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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 지역 대동여지도 재구성
김경수(향토지리연구소장, 간행위원)
Ⅰ. 들어가는 말
고대부터 현대까지 세계지도의 발달사를 집대성한 지도학사 시리즈(총8권) 중 한국지도학(Cartography in Korea) 집필자 레드야드(Ledyard, 미국 콜롬비아대학교 명예교수)는 고산자 김정호의 청구도와 대동여지도에 가장 많은 내용을 할애하면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한국의 지도 중 지도학적으로 가장 우수하다고 평했다.
고산자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그 방대한 지도를 제작했으며, 언제 생을 마감했는지가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제 전체적인 윤곽을 구경한데서 넘어서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마다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를 면밀하게 통찰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내가 머물고 있는 터를 고산자는 어떤 모양과 글자로 새겨 놓았단 말인가. 한 곳마다 더듬어 관찰해 나간 다면 그 간 묻혀있는 진실이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또 바르게 잘 된 부분도 파악하고, 전혀 엉뚱하게 잘못되어 그 까닭을 따질 필요를 느끼는 곳도 발견하게 된다.
필자는 1996년 화순군을 대상으로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내용을 현재 지도에 재구성해 보았다. 고산자의 작업이 지리학자 뿐만 아니라 조각가로서도 돋보였다. 특히 범례설정이 합리적이며, 나무에 새겨 넣을 때 그 위치도 깊이 숙고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 답사를 통하여 제작했는지 의구심이 들게 한 부분이 있었다. 즉 재구성 작업을 통해 위치가 다른 곳이 여러 곳 있었다.
2005년에는 광주광역시를 사례연구 한 바 있다. 화순군과 같은 점을 발견하고, 영산강유역을 대상으로 연구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그 길목에서 탐진강과 보성강 유역권에 있는 장흥군 지역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대동여지도를 개술해본다.
Ⅱ. 대동여지도 개관
대한민국은 IT와 Digital 강국이 되었다. 종이와 책자로 된 지도에서 이젠 실시간 선명한 화면으로 보여주는 GPS와 Navigation이 휴대전화에서 자동차까지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도 지리하면 누구나 김정호와 그가 만든 대동여지도를 말한다. 필자는 답사 중에 ‘현대판 김정호’라는 엄청난 칭찬을 들었다. 정작 우리는 대동여지도의 실제 모습을 보고, 또는 김정호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접하고 말하는지. 저 자신부터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황해도 출신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1804~?)가 1861년 피나무에 조각하여 만든 지도이다. 제목은 우리나라 여러 곳을 나타낸 그림이라는 뜻이다. 먼저 그 모습을 살펴보자. 현재 성신여대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지도가 보물 제850호, 현전하는 12장의 목판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11장은 보물 제1581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동여지도는 한 장의 지도가 아니고, 일정한 기준에 따라 나눠 접어져 있다. 분첩절첩식
(分帖折疊式)구성으로 휴대하고 관리하기 편하다. 인쇄하여 접었을 때 나눔의 크기는 높이(남북)가 22층으로 각 30㎝ 정도이고, 폭(동서)은 19면으로 약 20㎝다. 전국토를 이어서 보기위해 전체 227면 중 지도부분 220면을 모두 펼치면 높이(세로) 6.6m, 넓이(가로) 3.8m로 3층 건물 크기는 되어야 온전히 세워 볼 수 있다. 광주 일곡동 소재 향토지리연구소 동편 창에 게시되어 있는 대동여지도가 바로 실제 크기다.
본디 목판의 크기는 가로 43㎝ 세로 32㎝이며, 두께는 1.5㎝로 얇고 손잡이가 없으며 양면으로 양각되어 있다. 목판 수는 한 장에 4면씩 조각되어 있으니 대략 55∼60개로 추정된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숭실대학교 박물관 소장본 1매와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수장고에서 발견된 11매를 더해 12매다.
대동여지도는 현재의 경위도의 개념과는 다르지만 방격(方格)을 기초로 제작했다. 이를 앞부분에 방괘축척표(方罫縮尺表)에 잘 나타내고 있다. 축척은 남북 간을 기준으로 보면 실제길이 1,100㎞와 지도상 거리 6.6m를 계산하면 1/166,666이고, 동서 간으로 보면 실제길이 480㎞와 지도상 거리 3.8m로 산정하여 1/126,316이 된다.
