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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죽음
I . 여는말
한 개인의 죽음이란 주제는 성경신학에서 가장 방치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구약신학의 고전으로 알려진 폰 라드(von Rad)의 「구약신학」에는 "죽음"에 대한 항목도 없고, 아이크롯트 역시 "죽음"은 생략한 채 "음부의 세계"에 대해 그의 구약신학 제 2권에서 잠깐 다를 뿐이다(210∼230쪽). 가장 최근에 편집된 구약신학 책으로 1930∼1990년 사이에 있었던 20세기 주요 신학자들의 글 모음집 The Flowering of Old Testament Theology 에서도 24명의 신학자들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503쪽에 걸쳐 소개되지만 개인의 죽음을 다룬 글은 하나도 없었고 죽음이란 단어가 두 번 사용되었다.1 죽음의 주제에 대한 무관심은 구약신학 뿐 아니라 신약신학에도 마찬가지이다. 헤르만 리델보스(1977)나 조지 래드의 신약신학에는 죽음이 나타나지 않으며,2 루돌프 불트만의 신약신학에서는 죽음이 오직 3쪽에만 나타난다.3 그것도 죽음을 독자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고"죄와 죽음"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다(246∼48쪽). 따라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성경신학을 쓰는 기분으로 이 주제를 다루게 된다.
필자는 "성경에 나타난 죽음"이란 주제를 다루면서, 구약성경을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전체적인 구도로 삼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죽음은 그만큼 두드러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의 죽음은 구약의 흐름 속에서 다루려고 한다.
또한 구약성경의 죽음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먼저 고대 근동 아시아의 배경을 살피려고 한다. 그 이유는 먼저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사상과 관점들은 대부분 그 고대 근동아시아의 문화와 종교적인 배경 속에서 제시되고 있으므로, "죽음"의 문제도 그 배경 속에서 "비교와 대조"를 할 때 보다 선명한 관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에 관한 한, 한국의 문화적·종교적 배경은 고대 근동 아시아의 것과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성경을 고대의 배경 속에서 볼 때, 성경의 말씀을 우리의 배경 속에서 더욱 밝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대 근동 아시아의 죽음관을 총체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가는 것이므로, 그 중심된 특징을 둘로 나누어서 제시하고자 한다. 즉 첫째, 죽음 앞에서의 불안과 둘째, "죽음 이후의 세계와 존재를 신성화하는 것"이 고대 근동 아시아와 애굽 사람들의 중심특징으로 나타난다.
Ⅱ . 고대 근동 아시아의 배경
1. 죽음의 공포 앞에 떠는 인간 : 길가메쉬 서사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uebler-Ross)는「On Death and Dying」4에서 죽음을 맞는 다섯 단계를 부정과 고립, 분노, 타협, 우울, 순응의 단계로 보았다. 이 단계들은 옛날 "근대 근동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했던 서사시"인 길가메쉬 이야기5에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
길가메쉬는 그 3분의 2가 신이요 3분의 1이 인간으로 알려진(제 1토판ii.1), 고대 우룩(Uruk)성의 왕이요, 영웅이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인 엔키두(Enkidu)와 함께 이쉬타르 여신이 보낸 '하늘의 황소'(the bull of heaven)를 죽이고, 나아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멀고먼 백향목 숲에 사는 무서운 후와와(Huwawa)를 죽인다. 그러나 후와와를 죽인 것에 대해 신들은 노여워하고 엔키두를 죽인다. 길가메쉬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신들의 노여움을 받아 죽는 순간, 그동안 삶의 존재 양식 중 하나로 여겨온 죽음을 비로소 개인적으로 느끼고 그 무서운 죽음의 실재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 즉 퀴블러-로스가 말한 "부정과 고립"이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된다(제 8토판ⅱ:1-24).6
오 장로들이여, 나의 말을 듣고 내게 귀기울여 주시오.
나는 내 친구 엔키두를 위하여 애곡하나이다.
애곡하는 여인처럼 비통하게 우나이다‥.
내 친구, 날랜 노새, 야산의 야생 나귀, 평원의 표범
엔키두, 내 친구, 날랜 노새, 야산의 야생나귀, 평원의 표범
나와 함께 험한 산을 타고, 하늘의 황소를 붙잡고 죽이고
백향목 숲에 거하는 후와와(Huwawa)를 처치한 나의 친구.
이제 그대를 붙잡은 이 잠은 무슨 잠인가?
너는 어두워지고 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구나 !
그는 눈을 뜨지 못하는 구나.
(길가메쉬는) 그의 가슴을 만졌으나, 그것은 뛰지 않는구나.
그리고 나서 그는 그의 친구의 얼굴을 덮었다. 마치 그가 신부인 것처럼
독수리처럼 그는 그의 주위를 맴돌고 암사자가(돌아와) 그 새끼를 만나듯이.
그는 그의 친구의 앞뒤를 맴돌고,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머리타래를 흩으며,
몸의 장식을 떼어 내동댕이쳤다.
