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하루는 소리를 찾는 일이다. 시끌벅적한 소리 들로 혼미해진 세상이어서 자칫하면 어느 구석으로 나뒹굴지도 모르는 터다. 속내가 빤하면서도 오리무중인 소리 들이 발끈하고 악쓰고 그러다 왕창 깨어지고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소리에도 뼈가 있어 은근슬쩍 찔러 대는 일이 허다하지만, 한사코 희망을 발라내야 한다며 버둥거리는 나는, 소리 속에서도 소리가 그립다. 소리 없는 세상은 어쩐지 무성 영화처럼 밋밋하여 곧 외로워질 것만 같다.
“하늘이 청명하고 낮엔 햇볕이 따사롭겠습니다.”
기상 캐스터의 아침 목소리가 명쾌하다. 때맞춰 전기밥솥이 푸푸 뜨거운 숨을 내뿜는다. 여기저기서 달그락거리고 쨍그랑 그리는 소리 들이 들숨과 날숨의 편곡을 만들어내며 또 하루 치의 소리 세상이 열린다.
신문을 펼쳐 들어도 아침 소리가 우르르 쏟아진다. 상대방에게 은근히 날리는 뼈 있는 소리, 대놓고 비난하는 핏대 어린 소리, 하루아침에 말 바꾸기를 하는 줏대 없는 소리, 된소리들이 횡행하는 정치면은 아예 소리의 난타전이다. 주택 가격이 바닥을 친 거다. 아직, 아니다. 지금이 집을 사야 할 적기다. 채솟값이 너무 올라 벌써부터 김장 걱정이 앞선다. 설왕설래 중인 경제면에는 서민들의 근심과 우울도 섞여 있다. 페이지마다 행간마다 소리 들이 뛰어내리며 떠들썩한 세상을 알려준다.
“옵 옵 옵 오빤 강남 스타일~”
오랜만에 신명 나는 소리를 만났다. 오빤 강남 스타일~, 지구촌 사람들을 난데없이 말춤의 유행에 빠뜨려 놓은 ‘싸이’의 노래 ‘강남 스타일’이 단박에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올랐다. 양쪽 무릎을 번갈아 오르내리며 앞으로 위로 팔을 휘둘러 대느라 말처럼 날뛰는 춤에 노랫가락이 얹히니 흥이 절로 난다. 우울과 한숨이 깊어지는 삶의 한 소절을 가볍게 흔들어 주는 노래다. 춤은 새로 나온 ‘비타 음료’ 맛이랄까. 소리에도 색과 맛이 있다.
가끔은 순한 소리를 찾아 발길을 놓는다. 토란잎에 모이는 빗소리가 듣고 싶고, 속까지 들어찬 쇳소리를 털어내고 싶을 땐 야생초가 멋대로 자란 생태공원이어도 좋다. 계곡 숲길이라면 제격이다. 도란도란 계곡 물소리 따라 숲속 길로 접어들면, 거기 길섶의 삶들이 보인다. 어느새 한 소녀가 걸어 나와 가녀린 들꽃이며 개미 땅벌레 이끼 등, 간신히 목숨인 것들의 나지막한 소리에 귀를 대고 있다.
그러다 선뜻 그리운 소리도 깨어난다. 세상에서 가장 내 편이었던 한 사람, 어머니의 젖은 음성이 맴돌 적엔 마음속에도 물기가 어린다. 그리운 시절, 사람, 풍경들은 어머니의 목소리에 다 담겨 있는가. 고운 음색이 잘도 어울리던 애창곡 ‘목포의 눈물’을 다시, 한 번만 들을 수 있다면……. 그렁그렁한 그리움은 탁해지는 마음속에 부적처럼 심어 둔 한 그루 잎 푸른 나무다.
드높은 하늘과 나무와 사람이 일체가 되는 숲길은 명징하다. 편백 나무들이 까마득히 키를 세운 공원 숲길에서다. 바람마저 숨을 죽이는데 문득 소리 하나가 발길을 잡는다. 보리피리, 시비(詩碑)에 박제 되었다고 어찌 들리지 않으리. “…보리피리 불며 / 인환의 거리 / 인간사(人間事)그리워 / 피-ㄹ 늴리리….” 외딴섬 소록도에서 두고 온 세상이 그리워, 인간사가 하도 그리워 끊기듯 이어졌을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 소리다. 그를 본 적 있다. 흑백 텔레비전 시절의 어느 시상식에서 한 손엔 붕대를 친친 감고 수상을 하던 장면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에선 늘 속울음이 들린다. 소리가 소리를 불러 시인의 ‘소록도 가는 길’이 따라 나온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마음으로 듣는 소리는 울림이 더 깊은 건지도, 모른다. 죽음보다 더한 외로움도 있다는 걸 사람들은 그때 알았을까.