범례는 지도표라고 부르고 기호식 표현방식으로 영아(營衙)를 비롯하여 읍치(邑治), 성지(城池), 진보(鎭堡), 역참(驛站), 창고(倉庫), 목소(牧所), 봉수(烽燧), 능침(陵寢), 방리(坊里), 고현(古縣), 고진보(古鎭堡), 고산성(古山城), 도로(道路) 등 14개 항목을 제시하고 있다. 주로 국가의 행정, 군사, 재정과 관련된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주요한 사항들이다. 이외 누정, 사찰, 사원(祠院) 같은 문화 시설을 포함하고 있지만 범례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김정호는 풍수적 기법을 활용했지만 풍수와 지리를 철저하게 구분하면서 치국의 큰 범주에서 여지학(輿地學)을 강조한 점들이 지도에 녹아 있다. 하천의 표현에서도 폭을 조절했으며, 특히 가항(可航) 여부를 쌍선과 단선으로 구분하여 표현했다. 뱃길이 닿는 곳에는 조운창을 비롯하여 각 창고가 있었는데 작은 네모로 나타나 있다.
도로는 대로와 간로 구분 없이 같은 굵기 선으로 거의 직선이며, 십리마다 방표(傍標)가 찍혀 있다. 도보시대 길은 대개 지름길로 이는 직선으로 표현해야 적절하고, 방표는 거리를 쉽게 짐작하게 해준다. 나아가 방표 간격의 차를 두었는데, 평야나 하천을 따라 가는 곳은 2.5㎝, 산길은 1.5㎝ 정도로 나타내 실제거리가 느껴지도록 했다. 옛길이나 샛길에는 방표가 없다. 오늘날 터미널이나 정거장과 같은 역참은 작은 동그라미 안에 세로 줄로 이분된 표시로 나타냈다. 1895년 역참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대개 30리마다 역이 있고 10리마다 원이 있었다.
이상태의 조사(1999)에 따르면 지명은 13,188개로 그가 필사본으로 만든 동여도보다 5,548개가 적은데 특히 방리가 많이 생략되었다. 이는 필사본과 목판본 상 차이로 판각에 따른 어려운 점을 먼저 들 수 있고, 중복된 표현과 번잡성을 고려하여 일부러 제외한 것으로 짐작된다.
Ⅲ. 장흥지역의 대동여지도 재구성
대동여지도 가운데 19․20층과 12․13면에 오늘날 장흥군 지역이 나온다. 제작 당시 장흥의 관할 구역에 고산자는 장흥읍성을 비롯하여 총 61개를 목판에 새겨 넣었다. 그 중 현재 장흥군 관할 지역과 바로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40개 정도의 위치를 찾아보고, 간단하게 관련 자료와 제보 내용을 첨부해본다(이탤릭체는 대동지지). 앞서 장흥의 이해를 돕기 위해 김정호의 저서 대동지지에 기록된 연혁 부분을 읽어보자(김희태 역).
<대동지지> : 본래 백제의 오차(烏次)였는데 신라 경덕왕 16(757)년에 오아(烏兒)로 고쳐 보성군(寶城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940)년에 정안(定安)으로 고치고 현종(1010~1031) 때에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로 승격되었다. 또는 인종(仁宗) 때(1123~1146)에 공예왕후(恭睿王后) 임씨(任氏)의 향이라 하여 부로 승격했다고 한다. 소속된 현은 4개이니 수령(遂寧), 회령(會寧), 장택(長澤), 탐진(耽津)이다. 원종(元宗) 6(1265)년에 회주(懷州)목으로 올렸으며, 충선왕(忠宣王) 2(1310)년에 장흥부(長興府)로 내렸다. 모두 목이라 했다. 뒤에 왜구로 말미암아 임시로 내지(內地)에 옮겼다[오아 때의 고읍은 천관산의 남쪽에 있는데 고장흥이라 부른다.
