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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 (好佛大王) 비 정희왕후가 (광릉) 先王(세조대왕) 능을 받들어 모신다(奉護先王之陵)는 뜻의
⚛ 奉先寺 ⚛를 원찰로 삼는다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
독립운동 하다가30세 출가한 운허스님의 불교대중화 의지가 담긴 한글 현판 ㆍ
독립운동가 ㆍ 교육자ㆍ불교계의 큰 스님으로서 큰 족적을 남기신 운허스님
봉선사 입구의 운허스님 부도 (1892~1980)
이후 주로 왕후와 대비등 내명부의 지원을 받으며 세워진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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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의 비 문정왕후에 의해서 원찰이 되는
사찰로는 성종ㆍ중종의 (선ㆍ정릉) 의
⚛ 奉恩寺 ⚛
일제 시대의 봉은사
문정왕후는 불교진흥책의 하나로 禪宗의 首刹로서 과거시험중의 승과시험을 이곳에서 치르기도 하고 불교 진흥의 기반을 마련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에 많은 유생들의 극렬한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서울 강남 봉은사)
원 이름은 見性寺였고 위치도 달랐지만 성종을 지키는 능침사찰이 되면서 지금의 위치에 건축이 되고 왕실로부터 많은 땅을 하사 받게 되어 "은혜를 받든다"는 뜻의 奉恩寺가 되었다
봉은사로 자주 놀러왔던 추사 김정희의 운명3일전 마지막 작품 ^판전^
봉은사의 ^흥선대원군 영세 불망비^
능림 사찰에 대한 왕실의 지원이 조선 말기 까지 이어졌음을 볼수있다ㆍ
** 장조 (思悼세자)의 명복을 기원한 경기 화성의
⚛ 용주사( 龍珠寺) ⚛
용주사는 정조임금이 뒤주 속에서 죽은 비운의 왕세자인 부친 사도세자를 위해서 천하의 명당에 이장한 융릉(隆陵)의 능침사찰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의 명당자리를 수소문해서 찾은 이곳 융능 자리는 한양에서 80리 안에 왕릉을 설치해야 한다는 규정에서 벗어나, 88리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왕릉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왕명으로 이를 80리로 고치도록 하여 왕릉을 조성하였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하고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건설하게 되는데 사찰의 낙성식 전날 정조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게 된다. 龍이란 왕조 국가에서는 임금을 상징하니 여의주를 문 용의 승천은 부친인 사도세자의 한이 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와같은 서상(瑞祥)을 길이 새기기 위해서 사찰의 이름도 용주사라 한 것이다.
용주사에는 사도세자의 원한이 효자아들 정조임금과 부처님에 의해서 풀어진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호성전(護聖殿)
어머니 ㆍ아버지(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
위패를 모신 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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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가 잠들어 있는
소령원 의 파주 ⚛보광사(普光寺)⚛
대웅보전
숙빈 최씨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 어실각
(御室閣) ~~과 향나무ㆍ영조의 친필
영조의 친필로 잘못 알려진 대웅보전
덕수궁에있는 흥천사종(보물1460호)
⚛ 흥천사 ⚛는 태조 이성계가 1397년 (태조5년)에 계비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고
정릉을 수호하기 위해 지은 능침사찰이나 1510년에 화재로 전소되었다.
태조의 능침사찰인 ⚛ 회암사⚛지의 무학대사 홍융탑.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