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둘 사이의 조화와 균형이 필요합니다. 기도를 통해 깊은 영적 생활에 몰입했다면, 자기도취나 황홀경에 빠져 있어서만은 안 됩니다. 열심히 기도했다면, 그 힘을 바탕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장으로 나아가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균형 잡힌 신앙생활이요, 활동하는 관상가의 모습인 것입니다.
“기도 시간이 다른 시간과 구분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대단히 그릇된 생각입니다. 작업 시간에는 일로써, 기도 시간에는 기도로써 우리는 언제나 똑같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
[기도 맛들이기] 기도는 숙제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지독한 애정 결핍으로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아이들, 그러나 마음 하나는 비단결처럼 고운 아이들 80여 명이 알콩달콩 살아가는 한 청소년 시설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마침 저녁기도 시간이었는데, 기타며 전자 오르간, 드럼 등으로 구성된 미니 밴드에 맞춰, 덩치가 산만 한 아이들이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성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잠깐 착각했습니다. ‘지금 내가 기도하러 온 것인가? 아니면 록 페스티벌에 와 있는 것인가?’ 리듬에 맞춰 박수를 치고 온몸을 흔들면서, 목청껏 성가를 부르는 아이들의 얼굴이 참으로 해맑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런 활기찬 분위기는 함께 했던 노부부와 저까지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게 만들었고 주님께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돈보스코 오라토리오의 기도 시간 역시 비슷했습니다. 돈보스코는 기도 시간이 아이들에게 고통이나 부담을 주는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보다는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 활기와 생명력이 넘치는 행복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라토리오 안에서의 기도는 언제나 짧고 단순명료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의가 없다거나 준비가 소홀하지도 않았습니다. 본질이나 핵심을 빼먹지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하나는, 오라토리오에서 기도 시간은 설렘과 흥으로 가득한 축제의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저희 살레시오회 총장 신부님께서 방한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희로서는 가장 크고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초대형 현수막에 슬로건을 적어 관구관 외벽에 붙였는데, 그 내용은 “인생은 숙제가 아니라 축제입니다.”였습니다. 맞습니다. 기도 역시 숙제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기도할 때 여러분의 얼굴은 어떻습니까? 혹시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해 마치 연옥벌이라도 받는 듯한 표정은 아닌지요? 입 한 번 뻥긋하지 않고, 팔짱 딱 끼고, 인상 팍 쓰고, 지나치게 무성의한 모습은 아닙니까? 밀린 방학 숙제 해치우듯이 아무런 감흥 없이 초스피드로 기도를 바치는 것은 아닌가요?
기도는 숙제가 아니라 축제라고 한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설레는 마음과 기쁜 얼굴, 환희로 가득 찬 영혼으로 바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기도의 진정한 맛을 알게 된다면, 절대로 기도가 부담이나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안에 기쁨 넘치는 감사의 기도, 행복으로 충만한 찬미의 기도가 좀 더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기도를 기쁨이요, 환희, 축제로 여기고 그 시간을 좀 더 즐기고 만끽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악은 기뻐하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기쁨 속에 주님을 섬기십시오”(돈보스코). “기쁨은 기도입니다. 기쁨은 굳셈입니다. 기쁨은 사랑입니다”(마더 테레사).
[기도 맛들이기] 우비 입고 샤워하는 느낌이랍니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일인데, 당시 무슨 용기가 났었던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몇몇 수녀회 수녀님들의 연례 피정 지도를 덥석 수락해서, 죽을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강의 후 수녀님들의 질문도 날카롭더군요. 강의 끝에 강의록을 주섬주섬 챙기는 제게, 포스가 느껴지는 한 원로 수녀님께서 질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질문을 받았습니다.
내용도 정말이지 묵직한 돌직구 같았습니다. “저는 오랜 세월 수도생활을 해왔지만, 부끄럽게도 기도할 때마다 우비를 입고 샤워를 하는 느낌입니다. 나름 열심히 기도해 보지만 언제나 답답하고 지루합니다. 기쁨이나 보람, 개운함이나 시원함을 못 느낍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저보다 수도생활의 연륜이 훨씬 앞선 수녀님,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이미 깊은 영적 생활의 맛을 보고 계신 수녀님의 질문 앞에,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되더군요. 마음 같아서는 즉문즉답의 달인인 유명 스님처럼, 포스 넘치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멋진 답변을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저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횡설수설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안 되겠다 싶은 생각에 죄송하다고, 공부를 더 해서 내일 말씀드리겠다며,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제관으로 돌아와 ‘괜히 왔다!’며 가슴을 쾅쾅 치고 크게 후회를 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그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나요? 기도할 때 우비 입고 샤워하는 느낌. 샤워를 했지만 조금도 개운하거나 시원하지 않은 느낌. 샤워를 했지만 샤워를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듯한 느낌. 기도를 했지만 기도를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듯한 느낌.
그렇다면 나와 하느님 은총 사이를 가로막는 ‘우비’가 과연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증오나 미움의 대상들이 내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면, 그 존재들이 활기찬 기도생활을 방해하는 우비가 아닐까요? 씻을 수 없는 상처나 수모로 인해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트라우마가 있다면, 그것은 기쁨에 찬 기도생활을 가로막는 우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를 향한 분노나 억울함도 역동적인 기도생활을 가로막는 우비일 가능성이 큽니다.
깃털처럼 가벼워져야, 먼지처럼 작아져야, 구름처럼 흘러갈 수 있습니다. 비본질적인 것들, 덜 중요한 것들, 부차적인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 차원 높은 삶의 단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비우고 나서야 더 깊은 기도생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옭아매는 갖은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면, 그때부터 하느님의 은총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양손 가득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미련 없이 놓으면, 그때부터 하느님의 자비는 풍성해지며, 그때 우리는 기도의 참맛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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