먼지 한 점 흔들리지 않는 정적 속, 외로움이 포진한 시간들을 견뎌 본 사람이라면 소리의 반가움을 안다. 정든 장소나 보고픈 사람들은 멀어져 있을 때면 더욱 눈물 난다. 한동안 몸이 아파 웅크린 늪처럼 놓여 있던 시간이 떠오른다. 소리를 벗어나고파 안달했던 마음은 간데없고 자글자글한 웃음소리와 팔팔한 고함 소리가 그립기만 했다. 언제쯤 그곳에 섞일 수 있을지 조바심이 났다. 전원생활을 꿈꾸었던 누군가가 그랬다. 날마다 상쾌한 공기와 청초한 꽃들과 철마다 다른 풍경이 있어도 사람이 없으니 외로울 따름이더라고, 서로 다 산 것처럼 싸우고 돌아앉아 서럽게 울다가도 한데 엉겨 사는 건, 소리가 그립기 때문일 게다.
소리를 품으면 어떨까. 지하철 전동차를 기다리는데 낮게 포복한 소리 들이 말해 준다. 각양각색의 소리 세상에서 어찌 우아한 하모니만을 바랄 수 있겠냐고, 소리를 떠나 있어도 되돌아오고 싶은 곳 역시 법석대던 소리 세상이 아니더냐고, 그러고 보니 온갖 소음들로 뒤섞인 세상 소리도, 늘어진 삶을 건져 올려 나름의 화음을 만들어 갈 생생한 음이지 싶다. 귀를 닫고 도망칠 게 아니라 외로운 삶에 뼈아프게 품어야 할 통증이면서 위로이기도 하다. 땀과 눈물과 웃음 가득 밴 인간사 소리를 외면한 채 어떤 소리를 사랑할 수 있는가 말이다. 서툰 날갯짓으로 여기까지 먼 거리를 유영해 온 것이 소리를 품기 위함이었던가 보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거실 등을 밝히고 티브이 리모컨을 눌러 썰렁한 정적부터 몰아낸다. 뉴스를 들으며 세탁기를 돌리고, 솰솰 흐르는 수돗물에 쌀 씻어 밥을 안친다. 호박 양파 풋고추가 도마 위에서 사각사각, 가지런해진다. 모시조개도 살랑살랑 헹궈 담고 된장도 풀어 넣어 마침내 보글보글, 뚝배기 안에 한데 모인 소리들이 저들끼리 얼리느라 한창이다. 숨차게 요동쳤던 날갯짓 뒤에 찾은 안식이어선지 소리가 곧잘 속으로 스민다.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도 더불어 감칠맛을 낸다. ‘강남 스타일’의 튀는 맛도 썩 괜찮고 흘러간 가요도 구수하다.
그러다가 부그르르 부풀어 오른 거품을 걷어내며 생각한다. 복작대며 끓어 넘치기도 하는 것이, 괴로움과 아픔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것은 단조롭고 무미(無味)한 혼자가 여럿과 어우러졌을 때, 따뜻한 온도로 숙성되어 가는 달큰한 몸살일 수도 있다. 여태 소리를 찾아다녔건만 지금 내 곁의 밝은 주파수 같은 소리 하나가 그 많은 소리 길을 대신하듯, 비로소 아픔을 토닥여 주는 저녁이다.
나는 애당초 소리 새였다. 소리를 찾고 소리를 듣고 소리를 내며, 소리에 마음이 무너지고 눈물이 가득 고인다. 깃털이 뽑히도록 아귀다툼을 하여도 다시 휘파람을 불며 소리 세상을 유영한다. 소리 없는 세상은 밋밋하여 이내 외로워지고 마는 속성을 지녔기에, 감정의 기승전결 다 담은 그 아우성을 부실한 내 삶의 자양분으로 조금씩 품어 가는 중이다.
언젠가는 소리만 먹고 사는 양 날마다 소리를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 적요 끝에 달려오는 소리는 그 기적만으로도 화들짝 반가워 야윈 날갯죽지를 퍼덕이기도 할 게다. 귀를 세워 기다리고 쉰 목을 가다듬어 화답을, 할 테지. 그러니 소리 새들끼리 사는 벽 안에서 세상이 시끄럽다며 서로 탓하지는 말 일이다. 소리 새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를 잃는 순간, 날개를 접어야 한다.
소리는 소리새의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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