여기에서 죽음을 잠으로 묘사한 것이 흥미롭다. 잠자는 사람과는 아무런 교제를 나눌 수 없는 것처럼 엔키두는 길가메쉬와 세상을 달리하였다. 길가메쉬는 친구를 잃은 슬픔을 감당할 수가 없었고, 그는 친구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7
나와 함께 온갖 위험을 통과한 그, 나의 참사랑 엔키두,
나와 함께 온갖 위험을 통과한 그에게 인간의 운명이 그를 엄습하였다.
밤낮으로 나는 그를 애곡하며 그가 묻히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나의 친구가 내(큰) 소리를 듣고 일어날 것 같아,
칠일 칠야 동안, 구더기가 그의 코에서 떨어질 때까지.
그가 갔으니 나는 위로를 받을 수 없고, 평원의 사냥꾼처럼 방황하도다.
길가메쉬는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사로잡혀,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마음에 평안을 찾을 수 없었다(제 9토판 I:1∼5). 그러나 바벨론의 노아(Babylonian Noah)인, 그의 조상 우트나피쉬팀 (Utnapishtim )이, 세계를 멸망시킨 홍수에서 살아남은 후, 영생에 이른 것을 기억하고 그를 찾아가 영생의 비밀을 알고자 한다. 그가 땅끝에 있는 어느 선술집에 들어갔을 때, 그 주모 시두리(Siduri )가 길가메쉬의 헛된 소원을 알고 영생을 찾고자 하는 그의 꿈을 버리라고 설득한다(고대바벨론 판, 제 10토판 iii:1∼13).
길가메쉬여, 그대는 어디로 떠돌고 있는가?
생명, 그대가 찾는 생명, 그것을 결코 그대는 발견할 수 없다네.
(이는) 신들이 사람을 만들 때, 죽음을 인간에게 정했고,
생명을 그들의 손에서 빼앗았다네.
너, 길가메쉬여, 너의 배를 채우고, 날마다 즐거워하라.
날마다 잔치를 열고, 밤낮으로 춤추고 노래하여,
새 옷을 입고,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라.
너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를 보라.
너의 아내로 너의 포옹을 즐거워하게 하라.
이것들만이 인간의 관심(혹은 인생사)이니라.
그러나 길가메쉬는 땅 끝에 사는 선술집 주모의 타협적인 조언을 듣지 않고, 자신의 가슴은 친구 엔키두의 죽음으로 병들었다고 말하며, 우트나피쉬팀에게 가는 길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 길은 아무도 건널 수없는 바닷길이다. 오직 태양신 샤마쉬(Samash )만이 건너는 바닷길이다. 이 길은 죽음의 물이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길가메쉬가 지옥처럼 험한 길을 건너 드디어 우트나피쉬팀을 만나 영생의 비밀을 묻자, 그는 "육일, 일곱밤을 자지 않고 깨어있을 수 있어라"(제 11토판 198∼199)고 말한다. 즉 만약 길가메쉬가 "죽음의 동생인 잠"과 싸워 이길 수 있다면 영생의 길을 가르쳐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길가메쉬가 앉아서 도전을 하자마자 잠이 그에게 임하여 쓰러 진다. 우트나피쉬팀이 그의 아내에게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제 11토판203∼4).
생명을 탐하는 이 영웅을 보라.
잠이 폭우처럼 그를 강타하니라.
우트나피쉬팀의 아내는 길가메쉬를 불쌍히여기고, 그가 죽음의 잠에 들기 전에 깨워달라고 부탁한다. 길가메쉬는 잠에서 깨어난 후 영생의 비밀을 얻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부르짖는다(제 11토판 230∼234). 그는 너무나 깊은 우울에 빠져 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으리이까, 우트나피쉬팀이여, 내가 어디로 가리이까?
나를 뒤에서 쫓는자, 그 탐욕적인 존재, 바로 죽음이, 내 침실에 앉았나이다.
내가 내 얼굴을 어디로 돌리든지, 거기에 그, 죽음이 있나이다.
길가메쉬의 절망을 위로하기 위해 우트나피쉬팀의 아내는 그 남편으로 하여금 길가메쉬에게 회춘할 수 있는 약초의 장소를 가르쳐주도록 한다. 그 약초는 땅 아래 단물이 있는 곳에서 자라는 것으로서 "늙은이가 아이가 되는"(as Oldster Man Becomes Child) 활력을 주는 것이었다. 길가메쉬는 그것을 얻어 나오자, 때는 여름이었다. 그가 너무 더워 어느 우물에서 옷을 벗고 목욕을 하고 나왔을 때, 그 약초가 사라진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러나 그의 바로 곁에 뱀이 껍질을 벗고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길가메쉬는 자신의 수고를 뱀이 차지한 것을 알고 그 자리에 퍼져앉아 통곡한다. "그의 눈물이 그의 얼굴에 흘러 내린다"(11:290∼91). 이 슬픈 장면은 우트나피쉬팀이 길가메쉬에게 한 말을 상기시켜준다.8
우리가 집을 영원히 짓겠는가?
강물이 영원히 불어나 홍수를 내겠는가?
잠자리는 잠깐 태양 빛을 보려고, 그 껍질을 벗는다.
옛날부터 영속적인 것은 없었다. 쉬는 자와 자는 자,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자이다.
