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3번째 시간으로서 “희망적인 소망” 希望的希望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네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만, 오늘은 앞의 한 구절과 뒤의 세 구절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앞의 한 구절인 5장 5절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5장 5절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この希望は失望に終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なぜなら、私たちに与えられた聖霊によって、神の愛が私たちの心に注がれているからです。
여기서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대단히 문학적인 표현처럼 여겨집니다. 이처럼 번역한 책은
영어 성경 중에 보면, KJV라고 하는 킹제임스 성경이 있는데, 그 외에는 영어나 일본어를 보면 대부분의 번역서가 이를
‘실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한글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이나 표준새번역, 공동번역을 보면 모두 실망시키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성경에서는 <이 소망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저는 더 와닿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왠지 조금 더 핵심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저는 지난 한 주 동안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말을 곱씹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예를 들어서 어떤 유치원 정도의 어린아이한테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자기는 커서
슈퍼맨이 되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나쁜 사람들에게 혼을 내줄 거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고 생각 하시겠어요? 그 아이의 꿈이 정말로 실현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뭐, “어~
그래? 멋진 꿈이네”하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나이 40이나 50이 된 아저씨한테 당신의 꿈이 뭐냐고 물었더니만 그 분이 하시는 말이, 자기는 커서 슈퍼맨이 되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나쁜 사람들에게 혼을 내줄 거라고 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농담이 아니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면요.
글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다음에 이을 말을 찾지 못하고, 아, 그러시냐고…하면서 속으로는, 어디 좀 아픈 분이 아닐까,
아니면 요즘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신가, 좀 쉬어야 되지 않을까……등등 상당히 걱정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어린 아이라면 모를까 다 큰 어른이 그런 꿈을 갖는다면 이는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그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꿈이라고 하겠지요.
이를 ‘실망’이라는 말로 바꾸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정말 슈퍼맨이 되고 싶었는데, 점점 커가니까 어때요? 예,
아, 나는 슈퍼맨이 될 수 없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는 실망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믿으면 믿을수록 하나님이 느껴지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되시나요?
예전에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그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대학교 학부는 신학과를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4년제인 학부 신학과를
다니는 학생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대요. 처음에 들어갈 때에는 목사님의 믿음이 있었는데, 2학년이 되면 장로님 믿음, 3학년이
되면 집사님 믿음, 4학년이 되니까 평신도 믿음이 되더니 나중에는 무신론자가 되어서 졸업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 물론 이는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겠지요. 하지만 사실 신학을 했다고 해서,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무조건 믿음이 좋다고 할
수 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에 있어서 부끄럽게 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극단적으로는 그런 것이겠지요. 나 정말 하나님 잘 믿으면 천국에 갈 줄 알았는데, 예수님 잘 믿으면 구원 받을 줄 알았는데, 그런
줄 알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런데 생을 마감하고 봤더니 천국도 없고 구원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도 없었어요.
만약에 그랬다면 그야말로 자신의 인생이 부끄러울 것이요, 자신의 신앙생활이 절망감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 거짓말이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아아, 내가 교회에 속았어.
