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사진주(四眞主) 원문보기 글쓴이: 사진주(四眞主)
강증산 상제님을 옥황상제님으로 부르는 단체나 사람들이 있다. 이에대해 사실관계를 알아보자
이중성의 천지개벽경을 보면 진법주 주문에 상제님의 신위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이 있다.
<천지개벽경 5편> 1장
하루는 대선생께서 가르침을 내리시니, 진법주라.
진법주(眞法呪)
구천하감지위 옥황상제하감지위 칠성여래하감지위
九天下鑑之位 玉皇上帝下鑑之位 七星如來下鑑之位
이 내용을 보면 "구천하감지위"와 "옥황상제하감지위", "칠성여래하감지위"가 별도로 구분되어 있다.
즉 구천상제와 옥황상제 칠성여래 등 모두 각각 신명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아래 내용을 가지고 옥황상제이다 라고 말한다.
하루는 대흥리에 계시더니, 양지 여러 장에 각각 옥황상제라 쓰시고 측간에 가시어 후지(后紙)로 사용하시니라. 제자가 증산상제님께 여쭈기를 "지금 옥황상제라 종이에 써서 후지로 사용하시니 무슨 까닭입니까?" 증산상제님께서 이르시기를 "천하의 그 어느 누구가 감히 (옥황상제를 참칭하여) 이러할 수 있으리요. 천지만신이 목을 자르고 몸을 찢어 죽일 것이니라. 이후에 하늘을 능멸하고 도를 더럽히는 패천패도자가 나와 패가망신할까 두렵구나. 세상을 오도하고 사람을 상하게 할까하여, 이와 같이 자세히 경계하노라. 나의 마음씀이 괴롭기가 이러하구나." (이중성의 천지개벽경 p512)
증산상제님을 옥황상제님으로 지칭하는 단체는 이 말씀을 근거로 상제님을 옥황상제님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상제님께서는 옥황상제라고 쓰여진 후지로 사용하셨다는 기록과 옥황상제라고 누가 감히 이러할 수 있으리오 라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상제님께서는 당신의 신위를 말씀하시기 위해 요새말로 화장지에다 적어서 표현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록으로 상제님을 단순히 옥황상제이시다 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증산 상제님께서는 "내가 옥황상제이다" 라는 기록도 없고 그러한 말씀을 하신적도 없다.
상제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는 공사가 아닌것이 없다.
후지(后紙,後知)라는 것도 의미를 살펴보면 뒤에 있는것을 알아라란 의미도 된다.
즉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옥황상제 라는 것을 알아라"라는 것을 암시한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상제님의 뒤를 이으신 분들 중에 옥황상제라고 지칭하는 분을 찾아보자.
상제님께서 진인을 찾아 보시다.
1903년(계묘) 겨울 어느 날 보경 등의 종도들이 모시고 앉아 있는 자리에서 혼자 말씀으로
『내 일이 어찌 이렇게 더디냐.』하시니라.
보경이 여쭈기를 『무엇이 그리 더디나이까?』하니
『내 이제 신명을 시켜 진인(眞人)을 찾아보니 아직 아홉 살 밖에 되지 않은 지라.
내 일과 때가 이렇듯 더디니 어찌 딱하지 않으리요.』 하시니라.
보경이 다시 그러하오면 『저희들은 모두 쓸모없는 사람이요, 또한 지금까지 헛되이 따름이오니까?』하고 아뢰니
상제님께서 『체유기체 용유기용(體有其體 用有其用, 체에는 그 체가 있고, 용에는 그 용이 있음)이며, 시유기시 인유기인(時有其時 人有其人, 때에는 그 때가 있고 사람에는 그 사람이 있음) 이니라.』 하시니라.(태극진경3장59절)
상제님의 뒤를 이을 진인이 1903년에 아홉 살이라면, 진인은 1895년 을미년에 태어나야 합니다.
