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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제부터 급격히 몸이 좀 안 좋아져서 좀 상태가 이렇게 고르지 못합니다. 양해 부탁드리고 함께 말씀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싶어해요. 근데 이게 잘 안 되죠. 하나님 말씀을 잘 따르고 싶기도 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잘 살기도 하고 이렇게 하고 싶은데 실제로는 잘 안 돼요. 그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인 거예요.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많이 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거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아십니까? 우리가 게임의 룰은 알고 이거 세상에 기계를 돌리는 매뉴얼은 알고, 이 특별히 자동차나 일상에 사용하는 기계들의 기계들은 우리가 얼마나 상세하게 알아요?
어떤 성들은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그런 걸 아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와 반면에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좋아하고 내 인생의 전부라고 여기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과연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아진다는 의미예요. 그리고 누군가에게 하나님을 더 많이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인 거예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설명하지 못하잖아요. 우리가 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느냐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까 설명하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내 가족에게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싶은데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하나님, 제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 모습 중에 큰 불량을 차지하는 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무서운 하나님이고 하나는 행한 대로 갚으신 하나님. 제가 목사로 성도로 살 때 저를 가장 많이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 두 가지예요.
물론 다른 것도 많지만 어쨌든 가장 저의 행동과 저의 목회를 많이 이렇게 주관하는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 두 가지예요.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신 하나님.
제가 저도 나이가 들었잖아요. 나이가 다 들고 양심도 무뎌져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감각만 묻어진 게 아니라 양심도 이렇게 묻어져요.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양심도 이렇게 묻어집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무섭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 이 무서움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어디서 왔길래 저의 삶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까요?
창세기 3장 10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러니까 두려움은 죄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형벌인 거예요. 두려움은 형벌의 의미가 있어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는 두려움이 없었어요. 그래서 뱀도 함께 있을 수 있고 온갖 동물과 함께 할 수 있었어요. 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근데 아담과 하하가 죄를 짓고 난 이후에 인류에게 두려움이 임했어요. 그리고 이 두려움은 죄의 결과물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내재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장착이 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 중에 누구도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은 죄 지은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인 겁니다. 그러니까 죄가 평안을 깨고 두려움 가운데 살게 한 거예요.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는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9장 2절에 보면 죄의 결과로 동물에게도 두려움이 생겼다 그랬어요. 인간이 죄를 지었으니까 당연히 인간에게도 두려움이 생기고, 그 창세기 9장 2절에는 동물에게도 하나님이 두려움을 줬어요. 그러니까 제가 동물까지도 두려움을 느끼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자나 곰 같은 큰 동물도 커서 맹수여서 사납지만 그들에게도 여전히 두려움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도 두려움이 주어지고, 죄의 결과로 동물들에게도 두려움이 주어진 겁니다.
제가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 어떨 때는 신앙의 유익이 되기도 하고요. 어떨 때는 유익이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유익이 되는 것은 어떻든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니까 행동이 좀 조심스러워져요. 조심스러워지고 회계를 빨리 하고, 그러니까 부모님이 무서우면 빨리 잘못을 이렇게 실토하잖아요. 부모가 무섭지 않으면 실토를 하지 않아요. 근데 부모가 무서우면 잘못을 빨리 실토해요. 이처럼 하나님이 무서우면 우리가 잘못을 빨리 하나님 앞에 실토하게 됩니다. 두려운 것 앞에서는 말과 행동이 위축이 되고 조심하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너무 두렵다는 생각이 꽉 찬 사람은 이게 두려움에 폐단이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기 어려워요.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만 너무 많이 아는 사람. 이게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어려워요. 아버지가 되게 두려운 사람은 그 아버지와 자녀들은 인격적인 교제를 하지 못해요. 그 대부분 우리는 우리 아버지들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지 못하고 자랐어요.
왜 아버지는 항상 이렇게 무서운 분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제가 나이 들고 아버지가 그렇게 무섭지 않은 분인 걸 알게 되면서 아버지와 대화도 많아지고 훨씬 상황이 좋아졌어요. 그러니까 두려움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조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제가 느끼는 하나님에 대한 많은 불량을 차지하는 것은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에요. 저는 이것을 정말 철저하게 믿어요. 뿌릴 만큼 거둬진다니까 안 뿌린 건 거둘 수 없다. 거두게 하시면 그건 은혜다. 저는 이런 삶을 생각으로 살아가요.
