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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부활절특강Ⅱ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말씀/고전15:35-58
요절/고전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는 지난주 부활절을 맞아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으로 지난주에 이어 부활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시간 고린도전서 15장 후반부 말씀을 통해 부활에 대한 확신뿐만 아니라 부활의 영광과 승리를 주시는 예수님을 깊이 영접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와 아울러 충만한 부활소망 가운데 세상에서 승리하고 주와 복음역사에 헌신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Ⅰ. 부활의 영광 (35-49)
우리는 지난 주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들도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살아납니까(35)? 그런데 바울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부활의 때에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 것인가?’ 이 문제는 자연 속에서도 얼마든지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씨앗의 비유를 통해 몸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36-38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서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땅에 뿌린 씨앗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씨앗은 배와 배젖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씨앗을 땅에 심으면 배젖은 썩어 영양분이 됩니다. 배는 그 영양분을 먹고 새로운 싹을 피웁니다. 씨앗이 땅 속에 파묻혀도 없어지지 않고 싹을 피우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죽음을 이기고 새싹을 피우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어서 몸이 해체되고 한 줌의 흙으로 바뀌어도 그 생명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땅에 씨앗을 뿌릴 때는 나중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뜻대로 각 종자에게 새로운 형체를 주십니다. 씨앗만 보면 장차 어떤 형체를 가질지 알 수 없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씨앗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기도 합니다. 크고 반들반들한 호박씨에서 누가 호박꽃이 피어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겉모습만으로는 나중 형체를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씨앗 속에는 생명이 있고 그 생명 속에는 나중 형체를 보장해주는 DNA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앗이 땅에 떨어져 묻히면 씨앗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부활도 씨앗의 원리와 동일합니다. 부활 때의 모습은 현재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현재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몸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몸을 선택하겠습니까? 멋진 몸매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몸을 선택하겠습니까? 아니면 운동선수의 몸 혹은 무용가의 몸을 선택하겠습니까? 성형수술을 할 때 연예인들의 얼굴과 몸매를 선택하여 그 모양대로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때에 우리 몸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놀라운 변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모든 육체가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육체가 다르고 동물의 육체가 다르고 새의 육체가 다르고 물고기의 육체가 다릅니다. 하늘에 속한 것들이 있고 땅에 속한 것들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것들의 영광이 다르고 땅에 속한 것들의 영광도 다릅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릅니다(39-41). 지금 우리 몸은 장차 새로 태어날 부활의 몸과는 완전 다릅니다.
42-44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사도바울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몸을 썩고 욕되고 약한 육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썩는다’의 헬라어 원어의 뜻은 ‘파괴, 파멸, 부패’를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 몸은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망가져가고 있습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여기저기 고장이 납니다. 노화됩니다. 여자들은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몸을 가꿉니다. 화장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성형수술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으로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잠시 노화를 늦출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몸은 자연법칙에 따라 조금씩 망가져갑니다. 탄력 있던 몸매는 느슨해지고 피부에는 기미와 주름이 생기고 단단했던 뼈는 약해집니다. 늙고 쇠하여져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집니다.
또한 우리 인생은 욕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인생을 소망하지만 살아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부끄러움과 허물과 죄악뿐입니다.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죄의 소욕이 끊이질 않습니다.
또 우리 몸은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약합니다. 헬라인들은 훈련을 통해 완벽하게 다듬어진 근육질의 몸을 자랑했습니다. 오늘날도 남자들은 초콜릿 근육을 만들어 자랑합니다. 이런 남자들을 짐승남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런 남자들도 감기몸살에 걸리면 금방 죽을 것처럼 기침을 하고 드러누워 신음합니다. 하룻밤만 잠 못 자도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좁니다. 오늘날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 우울증을 비롯한 다양한 정신질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때는 썩고 욕되고 약한 육의 몸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부활했을 때의 몸은 항상 탱탱하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기미나 죽은 깨가 나지 않습니다. 상처도 나지 않고 주름도 생기지 않습니다. 씨앗이 아름다운 꽃으로 거듭날 때 얼마나 신비스럽습니까? 부활의 때에는 아름다운 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됩니다. 강하고 튼튼하고 신령한 몸을 가지게 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생령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심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 이후 모든 인류는 아담과 동일한 특성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 즉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썩을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차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 수 있는 것은 살려주는 영이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은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십니다.
