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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으라는 의미
마태복음 25:1~13
(마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 25: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마 25: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마 25: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마 25: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마 25: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마 25: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마 25: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마 25: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마 25: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마 25: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마 25: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마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저의 큰 딸이 8살, 둘째 아이가 5살 때의 일입니다. 제가 부목사로 시무하던 시절에 제 아내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러면 예민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큰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게 되고, 엄마가 없는 것을 알고 잠옷을 입은 채로 문밖에 나가 엄마를 기다립니다. 어는 때는 동생을 깨워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행동은 엄마가 안 오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있고, 둘만이 집에 있는 것이 두려워 그러했으리라 짐작을 합니다. 그렇지만 어찌 보면 기특한 행동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린 것이 엄마를 사모하고 그러기 때문에 언제 올지를 기다리며 있는 그 순수한 마음이 대견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엄마가 오면 의외의 반응을 보입니다. “추운데 왜 쓸데없이 나와 기다려!”하면서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혼이 나고도 아이는 번번이 엄마를 기다리는 일을 해왔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우리들은 어떤 반응을 가져야 할까를 생각하다가 저의 두 아이들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주님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는데 이렇게 해야 될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난 1992년 ‘다미선교회’에서 10월 28일 자정에 주님이 재림이 하셔서 성도의 휴거(携擧)가 온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전국 173교회 8천여 명의 신도들은 흰옷 차려입고 주님의 오실 날을 기다리면 많은 날을 예배당에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그날에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극성을 떨며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려야 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오실 때가 되면 오시겠지 하면서 무심하게 지내야 할 것인지도 생각해봐야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런 갈등에 대하여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이 들어왔던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해답은 재림의 때의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지만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 있어야 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슬기 있는 자와 미련한 자를 구별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할지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는 예수님 당시의 혼인 풍습에 대하여 알고 있어야 이 비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는 나지만 보통 신부의 아버지는 자기 딸을 위해서 잔치를 준비하고 신부의 친구들을 들러리로 초대해서 곧 열릴 결혼식을 축하하도록 해줍니다. 한편 신랑은 캄캄한 밤중에 자기 친한 친구들과 더불어 신부의 집으로 옵니다. 그 이유는 중동지방의 날씨가 낮은 너무나 무덥기 때문입니다. 신랑이 신부의 집에 도착할 때쯤 되면 한 사람이 대표로 신부의 집을 향해 가서 이제 신랑이 곧 도착한다고 외치며 알려줍니다. 그러면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부를 집안에 두고 밖으로 나가 신랑을 맞이합니다.
이 신부의 친구들인 들러리들은 각자 등불을 들고 나가서 신랑을 맞이하는데, 신랑은 이 남자 그룹의 가장 앞에 서서 집을 향해 옵니다. 신랑이 신부의 집에 들어서면, 여러 절차를 거치게 되고, 예식을 모두 마치고 나면 신부는 자기 들러리들과 함께 신랑의 집을 향해 가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열 처녀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중동지역은 유독 밤이 칠흑같이 어둡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귀한 손님이 오면 캄캄한 밤을 밝히고자 등을 들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신랑이 예상대로 오는 것이 아니라 점차 늦어지자 열 처녀 모두 꾸벅꾸벅 졸다가 아예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열 처녀를 2절에서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라고 구분하고 있습니다. 미련하고 슬기 있는 자를 구분하는 구별 점에 대하여 3,4절에서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기름이 준비되었느냐 그렇지 않냐에 따라서 미련함과 슬기로운 자가 갈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기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풀려져야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비유는 하늘에 속한 영적 진리를 이 세상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대비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기름이 단순히 불을 밝히는 기름에서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여야 될 것입니다. 기름은 성령을 말합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성령은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인도하십니다. 그 분의 선하신 뜻을 아는 것이 지식이라면 그 지식을 토대로 행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열 처녀 모두 신랑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는 그 지식을 어떻게 삶에 적용하는가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8절에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신랑이 신부 집에 당도하자 졸며 자다가 퍼뜩 깨어 이러나 등불을 켜야 되는데 그만 기름이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등에 기름 준비를 열 처녀 모두 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미련한 자들의 등불이 꺼져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등의 기름을 과도하게 낭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들은 자기 열심에 신랑의 발자국 소리에 온통 신경을 쓰면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신랑이 온다고 설치며 등에 불을 밝히고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함께 동조하지 않는 친구 들러리들에게 게으르고 어찌 그리 무심하냐고 타박을 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등을 밝히는 것을 여러 번 한 결과 등에 준비된 기름이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등은 올림픽에서 성화주자가 들고 달리는 토치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등 안에 있는 기름은 두세 시간이면 다 타버립니다. 그러면 기름을 등에 더 부어주어야 계속 불을 밝힐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분의 기름을 담아 둔 그릇마저 준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미련하다’는 말의 원뜻은 ‘얼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판단에 의하여 열심히 신랑을 맞이하려고 했습니다만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신앙인의 미련함이 이런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다미선교회의 임박한 종말론에 속아 열심을 내어 주님을 기다리는데 온 마음과 물질을 쏟았던 성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회의(懷疑)를 느끼고 신앙을 포기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전에 저희 교회에 출석한 분 중에 한 분은 신앙을 가진 이후 열심히 예배에 출석하였습니다. 그냥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감사헌금을 드리며 참석하였습니다. 