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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유배문학, 완벽한 선비 정황(丁熿)의 한시 세계는 도학적 초월과 순명[後篇]>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앞글에 이어[후편]--
앞서 전편(前篇)에서 「거제도 16세기 유배객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의 칠언율시 한시 세계와 문학적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어 이번 후편(後篇)에서는 「완벽한 선비 정황(丁熿)의 한시 세계는 도학적 초월과 순명」이라는 주제로 그의 문학적 특성에 대해 고찰해 보겠다. 앞서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유헌(遊軒) 정황(丁熿) 선생은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곤양으로 유배되었다가 1548년에 거제도로 이배(移配)되어 1560년 거제도 배소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13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거제도 역사상 가장 많은 유배문학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문집인 『유헌집(遊軒集)』에 실린 유배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특성과, 조선 시대의 다른 대표적인 유배 문인들과 다른 정황만의 독보적이고 특별한 특징을 살펴보겠다.
먼저(1) 정황의 유배문학은 '학문과 생활의 일치'에 있다. 정황의 유배문학은 단순히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고독을 달래는 감상적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이에 거제도를 '수양의 공간'으로 재정립하였다. 정황은 거제도 고현동의 새 거처와 거제향교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유배지를 형벌의 장소가 아닌 성리학적 도(道)를 닦는 은거지로 삼았다. 또한 일사불란한 도학(道學) 사상을 담았다. 정암 조광조의 문인답게, 시문 전반에 걸쳐 올곧은 선비 정신과 가난 속에서도 바름을 즐기는 '빈천락(貧賤樂)'의 자세가 뚜렷하다. '빈천락(貧賤樂)'은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도(貧賤) 그 처지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의 평안과 즐거움(樂)을 누린다는 뜻의 한자 표현이다. 그리고 방대한 저술과 기록 정신을 남겼다. 한시뿐만 아니라 『부훤록(負暄錄)』, 『장행통고(壯行通考)』 등 유배 기간 중 방대한 학술 저작과 일상 기록을 남겨 문학적 깊이와 역사적 가치를 모두 충족했다.
둘째(2) 다른 유배 문인들과 비교되는 정황만의 '특별한 특징'이 있다. 조선 시대 수많은 문인이 유배문학을 남겼지만, 정황의 문학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뚜렷한 독창성을 가진다. ① 도학적 초월과 순명(順命)을 앞세워 '원망(怨)'과 '미련'을 배제했다. 대다수의 유배 문인들은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고백하거나(연군지정), 자신을 모함한 정적들에 대한 분노, 억울함을 격정적으로 토로했다. 정철의 『사미인곡』이나 조위의 『만분가』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정황의 시에는 현실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원망이나 조정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초조함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유배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내면을 다스리는 '성찰과 순명(順命)'의 정서로 가닥을 잡았다. 현실 권력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인간 본연의 진실과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는 초연한 태도가 돋보인다. 또 ② 고립을 깨는 '유배지 지성 네트워크'의 구축과 시적 형상화에 있다. 보통 다른 문인의 유배객들은 보통 철저한 고독 속에서 홀로 침잠하거나, 자연물(달, 바람)을 유일한 벗으로 삼아 내면의 외로움을 고조시켰다. 그러나 정황은 거제도 내에서 동료 유배객, 지역민, 승려(산인), 현지 노인들과 끊임없이 시를 주고받으며(화답·차운) 정신적 연대를 나눴다. 벗이 자신을 책망하는 시를 보내오면 이를 달게 받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보유태호자책시」)를 쓰는 등, 유배문학을 '지식인 간의 도덕적 경계와 소통의 도구'로 활용한 점은 매우 독특한 정황만의 면모다. 이어 ③ 철저한 목민관(牧民官)적 시선으로 공직 윤리의 성찰을 (『육가외』) 꾀했다. 다른 문인들은 유배지 백성들의 굶주림을 보며 불쌍히 여기는 '동정적 시선'의 시(사회시)를 남기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정황은 단순한 동정을 넘어, 자신이 관직에 있을 때 백성들에게 부끄러움이 없었는가를 치열하게 반성했다. 특히 그의 대표적인 유배 저작 중 하나인 『육가외(六可畏)』는 '목민관이 두려워해야 할 여섯 가지'를 논한 글이다. 자신이 유배객이라는 비참한 처지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운영의 윤리적 원칙과 공직자의 책임을 본질적으로 질문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신세 한탄형 유배문학과 궤를 달리한다. 그리고 ④ 유배지 '지역 사회'로의 동화와 문화적 기여에 있다. 보통 문인들은 유배지를 언젠가 떠나야 할 '임시 거처'이자 '슬픈 이방인의 땅'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황은 거제도를 제2의 고향처럼 받아들였다. 그는 거제향교를 북쪽으로 바라보는 곳으로 거처를 옮기며(「재거제시이거향교북보고인운」), 현지 거제도의 수많은 제자를 직접 양성하고 가르쳤다. 유배객이 지역 문화와 교육의 주체로 깊숙이 동화되어 그 흔적을 시문으로 고스란히 남긴 사례는 유배문학사에서도 매우 드물고 고귀한 경우다.
