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상
법장의 「금사자장」
법장의 많은 저작들 가운데 「금사자장(金師子章)」은 화엄사상을 재가신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한
간략한 요약본으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 그것은 영어 번역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부가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 금사자는 법장이 이해 못하는 측천무후를 딱하게 여겨 만든 것이다.
법장은 궁중에 금사자를 만들어 놓게 한 뒤 그것을 가르칠 때의 비유로 썼다. 그래서 교리는 지극히
명료하고 이해하기 쉽게 되었고 측천무후는 가르침의 본질을 빠르고 완전하게 이해했다.
화엄사상은 복잡하고 때로 모호하다. 실제로 선정을 위한 가르침이나 존재의 실상을 묘사하는 철학적
진술을 위해 제시한 신비적 관점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는 자칫하면 오해하기가 쉽다. 측천무후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을 법장에게 일일이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너무나 큰데
「금사자장」은 간결하기 때문에 모호한 부분들이 여전히 남는 것 같다.
법장은 화엄의 존재론부터 시작한다. 그는 무후의 금사자에 대해, 금은 본래 자성이 없고,
그래서 장인이그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사자상(獅子像)은 원인과 조건들을 의지해서 존재하지만 금은 어떤형태로든 항상 존재한다.
금사자의 금은 이치[理]를 나타내지만 사자라는 모습은 현상인 사(事)이다. 이(理)와 사(事)의 두 개념은
본래 중국 철학의 중심 개념이고, 이(理)는 법장 이전의 중국 불교사상가들에 의해 불성과 같은 개념으로
이미 사용되었다.
‘도(道)처럼 이(理)는 현상적인 변화의 내부나 이면에 있는 또는 그 너머에 있는 절대적인 원리이다.
그러므로 이(理)라는 말로 정의되는 불성은 본질, 초월적인 실체 … 존재의 실상, 완전함이다’(Lai 1977: 75;
Williams 2005b: 163. 이탤릭체 부분이 원문이다).
그러나 화엄의 이(理) 즉, 법장의 금은 현상을 넘어선, 이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상은 절대적인
이(理)로부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상은 이(理)이다. 사자는 금이고, 사자 뒤에 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자는 금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금은 단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면서 존재하고 여기서는
사자의 모습을 가졌을 뿐이다.
말하자면 금사자 혹은 다른 모습 없이는 금도 없다. 현상은 현상의 형상 안에 있는 본체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중국의 전통적이고 현실적인 세계관과 잘 조화되었다. 궁극적인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심지어 가장 작고 초라한 것 속에 있다.
특히 본체로서의 현상을 강조하는 화엄사상은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도가의
무위자연의 도의 관점과 융합하기 쉬웠다. ‘도’나 ‘자연’처럼 화엄의 본체는 어떤 의미에서 초연하고
불변하는 절대가 아니라 바로 중관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성이 없으므로 역동적 인 것이다.
금은 숙련된장인의 손을 거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
그렇지만 법장은 사자의 모습은 단지 모습에 불과할 뿐이라고 한다. 본래 사자는 실재하지 않고 그것은
단지 금덩어리일 뿐이다. 사자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의미에서 금으로서의 금은 변하지않는다.
금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금의 입장에서는 변하지 않으므로 누군가 금을 사자의 모습으로 만 들어도, 즉 금에다 사자의 모습을
부여할지라도 그것은 금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금은 언제나 하나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므로
금으로서의 금은 어떤 모습이나 형태로 변할지라도 변함없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금 자체에 사자의모습이 없을지라도 금은 외적인 모습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법장은 단지 금만 있으므로 사자의 모양이 존재할 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금이라고 한다.
언뜻 보기에이것은 매우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비록 금자체에 모습이 부여되어 있지는 않지만
금은 항상 모습을 갖고있다.
그러므로 만약 금이 사자의 모습을 취하게 되면 금괴의 모습은 없어지고 사자 모양의 금이 된다.
‘금’이란 ‘어떤 모습으로서의 금’을 줄인 말이므로 생기거나 없어지거나 금 자체로서의 존재는 늘어나거나
줄지 않는다. 따라서 궁극적인 관점에서의 현상, 즉 불교 용어인 사(事)는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금과 사자로 비유를 들어 말한 이것은 본체인 이(理)와 현상인 사(事)를 나타낸다.
법장에게 무엇이이(理)이고 사(事)인가? 거기에는 현상과 관련된 조그만 문제가 있다.
이들은 우주의 일상적인 현상들이다.
그러나 이(理)에 관한 법장의 해석은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법장은 이(理)를 공(空)으로 말하고,
공이 본래 무자성과 같다는 중관파의 교리에 대한 약간의 이해를제시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특히 쿡을 포함한 많은 현대 학자들은 법장이 말하는 이(理)가 본래 자성이
없다는 중관적인 의미의 공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쿡은 화엄철학에는 이러한 사상이 없고, 화엄은중관파로 대표되는 인도의 부정주의(否定主義)를 자연계와
실존하는 현실 세계를 강조하는 중국의사유 방식으로 재배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Cook 1977; 1978).
때로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모든 대승철학을 용수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평가절하하려는 경향이 있고,
월칭에 따르면 더욱 불분명한 용수는 논란이 많은 주제들을 해석한 것으로 본다.
이 입장은 절대 옳지않다.
위에서 보았듯이 대승사상은 그렇게 획일적인 것이 아니다.
월칭은 중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않은 것처럼 보인다.