그러나 이제 길가메쉬는 영생이나 회춘을 찾는 것이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음을 받아들인다. 그는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비로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나, 이제는 죽음 앞에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길가메쉬는 자신의 현실을 이제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우룩의 성벽으로 돌아가 자기 일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친다(제 11토판 305∼11). 퀴블러-로스가 말한 마지막 단계, 즉 순응을 길가메쉬는 배운다.
2. 죽음의 신성화
죽음에 대한 불안과 분노, 그리고 순응의 모습과 함께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 그리고 애굽사람들은 죽음과 죽은 자들을 신격화시키고 그들에게 예배하며 제사드리는 강한 풍습을 갖고 있었다. 마치 태양과 달과 별들을 신격화하고, 그들이 인생의 운명을 주장한다고 믿은것처럼, 이스라엘 주위의 사람들은 죽은 조상들을 신격화시켰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죽은 자의 혼(etemmu )이 신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죽은 자의 혼들이 신들과 귀신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때로는 축복도 하고,9 저주도 한다고 믿었다.10 가족 묘에 안치되지 못한 혼들은 "떠돌이 귀신, 방랑귀신, 들귀신, 물귀신, 강귀신, 우물귀신, 목마른 귀신, 불귀신" 등의 이름을 갖고있다.11
죽은 조상의 신들을 돌보는 자는 전문용어로 파키두(paqidu)라고 하며, 주로 아들이나 가까운 친척이 책임을 진다.12조상신을 돌보는자(paqidu)는 주로 남자로서 여러 종류의 제사 음식(kispu)을 정기적으로 드리게 된다. 또한 물과 맥주, 포도주, 기름, 꿀, 암소의 젖을 마실 음료(libation offering, me naqu)로 드린다.
메소포타미아의 사람들은 무덤에 파이프(arutu)를 끼워서 음부에 있는 자가 시원한 물을 마시게 한다.13 또한 죽은 조상의 이름을 부른다(suma zakaru). "살아 있는 왕은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죽은 조상의 이름을 불렀다."14 특히 고대의 사람들은 족보를 조상 숭배할 때 사용하였다. 함무라비 왕조의 족보가 그 당시 바벨론을 다스리던 왕 암미짜두카(제9대왕, 주전 1646-1626)에 의해 조상의 이름을 제삿날에 부르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15 암미짜두카는 자기 집안의 창시자인 Aramm-adara로부터 시작하여, 엄격한 의미에서 고대바벨론 왕국을 처음으로 일으킨 제 20대손 수무아붐(Sumuabum, 주전 1894∼1881)과 제25대손인 함무라비(제 6대왕, 1792∼1750)와 자기 아버지인 28대손 암미디타나(Ammiditana)를 부른다. 그는 또한 조국을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여러 용사들의 흔들 중 돌보는 자(paqidim)가 없을 경우 자신의 제삿날에 "동과 서에서 찾아와제사 음식들을 먹고, 마시고, 자신을 축복해주길" 기원한다.
메소포타미아에 죽은 혼을 가리키는 전문용어가 있었던 것같이 가나안에도 죽은 혼을 가리키는 용어(repaim)가 있었다.16 물론 러파임이란 단어가 여러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그 중 하나는 명백하게 죽은 혼을 가리킨다. 우가릿 사람들은 조상숭배를 할 때 전문용어를 가지고 있었다(mrzh). 이 날에 그들은 황소와 양과 소와 염소를 잡고 조상에게 드리며, 조상신으로 일주일간 먹고 마시게 한다. 후손들의 중요한 의무는 조상의 무덤에 비를 세우고, 음료수를 공급하며, 향료를 드리고, 노래를 불러주며, 그들을 기념하는 장소에서 음식과 술을 드리고 무덤을 돌보는 것이다.
애굽에서는 죽은 자를 신성화하는 것이 죽은 바로를 미이라로 만들고 그를 신으로 만들어 피라밋에 안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애굽의 사람들은 죽음의 신 오시리스가 부활한 것을 믿었기 때문에 오시리스 숭배가 심했다.
제 18왕조의 죽음의 책(The Book of the Dead) 154에 따르면 오시리스는 "부패하지 않고, 곪지 않으며, 썩지 않고, 벌레가 되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고, 실체를 가지며, 그의 몸에 모든 지체를 완전히 가진다. " 죽은 투트모스 3세는 죽음 이후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살리라, 나는 살리라.
나는자라리라, 나는자라리라, 나는 자라리라.
나는 평안 중에 깨어나리라, 나는 썩지 않으리라.
나의 내장은 없어지지 않으리. 나는 아무 흠이 없으리라.
내 눈은 부패하지 않으리라. 내 몸의 외모는 사라지지 않으리라.
내 귀는 멀지 않으리라.
내 머리는 내 목에서 분리되지 않고, 내 혀는 없어지지 않으리라.
내 머리털은 잘려지지 않고, 내 눈썹은 밀리지 않으리라.
보기 흥한 내 상처가 사라지리라.
내 몸은 강건하고, 이 땅에서 썩거나 부서지지 않으리라.