⇨결국 윤선도가 유배지 자연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어부사시사』)했고, 김만중이 소설을 통해 인생무상을 그렸다면, 유헌 정황은 유배라는 절망 속에서 오히려 '가장 완벽한 선비의 삶'을 실천하고 증명해 보였다. 그의 유배문학은 감정적 과잉이 배제된 절제된 격조, 주변인들과의 치열한 소통, 그리고 유배지 백성과 지역 교육을 품어 안은 목민관적 책임감이 결합한, 조선 전기 사림 문학의 가장 건강하고 단단한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 이번 후편(後篇)에는 앞서 올린 전편(前篇) 8편에 이어 「보인운(步人韻)」, 「보유태호자책시(步柳太浩自責詩) 1558년(戊午)」, 「식육변미음(食肉變味吟)」, 「유고행(愉告行)」, 「서답상산목김문지 취문(書答商山牧金文之 就文)」, 「병중서회(病中書懷)」, 「어대간만(魚大諫挽)」 등 7편의 칠언율시(七言律詩)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9) 다음 ‘支’와 ‘歌’자를 통운한 칠언율시(七言律詩) 「보인운(步人韻)」은 조선 중기의 문신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의 작품으로, 『유헌집(游軒集)』 권2(卷之二)에 수록되어 있다. 유배지에서의 쓸쓸한 처지와 이를 달래는 심정,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겠다는 굳은 절개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특이하게도 1구(句)와 2구의 압운자는 ‘支’운목이고 나머지 압운자는 ‘歌’ 운목이다.
제목이 '보인운(步人韻)'이라, 다른 사람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그대로 따라서 지은 시인데 누구의 시를 따라 지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상대방의 시에 화답하거나 그 시상에 공감하며 지은 시임은 확실하다. 주제는 유배 생활의 고독과 세월의 덧없음, 그리고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겠다는 굳은 절개와 지조이다. 특히 정황 선생은 을사사화 등 조선 중기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 오랜 기간 유배 생활을 겪었다. 이 시는 억울한 처지 속에서도 원망에 사무치기보다는, 자연의 이치를 수용하고 선비로서의 당당한 내면을 지키려는 의지를 담담하고 고고한 어조로 그려낸 명작이다.
**「보인운(步人韻)」** / 정황(丁熿 1512~1560)
此生强半在南涯 이 내 한평생 태반을 남쪽 바닷가(유배지)에서 보내니
荒草溪邊是謫居 잡초 우거진 시냇가, 이곳이 바로 귀양살이하는 집이라네.
閒興遣前須短句 한가로운 흥취를 자아내려 모름지기 짧은 시구를 지어보고
濁醪斟後任長歌 탁주 한 잔 따르고 나서는 내친김에 길게 노래 불러보네.
天高地迥浮雲散 하늘은 높고 땅은 아득한데 뜬구름은 흩어지고
古往今來疾鳥過 예나 지금이나 시간은 빠른 새가 날아가듯 흘러가네.
