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新齋集』~~영귀재?
鄭義林의 개인 문집.
[내용 및 특징]
『日新齋集』은 21권 12책으로 문인 朴準基, 洪承渙 등과 族人 鄭炳海 등이 유고를 모아 1927년 간행했으며, 서문과 발문은 없다. 권1은 시 175제가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으며, 사우들을 만나고 지은 교제시가 대부분이며, 뒷 부분은 만시가 많다. 그는 노문삼자로 불리웠던 정재규와 특별한 교분이 있어서 서로 영호남을 방문하고 시를 남겼으며, 1902년에는 『蘆沙先生文集』중간을 위해 단성의 신안정사를 방문하고 이어 崔益鉉, 奇宇萬, 鄭載圭, 崔琡民 등과 七佛寺에서 함께 지은 시가 남아 있다. 대표적인 시로는 「瑞石唱酬韻」10수를 들 수 있다. 정의림은 이 시의 서문에서 1887년 8월 17일부터 8월 23일까지 7일간 친구나 문인들과 함께 화순에서 무등산의 廣石臺, 上峯, 澄心寺를 거쳐 다시 화순의 萬淵寺禪定庵, 능주의 映碧亭과 東歸峯을 다녀오면서 지은 것이라고 하였는데, 방문한 곳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그 곳의 풍광을 잘 묘사하였다.
권2부터 권10까지는 354명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권 2에는 그의 스승인 奇正鎭과 그를 가르쳤던 朴永主, 부여의 族大父 鄭龜錫를 비롯해서 金平黙, 任憲晦, 柳重敎, 崔益鉉, 閔冑顯, 閔種烈 등 기호지방의 저명한 학자 및 정치가, 그리고 동문선배인 趙性家에게 보낸 서간문이 들어 있다. 기정진에게는 理氣, 理一分殊, 陰陽動靜, 未發氣質, 心性, 善惡, 喪服 등 성리학이나 예학에 관에 물었는데 답변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정석구에게는 안부를 물으면서 부친의 삼형제가 모두 耆老에 들었다는 것과 가르침대로 기정진에게서 글을 배우겠다는 것을 말하였고, 박영주에게는 안부를 물었다. 김평묵과 유중교, 최익현 등 화서 이항로의 제자들에게는 異端邪說을 배척하고 화서와 노사의 주리설을 굳게 따르자고 주장하였다. 임헌회와 민주현, 동문인 조성가에 보낸 편지는 모두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전하는 내용이다.
권3은 주로 金錫龜, 崔琡民, 鄭時林, 鄭載圭, 奇宇萬, 金顯玉 등 기정진의 문인에게 보낸 편지이며, 柳基一 등 이항로의 문인에게 보낸 편지도 들어 있다. 정재규와의 편지는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는 기정진의 두 문인 간에 心主理說에 대해 心의 靈과 神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전개하였으며, 기우만과는 서로간이나 정재규 등 동문간의 근황, 그리고 기정진의 문집, 시국에 대한 걱정과 기우만의 상소 등에 글을 보냈다.
권4부터 권10까지는 주로 후배나 문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특히 권6의 梁會洛과는 11통의 편지, 권8의 黃澈源에게는 18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주 내용은 정재규와 마찬가지로 心主理說에 대해 心의 靈과 神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미발시 기질은 어떠한가에 관한 논쟁이다.
권11부터 권13 중간부분까지는 잡저인데 모두 86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11의 「辨田愚所箸蘆沙先生納凉私議記疑」, 「辨田愚所著蘆沙先生猥筆辨」은 1902년 田愚가 기정진의 「猥筆」과 「納凉私議」에 대해 비판한 것에 대해 재비판한 것으로 리에 동정이 있다는 주장과 理一分殊說, 율곡의 주장도 근본적으로 主理說이라는 것 등으로 기정진의 학설을 옹호하는 내용이다. 권12의 「書示諸同志」, 「通告嶺南列邑章甫文」, 「通告湖南列邑章甫文」, 권13의 「節酌辨誣文」은 1902년 영남 노론들이 기정진의 「猥筆」이 이이를 비판한 것으로 문제 삼아 기정진의 문집 목판본을 훼판하려고 하였을 때, 정의림이 영,호남의 선비들에게 기정진의 학설이 태극의 주재의 의리를 밝힌 것이며, ‘機自已’는 유행변의 설명으로 이이의 학설은 근본적으로 주리이다는 것을 널리 알려 기정진을 옹호한 글들이다. 「湖上奇遇錄」, 「閱奇遇錄有感而記」은 三嘉의 기우만과 성씨도 같고 기정진에게 공부한 시기나 나이, 재주가 비슷하다고 하여 기정진이 짓게 한 것이다. 그리고 「答通長城會所文」은 1896년 기우만의 의병에 능주에서도 참여하겠다고 답통한 글이다. 그리고 「日志錄」은 정의림이 44세 되던 해인 1889년에 자신의 성리설을 기록한 글이다. 그 밖의 다른 글은 주로 문인들과 헤어지면서 지어준 글이나 '子說'이 대부분이다.