조선 태조 원(1392)년에 수령현(遂寧縣)의 중녕산(中寧山)에 성을 쌓아 다스리는 곳으로 하였다. 태종 13(1413)년에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이듬해 성이 좁다하여 다시 수령의 옛현터로 다스리는 곳[치소]을 옮겼다. 세조 12(1430)년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관할은 3개읍이다.
읍호(邑號)는 정주(定州-고려 성종이 정한 것이다)와 관산(冠山). 관원(官員)은 도호부사로 장흥진관 병마첨절제사를 겸하며, 1원(員)이다.
1. 장흥읍성(長興邑城)
장흥읍성은 장흥읍 동동․남동․기양․예양․남외리 등 주변 산을 이용하여 구축된 포곡식 산성과 평지성이 연결되어 있다. 치소를 중령성(장흥읍 원도리일원)에서 수령현 옛터로 옮겨오면서 1422(세종4)년 쌓은 성으로 알려져 있다. 성안에는 동헌, 객사, 군관청, 군기청 등의 건물이가 있었다고 하나, 동헌터(장원주택자리)만 확인된다.
<대동지지> : 읍성(邑城) : 장령성(長寧城)이라고도 하며 둘레가 9,004자이고 동(東)․남(南)․북(北)의 3문이 있고 샘이 14개, 못이 3개 있다.
2. 수령(遂寧古縣)
장흥읍 동동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백제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으로 신라 경덕왕 때 마읍(馬邑)으로 고쳐 보성군에 딸리었는데 고려 때 수령으로 고쳐서 영암군에 붙이었다가, 장흥부에 편입되어 장흥읍내가 된다.
<대동지지> : 수령(遂寧) : 지금 [장흥도호]부의 치소이다. 본래 백제의 고마미지(古馬彌知)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에 마읍(馬邑)으로 고치고 보성군에 딸린 현이 되었으며, 고려 태조 23년에 수령으로 고쳐 영암에 속했다. 현종 9년에 장흥부에 래속(來屬)했다.
3. 장택(長澤古縣, 無城 倉庫)
장택현은 장동, 장평지역으로 장평면 용강리 창몰 또는 사창으로도 부르는 곳이 중심지이다. 현터는 살림집이고, 창터는 면사무소 터이다. 장택고현성은 장동면 북교리 신북마을(산 2, 산108-1, 산111-3) 야산에 위치하고 테뫼식(산정식) 토성으로 주민들은 ‘장동산성’이라 부른다. 2004년 신북리 거문고등(거문댕이) 국도2호선 확장공사구간에서 조선대학교 박물관팀(이기길)이 후기 구석기 유적을 조사했다.
<대동지지> : 장택(長澤) [장홍도호]부의 동북쪽 41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계천(季川)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에 계수(季水)로 고치고 보성군(寶城郡)에 딸린 현이 되었고, 고려 태조 23년에 장택으로 고쳤다. 현종 9년에 장흥부에 래속했다.
4. 회령(會寧古縣)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군학마을(산678번지, 산702-1번지, 697-3․7번지일대)일대 구미영터(龜尾營址)로 추정된다.
<대동지지> : 회령(會寧) : [장홍도호]부의 동남쪽 32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마사량(馬師良-신증동국여지승람 馬斯良)이었는데, 당(唐)이 고쳐서 귀화시켰고 신라 경덕왕 16년에 대로(代勞)로 고치고 보성군(寶城郡)에 딸린 현이 되었고, 고려 태조 23년에 회령으로 고쳤다. 현종 9년에 장흥부에 래속했다.
5. 회령포(會寧浦, 有城鎭)
회령진성은 1490(성종21)년 4월 축조된 만호진성으로 형태는 마을의 배산을 이용 축성한 부정형이다. 성내부에는 관아, 객사, 작청, 군관청, 장군청, 통인청, 사령청이 있었다고 한다. 회진면 회진리(이회진리 일명 돌개동마을) 하연준 집이 동헌터이고 826번지 교회가 객사터이다.
<대동지지> : 회령포진 : 남쪽 70리 바닷가에 있다. 남쪽으로 고금도와 마주하고 있다. 성의 둘레는 1,990자. 샘 3개소가 있다. 수군만호 1원이 있다.
