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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장 54-60절.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음
54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w when they heard this, they were cut to the quick, and they began gnashing their teeth at him.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Ἀκούοντες δὲ ταῦτα, διεπρίοντο ταῖς καρδίαις αὐτῶν
hearing now these, they were cut in the heart of them
직역하면 ‘이것을 듣고,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 계속 찔림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듣고’(Ἀκούοντες)는 현재분사이고(hearing), ‘찔려’(διεπρίοντο)는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서(they were cut) 계속 마음이 찔림 받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마음에 찔렸다’(διεπρίοντο)고 하는 말은 사도행전 2장 37절에서 ‘마음에 찔렸다’(κατενύγησαν)는 말보다 다 강렬한 말입니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καὶ ἔβρυχον τοὺς ὀδόντας ἐπ’ αὐτόν.
and they were began gnashing the teeth at him
‘갈거늘’(ἔβρυχον)은 미완료 과거인데(they were began gnashing) 여기서 미완료는 기동의 미완료(inceptive imperfect)로서 이를 갈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1. 스데반이 산헤드린 재판정에서 변론하는 설교를 듣고, 재판장들인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찔렸다>는 말(διεπρίοντο)은 화살이 정통으로 맞았다는 뜻입니다.
즉 스데반의 설교가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마음에 화살처럼 정곡을 찌르는 설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데반이 52절에서 <너희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다>라는 말이 저희들의 마음을 정통으로 찔러서 양심에 큰 충격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스데반의 설교는 정곡을 찌르는 가장 성공적인 설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에 대한 반응입니다.
2.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다고 했습니다.
똑같이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지만,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어찌할꼬?’ 하고 회개하여 예수님 믿고 3천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재판장들은 이를 갈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55절.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being full of the Holy Spirit, he gazed intently into heaven and saw the glory of God, and Jesus standing at the right hand of God;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ὑπάρχων δὲ πλήρης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he being but full of Spirit Holy
직역하면 ‘그러나 그는 성령 충만하여’란 뜻입니다.
‘충만하여’에서 동사(ὑπάρχων)는 현재분사인데(he being) 원형(ὑπάρχω)은 ‘시작하다, 어떤 상태에 있다’(begin, am, exist)는 뜻입니다.
본문에는 없지만 원래 ‘스데반’(Στέφανος)이란 말은 왕관(crown)을 뜻하는데, 스데반은 최초의 순교자로서 천국의 왕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ἀτενίσας εἰς τὸν οὐρανὸν
having looked intently to the heaven
‘우러러 주목하여’(ἀτενίσα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looked intently) 뚫어지게 하늘을 주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εἶδεν δόξαν Θεοῦ καὶ Ἰησοῦν ἑστῶτα ἐκ δεξιῶν τοῦ Θεοῦ,
he saw glory of God and Jesus having stood at the right hand of God
‘서신’(ἑστῶτα)은 완료분사로서(having stood) 예수님이 이미 서 계신 것을 가리킵니다.
‘보고’(εἶδεν)는 부정과거로서(he saw) ‘보았다’는 뜻이고, 분명하게 본 것을 가리킵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본 영광이고(행 7:2), 모세가 시내산에서 본 영광이었고(출 33:23),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본 영광으로서(겔 1:28), 하나님의 현현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은 광야에서 회막을 덮었고(출 40:34), 예루살렘 성전을 덮었고(왕상 8:11), 베들레헴 목자들의 주변을 비췬 것이었고(눅 2:9), 예수님의 변화산에 나타난 영광이었습니다(눅 9:32).
1. 재판장들은 스데반을 보고 이를 갈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주목하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인들은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스데반을 보고도 이를 갈았지만, 스데반은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때 스데반도 얼마든지 이를 가는 재판장들을 바라보고 무서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은 이상적인 집사의 모습입니다.
2. 우리들은 늘 세상을 바라보고, 낙심하거나 화를 내거나 죄악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과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56절.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he said, "Behold, I see the heavens opened up and the Son of Man standing at the right hand of God."
말하되
καὶ εἶπεν,
and he said
‘말하되’(εἶπεν)는 부정과거로서(he said) 그가 확실하게 말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보노라 한 대
Ἰδοὺ, θεωρῶ τοὺς οὐρανοὺς διηνοιγμένους
Behold, I see the heavens having been opened
‘보라’(Ἰδοὺ)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Behold) 확실히 주목하여 보라는 것이고, ‘열리고’(διηνοιγμένους)는 완료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opened) 하늘이 열려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보노라’(θεωρῶ)는 현재형으로서(I see) 내가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καὶ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ἐκ δεξιῶν ἑστῶτα τοῦ Θεοῦ.
and the Son of the Man at the right having stood of the God
‘서신’(ἑστῶτα)은 완료분사로서(having stood) 이미 서 계신 것을 가리킵니다.