권13권 후반부는 34편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문집이나 족보 서문이 많다. 「咬菜窩遺稿序」는 동향의 閔百火右의 문집서문이며, 「無邪齋遺稿序」는 사서를 배웠던 朴英柱의 문집서문이다. 그리고 「詠歸會案序」는 1887년 벗들과 함께 일주일간 무등산 일대를 다녀오면서 서로 학문과 도의를 강마하자고 만들었던 영귀회의 내력을 적은 글이다. 「豊壤趙氏派譜序」는 강진의 풍양조씨 監司公派의 파보 서문이다.
권14는 記인데 71편이 수록되어 있다. 「詠歸亭」은 영귀회에서 정의림의 말년의 강학처인 영귀정을 만든 경위와 이 강당에 출입하는 자는 소학으로 기본을 세우고 대학으로 규모를 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기문이다. 「日休堂先生崔公旌閭重修記」는 1593년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화순 출신의 의병장 崔慶會 장군의 정려 중수기이며, 「兩蹇堂黃公旌閭重修記」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강진 출신의 黃大中 장군의 정려 중수기이다.
권15는 14편의 跋, 14편의 銘, 3편의 辭, 3편의 贊, 3편의 상량문, 4편의 축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 「蘆沙先生答問類編跋」은 기정진과 문인들 간의 문답내용을 기정진의 문인들이 수년간에 걸쳐 성리학, 경서, 예학, 역사 등으로 항목별로 편집한 『答問類編』의 서문인데 발문을 정의림이 지었다는 것은 기정진 문인 가운데 정의림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가를 알려주는 글이다. 또한「題黃景涵巖間偶錄後」는 정의림과 정재규의 문인인 능주의 황철원이 성리학에 대해 논한 글에 정의림이 단락별로 평가를 해준 글이다. 銘이나 辭는 주로 후배나 문인들의 字에 대한 글이다. 그 밖에 65세 때에 자신의 모습에 대해 지은 自贊, 영귀정의 開基祝文이나 영귀정 강회시 선생과 선사에게 고한 축문 등이 있다.
권16은 제문 40편, 碑 1편, 묘갈명 9편이 수록되어 있다. 제문은 그의 스승인 奇正鎭과 그를 가르쳤던 朴永主, 鄭龜錫를 비롯해서 金平黙, 崔益鉉, 閔冑顯 등 기호지방의 저명한 학자, 趙性家, 金錫龜, 崔琡民, 鄭時林, 鄭載圭, 奇宇萬, 金顯玉, 金漢燮 등 동문선후배 또는 교유 인물들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다. 묘갈명은 권 17의 묘지명이나 묘표와 함께 주로 능주나 화순 일대의 인물들에 관한 묘도문자이다.
권17은 묘지명 35편, 묘표 12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18과 권19의 전반은 40편의 행장이 수록되어 있다. 정의림의 조부, 백부, 부친과 모친 등의 행장을 비롯해서 능주나 화순일대의 인물들에 대한 행장이다. 권19의 후반은 傳 13편이 수록되어 있다. 「贈通政大夫兵曹參議兼經筵恭贊官月軒曺公傳」은 무관으로서 을묘왜변 때 전사한 曺顯, 「河東鄭氏十忠傳」은 왜란과 호란 때 충의를 다한 10명의 충신에 대한 글이다. 「大谷處士金公景範傳」은 같은 蘆門三者의 수문으로서 정의가 두터웠던 金錫龜가 51세로 타계하자 그의 행적을 그린 전기이다. 권20과 21은 48편의 遺事가 수록되어 있다. 주로 능주, 화순 일대의 인물들에 관한 유사이다.
[자료적 가치]
정의림은 담양의 김석구, 삼가의 정재규와 함께 기정진의 3대 제자 중의 한 명으로서 많은 성리학적 관련 자료, 능주 지역과 관련된 많은 인물에 대한 정보, 위정척사운동이나 의병관련 자료를 남기었다. 그는 강학활동도 열심히 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고, 1902년 송병선 문인이나 전우 등에 의해 기정진 학설이 논란되었을 때, 영,호남 일대에 통문을 보내 기정진이 이이의 학설을 계승하여 주리설을 주장하였음을 밝혔다. 따라서 정의림의 자료를 통해 능주 지역을 비롯한 호남 일대의 유림들의 동향이나 성리학과 위정척사운동의 방향 등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日新齋 鄭義林의 性理說硏究」, 박학래, 『凡韓哲學』41, 2006
『蘆沙學派의 形成과 活動』, 김봉곤, 한국학대학원박사학위논문, 2007
집필자 : 김봉곤
정의림(鄭義林)의 문집
『日新齋集』은 21권 12책으로 문인 朴準基,洪承渙 등과 族人 鄭炳海 등이 유고를 모아1927년 간행했으며, 서문과 발문이 없다.