바로의 이 염원 배후에 애굽인들이 그들의 왕과, 왕가의 사람들을 미이라로 만드는 배경이 깔려있다. 미이라를 만드는 작업은 약 두 달에 걸쳐 이루어진다. 죽은 바로를 침상에 눕히고 먼저 쇠갈고리를 코로 넣어 뇌를 다 제거한다. 이 일을 집행하는 자는 아니부스(Anibus)라는 신으로 여겨졌다.17 그 후 내장을 드러내고 시체를 천연 탄산소다 가루(natron powder)에 둔다. 60일이 지난 후 시체를 씻고 침엽수(특히 참나무) 진으로 바르고 싸맨다. 그 후 여러 주술적인 말을 통하여 "시체가 지하에서 부패하지 않도록 한다.18
왕과 오시리스를 따르는 모든 자들은 영생과 행복을 누리고 완전한 몸을 갖고 살 것을 믿었다. 왜냐하면 오시리스가 죽음을 정복하고 죽음에서 부활하였으며 모든 사지가 완전한 몸으로 살기 때문이다.19
이런 맥락 속에서 고대 근동의 사람들은 조상숭배를 열심히 하였다. 죽은 자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부지런히 공급하였다. 죽은 자들에 대한 이런 극진한 태도는 생전의 갈등 관계를 해소하는데 물론 사용되었을 것이다.20 구약성경의 백성들은 그 이웃에 이렇게 편만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죽은 자의 신성화를 어떻게 극복하였을까? 이 배경을 가지고 우리는 이제 구약에 나타난 죽음을 살펴보자.
III. 구약성경의 죽음관
1 . 죽음의 용어
우리의 문화적인 배경 속에서 우리는 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분은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고, 그리스도인들은"소천했다", 불교인들은 "황천에 갔다"고 말한다. "돌아간다"는 용어는 어느 문화권에나 나타나는 것 같다. 바벨론 사람들은 저승을 "돌아오지 않는 땅"(Akk. ertset la sari, land of no return)으로 표현하였다.21 메소포타미아의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 성과 망대와 문이 있는 성에서 산다고 생각하였고, 그 성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믿었다.22
구약성경 속에서 죽음에 대한 다양한 용어들이 나타난다. 창세기 3장 19절에서 이미 "흙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나타났다. 인간이 원래 만들어진 소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adam)은 원래 "땅"(adama)의 "흙"(apar)으로 만들어졌다"(창2:7). 이제 그는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은 한평생 생존을 위해 싸우지만, 결국 한줌의 흙이 되고 말 것이다. "땅" 혹은"흙"은 인간의 요람이요, 집이요, 무덤이다"(Jacob).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표현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다시 반향되고 있다(욥 10:9; 34:15; 시 103:14; 전 12:7 등). 시편 90편이 이 점을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나이다"(3절). 즉 죽음이란 생기가 끝나고 목숨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인 혼(nephesh)은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한다(전 12:7). 죽음은 혼이 떠나는 것이다(창35:18; 왕상 12:21; 마10:28 참조).
욥기 13장 19절에 따르면, 죽음은"기운이 끊어지는 것(gawa)"이다.23 동일한 표현이 아브라함의 죽음에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gawa, "expire, breathe one's last breath")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창25:8). 아브라함은 175세로서 좋은 노년을 보내고(good old age)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에서 새로운 표현은 "자기열조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상에게로 돌아가다"(창15:15)와 같은 표현이다. 사사기 2장 10절에서도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이 세상을 떠나고 장사된 후 앞서간 친구, 조상들과 다시 만난다는 것을 뜻한다. "장수하다가 죽는 것"(seba toba)은 아브라함(창25:8), 기드온(삿8:32), 다윗(대상29:28)에게 적용되었다.
여호수아는 임종을 앞두고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간다'24(수23:14)고 말하며, 다윗은"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왕상2:2)고 말한다. 앞에 있는"온 세상이 가는 길"과 "온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 같은 의미인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에 대한 가장 멋있는 표현은 아무래도 전도서 12장에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는 죽음을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죽음을 노래한다(6∼8절).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2. 죽음에 대한 태도
1 ) 죽음에 대한 분노와 공포와 불안
이미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본 것처럼 고대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초연의 반응을 나타내었다. 성경에도 동일한 감정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난다. 아말렉의 왕 아각은 사무엘 앞에 나을 때,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the bitterness of death, RSV)이 지났다"고 말한다(삼상 15:23).
아각은 깊은 죽음의 고통과 왕이 포로가 되어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에 대해 쓴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죽음에 대해 가장 비통한 느낌을 표현한 사람은 다윗이었다. 그는 그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받기를 거절하며,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며 비통하게 운다(삼하18:33). 야곱도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창37:34). 그리고 그는 모든 위로를 거절하며,"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고 말한다(35절).
시편의 한 시인은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공포, the terror of death, RSV)이 내게 미쳤나이다"고 그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55:4).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고통"(the pangs of death, RSV)에서 풀려났다고 말한다(행2:24).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인간들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fear of death, RSV)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다"고 말한다(히 2:15).
구약성경 중에서 죽음에 대한 불안과 분노에 대해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시편 가운데 가장 슬픈 시"25로 알려진 제 88편이다. 시인은 죽음의 문턱에서 기도를 드린다.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로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며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웠사오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고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
사망자 중에 던지운 바 되었으며
살륙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니
저희는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데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로 저희에게 가증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라)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흑암 중에서 주의 기사와
잊음의 땅에서 주의 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이 시는 다른 애가시와는 달리 주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전혀 없다. 또한 주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면, 찬양하겠다는 서원도 없다. 시인은 극심한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고,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그는 죽음을 여러 가지로 묘사한다. 자신이 죽은 후에는 음부(스올)에 내려가며, 그곳을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 곳"으로 묘사한다.