俯仰庶幾無愧怍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바라건대 부끄러움이 없으니
自餘橫逆足呻哦 그밖에 닥쳐오는 뜻밖의 불행(재앙)은 그저 읊조리며 달랠 뿐.
○ 내용인즉, [1~2구]에선, 작가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남쪽 변방의 유배지에서 보내고 있다. 잡초가 무성한 거친 시냇가에 위치한 초라한 유배처를 묘사하며, 자신의 쓸쓸하고 고독한 처지를 덤덤하게 드러냈다. [3~4구]에선, 적막한 귀양살이 속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찾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짧은 시를 짓고(短句), 탁주를 한 잔 마신 뒤 마음속의 답답함을 긴 노래(長歌)로 풀어내며 스스로를 위로(閒興)하고 있다. [5~6구]에선, 넓고 아득한 천지간에 뜬구름이 흩어지듯, 인간 세상의 부귀영화나 유배의 고통도 결국 흩어질 감정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또한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기나긴 역사와 세월은 마치 '빠른 새가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덧없고 신속함을 표현했다. [7~8구]에선, 맹자가 말한 '부앙무괴(俯仰無愧,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럽지 않다)'의 정신이 담겨 있다. 비록 모함을 받아 유배를 왔지만, 내 양심과 도리에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당당한 기개가 돋보인다. 그러므로 앞으로 내게 닥쳐올 시련이나 억울한 일(횡역)이 있더라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그저 시를 읊조리며 의연하게 버텨내겠다는 다짐으로 시를 마무리했다.
○ 참고 [보인운(步人韻)] 보인운은 다른 사람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와 그 순서를 그대로 따라 지어 화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시(漢詩)를 지을 때 타인의 시에 화답하는 방법(和韻) 중 하나로, 한자어 뜻 그대로 '다른 사람(人)의 운(韻)을 걸음걸이처럼 뒤따라 밟아간다(步)'는 뜻이다. 전통 시학에서는 주로 '차운(次韻)' 또는 '보운(步韻)'이라는 표현으로 널리 쓰였다.
⇨한시에서 화답(和韻)의 방식은 몇 가지로 구분한다. ‘보운(步韻)과 차운(次韻)’은 원본 시에 쓰인 운자(韻字)와 그 배열 순서까지 완벽하게 동일하게 지어야 한다. 가장 제약이 심하고 창작하기 까다로운 방식입이다. ‘용운(用韻)’은 원본 시에 쓰인 운자는 그대로 사용하되, 그 순서는 자유롭게 바꾸어 짓는 방식이며, ‘의운(依韻)’은 원본 시와 똑같은 글자를 쓸 필요 없이, 같은 운목(韻目, 발음 계열)에 속하는 글자만을 사용하여 짓는 방식이다.
특히 보운(次韻) 방식은 당나라의 시인 원진(元稹)과 백거이(白居易)가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송나라 때 소동파(蘇軾)와 황정견(黃庭堅)에 이르러 문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며 하나의 주요한 시적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 문인들 역시 '보운(步韻)' 혹은 '차운(次韻)'이라는 제목을 붙여 수많은 화답시를 남겼다.
10) 다음 ‘魚’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보유태호자책시(步柳太浩自責詩) 1558년(戊午)」 즉 ‘무오년에 유태호의 자책시를 차운하여 짓다‘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의 작품으로, 『유헌집(游軒集)』 권2(卷之二)에 수록되어 있다. 선생이 1558년(명종 13년, 무오년)에 벗인 유태호(柳太浩)의 자책시를 차운(步)하여 지은 시이다. 이 시는 한평생을 돌아보며 학문적 성취를 이루지 못하고 세월을 허비한 자신을 '책벌레(白魚)'와 '짐승'에 비유하며 처절하게 반성하고 자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보유태호자책시(步柳太浩自責詩) 1558년(戊午)」 / 정황(丁熿)
曾若我人古有諸 일찍이 우리 같은 사람이 옛날에도 있었던가?
盗名字久孰非虛 이름과 명예를 훔친 지 오래니, 무엇인들 허황되지 않으리.
