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추마골피(千方池秋馬骨皮)의 성씨중에는 임진왜란 후로 명나라로부터 조선을 구하기 위해서 구원병으로 들어온 성씨가 많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오래도록 존재했던 토착성씨들이 외래성씨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배타적 감정을 지닌다.그래서 지금도 편견이 남아서 이런 말 저런말 나온다. 특히 우리나라는 폐쇄적인 씨족관념이 많다. 예컨대 영양천씨의 시조인 천만리(千萬理) 선생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으로 들어와서 왜와 싸우는 조선을 돕다가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강산을 좋아하여 조선에 그대로 눌러앉아 정착하였다. 지금도 천씨들이 한국에 많다.방씨 중 유명한 분이 어린이의 인권을 강조한 방정환 선생이 계시고, 지씨 중에는 종두법을 창시한 지석영 선생, 명심보감을 고려말에 목판으로 만든 추적 선생,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대가 마해송 선생, 수필가로 유명한 피천득 교수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런데 명심보감을 지은 추적은 고려말 사람이고, 마천목 장군은 조선 성종때 유명한 장군이니 그 임란 전에도 살았던 성씨도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한편 우리나라 고려시대 때 옹진반도에 표착한 베트남(안남) 사람 이용상은 고려정권으로부터 후대를 받았고, 위구르 계통인 덕수장씨의 시조인 장순룡도 고려 조정의 후대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리고 우록 김씨의 시조인 김충선도 임란 때 선조의 후대를 받았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조선중기까지 귀화인들에게는 후대를 하다가 명나라 구원병들이 도움을 주는 대신 폐해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차별하는 씨족문화가 존재한 것은 기억해야 한다.
최근 국립진주박물관에서 간행한 <임진왜란>이라는 책자에는 임란 때 들어온 성씨를 정리하고 있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