죽음과 어둠은 여러 곳에서 연결된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의 "눈이 쇠했다"고 한다. 이 표현은 단순히 "시력을 잃는 것"이 아니라, 힘을 잃는 것이다. 눈이란 "전인에 대한 제유법(synecdoche,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한 개인의 정열과 건강의 척도이다"(삼상 14:27, 29; 신 34:7; 시 19:9; 에스라9:8).26 따라서 눈에 빛을 거두어가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시 13:3; 38:10). 그는 죽은 자를 "임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한다(4절).
일단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은 그에게 기사, 즉 구원을 베풀 수가 없다. 죽은 자는 다시 일어나 주를 찬송할 수 없다.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선포할 수도 없다. 죽음은 "흑암"이며, "잊음의 땅"(the land of forgetfulness)이다. 따라서 주께서 더 이상 그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 땅에서 더 이상 주의 기사와 의를 알 수 없다. 즉 그는 더 이상 어떤 것도 경험할 수 없다.
2) 죽음에 대한 초연함과 미래에 대한 확신
그러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이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후손을 축복하기도 하고 그들에게 중요한 유언의 말씀을 남긴다. 죽음을 앞두고 후손을 축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에게 아주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야곱이 임종의 순간에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두손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려오라고 한다. 그들이 들어오자 야곱은 "힘을 내어 침상에 앉는다"(48:2).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약속을 상기시킨 후에 두 손자를 축복한다. 야곱은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였는데"(10절)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14절). 요셉이 축복의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자(17절), 그는 "나도 안다 ‥‥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고 대답한다(19절). 죽음을 앞둔 야곱이 그 연약한 가운데 일어나 손자들을 축복하고 자신의 자식들의 미래를 예언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날지 알고 선언하는 것은 너무나 놀랍다.
모세 역시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을 빈다(신 33:1). 그의 말은 창조적인 능력이 있어서 미래의 윤곽을 잡아준다. 모세는 자신의 나이가 이제 120세로서 "더는 출입하기 능치 못하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워 일을 계속하게 하며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고 격려한다(신31:6).
여호수아도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성취를 말하고 있다. 그는 모든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세겜에 불러 모으고 "나는 나이 많아 늙었다" 고 말하면서(수23:2),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수23:14).
예수 그리스도 역시 자신의 임종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모든 일들을 다 이루었다는 확신을 가졌다. 사도 바울 역시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3. 죄와 죽음
1 ) 원죄와 보편적 죽음
길가메쉬의 침침한 배경 속에 구약성경은 독자적인 죽음의 관을 제시하고 있다. 길가메쉬 이야기는 인간의 죽음에 대해 불안, 분노, 공포스러운 반응을 너무나 잘 그리며, 인생의 사실로 받아들이지만, 모든 인간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그의 친구 엔키두의 죽음은 신들의 뜻을 어긴 것이지만, 인간의 보편적 죽음에 대한 설명은 없다.
창세기 3장은 이런 배경 속에서 살펴볼 때 너무나 독특하다. 인류의 대표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간의 범위를 넘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는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3:19). 이리하여 죽음은 인간의 존재양식이 되었고, 인간은 출생과 죽음 사이에 사는 존재가 되었다.
죽음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반역함으로 생긴 것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요 심판이다. 죽음이란 궁극적으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다. 사람은"죽음의 아들"(bene mawet)이다.
여기에서 죄와 죽음의 관계가 명백하게 나타난다. 죽음은 인간의 창조를 닮았다. "너는 흙에서 취했으므로, 흙으로 돌아가라"(3:19).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은 것을 상기시킨다(2:7). 영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고(3:22), 사람에게는 영생의 길이 차단되었다. 즉 창세기 3장은 길가메쉬가 추구하는 영생이 인간에게 차단되었음을 명백하게 해준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룹들과 두루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한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22∼24절)하시고 그 길을 차단하신다.
창세기 3장은 한 사람의 죄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왔음을 가르친다. 이사야 53장은 같은 원리를 반대로 적용하고 있다. 즉 한사람의 죽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린다(사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 셨도다.
신약성경은 이 고난받는 종의 죽음을 예수그리스도와 동일시하며,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음을 증거하고 있다(행 8:32∼35).
2) 자범죄와 죽음
죄는 죽음을 초래한다. 신구약 성경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한 많은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다. 죄를 범하면,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바대로 "명대로 살지 못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엘리의 자식들에게서 발견한다. 엘리의 두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가 불량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바치는 성물을 모독하고, 성전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을 때, 엘리의 집에 무서운 심판의 말씀이 임한다(삼상2:31∼34).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네 집에 영영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 네 집에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죽으리라. 네 두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가 한날에 죽으리라.
이와 같은 사상이 욥기 22장 15∼16절에도 나타난다. 즉 악한 자는 "때가 이르기 전에 끊겨진다."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젊어서 죽으며 그 생명이 남창과 함께 망하려니와"(욥36:13∼14).