내가 수거하지 않는 영역에서 어떤 열매가 거둬지면 좀 불안한 게 저예요. 좋은 심리는 아니죠. 내가 노력하지 않는데 어떤 대가가 오면 저는 그건 되게 마음이 불편해요. 왜냐하면 제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신 하나님, 행한 대로 거두게 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장 6절과 8절을 우리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한 대로 부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종기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그러니까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 행한 대로 부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할지를 결정하게 되는 거예요.
저는 하나님이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이니까 죄를 지으면 빨리 회개하려고 해요. 한 번 회개하고도 이미 다 용서했는데 사람이 이게 불안 심리인 거죠. 또 회개하려고 해요. 왜 하나님 무서우니까 하나님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인 걸 알기 때문에 더 열심히 뭔가를 뿌리려고 해요. 많이 구제하면 하나님이 구제한 만큼의 상급과 은혜를 저에게 주실 것이고, 내가 주변을 많이 돌아보면 그래서 저는 항상 좀 과해요. 그러다 보니까 빛도 지게 되고 과하다 보니까 가정을 때로는 잘 돌아보지 못할 때가 없잖아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에 대한 저의 지식이 제 신앙에 엄청나게 많은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시는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대하시는 가는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했느냐가 결정하는 거예요. 내가 오늘날 하나님을 어떤 분을 모시느냐 어떻게 예배하느냐 어떻게 찬양하느냐에 따라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액션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행한 대로라는 의미에는 두 가지가 담겨져 있어요. 규모의 의미도 있어요. 행한 만큼 똑같이 갚아준다는 의미도 있고, 이 행한대로 내 안에는 내용의 의무도 있어 그러니까 같은 종류로 갚아주신다는 거예요. 같은 종류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하나님을 잘 대할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누릴 수 있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께 범죄하기 쉽고 그 범죄로 인해서 행한 대로 갚으신 하나님의 형벌과 징계 속에 우리의 삶이 놓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데 하나 또 생각해 봐야 될 문제가 있어요. 진짜 하나님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과연 있으실까 있을까요? 정말 우리가 행한 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갚으시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인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게 버젓이 살고 있잖아요.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신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내하신 하나님인 거예요.
불순종하고 거역한 우리에 대해서 인내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행한 대로 그 죗값을 다 치르지 않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08편 8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신데 행한 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인내하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인내가 풍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도 이렇게 죄를 회개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가 크시기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지은 즉시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징계하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회개할 때까지 우리가 돌이킬 때까지 기다리고 인내해 주시는 것입니다.
근데 가끔 성도들 중에 이런 분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인내하고 계신데 하나님이 인내하고 계신다는 걸 알면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될까요?
겸손해야 되겠죠. 근데 어떤 성도들은 하나님이 지금 인내하고 계시는데 교만해진 성도가 있어요. 죄를 지었는데 괜찮네 불순종했는데 괜찮네 하나님의 인내를 하나님의 오케이 사인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있습니다. 잘못된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안다면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하나님의 오케이 사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잘못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참으시는 거예요. 우리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참으시는 거예요. 참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과 저의 삶에 문제가 없는 겁니다.
우리 한번 돌아보실까요? 과연 예배의 자리에 합당한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나오셨나요? 오늘 교회를 섬기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세로 교회를 섬겼나요? 일주일간 세상에 살면서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로 사셨어요 지난 한 주간 얼마큼 기도하셨나요?
기도는 영적 호흡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는 어거지로 숨 쉬지 않겠다고 일주일을 살다가 여기 온 거잖아요. 근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 모든 상황에 대해서 인내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내를 인내 앞에서 교만해져요. 정말 잘못된 신앙이에요. 성신앙이 바르다면 하나님의 인내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됩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주의 약속은 어떤 이에 더디다고 생각한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이렇게 참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 얻을 기회를 얻게 된 거예요. 하나님의 인내는 인간의 기회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참지 않으셨다면 여러분과 저는 그 어떤 영적인 기회도 누리지 못했을 거예요. 하나님이 참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기회를 지금도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인간들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가 가벼워서 징계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징계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내하셨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과 저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당장 심판의 주로 이 땅에 재림하지 않으신 것은 인내하고 계신 것은 우리와 우리가 구원받은 자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하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인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내가 지금 구원의 기회를 인류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인내가 여러분과 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지, 우리의 의로움이 우리 인생에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
야고보서 1장 4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인내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존재로 갖추어져 갈 기회를 제공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회는 우리가 만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어떻게 그 기회를 잡아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참고 인내하시는 것은 우리를 우리가 잘 구비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하나님이 백성으로 서게 하시기 위해서 여러분과 저의 삶에 대해서 지금 인내하고 계신 거예요. 언젠간 온전히 서기를, 언젠간 온전한 예배자가 되기를, 언젠간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지금 하나님이 인내하고 계신 것입니다.