‘인자’(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the Son of the Man)란 말은 예수님 자신이 사용하신 호칭이고(막 2:10), 다니엘서에 메시아를 인자로 호칭한 것을 예수님이 자신에게 적용해서 말씀하신 호칭입니다.
다니엘 7:13-14.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마태복음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이처럼 스데반이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본 것은 사울(바울)의 경우(행 9:17)와 사도 요한의 경우(계 1:13)도 비슷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요 3:13, 6:38), 감람산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행 1:12).
이 때 예수님이 하늘 보좌에서 일어서 계신 것은 스데반을 영접하려는 모습이었고, 스데반은 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큰 위안을 얻고 용감히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1. 왜 예수님은 스데반이 죽는 마당에 하나님 우편에서 일어서셨을까요?
스데반을 격려하기 위해서이고, 스데반을 천국으로 환영하기 위해서이고, 스데반에게 면류관을 씌워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2. 이처럼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을 보았으므로 원수들을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57절.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they cried out with a loud voice, and covered their ears and rushed at him with one impulse.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κράξαντες δὲ φωνῇ μεγάλῃ,
Having cried out then in a voice loud,
직역하면 ‘그리하여 그들이 큰 소리로 소리지르며’라는 뜻입니다.
‘지르며’(κράξ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인데(Having cried out) 그 자체가 크게 악을 쓰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뜻합니다.
귀를 막고
συνέσχον τὰ ὦτα αὐτῶν,
they held fast the ears of them
‘막고’(συνέσχον)는 부정과거로서(they held fast) 귀를 굳게 막았다는 뜻입니다.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καὶ ὥρμησαν ὁμοθυμαδὸν ἐπ’ αὐτόν,
and they rushed with one accord upon him
직역하면 ‘그들이 그에게 일제히 달려들었다’는 뜻입니다.
‘일제히’(ὁμοθυμαδὸν)라는 말은 사도행전 2장 46절에서도 똑같이 쓰였는데, 성도들이 일심으로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고 각 집에서 떡을 떼는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본 절에서는 악의적인 유대 지도자들이 일제히 스데반을 죽이는데 하나가 된 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달려들어’(ὥρμησαν)는 부정과거로서(they rushed) 쏜살같이 달려드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이를 갈면서 달려든 것은 나중에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대 군중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때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사도행전 22:22-23.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1. 재판장들은 오늘날 국회의원보다 더 높은 공직자들이고, 종교지도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의 설교에 대항하여 큰 소리를 지르고, 귀를 막고 달려들었습니다.
이성을 잃은 짐승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교회에서도 가끔 싸움이 벌어지면 이처럼 이성을 잃은 짐승 같은 모습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들의 양심의 정곡을 찌르는 설교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설교자인 스데반을 죽이려고 달려 든 것입니다.
58절.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en they had driven him out of the city, they began stoning him; and the witnesses laid aside their robes at the feet of a young man named Saul.
성 밖으로 내치고
καὶ ἐκβαλόντες ἔξω τῆς πόλεως
and having cast [him] out of the city
‘내치고’(ἐκβαλ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cast) 힘껏 내던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돌로 칠새,
ἐλιθοβόλουν
they began to stone
‘돌로 칠새’(ἐλιθοβόλουν)는 미완료 과거인데, (they began to stone) 여기서 미완료는 기동의 미완료(inceptive imperfect)로서 돌로 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로마 당국의 허락이 없이는 사형집행을 할 수 없었는데(요 18:31), 이때 스데반을 죽인 것과 야고보를 죽인 것(행 12:2)은 BC 37년 로마 총독이 해임되고, 후임자가 부임하는 중간 공백기에 저질러진 일이었습니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 두니라
καὶ οἱ μάρτυρες ἀπέθεντο τὰ ἱμάτια αὐτῶν
and the witnesses laid aside the garments of them
직역하면 ‘그리고 증인들이 그들의 옷을 두었다’는 뜻입니다.