문집에는 정의림이 정재규나 황철원, 양회락등과 토론한 많은 성리학적 관련 자료, 능주나 화순, 보성 지역과 관련된 많은 인물에 대한 정보, 위정척사운동이나 의병관련 자료를 남기었다. 특히 1902년 송병선 문인이나전우 등에 의해 기정진 학설이 논란되었을 때, 영, 호남 일대에 통문을 보내 기정진이이이의 학설을 계승하여 주리설을 주장하였음을 밝혔다. 문집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집필자 : 김봉곤
정의림(鄭義林)에 대한 인물 정보
鄭義林은 자는 季方, 호는 日新齋이며 본관은 光山으로, 綾州 大德에서 鄭濟玄과 珍原朴氏 致聖의 딸 사이에서 1845년(憲宗 11) 11월 출생했다. 그의 선조들은 조선조에 纘 이후 나주에 줄곧 거주하였으나, 그의 증조埰가 영암으로 이주하고 조부 加錫이 다시능주에 이주하였으며, 정의림의 조부와 부친은 각각 81세를 살아 壽職으로 통정대부를 받았다.
정의림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사색을 좋아하였는데, 이미 서당을 다니기 전에도 華夷에 대해 구분하고, 화이는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신상에도 華夷가 있는데 아름다운 것은 華이고 악한 것은 夷라고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10세에 明村黃綺顯에게서『小學』을 배우고 13세에 觀水齋 朴永柱에게서 四書를 배웠으며, 17세부터는 山寺에 들어가 스스로 三經을 읽었다. 이어 그는 20세 때에 서울을 다녀오는 길에 부여에서 族大父 石塘 鄭龜錫을 배알하고 ‘日新齋’라는 아호를 받고 기정진에게서 수학할 것을 권유받았다.
정의림은 4년 후 1868년에 장성의 하사로 기정진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정진한 결과 기정진으로부터 김석구, 정재규와 함께 노사학파를 이끌어갈 인물로 기대되었으며, 동문들로부터 蘆門三子로 불리게 되었다. 기정진은 1875년 10월 자신의 평생의 역작인 『納凉私議』를 김석구, 정의림, 정재규 3인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4일 밤낮을 강론하였으며, 다시 1879년 정월에 「納涼私議」와 「猥筆」을 강론하게 되자 이들은 기정진의 학설을 이해하고 기정진의 학설을 독실하게 믿고 따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의림은 학문적인 명성이 점점 높아지자 전라감사였던 韓致肇나 능주목사였던 南學熙로부터 강학과 향음례에 초대되어 일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1879년에 스승인 기정진의 별세, 다시 3년 뒤인 1882년에는 부친의 별세로 한동안 강학활동에 전념하지 못하였다가, 부친상을 마친 1884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강학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大德에서 品村, 墨谷, 星洞, 佳山 등으로 자주 옮겨 다니면서 강학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곳곳마다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이어 정의림의 강학활동은 능주목사에게도 알려져1886년 학행으로 능주목사가 도백에게 천거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1887년에는 여러 친구들과 문인들을 데리고 무등산 일대를 유람하였는데, 이 때 유람한 인물들과 詠歸會를 조직하고 1891년 겨울에는 평생의 강학처인 詠歸亭을 축조하고 5성 4현을 모시고 춘추로 享祀하고 강론에 힘썼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문인들이 크게 늘어났다.
그는 영남의 기정진 문인과도 활발하게 교유하여 1891년 2월에는 삼가의 정재규를 방문하여 뇌룡정에서 강회를 개최하였으며, 다시 그해 8월에는 지리산 화엄사에서 鄭載圭와崔琡珉, 金顯玉 등 영남문인과 鄭義林과 鄭時林 등 호남 문인들이 모두 모여 대규모 강회를 실시하였다. 이후 그는 정재규와 함께기정진의 학설에 대해 토론하는 한편, 金平黙, 柳重敎, 崔益鉉 등 화서학파와의 교류에도 힘썼다.
또한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招討使 閔種烈에게 편지를 보내 동학이 극성하다고 하여 백성을 죽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정학을 높여 이단에 물들지 않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1896년 기우만이 나주에서 의병운동을 일으키자 적극 가담하였다.
또한 1902년 스승인 기정진의 문집 간행시, 영남의 노론들로부터 기정진의 「猥筆」이이이의 학설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고 문집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정의림은 영남과 호남의 각 읍에 통문을 보내 기정진은 이이의 학설을 篤信하였으며, ‘기틀이 스스로 그럴 뿐이다(機自爾也)’고 한 이이의 주장이 주기로 이해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변론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역적들을 처단하자고 유소를 작성하였으며, 최익현이나 정재규, 기우만의 거의에도 참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의병운동이 실패하게 되자, 정의림은 일체 두문 불출 자정하다가 1910년 10월 10일 별세하였다. 사후에 문인들이 그의 학덕과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화순의 七松祠, 三山祠,龍山祠와 담양의 金谷祠 등에 제향하였다. 그는 驪興 閔致煥의 딸 사이에서 슬하에 아들 尙默과 光山 李進休, 洪州 宋光壽, 密陽朴敬東에게 시집간 세 딸을 두었다.
집필자 : 김봉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