優遊玩日乖心事 한가하게 놀며 세월을 허비하니 본래의 마음(지조)과 어긋나고
姑息便身廢榻書 당장의 편안함만 찾으며 침상 위(책상 위)의 책마저 멀리했네.
父母全生存未幾 부모님이 온전하게 물려주신 몸으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乾坤賦命喪無餘 천지 자연(건곤)이 부여해 준 목숨도 이제 다해가네.
且禽且獸百年半 짐승과 다름없이 살아온 인생이 벌써 반백 년(쉰 살)인데
冊裏黏形同白魚 책 속에 몸을 붙이고 살아온 모습이 그저 '좀벌레(白魚)'와 같구나.
[주1] 보(步) :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그대로 순서대로 가져와 시를 짓는 '차운(次韻)'을 뜻한다.
[주2] 도명자(盗名字) : 학덕이나 실력도 없으면서 세상의 명성과 이름(이름값)을 도둑질하듯 과분하게 누려왔다는 겸양과 자책의 표현.
[주3] 우유완일(優遊玩日) :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세월만 보낸다는 뜻.
[주4] 고식(姑息) : 근본적인 해결을 하지 않고 당장의 편안함만 추구하는 태도다.
[주5] 부모전생(父母全生) : 《효경》의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와 통하는 개념으로, 부모님이 온전하게 낳아주신 몸을 도덕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훌륭하게 보존하지 못했다는 불효의 자책이다.
[주6] 백어(白魚) : 책을 갉아먹는 '좀벌레'를 뜻함. 성현의 도리가 담긴 책을 읽고 깨달음을 얻어 실천한 것이 아니라, 그저 책 속에 파묻혀 글자만 파먹고 살았을 뿐 세상에 아무런 이로움을 주지 못했다는 극단적인 자기비하와 성찰을 담은 핵심 비유다.
○ 내용인즉, 이 시는 학자로서, 그리고 자식으로서 자신의 삶을 매우 엄격하게 성찰하는 유학자의 내면을 보여준다. 전반부(1~4구)에선, 학자로서의 명성은 과분하게 얻었으나, 실제로는 게으르게 세월을 보내고 책을 멀리하여 처음에 품었던 학문적 고결한 뜻(심사)을 잃어버렸음을 고백했다. 후반부(5~8구)에선, 어느덧 나이가 들어 인생의 황혼기(50세 전후)에 접어들었음을 깨닫고, 부모님과 하늘이 주신 고귀한 삶을 가치 있게 쓰지 못했다는 위기감을 드러낸다. 특히 마지막 구절에서 자신을 인간이 아닌 책 속의 좀벌레(백어)에 비유한 것은, 실천이 따르지 않는 죽은 학문을 해왔다는 지식인으로서의 뼈아픈 부끄러움을 극적으로 표현한 명문장이다.
11) 다음 ’眞‘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식육변미음(食肉變味吟)」 즉 "맛이 변한 고기를 먹으며 읊조린 시"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의 작품으로, 『유헌집(游軒集)』 권2(卷之二)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유배지 같은 극도의 궁핍하고 고단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상한 고기(맛이 변한 고기)를 먹어야만 했던 지식인의 자괴감과 선비로서의 엄격한 자기 성찰을 담고 있다.
**「식육변미음(食肉變味吟)」** / 정황(丁熿 1512~1560)
雖持支體困精神 사지(육체)는 비록 지탱하고 있으나 정신은 피곤에 지쳤고
寢席三旬鬼主身 한 달(30일) 동안이나 자리에 누워 지내니 귀신이 이 몸을 주관하는 듯하네.
頃夕助滋忘祖父 지난 저녁에는 몸을 보양하고자 고기를 먹으며 조상님을 잊었더니
今朝變味負君親 오늘 아침 맛이 변한 것(상한 것)을 알고 나니 임금과 어버이를 배반한 꼴이 되었구나.
不忠不孝已違理 충성하지 못하고 효도하지 못하여 이미 천리를 어겼으니
而獸而禽幾敗倫 짐승이나 새처럼 인륜을 무너뜨린 것과 다름없네.