죄와 죽음의 관계와 연관된 구절로서 민수기 27장 3∼4절에 나타난 슬로보핫의 딸들의 말은 대단히 흥미롭다.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스려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에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즉 여기에는 두 종류의 죽음이 구별되어 나타난다. 고라와 그 무리의 죽음은 하나님을 거스린 죽음으로 특별한 죽음이다.
그러나 슬로보핫은 자기 죄 가운데 죽은 것이다. 즉 일반적인 죽음이다. 따라서 슬로보핫이 아들이 없다고 해서 딸에게 유산을 줄 수 없다는 판례는 잘못된 것이라고 이 딸들은 모세에게 항의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죄의 대가로 죽음을 선언하지만, 죄를 지으면 자동적으로 죽는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은 철칙이 아니다. 죄를 범한 자가 진실되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신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아합이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위증자들을 세우고 결국 그를 죽인 후,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나봇의 피 때문에 아합의 집이 망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이때 아합은 너무나 두려워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하자" 하나님께서 아합의 "겸비함"을 보시고 재앙을 다음 세대로 늦추신다(왕상21장).
죄와 죽음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모세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과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한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30:15). 이 사상이 선지자들의 선포에 계속 나타난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5:4). 또한 이 사상은 지혜문학에도 나타난다. 잠언에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 두 여인으로 묘사된다. 한 여인은 어리석은 계집이요, 음녀요, 이방 계집으로서 "그 집은 사망으로, 그 길은 음부로 기울어졌나니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길을 얻지 못하느니라"(2:18∼19). 또 다른 여인은 지혜로운 여인으로, 이 여인을 품을 때 생명과 존귀가 뒤따른다. 즉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선지자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을 떠날 때 우리에게 오는 것이며, 생명은 이 말씀을 따를 때 우리에게 온다.
그러나 욥기는 하나님의 부재를 다루면서, 의인이라고 해서 고난과 죽음이 피해가는 것이 아니요, 악인이라고 해서 꼭 빨리 죽는 것이 아님을 잘 말해주고 있다.
3) 우발적인 죽음
인간의 죽음과 연관하여, 출애굽기 21장 12∼14절에는 아주 독특한 표현이 나타나고있다.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즉 여기에는 의도적인 살인과 비의도적인 살인이 나타난다. 즉 산에 나무하러 가서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우연히 사람을 죽일 때에는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는 길을 허락하고 있다. 이런 우발적인 죽음을 피하기 위해 신명기 22장 8절은 독특한 법을 만들고 있다. "네가 새 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 흐른 죄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4. 죽음의 비신성화
죽음관에 있어서 성경의 독특성은 죄와 죽음을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것뿐 아니라 죽음을 철저하게 비신성화시키는 데 나타난다. 성경의 신앙은 죽은 자를 신격화하여 숭배하는것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성경에는 애굽에서처럼 죽은 자를 위한 의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인생사에 개입하지 못하며,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그들은 힘이 없는 존재들이다.
물론 시에서는 죽음이 의인화된다. 수아 사람 빌닷은 악인의 죽음에 대해 흥미로운 묘사를 하고있다(욥 18:13∼14).
그의 백체가 먹히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 지체를 먹을 것이며
그가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 뽑혀서 무서움의 왕에게로 잡혀가고.
13절은 질병으로 말미암아 벽골이 앙상해지며, "사망의 장자"(the firstborn of death) 즉 재앙이 지체를 갉아먹음으로 죽음 직전에 움직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빌닷은 욥의 병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27 14절에 따르면, 죽음이 올 때 악인은 그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장막에서 뽑히고, "무서움의 왕" 즉 죽음의 왕에게 이끌려 간다. 여기에서 죽음은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죽음이 올 때 거부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14장에서 죽음에 이른 바벨론의 왕을 조롱하며 그가 저승세계로 내려갈 때의 장면을 시적으로 그리고 있다. 공포의왕 바벨론의 왕이 죽자 온 땅이 평안하고 정온하며 무리들이 소리질러 노래한다(14:3∼8).
아래의 음부가 너로 인하여 소동하여 너의 옴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에서의 모든 영웅을 너로 인하여 동하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으로 그 보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그들은 다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도 우리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 하리로다.
네 영화가 음부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9∼11).
바벨론 왕이 죽자 땅은 평화를 되찾지만, 땅 아래의 음부는 소용돌이친다. 죽은 혼이 가는 음부는 이 독재자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 한때 바벨론의 왕은 하늘까지 높아졌지만, 이제 "음부"(sheol)에 떨어진다.
그때, 먼저 죽은 왕들이 다 일어나서 묻는다. "너도 우리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같이 되었느냐? "(10절) 죽은 바벨론 왕은 더 이상 공포의 존재가 아니다. 또한 그의 영화는 완전히 사라지고 "구더기"와 "지렁이"가 그를 덮는다. 무덤 안에서 그의 몸이 썩어가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바벨론의 왕은"아침의 아들 계명성"으로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하였지만(12∼14절), 이제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졌다"(15절). 이 교만한 왕은 가장 낮은 스올에 던져졌다. 그는 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왕이 아니다. 죽은 바벨론의 왕은 음부의 세계를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다.