법장이 『대승기신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가 말하는 본체가 여래장과 동일하다는 것에는
의견들이 일치한다. 중국에서는 용수를 『대승기신론』에 대한 주석가로서 여래장사상을 주장한 인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공’에 대한 용수의 견해는 ‘무자성(無自性)’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중국에서는 인도 불교사상에서 발견되는 ‘공’에 대한 다른 의미를 명백하게 구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쿡의 논리는 우주를 일심(一心)이라고 한 화엄의 원전들을 무시하려고 하는데,
필자가 보기엔법장이 말한 대로 본체가 사실은 일심이라는 이전의 견해가 더 맞는 듯하다.
금과 사자,
물과 파도의 비유는
본체가 본래 무자성이 상의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이(理)라는 말은 보다긍정적인 것을 함축하고 있다.
과거에는 두순의 저작으로 여겨졌지만 현재는 법장의 저작으로 여겨지는
책에서는 본체를 심진여(心眞如) 그리고 현상을 심생멸 (心生滅)이라고 말한다.
또한 법장은
‘하나의 본성’,
청정한 본성,
‘본래 청정하고 완전하고 빛나는’ 여래장에 대해 말하고,
이본성은 ‘본래 청정한 마음의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대승기신론』을 인용한다(Cleary 1983: 152). 다른
곳에서 법장은 『대승기신론』에 따라 모든 것은 절대적인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존재론을 설명하고,
이 존재론이 중관철학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한다(Gregory 1983b: 36-7).
사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대승기신론』을 종종 화엄종의 소의경전으로 여긴다.
화엄종의 제5대 조사인종밀은 중관파의 공의 교리를 마지막 가르침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고,
승의제(勝義諦)를‘하나의 진실하고 영적인 자연, 창조되지도 안고, 소멸되지도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여래장이고진여이다.
화엄학자들이 중관의 공을 무자성이라고만 구분한 만큼
그들은 어느 정도 화엄의 본체가중관의 승의제보다 뛰어나다고 보았다.
지금까지는 법장의 존재론에 해당한다. 그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는 화엄의 특징적인 교리들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이 존재론을 사용한다. 그것은 십현문(十玄門)이라고 하며 화엄종에서는
첫 번째가 가장 중요하고, 첫 번째는 나머지 것들을 포함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첫 번째는 ‘동시에완전히 상응한다’는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이다.
금과 사자는 동시에 존재한다. 법장에의하면 이 둘은 완벽하고 완전하다.
이 애매한 문제를 해석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본질과 현상은 상즉상입하고 (어떤 의미에서)동일하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립도 없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배척하지 않는다.
둘째, 법장은 다른경우에 모든 사물들이 상호 의존적인 연기로 발생(중관파를 따름)하기 때문에,
그리고 연기의 고리는전 우주와 (과거·현재·미래가 각각에 의존하고, 전체 법계가 동시에 발생한다고 말하는)
모든시간으로 확장하기 때문에,
상호의존적인 연기 전체와 법계에서 모든 현상은 상즉상입한다고설명한다.
이것이 법장의 설명을 내가 이해한 내용이다.
첫째, 모든 현상은 특별한 형태 안의 본체에 지나지않고, 형태는 본래 존재하지 않으므로
모든 현상은 동일[相卽]하다. 게다가 본체는 본래 나누어질 수없다.
금 한조각과 다른 금 조각은 다 금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둘의 차이는 공간적으로분리된 데 있으며 금으로서의 금이 아니라 형태와 모습에서 다른 것이다.
현상은 단지 본체이고
본체의 어떤 두 ‘실례들’은 본체 자체는 차이가 전혀 없기 때문에 각각의현상은 사실 다른 현상들과 동일하다.
게다가 본체의 각 실례들은 (나누어질 수 없는) 본체자체이므로 각각의 현상은 또한 모든 현상이다.
즉 상즉상입인 것이다.
둘째, 법계는 상호의존적인 요소들의 전체이고, 중관파의 논리에 따르면 개체에는 자성이 없으며,
단지 인과적 상호관계성이라는 무한한 그물망에 의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개체가 사라진다면
전 우주는 붕괴될 것이다. 이것은 개체가 전체의 원인임을 의미한다.
물론 전체도 개체 의 원인이다. 개체가 전체의 바로 그 원인이므로 그 원인 없이 전체는 생겨날 수
없다. 그리고 (중관파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은 단지 인과관계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개체는 다른 개체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 어떤 하나의 개체라도
없어지면 전체도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체는 전체 인과관계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우주에서 개체가 전체 인과관계에 영향력을 미친다면 그 각 개체는 다른 개체를 포함해야만
한다. 한 번 더 상즉상입인 것이다. 물론 이들 중 어느 것도 개체가 전체 안에 자기 자리를 차지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각각의 개체는 분리되어 존재하고 개체들은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금과 사자에 대한 이 모든 이야기를 혼동하면 안 되므로 법장은 이것이 새로운
물리학이나 장인(匠人)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고 상기시킨다. 실제로 금과 사자는 유식(唯識)의
변형으로, 마음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이쯤에서 법장과 그의 「금사자장」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다.
그는 이 짧은 책에서 무척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만 여기서는 주요한 점만을 다루었고, 독자는
여기서 화엄사상의 본질, 복잡하고 불분명한 점에 대한 몇 가지 아이디어, 하나의 실례를 얻었을
것이다. 그것은 합리적인 관점에서 영적인 심상을 표현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몇몇은 그러한노력이 실패했다고 여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