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 삼십송 해설 제 26 송
/지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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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6 송
乃至未起識 求住唯識性
내지미기식 구주유식성
식(識)을 일으키지 않고
유식의 성에 머물기를 구한다면
於二取隨眠 猶未能伏滅
어이취수면 유미능복멸
능취 소취의
두 가지 수면상태에서는
아직 능히 조복 소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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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법유식(萬法唯識)임을 내세우는
유식학의 식(識)은
망식(妄識)으로
번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식을
지혜로 전환하는 것이 유식의 수행이다.
식을 일으키지 않는 다는 것은
본래 유식의 성에 갖춰져 있는
무분별지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려면
주객이 서로 상대하여 일으키는
분별을 여의어야 한다.
능취(能取)와 소치(所取)가
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밝혀 놓은 송이다.
수면(隨眠)이란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번뇌가 늘 중생을 따라 다녀
떠나지 않으므로 수(隨)라 하고
그 작용이 아득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
마치 잠자는 상태와 비슷하므로
면(眠)이라 한다.
이 수면이 남아 있는 한
유식의 성
곧 승의승의(勝義勝義)인
원성실성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변계소집성의
분별이 끊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유식의 실성에 머물고자 하는 것이
유식수행의 목표다.
26송부터
오위(五位)의
수행지위를 따라 설하는데
자량위(資糧位)
해당하는 송이라고 말해왔다.
‘식(識) 일어나지 않는’의 1구는
아집(我執), 법집(法執)의
두 집착에서 일어나는
분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수행의 양식(糧食)이 되므로
자량위(資糧位) 수행분이라 한다.
이 자량위부터
수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2취 수면은
아(我)와 법(法)
곧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수면이다.
수면(隨眠)은
아뢰야식에 잠복해 있는 번뇌종자이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는
유식의 논지가
결국은 식에 의해 나타난
허망한 경계를 뛰어넘으라는 것인데
식의 실체가 공함을 알아야 하고
식으로 인한
능취 소취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경(無境)을
유경(有境)으로 보는 것은
능취, 소취 때문이다.
번뇌의 종자가 끊어지면
유식 실성인
원성실성에 돌아가게 되고
그때는
아뢰야식의 망(妄)이 떨어져 나가
순정무구(純淨無垢)한 진(眞)만 남아
아마라식(阿摩羅識)
곧 백정식(白淨識)이 되는 것이다.
백정식은
부처님의 지위에서 얻어지는 식으로
망(妄)이 없는 것을 일컫는 말로
때로는 제9식이라 부르기도 한다.
‘복멸(伏滅)’은
조복(調伏)해서
소멸(消滅)시킨다는 뜻으로
아뢰야식에 숨어 있는
번뇌종자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자량위에서의 수행은
우선 번뇌를 조복하는 것이
급선무이고 번뇌를 조복하려는 것이
수행의 준비가 되는 것이다.
『성유식론』에서는
자량을
지혜자량(智慧資糧)과
복덕자량(福德資糧)
두 가지의 자량을 말하고 있다.
수행이 이루어짐에 따라
두 가지 자량이
함축(含蓄)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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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6 송
식(識)을 일으키지 않고
유식의 성에 머물기를 구한다면
능취 소취의
두 가지 수면상태에서는
아직 능히 조복 소멸되지 않는다.
乃至未起識 求住唯識性
내지미기식 구주유식성
於二取隨眠 猶未能伏滅
어이취수면 유미능복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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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 삼십송 해설 제 26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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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17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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