이 시적이고, 신화적인 암시가 깔린 이야기는 죽음을 신격화시키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죽음의 통치가 영화롭게 되고, 신격화 된것을 찾아볼 수 없다.28 구약성경에서 스올로 내려가는 것은 대부분 인생을 하직하고 무덤에 장사되는 것을 뜻한다.29 물론 스올은 하나님이 만든 장소로 언급되지는 않으나 우주의 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그곳은 가끔 우주의 끝, 경계에 있는 곳으로서 하늘과 연관되어 나타난다(암9:2; 시 139:8; 사 14:13∼15참조).
욥기 18장 13∼14절과 이사야 14장 같은 곳에서는 죽음이 의인화되고, 또 신화적인 암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인 "이쉬타르의 지옥강하"나 애굽의 오시리스 신화를 비교해볼 때, 죽음의 세계는 철저하게 비신성화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족장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죽은 후에 "신", 혹은"귀신"이 되어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가장 중요한 예로서, 조상숭배를 생각해보자. 신약성경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구약성경에서는 메소포타미아의 키스푸 제사나 가나안의 마르제아 제사와 같이 죽은 조상신에게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허락하는 규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죽은 조상 숭배와 연관된 의식을 철저히 거부한다. 죽은 영에게 바친 제사음식은 금지된 것이었다. 먼저 민수기 25장 1 ∼3절을 보라.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주석이 시편 106편 28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wayyissamedu),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zibehe metim)을 먹었다." 즉 그들이 싯딤에서 먹은 음식은 죽은 자에게 바친 제사음식이었다. 바알브올의 의식은 "죽은 자들", 구체적으로 죽은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며, 바쳐진 음식과 술을 함께 먹으면서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신명기 26장 14절에 따르면,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후에 감사예배를 드리며 십일조를 드리면서 한가지 고백해야 할 사항을 명시하고 있다. 즉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나이다." 여기에 "죽은 자를 위하여 십일조를 사용한 경우"가 나타난다. 이것은 십일조를 "죽음의 사자"바알(Baal, the Dead one)에게 드리는 것일 수도 있고,30 혹은 십일조를 "죽은 자를 위해 무덤에 두는 것"일 수도 있다.31 어쨌든, 이것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짓이다.
예레미야 16장 5절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상가(marzeah-house)에 들어가지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긍휼을 제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바로 이 다음 절에 따르면(16:6∼9), 상가집이 이방의 의식으로 가득찬 것을보게 된다. 즉 "그곳에서 그들은 애곡하며, 자기 몸을 베며, 대머리 되게 하는"일이 있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위로의 잔"을 마셨다. 이 잔은 특히 방탕함으로 가득찬 것이었다. 아모스 6장 4∼7절 역시 같은 배경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사야 65장 4절에 따르면 패역한 백성들이"무덤 사이에 앉으며…, 돼지고기를 먹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무덤에 앉는 것"은 죽은 자를 위해 애곡을 하거나, 그들에게 제사하거나, 혹은 그들에게 신탁의 말씀을 묻기 위한 행동(신18:11; 삼상28:3; 사57:9)이었을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죽음과 연관된 모든 것이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음에도 백성들이 이방사상에 젖어서 이제는 무덤 안에 들어가 앉으며 돼지고기를 먹고 있다.
죽음과 죽은 자의 비신성화와 연관하여, 죽은 자들을 불러오는 접신술과 강령술이 철저하게 금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사야 8장 19∼20절을 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성경은 초혼술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에 대해서는 명백한 입장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초혼술을 명백히 이방의 종교행위로 정죄하고 있다. 이것은 "여호와께 가증한 것" 이라고 못을 박는다(신18:12∼14). 이사야29장4절에서도 신접한 자들이 땅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술법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히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거리리라." 사울은 정신분열을 일으킨 후에 엔돌의 신접한 여자에게 나아가 죽은 사무엘의 혼을 불러내라고 한다(삼상28장). 역대기 기자는 이 점에 대해 명백한 신학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셨더라"(대상 10:13-14).
선지자의 규례를 말하는 신명기 18장 11절에서는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고 말한다.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신다. " 왜 가나안 사람들은 그 땅에서 좇겨났는가? "바로 이런 가증한 일 때문이었다"(12절).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레 20:6,27).
죽음의 비신성화와 연관된 것으로, 신명기는 장례식에서 금지된 규례 두가지를 명시하고 있다. "너는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14:1). 우가릿의 효자 아캇의 전설(Legend of Aqht)에 따르면, 죽은 자를 위해 애곡하는 전문 여성이 몸을 난자하는 것이 나타난다.32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기"때문이다(2절). 유사한 말씀이 레위기 19장 28절에 나타난다.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방의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들 중 누가 죽으면 머리털이나 수염을 자르는 규례가 있었다(렘 41:5참조). 그 이유는 애곡하는 자들이 자신의 슬픔을 극대화하기 위해 몸을 해치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었다.