그렇게 1년여를 보냈는데 어느 날 교회에 얼굴을 비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웬일이냐고 묻기 위하여 심방을 하였더니 그 분이 제게 화를 벌컥 내면서 “3대 독자 아들의 대학입시에 합격을 위하여 그렇게 열심히 믿었는데 그것 하나 들어주지 않는 하나님을 왜 내가 믿어야 합니까?”하면서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갈 3:3에서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했습니다. 처음에 저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열심을 다하여 모이고 전도하며 구제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 열심히 지나치다보니 끈기를 지니고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시들해지고 말았습니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주님은 곧 세상에 올 것 같이 전해왔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주님의 다시 오실 것을 사모하고 기다리려고 하면 이런 육체에 속한 애씀으로는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비유에서 열 처녀 중에 슬기로운 자만이 혼인잔치에 참여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기에 같은 장소에서 같이 등을 들고 같이 졸면서 기다렸는데 누구는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누구는 참여하지 못하였습니까? 그것은 아주 단순한 것에서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릇에 기름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릇이란 우리 영혼을 말합니다. (딤후 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릇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에 따라서 귀하게 쓰임받기도하고 천하게 쓰임 받을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령충만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미련한 자나 슬기로운 자나 등에는 기름을 준비하였습니다. 두 부류 모두 외형에서는 열심을 내는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안을 살펴보면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있으나 예수님을 누릴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습니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애원해 보지만 신랑은 '내가 진정으로 말하는데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할 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주님이 그들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이 그 안에 없으면 우리 주님과 교통할 수 없고, 예수님이 나를 알 수 없습니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 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영,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열심히 주를 섬기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를 종교행위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주님 앞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마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신부의 제일 되는 덕목은 순결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예수님의 거룩을 본받아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풍조를 쫓지 않고 하늘의 소망을 지니고 사는 비결은 오직 성령의 충만함에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육체의 열심으로는 거룩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기름인 성령을 모셔 들여야 우리는 담대히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였습니다. 외적인 등 뿐 아니라 내면에도 등을 준비하여 언제나 밝은 등불로 자기 점검을 게으르게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부가 신랑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자기를 돌아보고 정결함을 유지하고 있다면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에 대하여 그리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좀 더 자기관리를 하는데 마음을 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혼인잔치의 문이 닫힐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아무리 애걸복걸 사정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이 지혜요 슬기이며 깨어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성령의 지배를 받는 슬기로운 삶은 무엇인지를 좀 더 정확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속박하는 영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영이십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유란 방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발적인 나의 의지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나를 강제로 그 분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에 감동을 받아 스스로 하나님께 결단하여 사랑하고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역할을 성령이 하십니다. 성령에 부여된 보혜사라는 명칭은 요한복음 14장으로부터 16장에 걸쳐 4차례 등장하고 있습니다. ‘보혜사’는 헬라어로‘파라클레토스’인데 ‘파라칼레오’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파라칼레오’는‘곁에서’라는 뜻이 담긴 접두어 ‘파라’ 와 ‘부르다, 간청하다, 탄원하다, 요청하다, 권고하다, 훈계하다, 격려하다, 위로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칼레오’로 조합이 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파라클레토스’는 성도들의 곁에서 함께 하는, 위로자, 대언자, 돕는 자의 역할을 하는 분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내 곁에 항상 계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도록 하는 분이 성령이신데 이 성령이 나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성령의 모습으로 이미 오셨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을 내가 모시고 살고 있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를 그 분께 의탁하면 내 안에 성령이 빛이 비춰지고 주님이 싫어하시는 죄가 발견됩니다. 이 죄를 십자가 앞에 고백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이처럼 성령과 내가 하나 되어 내 안에 있는 죄들을 하나씩 처리하면서 내 안에서 성결한 모습이 생성되는 것입니다. 이 성결함이 곧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자질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슬기롭고 깨어있는 성도의 참 모습입니다.
슬기롭게 깨어있는 성도는 전혀 요란하지 않습니다. 성급하지 않습니다. 언제든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게으르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목사님말씀을 읽고 개인적으로 묵상한 내용입니다
기름을 낭비한 처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아가면서 내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것을, 나의 뜻을 마치 "그래, 이게 주님의 뜻일거야" 라고 오해하여 밀어부치고,
고집부리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안에 진정 하늘나라를 우선으로 하는 마음은 없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며 이 세상의 것을 바라는 신앙인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이 등불을 들고 있으나 기름을 낭비하는, 미련한 믿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속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이 세상의 복만을 바라며 하나님을 찬양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시야로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하나님의 숨겨진 뜻과 비밀을 절대 알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유일한 사실만을 믿습니다.하나님은 나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한다는 사실. 그리고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이 하늘나라에 우리를 초청하셔서 예비해두신 약속만을 믿겠다는 믿음.
이 세상속에서는 담담히 그 순간에 제 할일에 충실하고 살아가고, 성령님이 이끄는대로 맡기고, 빛을 따라 사는것.
그 삶속에서 예수님을 누릴 수 있는 은혜를 받아 평안한 삶을 사는것..
하나님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이 삶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길일것입니다.
묵상시간 갖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