儘爲區區延喘息 겨우 구차하게 이 헐떡이는 숨통을 이어 가고자 한 것뿐인데
餘年事業果如人 남은 평생의 삶과 업적이 과연 사람다울 수 있으랴.
○ 내용인즉, 정황 선생은 을사사화(1545년) 무렵 화를 입어 거제도 등지에서 오랜 기간 유배 생활을 겪었다. 시 속에서 "한 달 동안이나 자리에 누워 지냈다"는 표현으로 보아, 큰 병을 앓아 몸과 마음이 극한으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몸이 너무 부실해지자 주변의 도움이나 스스로의 방책으로 영양을 보충(助滋)하기 위해 고기를 구해 먹었다. 그러나 보관 기술이 없던 옛날 유배지나 궁핍한 환경 탓에 그 고기는 이미 상해 가며 '맛이 변한(變味)' 상태였다. 유학자로서 상하거나 부정한 음식을 먹는 것은 신체를 훼손하고 예를 잃는 일로 여겨졌기에, 저자는 고기를 먹은 행동을 "임금과 어버이, 조상님을 배반하고 불충·불효를 저지른 행위"라며 뼈저리게 자책했다.
단지 살기 위해 음식을 먹었을 뿐인데도 자신을 '짐승'에 비유하며 인륜을 무너뜨렸다고 괴로워한다. 목숨을 구차하게 연명하느라 선비의 꼿꼿한 지조와 몸가짐을 지키지 못했으니,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간들 어찌 부끄럽지 않은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 수 있겠느냐는 선비 특유의 엄격한 도덕적 결벽증과 자아성찰이 돋보이는 명시다.
12) 다음 ’魚‘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유고행(愉告行)」 ’기쁘게 아뢰고 행하다‘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의 작품으로, 『유헌집(游軒集)』 권2(卷之二)에 수록되어 있다. 한시 「유고행(愉告行)」은 유배를 떠나거나 먼 길을 가는 벗(또는 친지)을 떠나보내며, 현실의 고난에 굴하지 않고 군자로서의 도리와 절개를 지킬 것을 당부하는 송별시다.
○ 이 시는 가을날의 쓸쓸한 이별로 시작하지만, 단순한 슬픔에 머무르지 않는다. 도학자(道學者)였던 정황의 기상답게, 정치적 격변이나 곤궁한 처지 속에서도 사사로운 명리에 흔들리지 말고 대장부로서 나라를 걱정하는 큰 뜻과 초심을 유지하라는 묵직한 격려와 당부를 담고 있는 격조 높은 작품이다.
**「유고행(愉告行)」** 기쁘게 아뢰고 행하다 / 정황(丁熿)
秋風相別意何如 가을바람 속에 서로 이별하니 그 마음이 어떠한가.
今去幾時復一廬 이제 떠나면 어느 때나 다시 한 초가집에서 모여 살꼬.
窮處切心區吏部 곤궁한 처지에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이조(吏部)의 일을 걱정하고
大庭酸鼻背長書 대궐 뜰을 바라보며 시린 코를 훌쩍이며 임금께 올릴 긴 상소문을 등에 지노라.
須於中夜存孤念 모름지기 깊은 밤에는 홀로 지키는 일편단심을 가슴에 품고
更向平朝反厥初 밝은 아침이 오면 다시 그 본연의 초심으로 돌아가리.
男子擔當應不淺 사나이가 세상에서 담당해야 할 책임이 응당 얕지 않으니
些兒名利是爲餘 보잘것없는 조그만 명예와 이익 따위는 그저 덤(여분의 것)일 뿐.
[주1] 구이부(區吏部) : '이부(吏部)'는 관리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를 뜻함. 나라의 인재 등용과 안위를 걱정하는 충정 어린 마음을 나타낸다.
[주2] 산비배장서(酸鼻背長書) : '산비(酸鼻)'는 슬프고 억울하여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말하며, '장서(長書)'는 임금에게 올리는 긴 상소문이나 곧은 비판의 글을 뜻한다. 조정의 잘못된 현실을 바라보며 눈물짓고, 나라를 바로잡기 위한 무거운 책임감(상소문)을 짊어지고 있는 지식인의 고뇌가 돋보이는 구절이다.