6. 고장흥(古長興)
오차-오아-정안현-장흥부로 이어지는 백제-고려시대까지의 치소로 관산읍 방촌리가 중심지이다. 고장흥성지(‘상잠산성’)는 관산읍 방촌리 내동과 계춘동마을 뒤편에 상잠산에 남아있다. 성의 전체적인 둘레는 약 450m이고, 폭은 1~3m, 높이는 2m내외이다.
<대동지지> : 연혁(沿革) : 본래 백제의 오차(烏次)였는데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오아(烏兒)로 고쳐 보성군(寶城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정안(定安)으로 고치고 현종 때에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로 승격되었다.[또는 인종(仁宗) 때에 공예왕후(恭睿王后) 임씨(任氏)의 향이라 하여 부로 승격했다고 한다] [소속된 현은 4개이니 수령(遂寧) 회령(會寧) 장택(長澤) 탐진(耽津)이다] 원종(元宗) 6년[1265년]에 회주(懷州)목으로 올렸으며, 충선왕(忠宣王) 2년[1310년]에 장흥부(長興府)로 내렸다. [모두 목이라 했다] 뒤에 왜구로 말미암아 임시로 내지(內地)에 옮겼다[오아때의 고읍은 천관산의 남쪽에 있는데 고장흥이라 부른다]
7. 황시(보)성(黃市<甫>城)
황보성은 장흥읍 원도․축내․향양․건산리에 걸쳐 있는 높이 60m 중녕산 토성 터이다. 1392년 부사 황보덕(皇甫德)이 고을의 부로들이 “장흥부는 은띠(정3품-종6품) 이상의 관원이 다스리었는데, 이제 보성군에 붙이어 작은 고을에 딸리게 되었으니 심한 수치”라는 진정을 받아 안렴사 이원(李原)에게 보고해서 이웃 고을의 장정 350명을 모아 8월 17일에 공사를 시작, 9월 27일에 끝마치었다.
<대동여지도>에 황보성이라 표기된 부분과 <대동지지>의 남쪽 30리 기록은 중령산 고읍성과 달리 억불산의 학성 또는 관산 방촌의 정안현 고읍과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황보덕은 조선시대 초기 장흥부사를 지낸 인물로 중령산에 있는 고읍성이 황보덕 부사 재임시절 쌓은 성이다. 장흥에 유배를 왔던 목은 이색의 중령산황보성기(中寧山皇甫城記)가 참고가 된다. 이 기문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장흥 조에도 실려 있다.(김희태, 동문선소재 기문 3례, <장흥문화> 11집 참조).
<대동지지> : 황보성(皇甫城) : 고려 말에 황보덕(皇甫德)이 쌓은 것이며 [장홍도호]부(府) 남쪽 30리에 쌓았고 둘레는 1,500자이다.
고읍성(古邑城) : 중령산(中寧山)에 있으며 태조 원년에 쌓았다.
8. 碧沙(道驛)
벽사역은 병조 직할 역참으로 장흥읍 관덕리와 원도리 경계부분에 위치했다. 벽사역 찰방터는 1896년 폐지된 뒤 부동면사무소로 쓰였다고 한다. 이 부근에 있던 찰방 선정비는 장흥교도소 앞으로 이전(찰방비-이영망 1677년, 윤대, 이인술 1871년, 성종호 1871년, 권유선, 임오년, 한오장, 이명륜, 원재성 1951년)했다.
<대동지지> : 벽사도(碧沙道) : 동쪽으로 5리에 있다. 속한 역이 9개소이다. 찰방(察訪) 1원(員)이다.
9. 해창(海倉)
안양면 해창리 97번지 웃너메 복판에 있던 창터로 조선시대 한성으로 세곡을 운반하던 곳이다.
<대동지지> : 해창(海倉) : 동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진도(津渡) : 해창진(海倉津).
10. 부산(夫山)
부산면 내안리 내동마을이 중심지이고 내동을 예전에 흥룡동이라 했다. 마을 이름을 딴 흥룡단은 오남(吾南) 김한섭(金漢燮1838~1894)과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1819~1888)을 제향하는 단이다. 내동마을은 수리봉(411m)자락의 남쪽사면에 서출동입형으로 자리 잡은 큰 마을이다.
<대동지지> : 부산(夫山) : 북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