‘두니라’(ἀπέθεντο)는 부정과거로서(laid aside)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παρὰ τοὺς πόδας νεανίου καλουμένου Σαύλου.
at the feet of young man having been named Saul
‘하는’(καλουμένου)은 현재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named) ‘이름 지어진’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돌로 치는 자들이 옷을 사울의 발 앞에 둔 것은 바로 사울이 스데반 처형에 책임자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볼 때, 증인된 사울이 먼저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을 것이고, 그 후에 다른 사람들이 증인인 사울 앞에 옷을 벗어 던지고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는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 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 13:10, 17:7)
신명기 17:7.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사울에 대한 약술-
1.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했고(행 9:11, 21:39, 22:3), 아버지는 장막 제조업자였고(행 18:3 참조), 생질이 있는 것을 보아 누나가 있었고( 행 23:16), 후에 기독교로 개종시킨 형제가 있었고(고후 8:16-24 참조, Haustras의 증언), 나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졌고( 행 16:37, 22:28), 유명한 바리새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고( 행 22: 3, 26:4), 바래새인이었고(행 22:3, 23:6, 빌 3:5, 갈 1:7), 베냐민 지파로서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빌 3:5, 고후 11:22, 빌 3:5).
2.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데 증인이었고(본문), 예루살렘 교회를 잔멸하여 없애려고 했고(행 8:3),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에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갔습니다( 행 9:1).
3.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기도교인으로 개종했고(행 9:1-9), 1차 전도여행을 바나바와 같이 했고(행 13-14장), 2차 전도여행을 실라와 함께 했고(행 16장-18:22), 3차 전도여행을 디모데와 함께 했고(행 18:23-21:7), 소아시아 전역과 유럽의 그리스 반도와 로마에 수많은 교회들을 설립했습니다.
4. 사울은 로마서에서부터 빌레몬서까지 13개 성경을 썼고, 스데반을 살해한 것처럼 자신도 순교했습니다.
1. 원래 사람을 죽이려면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을 죽일 때는 얼마나 흥분했든지, 로마 총독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달려들어서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쳐 죽였습니다.
2. 그런데 이 때 당시에 사울은 30세 청년으로 최연소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즉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데, 총 책임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사울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스데반의 설교를 중심으로 그의 설교와 신학이 개편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9절.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y went on stoning Stephen as he called on the Lord and said, "Lord Jesus, receive my spirit!"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καὶ ἐλιθοβόλουν τὸν Στέφανον,
and they were stoning the Stephen
‘치니’(ἐλιθοβόλουν)는 미완료과거로서(they were stoning) 계속 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ἐπικαλούμενον καὶ λέγοντα
he was calling out and saying
‘부르짖어’(ἐπικαλούμενον)는 현재완료로서(he was calling out) 부르짖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르되’(λέγοντα)도 현재분사로서(saying) 말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Κύριε Ἰησοῦ, δέξαι τὸ πνεῦμά μου.
Lord Jesus, receive the spirit of me
‘받으시옵소서’(δέξαι)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receive) 꼭 단호하게 받아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시고 운명하셨고(눅 23:46), 순교자 후쓰(John Huss)나 순교자 프라하의 제롬(Jerom)도 스데반의 말에 따라 ‘주 예수여 제 영혼을 주님께 맡깁니다’라고 외치면서 순교했습니다. (Neander, Church History 9권, 536, 539)
1.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 두 가지의 기도를 했습니다.
첫째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둘째는 60절에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대로 사울이 나중에 회개하여 전도자 바울이 되었습니다.
2.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이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모세도 반역하고 우상숭배 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애굽기 32:32)
우리도 원수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2:19-20.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n falling on his knees, he cried out with a loud voice, "Lord, do not hold this sin against them!" Having said this, he fell asleep.
무릎을 꿇고
θεὶς δὲ τὰ γόνατα,
Having fallen then on knees
‘꿇고’(θεὶ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fallen) 단호한 자세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때 스데반이 무릎을 꿇은 것은 최후로 기도하는 경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솔로몬이 여호와께 성전에 임재하시도록 기도할 때(대하 6:13),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할 때(단 6:10),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하실 때( 눅 22:41), 베드로가 도르가를 기도하여 일으킬 때(행 9:40), 바울이 밀레도 해변과(행 20:36) 두로에서 기도할 때(행 21:5) 무릎 꿇고 기도한 것처럼, 스데반도 최후의 기도를 할 때 무릎을 꿇었습니다.
크게 불러 이르되,
ἔκραξεν φωνῇ μεγάλῃ
he cried in a voice loud
직역하면 ‘그가 큰 소리로 불렀다’는 뜻입니다.
‘불러’(ἔκραξεν)는 부정과거로서(he cried) 간절하게 부르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스데반이 마지막 순교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한 것은 나중에 살인의 증인 사울(바울)이 회심하는데 큰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스데반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교회는 바울을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Κύριε, μὴ στήσῃς αὐτοῖς ταύτην τὴν ἁμαρτίαν.
Lord, not place to them this the sin
‘돌리지’(στήσῃς)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place) 간절한 바람을 나타내고 있고, 원형(ἵστημι)은 ‘두다’(place)란 뜻인데, 부정사(μὴ, not)와 함께 사용해서 ‘용서해달라’(forgive)는 뜻입니다.