성경에 속았어. 그리고 홍 목사한테 속았어……그런 생각이 안 드시겠어요?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 본문 5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5절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この希望は失望に終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なぜなら、私たちに与えられた聖霊によって、神の愛が私たちの心に注がれているからです。
우리가 가진 소망은 절대로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에 대해서 5절 후반에
보시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私たちに与えられた聖霊によって、神の愛が私たちの心に注がれているからです。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조금 더 풀어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마음 안에 채워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소망은
부끄럽게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게 말이 쉬어보일지는 모르지만,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그리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 6절~8절입니다. 이 6절~8절 말씀을 이해하게 되면 비로소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인 5절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함으로 인해서, 절망적인 소망이 아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진정한 소망, 희망적인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로마서 5장 6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6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6.実にキリストは、私たちがまだ弱かったころ、定められた時に、不敬虔な者たち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いました。
6절에 보시면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기약대로’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것은 어떤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바에 따라 완전하게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일이 구약에서 끊임없이 예언되어 왔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대표적인 구약 성경이 이사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11절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イザヤ書53章4節~11節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担った。それなのに、私たちは思った。神に罰せられ、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私たちはみな、羊のようにさまよい、それぞれ自分勝手な道に向かって行った。しかし、主は私たちすべての者の咎を彼に負わせた。
彼は痛めつけられ、苦しんだ。だが、口を開かない。屠り場に引かれて行く羊のように、毛を刈る者の前で黙っている雌羊のように、彼は口を開かない。
虐げとさばきによって、彼は取り去られた。彼の時代の者で、だれが思ったことか。彼が私の民の背きのゆえに打たれ、生ける者の地から絶たれたのだと。
彼の墓は、悪者どもとともに、富む者とともに、その死の時に設けられた。彼は不法を働かず、その口に欺きはなかったが。
しかし、彼を砕いて病を負わせることは主のみこころであった。彼が自分のいのちを代償のささげ物とするなら、末長く子孫を見ることができ、主のみこころは彼によって成し遂げられる。
「彼は自分のたましいの激しい苦しみのあとを見て、満足する。わたしの正しいしもべは、その知識によって多くの人を義とし、彼らの咎を負う。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아는 우리가 이 글을 보면, 마치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대한 그 본질까지도 정확하게 적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이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적은 신약성경에 처음 나온다고 하면 그나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이 글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이사야서는 대부분이 기원전 690년 경에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약 690년 전에 이미 기록된 것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720년 전에 예언된 말씀이라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연히 오신 것도 아니요, 예수님께서 실수로 붙잡혀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대로 오시고,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6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기약대로 오신 것은 좋은데, 오셔서는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합니다.
7절~8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7절~8절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7.正しい人のためであっても、死ぬ人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良な人のためなら、進んで死ぬ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
8.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이 세상에 아무리 의인이라 한다 하더라도 그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훌륭한 사람이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교도소에 갇혀 있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그 훌륭한 사람은 죽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왕이 말합니다. 누군가가 대신 죽을
사랑이 있으면 이 사람을 살려주겠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라면 누군가가 선뜻 내가 대신 죽겠습니다. 이렇게 나오기가 쉬운가요? 아니요.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는 의인도 아니고 선인도 아니에요.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착한 사람도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죽게 되었어요. 죽게 된
이유요? 누명을 쓴 것도 아니에요. 억울할 것도 없습니다. 정말로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게 되었어요. 정말 죽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서 그 죄 많고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을 대신해서 무참하게 죽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아니요 안 됩니다.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아요. 밑지는 장사도 이런 장사가 없습니다. 하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하셨냐 하는 것이죠.
여러분께서 돈이 많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아니, 물론 많으시겠지요. 그런데 보통 많은 것이 아니라, 정말 여러분이 거래하는 은행에
가면 그 은행 지점장이 직접 나와서 반갑게 맞이해줄 정도로 아주 부자라고 생각해보세요.
자, 그런 여러분이 좀 착한 일을 해야지 생각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해주려고 합니다. 참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여러분께 질문하겠습니다. 똑같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라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학생의 학비를 지원해주려고 하겠습니까.
1번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 2번 공부는 하지 않고 탱자탱자 놀고 있는 학생.
