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교민사회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실을
4.19 혁명 관련 글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썼었는데
흠.. 최종적으로 제 글을 싣지 못하게 되어 죄송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이곳에서는 금기어인가봐요.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이곳에 썼었던 글을 올려볼까합니다.
4.19 혁명 기념일을 앞두고
오늘 중등 건물 2층 복도에서 유독 키가 큰 고등학생 옆을 초등학생이 지나가는데 그 작은 아이의 머리가 고등학생의 허리에도 닿지 않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교직 생활의 대부분을 고등학교에서 보낸 나에게 OO에서 근무하면서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한 학교에서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모두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모두가 나에게는 귀엽기만 하다. 이런 어린 학생들이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한국 현대사의 시작인 광복부터 현재까지 우리의 역사는 부침이 많았고, 이에 어린 학생들의 희생도 많았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제주 4.3의 도화선은 3.1절 기념식에서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에 차여 다친 것이다. 이는 제주 출병을 거부하고 봉기하는 여수‧순천 10.19로 이어진다.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단독정부는 구성이 되었고, 이승만 정권이 탄생했다. 정권 연장을 위해 자행한 3.15 부정선거에 맞선 마산 시위에서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김주열이 최루탄을 얼굴에 맞아 사망하여 시신이 바다에 유기되었다가 떠오르면서 4.19 혁명은 시작된다. 결국 현대사에서 민중의 첫 승리인 4.19도 어린 학생의 희생이 도화선이 된 것이다. 발포에도 불구하고 학생과 시민의 저항은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있었다. 당시 11살의 가장 어린 희생자 임동성과 13살의 전한승이 경찰이 쏜 총에 사망하였다. 이에 전한승과 같은 학교인 수송초등학교의 어린이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시위에 참여했던 어린 학생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슬픔과 분노가 있었겠지만, 설마 어른들이 또 우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진 않겠지, 하는 믿음이 한편에 있지 않았을까?
좋은 어른이 되기란 쉽지 않다. 옳고 그름을 판별하고 행동할 줄 아는 아이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란 더욱 쉽지 않다. 종종 학생들이 쓴 글을 읽거나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학생들을 어리다고 만만하게 보고 있진 않나 반성하게 된다. 각자 자기 역사의 주인공인, 앞으로 우리 역사의 주인공이 될 학생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 더불어 나는 믿을 만한 어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2023.04.03.
첫댓글 맘편히님,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아마 중국이라는 사회가 우리 사회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왜? 그렇지?'보다는 이해가 바로 됩니다.
독서클럽 모임 때 맘편히님의 연결 환경이 가능하시다면
화상으로 한번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능하시다면 언제든 얘기해 주세요~
언제나 건강하시고 좋은 추억 쌓으시길...
중국의 위정자들은 미국의 정치가 때로는 극도의 혼란을 大選 때마다 격으면서도 결과가
발표되고나면 언재 그랳냐는듯 급속히 안정이 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특히 자유민주체제의 가치는 군중의 피의 혁명으로 이뤄진 것에 대해서 경끼를 발합니다.
이들 중국의 위정자들이 속으로 대한민국을 두려워하는 것도 직접민주정에 의한 국민의
직접 투표로 권력을 창출해 도도한 발전의 동기가 유지되어 온 결과가 오늘이라는 사실이죠.
사실 중국의 일개 城만큼도 아닌 남한이 이렇게 눈부신 전진을 계속할 때 두렵지요.
그리고 저들이 가장 두려움의 대상이 "혁명"이라는 단어일진데 교민사회의 불채택은 살기위
한 생존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1989.4.15 - 6.4 천안문 광장 사태는 [베이징 노동자치연맹]이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행해
졌지만 당시는 六四事件으로 불렸지만 실제로 중국내에서는 단어를 사용하지도 못하게 억압
을 하는 중이구요. 이 칼럼이 교민 사회 간행물에 실렸다면 아마도 . . . 상상만으로도 앗찔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