모든 인류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흙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살기에 적합한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몸은 약하고 질병에 걸리고 썩어 흙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은 사람은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하늘에 속한 사람과 같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저 하늘에 속한 사람의 속성을 몸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늘에 속한 사람의 속성이 조금씩 나타납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때에는 예수님처럼 완전히 하늘에 속한 사람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49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혼까지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기에 가장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그날을 소망하면서 이 땅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되어가는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Ⅱ. 최후의 승리 (50-58)
그러면 왜 우리가 그렇게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5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썩을 몸은 썩지 아니하는 세계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썩지 않는 세계에서 살려면 썩지 않을 몸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태아는 엄마 뱃속에서는 ‘양수’라는 물속에서 자랍니다. 태아는 자기 폐로 호흡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엄마 뱃속에서 나오면 폐호흡을 하도록 호흡 구조가 즉시 바뀝니다. 그런데 구조가 바뀌지 않는 아이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면 볼기짝을 때려줍니다. 폐호흡을 하도록 그 구조를 바꾸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부활의 세계에서 살려면 몸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 몸은 어떻게 됩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납니까? 51,5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비밀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잠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잠을 자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재림하실 때 천군천사들은 마지막 나팔을 붑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잠자던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몸으로 홀연히 변화됩니다. 그 순간에 죽지 않고 살아있는 성도들도 눈 깜박할 사이에 함께 변화됩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하기 때문입니다(53). 그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승리의 날이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최후의 심판의 날입니다. 큰 영광 가운데 구름타고 재림하신 예수님은 성도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부르시고 그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고 함부로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은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합니까? 지금까지는 사망이 모든 사람을 삼켜버렸습니다. 여기에 먹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무서울 것이 없이 살았던 한 사나이가 사형대 앞에서 친구에게 묻습니다. “나 떨고 있니?” 누구도 이기지 못한 것, 그 어떤 사람도 다 떨게 만든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두려움이요, 허무요, 끝입니다. 사람들이 쾌락에 빠지는 것도 이 두려움과 허무를 잊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사망을 삼키고 이겨버렸기 때문입니다. 54절을 보십시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25장 8절은 말씀합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또 호세아 13장 14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이 약속의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망은 이때까지 인류 위에 왕노릇해왔습니다. 56절에 보면,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쏘는 것’은 벌이 벌침을 쏘는 것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벌은 사람의 몸에 벌침을 쏘고 그 벌침을 통해 독소를 몸속에 퍼뜨립니다. 이처럼 사망도 무서운 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침은 죄입니다. 죽음은 죄를 자신의 공격무기로 삼아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 죄는 율법의 힘을 등에 업고 우리를 정죄하여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그 죄를 통해 죽음의 세력이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죽음 권세에 시달리게 됩니다. 허무와 무의미와 두려움과 염려에 사로잡혀 고통당합니다. 율법으로 인해 항상 죄의식에 짓눌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 사망권세를 박살내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사망에게 감히 어떻게 도전합니까? 55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을 믿는 자는 더 이상 사망권세에 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정복합니다. 마틴루터는 죽음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이 오도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피한다. 주님의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존낙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라. 그러면 죽음이 무섭지 않다” 고백했습니다. D.L. 무디는 죽어가면서 “땅은 물러가고 하늘은 열린다” 했습니다. 그들이 죽음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안에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는 ‘몽구스’(Mongoose)라는 동물이 있는데 코브라의 천적이라고 합니다. 몽구스가 코브라를 잡아먹을 수 있는 것은 코브라의 독이 몸 안으로 들어와도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그의 몸에는 뱀의 독을 해독하여 영양제로 바꾸는 효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는 예수님의 생명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독이 쏘아도 생명의 피가 그 독을 해독해 버립니다. 오히려 우리 삶의 영양제가 됩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넉넉히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57).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5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는 무엇보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견실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만난 예수님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내 믿음이 견실하면 내 삶은 어떻게 변합니까?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됩니다. 부활의 소식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에 힘쓰는 자가 됩니다. 이 일에 힘을 쓰는 것은 부활의 소식만이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듣는 사람도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는 물론이고 우리 자신도 이 소식을 들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증인된 이 사역을 계속해서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계속 감당할 수 있게 됩니까? 우리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가 왜 멈칫멈칫합니까? 왜 상대적인 비교의식에 빠집니까? 왜 슬그머니 그만두기까지 합니까? 그것은 주님 안에서의 우리의 수고가 헛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수고에 대한 대가가 기대만큼 빨리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당장 닥쳐오는 삶의 필요들을 채우기에 너무 바쁜 것도 문제입니다. 주님의 일은 멀리보이고 당장 먹고 살아야 할 일과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보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여유도 관심도 사라집니다. 반면 자기 힘으로 살면 뭔가를 이룰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살아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삶을 자기 마음대로 즐기며 사는 파티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자기 힘으로 자기 일에 매달려 살면 열매가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주님의 일은 헛된 것입니까? 오히려 반대입니다. 세상의 일들은 사망으로 끝나기 때문에 열매 없는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의 수고는 헛되고 내가 내 힘으로 사는 것만 남는다’는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1970년대를 풍미했던 오혜령씨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엄친딸’이었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삶에 자신만만해 했습니다. “나는 그물을 던지면 얼마든지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 생각하며 예수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30대에 암 진단(임파선암 말기)을 받고 3개월 시한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정된 죽음의 날짜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심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반사적으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 죽음의 한복판까지 따라오시는 것입니까?” 그녀는 그동안 주님 없이 자기 힘으로 자기만을 위해 살아온 삶을 회개하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때부터 암세포가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버림받은 노인들을 돌보는 “평화의 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고백합니다.
“당신 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랐던 지난날들은 죽은 시간이었습니다. 오! 주님, 이제 당신께서 그물을 채워주소서. 그러면 저는 비로소 살 겁니다.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당신 없이 한평생 수고해봐야 우리의 인생은 빈 그물이옵니다. 비록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당신을 지금 당장 알아차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저희의 계획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당신에 대한 신뢰 속에서 새로 시작하려는 각오를 다질 때마다 저희 행위에 방향과 성취가 부여됩니다. ... 날마다 호숫가에서 저희를 기다리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이제 주님 제 그물을 채워 주소서)
우리는 목자요, 성경선생으로 살기 위해 나름 수고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캠퍼스에 올라가 학생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수고를 누군가 알아주기도 하지만 몰라 줄 때가 참 많습니다. 누군가가 알아주면 의미가 있어도 몰라주면 헛된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나만 헛수고하는 걸까?”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수고는 영생과 보상에 참여하는 열매가 있습니다. 내가 오늘 주님 안에서 하는 작은 수고와 헌신들, 즉 찬양하고 기도하고 청소하고 양들과 일대일하고 우리가 섬기는 모든 일들에는 반드시 그 열매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는 일은 주님께 속한 일이요, 주님께서 지원하시는 일이요, 주님께서 보상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소망 가운데 믿음으로 주와 복음역사에 수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계란을 먹고 찬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삶 속에서 만나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내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지식으로만 아는 부활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살아나고 회복되는 부활소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