몇몇 종도들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진 이 일화는 상제님께서 재세시에 이미 종통계승자를 따로 정하셨고 을미생임을 명확히 하셨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속의 민요에서 ‘조을시구’라는 후렴구가 조을(趙乙)과 시구(矢口)로 풀어 ‘조씨 을미(乙未)생을 알아라.’는 뜻으로 해석됨도 상제님께서 안배하신 종통계승의 천부적 신성성을 잘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내 덕을 펼 사람은 지금 초립동년(草笠童年)이니라
하루는 대흥리에 계시더니, 제자가 명을 받고 삿갓을 사와서 비치하니라.
말씀하시기를, 내 덕을 펼 사람은 지금 초립동년(草笠童年)이니라.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공우야. 비록 나이가 적은 사람이라도
지위가 너보다 높고, 덕이 너보다 높거든 만날 적에 반드시 공경하라.
어떤 날은 말씀하시기를, 공우야. 때가 와서 한 사람이 허락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내가 있는 곳에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노라.(이중성 천지개벽경7편8장)
* 1907년 주요 인물들의 행적을 살려보자.
- 선도교 고수부 : 본명은 고판례로 1907년 당시 28세
- 천지개벽경 저자 이중성은 1907년 당시 11세
- 대순전경 저자 이상호 선생은 1888년 생으로 1907년 당시 20세
- 증산도 안운산(본명-안세찬)은 1922년생으로 1907년엔 태어나지도 못했다.
위의 인물들 중에서 강증산으로 부터 종통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고수부와 조정산이다.
그러나 고수부는 여자로써 초립동이 아니였고,
조정산께서 증산상제 님으로 부터 종통을 받아 덕을 펼칠 그 초립동이 맞다고 볼 수 있다.
* 초립동(草笠童)은 초립(草笠)을 쓴 사내아이로 1907년 당시 도주님은 13세 이셨다.
증산도경전인 도전에서 밝힌 종통에 대한 상제님의 공사가 어떤것인지 확인해보자.
위는 증산도 경전 도전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 처음에는 있었던 사실 그대로 진실을 기록했는데
이후 자신들의 체재를 주장하기에 불리하다고 생각되었는지 신판에는 삭제되어 찾을 수 없다.
상제께서 조정산 도주님께 종통을 계승하다
도주 옥황상제님께서는 15세 되시던 1909년 4월 28일에 전 가족과 함께 창원역에서 신의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길에 오르셨다.
바로 이날 상제님께서는 진주이신 도주 옥황상제님의 봉천행 여정을 확인하시기 위해 기차가 다니는 들판으로 가 기차를 향해 명을 내리시고 또한 공사를 보셨다.
김보경(金甫京, 1861~1934)과 이치복(李致福, 1860∼1944)을 비롯한 몇몇 종도를 앞세우시고 대전역 근처의 철도주변에 이르셔서 혼자 말씀으로 「올 때가 되었는데.......」 하시고 멀리 바라보시며 누구를 기다리는 표정이시니라.
종도들이 이상이 여겨 여쭈기를 『누구를 그렇게 기다리시옵니까?』 하였으나 답을 않으시고 바라만 보시더니 마침 남쪽에서 달려오는 기차를 보시고 반겨 하시며
『이제 나의 일은 다 이루었도다. 남자가 15세면 호패를 차느니 무슨 일을 못하리요.
과연 인유기인(人有其人) 시유기시(時有其時)로다.』 하시고 한참동안 서 계시니라.(태극진경9장153절)
* 증산께서 기유년(己酉年) 화천하시기 2개월 전 대전역 부근의 일이다.
이것이 바로 계시에 의한 종통이다.
아래는 도주님의 행적을 기록한 태극진경에서 그 당시의 상황을 찾아보자.
상제(도주 옥황상제)님께서는 창원역을 출발하신 후 처음에는 망명준비의 과로로 피곤하셨으나 미시(오후1시30분 3시30분사이)경 대전부근에 임하셔서는 정신이 맑아지시고 기운이 충천하신 중에 마음공부를 조금도 늦추지 않으시니라.
이때 갑자기 일광 같은 모습에 황금색 용포의 신인(神人) 한 분이 나타나셔서 우뢰같은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를『내 그대를 기다린지 오래노라. 그대는 삼계의 진주니 이는 막중한 천기라. 그대가 나의 도통을 이어 치천하도수(治天下度數)로 무극대운(无極大運)의 대공사를 성취하되 내 명교(命敎)를 받들어 태극(太極)의 진법(眞法)을 용(用)하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광구삼계(匡救三界)하리라.