스데반이 자기를 돌로 쳐죽이는 원수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과 같습니다.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도록 가르치셨고, 심지어 원수와 핍박자를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 18:212-22, 마 5:44, 눅 6:28)
이 말을 하고 자니라.
καὶ τοῦτο εἰπὼν, ἐκοιμήθη.
and this having said, he fell asleep
직역하면 ‘이것을 말하고, 그가 잠들었다’는 뜻입니다.
‘말하고’(εἰπὼν)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said) 단호하게 말한 것을 가리키고, ‘자니라’(ἐκοιμήθη)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he fell asleep) 확실하게 깊이 잠 든 것을 가리킵니다.
죽는 것을 자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기독교의 교리를 반영한 독특한 표현입니다(행 13:36 고전 15:18).
이처럼 스데반이 평온하게 잠자듯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충만히 함께 하셔서, 돌에 맞아 죽는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후의 많은 순교자들도 화염 속에서도 찬양을 했고, 칼날이나 맹수의 발톱과 이빨 앞에서도 찬양을 했습니다.
1. 스데반은 평온하게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수고와 슬픔뿐인 세상을 떠나서 주님 품안에서 평안히 잠들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갈 길을 다 가고 하나님 나라에서 편히 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가 맡긴 모든 일을 다 하고 편히 쉬어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스데반 설교의 특징
1. 사도들은 오순절 성령을 받은 후로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유대교의 의식법을 존중했고, 유대교 지도자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는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에만 계시지 않고 전 우주적으로 계신다고 설교했습니다.
이것은 과연 당시 성전을 중심한 유대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치명적인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종교의 핵심 지도자들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를 죽였다고 지적함으로써, 유대교 지도자들의 치명적인 잘못을 주장했습니다.
과연 죄는 이방인만 짓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인들도 모두 보편적인 죄인이며, 따라서 속죄에 대한 성전 제사로써는 참된 속죄가 안 되고, 오직 유대교 지도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만이 절대적인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즉 스데반은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를 보편적인 인류 구원의 교회로 확 끌어올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데반의 영향으로 유대인 중심의 기독교를 이방인을 포함한 우주적인 보편교회로 확대시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스데반이 본토 중심의 유대인 신자가 아니라, 당시 세계 보편언어였던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Baker.
스데반의 순교로 인한 영향
1.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에 몰두했고,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2. 스데반의 모범적인 순교에 힘입어서 사도들은 용감하게 예루살렘에 남아서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을 보호했습니다.
3.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스데반이 성전 중심이 아닌 보편적 구원에 대해서 설교한 후에, 헬라어를 사용했던 경건한 유대인들이(행 8:2) 스데반을 장사했고, 장차 이 사람들이 흩어져서 안디옥에 전도하고(행 11:19-21), 이방인 중심의 안디옥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건한 유대인들이 처음에는 안 믿었지만, 결국 예수님을 믿고, 사울의 박해 때 안디옥에까지 가서 전도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헬라 문학에 대해서도 공부했고, 본토 유대인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출신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도들과 달리 이방인 전도에 적합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스데반을 죽일 정도로 유대교에 열심이었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스데반의 탈성전(脫聖展) 중심의 기독교에 대해서 영향을 받아, 이방인 전도에 생애를 바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스데반의 순교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많은 결실을 맺히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처럼 스데반의 순교가 위대한 전도자 바울을 만들어냈듯이, 박해자 바로는 민족 해방자 모세를 만들어냈고, 골리앗은 위대한 다윗을 출현시켰고, 교황의 박해는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를 만들어냈고, 영국의 찰스왕은 크롬웰을, 미국의 왕당파는 워싱턴을, 그리고 감옥은 존 번연을 만들어냈고, 일제의 박해는 주기철 목사를 만들어냈고, 공산 치하는 손양원 목사를 만들어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우리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
극심한 박해나 어려운 시험을 당하면, 보통 성도들은 ‘우리가 이런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하나님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원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늘 보좌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야곱도 부모님이 계신 고향 집을 떠나, 들판에서 돌 베게를 하고 쓸쓸히 자고 있을 때,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닥다리와 천사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어려울 때 기도 많이 하고, 하나님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아서, 영적으로 밝은 눈을 뜨고, 성령님의 능력을 얻어서, 극심한 난관을 극복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초두에 세 사람의 죽음이 나오는데, 우리는 가룟 유다와 같은 배신자의 죽음이나, 교회에서 부정하게 명예를 추구하다가 죽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부끄러운 죽음이 아니라, 스데반같이 명예로운 죽음을 죽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일을 하면서 어떤 오해와 환난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시고,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 환난을 이기고, 참된 평안과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