좀 더 생각을 더해보면 우리는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내 앞에서 어떻게 해야 될까 하나님의 인내처럼 우리 또한 인내해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내 삶에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인내하듯이 나도 너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내는 하나님과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속성이에요. 하나님에게도 인내가 있고 인간에게도 인내가 있어요. 하나님의 인내는 우리에게 기회를 제공해 줬다면 우리의 인내는 믿음을 성숙시킬 기회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인내가 구원의 기회를 우리에게 줬다면 우리의 인내는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킬 기회를 우리에게 줘요. 그러니까 인내하는 사람이 자기의 믿음을 성장시켜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인내함으로 기도하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한 거예요.
교회를 열심히 섬겨도 영적인 결실이 없어서 없어요. 그 결실 앞에서 우리가 인내함이 있어야 기다릴 수 있고, 그리고 결실이 맺어질 때까지 수고하고 땀을 흘릴 수 있습니다.
먼저 여러분과 제가 인내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라고 하신 십자가를 질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져야 하는 우리 목에 십자가가 있어요. 가정이든 교회든 내가 져야 될 십자가가 있어요. 이 십자가는 인내하는 성도만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인내하지 않으셨다면 구원이 없을 것이고 없었을 거예요. 우리가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인내하지 못하면 내 삶의 영적인 결과와 결실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인내가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게 했다면 우리는 우리도 인내해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이루신 그 구원의 역사를 내 삶에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내해야 하나님의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나타나게 됩니다. 인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없어요.
여러분 성도들이 열심을 다해 수고하잖아요. 근데 결실이 없어요. 여러분 결실에는 반드시 인내의 시간이 있어야 이게 결실로 만들어져요.
근데 우리가 인내하기 전에 어떤 일이 벌어져요?
불평해버리고 원망해 버리고 포기해버리고 낙심해버리고 이래버리잖아요. 곡식도 인내의 긴 뜨거운 햇빛을 쬐는 시간이 있어야 곡식이 결실이 일어나요. 그 긴 시간을 긴 시간을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이 없으면 그 시간에 곡식이 인내하지 못하면 다 타버리는 거죠. 그럼 결국 끝이 나요. 그 시간에 열심히 수분을 빨아들여서 자기를 뿌리를 든든하게 하고 줄기를 든든하게 하고 열매를 든든하게 해야 가을에 결실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열심히 고생했는데 왜 제 삶에는 열매가 없어요?
이런 말을 하시거나 아니면 이런 마음이 있는 성도가 되게 많아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주된 이유 중에 하나가 아마 인내일 거예요. 인내가 그분에게는 약한 거예요. 좀 더 인내함으로 기도했다면 원망하고 불평하기 전에 짜증 내고 화내기 전에 조금 더 인내하고 기도했다면 기도했다면 하나님이 열매 맺게 하셨을 텐데, 열매 맺기 직전에 불평하고 원망해서 나무를 열매 열리는 나무를 흔들어버린 거죠. 그래서 열매가 다 떨어져서 결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하면서도 인내하지 못하고 땀을 흘리면서도 인내하지 못합니다. 인내하지 못하고 화를 내고 인내하지 못하고 다투고 참지 못해서 비난하고 못 참고 헐뜯습니다. 못 참고 떠나가고 못 참고 잘못된 길로 가고, 인내하지 못하고 불순종합니다. 인내하지 못하고 죄를 짓고 인내하지 못하고 악한 길로 걷습니다.
하나님이 인내하셨기에 우리에게도 우리도 인내해야 하나님이 인내하심을 우리에게 주신 이 기회를 소명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내함으로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어요. 우리가 인내해야 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우리가 선령 잘 사용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인내와 우리 인생의 인내가 이렇게 합쳐져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내하셨는데 우리가 인내하지 못하면 열매가 없어요. 하나님이 나의 삶에 우리 교회에 대해서 인내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우리에게 기회를 만들었듯이 우리의 인내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잘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인내하지 못해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교회에 기회를 제공하고, 하나님의 인내가 우리의 사역의 기회를 제공하고, 하나님의 인내가 우리의 가정의 기회를 제공했어요. 막상 기회를 가진 성도들이 교회가 인내하지 못해서 좀 더 인내함으로 기대하지 못해서, 좀 더 인내함으로 봉사하지 못해서, 좀 더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해서 그 기회가 사라지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기회가 없어서 우리가 어떤 영적인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기회를 놓쳐서 못 누리는 거죠.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인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늘 우리에게 기회가 우리 눈앞에 있어요.
지금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과 저 앞에도 한 명도 예외 없이 우리 인생 앞에 다 하나님이 적용해 주시는 기회가 있어요.