그대의 호는 정산(鼎山)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간(甑鼎之間)이며 이도일체(以道一體)니라.
나는 구천(九天)의 천존상제(天尊上帝)로라.』하시니라.
상제(도주 옥황상제)님께서는 이 말씀에 정신이 더욱 환해지셔서 이 신인이 바로 진리의 당체이신 구천상제님이심을 깨닫는 동시 봉천명(奉天命)의 기쁨속에 몸소 태극진주(太極眞主)임을 대오(大悟) 자각(自覺)하시고 삼계를 광구하실 각오를 마음속에 굳게 다지시니라.(진경1장39)
* 증산 상제님의 종통계승은 이처럼 이루어지셨으며 이 분이 바로 옥황상제이심을 알 수가 있다.
기유년(己酉年)에 십오세이면, 을미생(乙未生)임을 뜻하는 내용이다.
당시 도주님의 조부께서는 홍문관 정자(正字)겸 춘추관 기사관(記事官), 승정원 주서(注書) 등을 지낸 조영규(趙瑩奎)셨다. 그 분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할 뜻을 품은 것을 알고 나라의 위태함을 거듭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낙향하셨다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분개하여 토혈 서거하셨다.
조부의 배일사상(排日思想)을 이어받은 도주님의 부친과 숙부들은 구국운동을 하기 위해 화약 공장을 차리고 무기 수집을 하였는데 그만 일본 경찰에 발각되고 말았다.
형세가 다급해지자 도주님을 비롯한 전 가족은 고향을 떠나 만주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1909년 4월 28일 당시 15세이셨던 도주님께서는 창원역에서 신의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전 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오르게 되신 것인데, 바로 그날 그 기차가 대전의 신탄진을 지날 때에 상제님께서 미리 마중 나와 계시다가 보시고 기뻐하셨던 것이다.
도주님께서 천명(天命)을 받드는 50년 공부를 시작하시게 됨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이 일화는 종도들 사이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상제님의 뒤를 이어 종통을 세우실 분이 도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유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훗날 이상호와 이정립이 상제님의 행적을 모아 『증산천사공사기』와 『대순전경』을 간행할 때 이 이야기를 싣지 않았는데, 그것은 종통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려주는 이 일화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도들에게는 이 불편한 진실이 워낙 광범히 하게 퍼져 있었다.
만약 당시 인물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종통을 주셨다면 그것도 편파적이라고 하여 종도들 간에 큰 싸움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통은 판밖에서 맥을 이루신 것이며, 종도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종교를 만들어 교주로 활동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증산관련 다른 교단들은 종교는 있으나 맥은 떨어져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증산도는 위 구절을 가지고 창시자인 안운산의 고향이 대전이라는 것을 꿰맞춰보려 했으나, 그 어떤 해석으로도 관련성을 찾을 수 없기에 증산도 경전인 도전의 신판을 발행하면서 부터는 이 구절을 빼 버렸다.
그러므로 지금 증산도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런 구절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금산사(金山寺) 미륵금불과 양산(兩山)의 진리
금산사(金山寺)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의 모악산(母岳山: 794m) 서편 기슭의 골짜기에 자리한 사찰로 상제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강세하시기 전에 금산사 미륵금불에 30년간 임하여 계셨던 곳이다.
진표율사가 세운 미륵불은 1597(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고, 1627(인조 5)년 미륵전을 중건할 때 흙으로 빚은 불상에 도금을 한 형태로 다시 만들어졌다.
이때 중앙의 미륵불(11.8m)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불(挾侍佛: 8.8m)이 ‘뫼 산(山)’ 자 형태의 삼존불로 조성되었는데 그 후 협시불 양옆으로 작은 보살상이 추가로 봉안되면서 전체적으로 ‘날 출(出=山+山: 兩山)’ 자 형태가 되었다.