[주3] 중야존고념(中夜存孤念)과 반궐초(反厥初) : 이 시의 핵심적인 도덕적 권유다. 남들이 보지 않는 깊은 밤에도 외로운 충심과 절개를 지키고(愼獨), 아침이 되면 인간 본연의 순수한 초심으로 돌아가 자신을 다잡으라는 성리학적 수양의 태도를 강조한다.
[주4] 사아명리시위여(些兒名利是爲餘) : 세상의 자잘한 명예나 이익은 대장부가 추구할 본질이 아니며, 오직 정의와 도리를 다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당당한 기개를 보여주며 시를 마무리했다.
13) 다음 ’眞‘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서답상산목김문지 취문(書答商山牧金文之 就文)」 즉, ’상산(상주) 목사 김문지(취문, 1509~1570)에게 글을 써서 답하다.‘는 조선 중기의 문신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의 작품으로, 『유헌집(游軒集)』 권2(卷之二)에 수록되어 있다. 저자가 거제도 유배 시절, 당시 상주 목사(상산목)로 재임 중이던 벗 구암(久菴) 김취문(金就文, 자 文之)에게 보낸 답장 시다.
이 시는 을사사화(1545년)로 인해 변방과 섬을 전전하며 15년째 고독한 유배 생활을 이어가던 작가의 곤궁한 처지와, 그럼에도 변치 않고 우정을 보내준 벗에 대한 깊은 고마움이 잘 드러나 있다.
○ 또한 이 시는 벼슬길에서 밀려나 섬에서 외롭게 늙어가던 노학자 정황(丁熿)이, 자신을 잊지 않고 귀한 위문품과 편지를 보내준 동료 문인(金就文)에게 보낸 눈물겨운 감사의 시다. 궁핍한 유배 생활의 절박함 속에서도 선비로서의 청렴한 정신(固窮)을 잃지 않으려는 강인한 의지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서답상산목김문지 취문(書答商山牧金文之 就文)」** / 정황(丁熿)
不忠不孝島夷隣 불충하고 불효한 몸으로 오랑캐 섬의 이웃이 되어
十五年來衆棄身 유배된 지 15년 세월 동안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몸이라네.
一脈交情君未絶 그러나 한 가닥 서로 사귀던 정을 그대는 끊지 않으니
千般別恨我何陳 마음속 천 가지 이별의 한을 내가 어찌 다 말하겠는가.
食從寡助虞無夕 먹을 것은 돕는 이가 적어 저녁거리가 없을까 걱정스럽고
心欲固窮證有神 가난 속에서도 지조를 지키려 하니 신명(神明)께서 증명해 주시리.
尺札曾俱滋味至 그대의 짧은 편지와 맛 좋은 음식이 함께 이르렀거늘,
却留長鋏已三旬 도리어 오가며 긴 칼자루 두드린 지 벌써 삼십 일이 지났구려.
