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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친노'는 '대세'라고 정의가 매우 새삼스러운 모습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을 때, 약간의 이기죽거림은 있었으나 제대로 된 반론은 없었다.
오히려 당대의 메이저 신문들까지,
더민주당의 아무개가 그러는데 친노가 대세라네~, 하고
크게 써서 자기 독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들의 '관행'인 괜히 비트는 투 같은 것도 덧대지 않은, 아주 산뜻한 기사였다.
그래서 친노는 공식적으로 당대의 대세가 되었다.
그런데 친노가 대세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소년 시절에는 성공한 뻥튀기 장수꾼이었고,
자란 뒤에는 떼돈을 번 토건업자였던 이명박이 747이라는 거창한 사기 한방으로
대통이 된 뒤, '친노'의 노무현을 기어코 살해하기로 모진 작심을 했을 때,
능한 장삿치답게 용의주도한 그의 계산에서 친노는 이미 대세가 되어 있었다
- 친노를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나의 장사가 뜻과 같이 이룩될 수 없다.
그래서 '친노'의 노, 그를 기어코 살해하게 되고야 말았는데,
그것은 이명박의 당초 계산보다 너무 멀리 나간 거였다.
살해당한 거나 마찬가지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을 아예 살해버린 그것은
하수인들의 실수였는데, 그 실수의 대가는 혹독했다
- 친노가 갑자기 뻥튀김되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기어코 살해당해, 그 육신을 벗어버리고 불사의 상징으로 化身했을 때,
그 화신을 기리는 사람들의 숫자가 통칭 500만. 이 나라 역사상 최초, 최고였다.
친노포비아는 사실은 그때부터였다.
그 시간 직전까지 노무현은
비루먹은 강아지 취급이나 하고 있던 사람들까지(1번당 인사들만은 물론 아니다), 검은 상복을 차려 입고 슬픔이 잔뜩 과장된 얼굴을 드리우고,
온갖 욕설과 저주마저 무릅쓴채, 그의 그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분명한 희화였는데, 그것은 그를 존경해서가 아니라 그가 두려워서였다.
영혼이 된 그가 이제 내리게 될 앙화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다.
심리학적으로 보아 대개의 불안감은 망상이라 한다.
99% 이상이라는 숫자까지 제시한 학자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공포감은 그대로 정확한 현실이 되었다.
그의 육신이 묻혀 있는 시골 마을이 (자발적 참배객이 가장 많은 것으로 보아)
민족 최대의 성지가 된 것부터 그랬고,
당대 최대 행패 집단으로 기세가 등등했던 이른바 친박의 비참한 종말이나
그 훨씬 전에 이미 자취를 감춰버린 박사모가 좋은 예가 되겠지만,
자신들의 집권 기간마저 버텨내지 못할 만큼 극히 단명한
다른 정치인의 지지세력과는 달리, 시간이 흘러갈수록 친노가 양적, 질적으로
오히려 줄곧 늘어가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도대체가 '친노, 이것들'을 제쳐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친노, 이것들'은 지금은 3번당에서 건 입 노릇을 하고 있는
어느 인사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는데, 그것은 사실 같다.
비단 2번당 안에서만은 아니다.
2번당 내외 모든 각급 선거에서 친노는 부동의 항수가 되었다.
어떻게든 친노를 안든가, 물어뜯든가, 선택은 이 둘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현실은 1번당이나 3번당에게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친노, 이것들'을 제쳐두고는 아무 것도 해볼 수 없게 되었다.
친노勢(세)는 그렇게 차츰 커지고 있다.
더불어 새로운 현상 하나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 친노의 근본주의化(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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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나폴레옹과 그의 사나운 개들.
그냥 재미로, 이 그림의 세 캐릭터를 5초쯤이나 10초쯤 들여다 보시기 바란다.
당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지 않은가?
만일 잘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시대를 향한 당신 눈을 조금 더 밝게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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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이 마치 현대 한국의 바로 그 누군가를 모델로 이 소설을 쓴 것 같다.
'나폴레옹의 적은 바로 나폴레옹(나적나)'이라는 경우가
현대 한국의 '박적박'과 정확하게 대비되는 것만으로도 그렇다.
위대한 나폴레옹은 과거에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언제나 체면을 구기게 되지만,
물론 그럴수록 더욱 기세등등해진다.
왜냐하면 나폴레옹은 위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작가의 형안(炯眼)이라는 게 이런 것이고나 하고,
이 작품을 오랜만에 새로 읽게 되기까지 했다.
재미는 있었으나 유쾌하지는 않았다.
현대 한국의 박, 그 사람에 대한 측은함 때문이다.
거짓말을 할 체질이 아닌 함세웅 신부가 말씀하신 적이 있다
- (박, 그 사람은) 그 아버지에 의해 잔인한 기계로 만들어진 사람이에요.