* 수미좌(須彌座) : 절의 불전(佛殿) 안에 불상을 받치는 단.
- 수미산을 본뜬 것으로 수미단 또는 수미좌라고 한다.
* 철수미좌(鐵須彌座]) : 철로 만든 수미좌
금산사에는 본래 그 터에 9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용소(용추)가 있었다.
진표율사는 못을 메우고 미륵불을 세워야하는데 도저히 물을 메울 수가 없었다.
흙으로 메우면 흙이 간 곳이 없어져 버리고, 돌로 메워도 그 다음날이면 모두 밖으로 튕겨 나와 있었다.
다시 기도를 하니 계시가 있기를 숯(목탄)으로 메워라. 라고 하시었다. 그리고 내가 고을 사람들에게 눈병을 창궐하리라. 고을마다 방을 붙여 안질이 있는 사람은 숯을 갖고 와서 여기 연못에 넣고 그 물로 눈을 씻으면 눈병이 낫는다고 널리 알리라고 하셨다. 이후 고을에 방을 붙이고 나니 정말로 사람들이 눈병이 생겨 숯을 가져와서 연못에 넣고 그 물로 눈을 씻으니 눈병을 나았다.
그렇게 연못이 숯으로 메워진 뒤 계시대로 솥[鼎]과 시루[甑]를 놓고 그 위에 미륵불을 모셨다.
지금 금산사 미륵전 밑으로 들어가면 쇠로 만든 솥이 있고 그 아래 숯으로 메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루는 솥 위에 얹혀야 조화가 나온다. 물도 있어야 하고 숯으로 불도 때야 하는데 용추 못은 물이고, 숯은 불이니 조화가 나온다.
금불의 양쪽에 보호불이 두 개씩 있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금불과 보호불, 그 옆의 조그만 불이 합쳐서 두 개의 뫼 산(山) 자, 즉 출(出) 자를 이룬다. 이것은 산(山)이 두 개 있는 형상으로 증산, 정산을 의미한다. 완연하다.
이 시루와 솥의 이치가 바로 시루 증(甑) 뫼 산(山) 증산(甑山) 상제님을, 솥 정(鼎) 뫼 산(山) 정산(鼎山) 옥황상제님을 상징하는데, 상제님께서 인세(人世)에 계실 때 호가 증산(甑山), 옥황상제님의 호는 정산(鼎山)이셨다.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후 천하지 대금산(天下之大金山) 모악산하(母岳山下)에 금불(金佛)이 능언(能言)하고 육장 금불(六丈金佛)이 화위 전녀(化爲全女)라”고 하셔서 미륵금불이 전녀(全女)를 합친 성씨인 강(姜)씨로 왔음을 암시하신 데서도 알 수 있다.
양산도(兩山道) 타령
상제님께서는 금산사의 미륵금불을 양산도(兩山道)라고 이름 지으시고 세속에 전해지는 양산도와 비유하곤 하셨다. 시속에는 양산도 타령이라는 유명한 민요가 전해지는데, 그 후렴구 중에는 “에라 놓아라, 아니 못 놓겠네, 능지를 하여도 못 놓겠네, 에헤이예”라는 구절이 있다. 그렇게 능지처참을 당해도 양산(兩山)의 도(道), 이 줄만큼은 절대 못 놓는다는 것인데, 그 양산이란 바로 시루와 솥인 증산(甑山)과 정산(鼎山)인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강증산 상제님을 옥황상제님으로 지칭한것은 매우 잘못된것이다.
그러므로 증산상제님은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 님이 맞는 신위이시다
옥황상제님께서 개유보하신 후인산조개유보 권군범사막원천에 대한 바른 의미로 하늘에게 원망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https://cafe.daum.net/gncjsroqur/NQn1/35
의통(醫統)을 열어주시는 시기는 언제인가 - 의통이란 성도(成道)를 의미한다
https://cafe.daum.net/gncjsroqur/WOux/4
사진주(四眞主) https://cafe.daum.net/gncjsroqur
김영진교감 010-3967-0919 / SNS ID: simwoodo
|
출처: 사진주(四眞主) 원문보기 글쓴이: 사진주(四眞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