○ 내용인즉, [1~2구]에선, 죄인의 신분이 되어 유배지(거제도)에서 변방 오랑캐와 이웃하며 산 지 어느덧 15년이 흘렀다. '불충불효'는 진짜 죄를 지었다기보다 왕과 부모에게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유배객의 자조적인 고백이며, 세상 모두가 자신을 잊고 버렸다는 극도의 고독감이 서려 있다. [3~4구]에선, 세상이 다 나를 버렸는데도, 상주 목사라는 고위 관직에 있는 김취문만은 유배된 옛 친구를 잊지 않고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그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오랜 이별의 한이 너무 깊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애틋한 감정을 담았다. [5~6구]에선, 5구 '식종과조우무석(食從寡助虞無夕)'은 유배지에서의 비참한 생활고를 뜻한다. 먹을 것을 대주는 이가 없어 당장 저녁을 굶을까 걱정할 만큼 굶주리고 있다. 하지만 '심욕고궁(心欲固窮)'을 통해 논어에 나오는 '군자고궁(君子固窮, 군자는 궁해도 지조를 지킨다)'의 정신을 드러냈다. 아무리 굶주리고 힘들어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결백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하늘(신)이 알아줄 것이라 위안한다. [7~8구]에선, 김취문이 보내온 편지(尺札)와 먹을거리(滋味)를 잘 받았다는 감사의 인사다. 마지막 구의 '장협(長鋏, 긴 칼)'은 전국시대 맹상군의 식객 풍환이 "칼아, 돌아가자꾸나. 먹을 고기가 없구나" 하며 칼자루를 두드렸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벗이 보내준 선물을 받고 칼자루를 두드리며 기뻐한 지 벌써 한 달(三旬)이나 지났을 만큼,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벗의 은혜를 매일 되새기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4) 다음 ’灰‘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병중서회(病中書懷)」는 조선 중기의 문신 유헌(遊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의 작품으로, 『유헌집(游軒集)』 권2(卷之二)에 수록되어 있다. 오랜 유배 생활과 병마 속에서 느끼는 쓸쓸함, 고향과 옛 벗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변치 않는 충절을 노래한 칠언율시다.
○ 이 시는 정황 선생이 유배지에서 병을 얻어 잔여 생을 돌아보며 지은 작품이다. 자신과 뜻을 함께했던 수많은 옛 벗들(故舊)은 사화와 유배 속에서 이미 세상을 떠났고(鬼何哀), 계절은 흘러 자연은 매년 푸르지만 자신의 삶과 고향 집은 피폐해져만 간다. 젊은 시절 가졌던 학문적 열정과 포부가 정치적 격변(조물주의 시기)으로 인해 꺾여버린 절망감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구절에서는 자신의 평생 신념이었던 충효(忠孝)를 되새기며, 병상에 홀로 누워 자신의 마음을 알아 줄 이 없는 절대적인 고독감과 쓸쓸함을 심화시키며 마무리된다. 조선 사대부의 유배 문학 중에서도 겪어온 세월의 무게와 내면의 고독이 매우 짙게 투영된 수작이다.
**「병중서회(病中書懷)」** / 정황(丁熿 1512~1560)
屈指流離星屢易 손가락 꼽으며 유배지 떠돈 지 세월이 몇 번이나 바뀌었던가
回頭故舊鬼何哀 고개 돌려 옛 벗들을 생각하니 이미 귀신이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謝家春草年年綠 고향 집 봄 풀은 해마다 푸르게 돋아나는데
陶令園田日日萊 내 고향 밭과 정원은 날마다 잡초만 우성해져 가는구나.
幼學仰先師也誘 어릴 적엔 스승님의 따뜻한 가르침 우러르며 배웠고
壯行爲造物之猜 자라서는 장부의 뜻 펼치려 했으나 조물주의 시기를 받았다.
一生忠孝吾顔厚 평생 충효를 뜻하며 이룬 것 없이 얼굴 두껍게 살아왔는데
病裏幽懷孰和哉 병 깊은 이 속마음을 그 누구와 함께 나눌 수 있으랴.
[주1] 유리성루역(流離星屢易) : 정황 선생은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고, 이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0년이 넘는 오랜 유배 생활의 고단함과 세월의 흐름을 뜻한다.
[주2] 사가춘초(謝家春草) : 중국 남북조시대의 시인 사령운(謝靈運)의 꿈속 구절인 '池塘生春草(연못가에 봄 풀이 자란다)'에서 유래한 고사다. 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시적 영감을 상징한다.
[주3] 도령원전(陶令園田) :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전원생활을 노래한 중국의 시인 도연명(도철)을 지칭함. 여기서는 유배지에 묶여 고향의 전답을 돌보지 못해 황폐해져 가는(日日萊) 처지를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인용해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주4] 조물지채(造物之猜) : 뛰어난 인재나 바른 길을 가려는 사람이 겪는 불행을 '조물주가 시기한다'고 표현하는 전통적인 문학적 수사다. 자신의 유배와 시련이 죄 때문이 아니라 운명의 가혹함 때문임을 뜻한다.