왜요? 하나님 우리 모두에서 다 인내하신 분이시기 때문인 거예요. 하나님의 인내가 제공하는 기회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도 인내해야 이 하나님의 기회를 우리가 선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회는 놓쳐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회는 놓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규모와 크기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인 거예요.
사람이 준 기회는 규모가 금방 결정이 나요. 어떤 사람이 저에게 기회를 주면 그냥 대화를 해보면 그 근거가 그냥 다 보여요. 이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 정도의 일을 할 수 있구나 그냥 그래서 그 사람이 준 기회를 놓쳐도 내 인생에 큰 손해가 일어나지 않아요. 결반 크지 않으니까.
근데 하나님이 주신 기회는 상상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놓쳐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이 기회가 우리 가정에 어떤 역사를 만들지, 이 기회가 내 삶에 어떤 일을 만들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기회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겁니다.
저는 그래서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그래도 예민하게 반응하려고 해요. 주로 이 하나님의 기대 지혜가 어디에 있냐 하면 기도에 있더라고요. 하나님이 기회를 우리에게 인간에게 주시는데 기도에 담아주셔요. 기도에 기도를 열심히 하고 부지런히 하고 순종하러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이렇게 담아주시는 거예요.
기도는 어떤 역할을 하면 그릇을 만드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하면 돼요. 작은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도 작은 거잖아요. 큰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도 커져요. 교회가 기도한다는 것은 교회의 영적인 그릇이 커진다는 것이고, 그만큼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교회는 세상의 기회를 잡으면 무너지지만 하나님의 기회를 잡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거예요.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주는 기회를 잡으면 오히려 손해 나고 넘어질 확률도 있지만 할아버지는 기회를 잡으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의 규모가 다르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의 의미가 다르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의 능력이 달라요. 그래서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기회를 주시고자 인내하시는 거예요. 구원의 기회를 주시려고 인내하시는 거고, 회복의 기회를 주시고 부흥의 기회를 주시려고 인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돼요. 하나님이 인내하심으로 만들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우리가 기회를 선용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내하심으로 우리에게 기회가 만들어진 것처럼 우리도 인내해야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아요. 인내함으로 계속 기도의 자리에 있어야 내가 이 기회를 잡을 수 있어요.
잠깐 잠깐 하는 기도가 기회를 잡게 하는 게 아니라 계속된 기도의 자리에 있는 기도가 기회를 잡게 해요.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도 계속 기도하고 하셔야 돼요. 사업을 위해서도 계속 기도하셔야 되고, 교회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셔야 되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도 계속 기도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인내하지 않았다면 다윗이라는 멋진 이스라엘의 구원자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내의 결과물이지 다윗의 삶의 결과물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인내하셔서 만들어진 존재가 다윗이에요. 하나님은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해 인내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할 기회를 갖게 된 거예요.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인내하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내가 이스라엘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 대해서 인내하지 않으셨다면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기회는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과 제가 지금 기회를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인내의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우리에게 기회를 만든 거죠. 문제는 하나님의 인내가 끝나면 기회가 사라진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 대해서 참고 참고 참고 또 참으셨어요. 근데 우리가 인내로 그 하나님의 인내에 화답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기회도 사라집니다. 하나님 여러분과 저에 대해서 긍휼을 거두면, 하나님 여러분과 저에 대해서 은혜를 거두시면 인자를 거두시고 진노하시면 기회는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영적인 사람이라 아니 조금이라도 영적인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기회를 잡아야 됩니다. 최소한 성도는 하나님의 인내가 지금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기회를 우리 눈으로 볼 수 있어야 돼요 그래야 기회를 잡잖아요. 지금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주시는 기회가 우리 눈에 들어와야 돼요.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우리 가정에 우리 가정에 주신 기회가 내 눈에 들어와야 하고, 하나님 우리 회사에 주신 기회가 내 눈에 들어와야 돼요. 근데 사람들이 인내함으로 화답하지 못해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회를 잡기 위해 더 기도하고 기회를 잡기 위해 더 회개하고, 기회를 잡기 위해 더 순종하고 기회를 잡기 위해 더 땀을 흘려야 돼요.
지금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여러분과 저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기회라는 멋진 선물을 지금 목장 교회에게 주셨어요. 우리는 이 기회를 빼앗기지 않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보이지 않으시나 봐요.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이 기회가 보여야 행동이 달라져요. 행동이 달라져야 기회가 제공하는 결실을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목장 교회에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목장 교회에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목장 교회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목장 교회에 부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목장 교회에 열매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기회를 소명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