끝으로 죽음의 비신성화와 연관하여, 우리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그 많은 족보들이 전혀 조상숭배와 연관되어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죽음과 죽은자를 비신성화시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덤을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는데도 나타난다. 그들은 이방인들처럼 무덤을 높이지 않는다. 이사야 선지자는 국고를 맡고 궁을 차지한 셉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네가 여기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해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내었도다"(사22:15∼16). 주님은 셉나에게 죽음을 선고한다(22:17∼25). 예수님도 선지자를 죽인 자들이 선지자의 무덤을 짓고 장식하는 것을 책망하였다(마23:29).
Ⅳ. 닫는말
위의 글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이방인과 성경의 백성들 사이에 많은 유사성이 있는 것을본다. 하지만, 또한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그 유사성은 죽음을 맞이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있는 불안과 분노와 공포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믿음의 인물들은 아브라함이나, 야곱, 여호수아, 바울처럼 자신의 길을 힘써 달린 후, 죽음에 대해 초연한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방의 문화와 종교에 두드러진, 조상숭배와 죽은 자의 신격화와 신성화는 성경에서 철저하게 거부되고 있다. 죽은 자와 교제를 나누며 그들로부터 신탁의 말씀을 받는 것을 성경은 가증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방 사상과 성경 사상의 근본적인 차이는 신관에 있다. 오직 유일하시고, 살아계신 인격적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외에 그 어느 누구도 신성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며,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나 죽으나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주(註)---------------
1. B. C. O11enburger, E.A. Martens, G. F. Hasel, ed. The Flowing of Old Testament Theology(Winona Lake: Eisenbrauns, 1992) .
2. H. Ridderbos, Paul, An Outline od His Theology- (Eerdmans, 1977). G. E. Ledd, A Theology of the
New Testment(Eerdmans, 1974).
3. R.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Charles Scribner's Sons, 1955) .
4. E. Kuebler-Ross, on Death and Dying(New York-:MacMillan company, 1969). 성염 옮김, 「인간의 죽음」(분도 출판사, 1979).
5. George Roux, Ancient Iraq(Second Edition, Penguin Books, l980), p. 121.
6. 나는 E. A. Speiser가 번역한 "The Gilgamesh Epic",in ANET(P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1969), p. 72-99를 중심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7. 이 부분은 Thorkild Jacobsen, The treasure of Darkness, A history of Mesopotamian Religion(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1976), p.203 에서 인용됨.
8. Roux, Ancient Iraq, p. 121
9. ABL 614 r.4,6-NA, in CAD E, p.397.
10. BIN 4,96:19, JEN 478:6.
11. CAD,2. p.399.
12. J- J. Finkelstein, "The Genealogy of the Hammurapi Dynasty", JCS 20(1966), p. 115.
13. CAD, arutu, p. 324.
14. Finkelstein, "Genealogy", p. 116.
15. BM 80328, Finkelstein, "Genealogy", p.95 ~97.
16. J. C. DeMoor, "Rapitma-Rephaim", ZAW88(IyF6), p. 330.
17. O. Kiel, The Symbolism of the Biblical World(New York:Crossroad, 1985), p 67에 있는 그림 74를 보라.
18. 「사자의 책」 45장, 154장, E. A. Wallis Budge, The Book of the Dead, (Arkana, 1989):cxxviii, cxc, cxci;제 154장은 가장 중요한 장이다. 죽은 자는 그의 "아버지"이신 오시리스에게 자신의 몸이 썩거나 상하지 않도록 간구한다.
19. Wallis Budge, Book of the Dead, Ixi. 사자의 책 중 한 파피루스인 아니 파피루스(Ani papyrus)에는 오시리스의 재판정에 죽은 자의 심장을 여우머리를 쓴 신아니부스가 저울에 달아 그 인생을 판단하는 그림이 나타난다(주전 1300년, 대영박물관소장, 김의원 역,「모세 오경의 문화적 배경」, p. 132를 보라).
20. M. Bayllsss "The Cult of Dead Kin in Assyria and Babylonia", Iraq 35(1973), p. 125.
21. 애굽에서는 여러 완곡어법(euphemism)을 사용한다. "He goes living to his rest", "the fairest of destinieshas come to pass", "he enters into his horizon, departs to heaven, and is united with the sun through the mingling of his divine body with his maker." H. W. Wolff Anthropology of the Old Testament (Philadelphia : Fortress Press , 1974) , p .103.
22. Keel, Symbolism, p.63.
23. 이 부분에 대한 주석은 J .E. Hartley, The Book of Job, NICOT(Eerdmans, 1988), p. 225를 보라.
24. derek tool ha'arets, "what is usual all over the earth"(Wolff, Anthropology, 240), 창 19:31, "세상의 도리".
25. "the saddest Psalm in the whole Psalter", Kirkpatrick, Pslmas, p, 523.
26. M.E. Tate, Psalms51~100, WBC(Word Books,1990), p. 402.
27. Hartley , Book of Job p.279.
28. Wolff Anthropology p. 103.
29. 창42:38; 44:29, 31; 사38:10, 17; 시 9:15, 17; 16:10;49:9, 15; 88:3∼6, 11 이하.잠 1:12.
30. P. C. Craigie, The Book of Deuteronomy, NICOT(Eerdmans, 1976), p.323.
31. Wolff, Anthropology, p. 101.
32. CTA 19.IV, p. 173, 184.
김정우(총신대학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