이는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장학금도 마찬가지잖아요? 기껏 학비를 지원해주려고 한다면 열심히 공부를 하는
학생을 지원해주지, 아무리 여러분이 돈이 많다고 해도 그렇지, 맨날 학교도 안 가고 공부도 안 하고 그런 학생한테 학비를
지원해주고 싶겠어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문제를 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니까, 그 사람은 부자도 아니고 오히려 가난해요. 하지만 그런데도 그런 학생, 공부도 안 하고, 학교도 안 가고,
맨날 문제만 일으키는 학생인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팔고 땅 팔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침부터 밤까지 일해가면서 학비를 대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 왜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그 학생 부모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그 학생이 공부도 안 하고 학교도 안 가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하더라도 열심히 그 학생을 위해서, 자기 자식을 위해서 입혀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거기다가 밤낮없이 일을
하고서는 학비도 보태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아무리 돈 많은 부자가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을 지원해준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꼭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들어갈 필요까지는 없겠지요. 지금도 학교에 보면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장학금을 지원해주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만, 장학금을 지원해주는 개인이나 단체가 그 학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원해주는 것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맨날 공부는 안 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못난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지원해준다는 것은,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을 빼고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훌륭한 사람들이나 착한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하신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자기들이 지은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무엇을 내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것, 즉 생명을 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의 증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구할 것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이비 교주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예, 자신들이 가장 돈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입는 옷이나 먹는 것이나 사는
집이나, 자기가 누리는 것은 항상 최고의 것이에요. 그리고 반면에 그 신도들은 어때요? 예, 가난합니다. 자기 재산들을 다 바치고
그랬기 때문에 가난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말씀을 전하시고는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요. 어쩌면 제자들은 흥분했을 지도 모릅니다. 아, 물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는 부활하셨기 때문에 기쁨도
컸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으니까, 이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겠구나!
그러면 이제 나도 벼슬을 얻을 수 있겠구나. 아무리 못해도 장관 자리 하나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거야! 이렇게 기대를 했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야, 내가 할 일은 다 했으니까, 이제 너희들이 해. 그러고 어떻게 하셨어요?
예, 하늘 위로 올라가 버리셨습니다.
이는 전설이 아닙니다. 한 두 사람이 본 게 아니에요.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다음에 40일 동안이나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고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정말 이 땅에서 여느 사이비 교주처럼 부귀 영화를 누리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의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主イエスは彼らに語った後、天に上げられ、神の右の座に着かれた。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리는 것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시고, 하물며 그 귀한 피를 모두 흘리시고, 그 생명 마저도 우리에게 주시고
아무런 미련 없이 하늘로 올라 가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는 사이비 교주들은 그런 소망이 없으니까, 나중에 지옥에 가든 말든, 신도들이 가난에 괴로워하든 말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자기 신도들한테서 돈을 쥐어 짜서 자기 배를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모든 사역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제자들에게 다 맡긴 채로, 나 몰라라 하고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しかし、わたしは真実を言います。わたしが去って行くことは、あなたがたの益になるのです。去って行か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はおいでになりません。でも、行けば、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を遣わします。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しかし、助け主、すなわち、父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は、あなたがたにすべてのことを教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話したすべてのことを思い起こさせてくださいます。
예수님께서는 헤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히려 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유익하다. 내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면 성령님이 안 오신다. 내가 올라가야지만 성령님이 내려오셔서 너희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많은 분석을 합니다만, 성경에는 왜 그런 시스템이 되어 있는지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무조건 믿는 것이 상책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에 성령님이 내려오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시면 이른바 성령강림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놀라운 새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극히 일부의 선지자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구약이 끝나고 이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제 일부 선지자가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었냐 하면,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가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시간도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하셨던 3년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고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聖霊を与えてくださいます。」
이제 선지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멀리 이스라엘에 가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떤 때라도 간절히 주님 만나기를 구한다면 성령님을 통해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성령님을 통해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요? 여기서 바로 로마서 5장 5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5절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5.この希望は失望に終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なぜなら、私たちに与えられた聖霊によって、神の愛が私たちの心に注がれているからです。
그렇습니다. 그와 같은 사랑의 하나님, 우리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이 못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까지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소망은 절망적인 소망, 부끄러운 소망이 아니라 희망적인
소망, 가장 확실한 소망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는 들리지 않고, 손에는 잡히지 않아서 답답하고 힘들더라도,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채워주시는 소망을 가지고 나아갈 때,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을 모두 받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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