[주5] 오안후(吾顔厚) : 면피(낯가죽)가 두껍다는 뜻, 유배지에서 병들고 늙어가면서도 국가에 큰 보탬이 되지 못하고 조상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채 구차하게 살아남아 있는 자신에 대한 겸손과 부끄러움(자책)의 표현이다.
15) 다음 ’東‘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어대간만(魚大諫挽)」 즉, ’어(魚) 대사간(大司諫)을 애도하며‘는 조선 중기의 문신 유헌(遊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의 작품으로, 『유헌집(游軒集)』 권2(卷之二)에 수록되어 있다. 저자 정황(丁熿)이 세상을 떠난 사헌부 대간(大諫) 관포당(灌圃堂) 어득강(魚得江 1470~1550)을 애도하며 지은 만시(挽詩)다. 유헌(遊軒) 정황(丁熿 1512~1560)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 두 분 다, 예전에 진주에 낙향하여 사망한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 1470~1550)에게 학문을 배우고 그 영향을 받았던 관계로 가까운 지기(知己)였다.
○ 이 시는 전형적인 칠언율시(七言律詩) 형식의 만시다. 고인의 청고한 인품, 과감한 은퇴, 자연 속에서의 풍요로운 정신적 삶을 전반부에서 높이 기린 뒤, 후반부에서는 고인의 죽음을 직접 애도하지 못하고 멀리서 눈물로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작자 자신의 외롭고 안타까운 처지와 슬픔을 극대화하여 표현한 명작이다.
**「어대간만(魚大諫挽)」** ’어(魚) 대사간(大司諫)을 애도하며‘ / 정황(丁熿)
高山仰止士林同 높은 산처럼 우러러봄은 온 사림이 한마음이었고
勇退神仙不遠中 용기 있게 물러나 신선이 되시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계셨다.
世代是非身已蛻 세상의 옳고 그름에서 몸은 이미 허물을 벗어났고
江湖風月鬢成翁 강호의 바람과 달을 벗 삼아 살며 귀밑머리 센 노인이 되었네.
眼遊今古生涯富 눈으로는 고금을 노닐었으니 그 생애가 풍요로웠고
名滿人寰物望隆 이름은 인간 세상에 가득하여 사람들의 기대가 높았도다.
孤係海心無以赴 외로운 이 내 마음 바다 한가운데 매여 있어 달려갈 길 없기에
新詩和淚寫幽衷 새로 지은 시에 눈물을 섞어 깊은 속마음을 써 내리노라.
○ 내용인즉, 첫 구(句) '고산앙지(高山仰止)'는 《시경》에서 유래한 말로, 덕망이 높은 사람을 우러러보는 것을 뜻한다. 고인의 훌륭한 인품과 학식을 모든 선비(사림)들이 한마음으로 존경했음을 나타냈다. 이어 고인이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용기 있게 물러난(勇退)' 모습을 찬양했다. 세속을 벗어나 유유자적하게 사는 모습이 마치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신선과 같았다고 비유했다. 세상의 온갖 시비와 당파 싸움, 정치적 혼란 속에서 마치 매매가 허물을 벗듯(身已蛻) 초연하게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자연(江湖) 속에서 풍류를 즐기며 하얗게 늙어간 고인의 평화로운 노년 생활을 묘사했다. 책을 읽고 학문을 닦으며 눈으로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종횡무진 노닐었으니, 비록 벼슬은 없었어도 정신적인 삶과 생애는 누구보다 풍요로웠다는 뜻이다. 고인의 명성이 온 세상에 가득했고, 그를 향한 사회적 신망과 기대(물망)가 매우 높았음을 기리는 구절이다. 여기서 '海心(바다 마음)'은 정황 자신이 유배 중이거나 멀리 떨어진 고립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암시한다. 마음은 외롭게 묶여 있어 고인의 빈소나 무덤에 직접 달려가 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처지를 토로했다. 끝으로 직접 찾아가지 못하는 슬픔과 고인을 향한 절절한 애도의 정을 담아, 새로 지은 시에 눈물을 섞어 가며 가슴 깊은 곳의 속마음을 적어 보낸다는 뜻으로 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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