그런데 내가 박, 그를 측은해 하는 것은 기계의 잔인성보다는
똥과 된장에 대한 분별력 부재다.
그 자신을 망치고,
그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다는 나라를 망치는 것은 바로 그 부재 때문이다.
국운으로 돌리기에는,
그래봐야 미천한 한 인간에 의해 만인의 삶이 무참하게 박살나고 있는
이 현실이 너무 속상하다.
결국은 그 속상함 때문에 그런 시대의 마감을 위해 2번당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관심마저 허망한 것이 되고야 말 것이기에 속은 더 상한다.
그래도 자, 더 나아가 보자꾸나, 끙!
*
모든 근본주의가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정체성이 건들리면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서 무작정 발끈한다.
친노가 지렁이쯤으로 보는 친박이 유승민을 죽이라는
나폴레옹(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절대군주 노릇을 하는 위대한 돼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블루벨, 제시, 핀셰(나폴레옹의 사나운 개)들 처럼
유승민을 물어뜯어댈 때, 그들 가운데 하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헌법보다 의리가 우선이다.
이토로고 발칙한 망언은 분명하고 확실한 그들 편인 조선일보마저
혹독하게 비판했으니까(조선일보 2016-2-5) 자해가 분명하지만,
그들의 광신적 근본주의에서는 자해에 대한 성찰이 불가능하다.
광신이라는 게 본디 그렇다. 죽어도 Go!
친노도 꼭 마찬가지다.
친노勢가 차츰 더 커질수록, 친노의 인내심은 차츰 더 희박해져 가고 있어서,
친노의 어떤 것에 대한 아주 작은 건들림에도 매우 촉각적으로 반응하고,
그 반응은 순식간에 극단적으로 과격해진다.
그 구체적 예 가운데 하나가 얼마 전,
어느 주간지의 친노 비판 기사에 대한 친노의 테러다.
그 기사를 우선 한 번 훑어보시는 것도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
시간이 조금 넉넉하시다면 비판적으로 정독해보셔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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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확장성 막는 ‘친노포비아’의 실체
총선 후에도 총성이 그치지 않는다.
SNS에서, 인터넷 댓글 창에서, 여의도 술자리에서 총성은 점점 크게 들린다.
4·13 총선이 야권의 동반 ...www.sisainlive.com
*
모든 기사의 생명은 팩트인데,
바로 그 팩트에 얼마만큼이나마 차이가 있어 보이는 것부터
정제되지 않은 워딩까지, 썩 잘 쓴 기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관점에 따른 약간의 비판 이상의 공격을 할 수 있는 질료는 분명 아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테러 수준의 공격이었다.
이 기사를 쓴 기자의 전화번호가 공격 표적으로서 친노 진영 여러 곳에 전파되어,
실제로 이 잡지사는 전화 공격 때문에 업무에 지장이 있을 정도가 되었던 것 같고,
친노 진영 여러 곳에는 잡지사나 기자를 상대로 자신이 어떻게 싸웠는가 하는
무용담이 여럿 눈에 띄었다.
절독 통보도 꽤 있었던 것 같다.
절독을 선언한 한 친노는 자신이 그 잡지사 게시판에 올린 규탄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의 동지들에게 공개했고.
이 글에는 '좋아요'와 지지 댓글이 많이 달려 있었다. 표현 그대로 테러였다.
이걸 테러라고?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나는 '내 관점에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하겠다.
*
내 관점에서의 테러, 하나 더 이야기해야겠다.
이 기사에도 나와 있지만,
발언의 진위, 해당 기사의 옳고그름(正誤)에 대한 확인도 없이,
김부겸에게 최악, 극단의 폭언을 발사한 것, 분명 저질 테러다.
설령 김부겸이 그렇게 말했고, 그것이 잘못이라 할지라도,
폭언 이전에 다른 해결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잘못 없는 인간은 없다.
잘못을 할 때마다 최악의 폭언을 파부어댄다면
살아남을 공동체의 존재는 아예 불가능하다.
가족 공동체부터 국가 공동체까지,
지금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공동체 붕괴라는 재난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무차별적 막말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붕괴 공동체에 이 단정을 대입해보면
이 단정의 증명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하는데,
1번당이 박살난 직접적 동인은 물론 막말이지만
(예: 윤상현 - 김무성, 죽여버려 이xx!), 그 집안이야 관심이 없으니까,
우선 우리의 주제인 2번당을 증명 대상으로 삼아보면 좋을 듯하다.
평균 반년마다 대표를 갈아대기를 되풀이해온 게
2번당의 결코 자랑스러운 것일 수 없는 역사는
바로 이 극단적 막말에 의해 이룩되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막말의 최근 실적은 3번당이라는 기형 사생아다.
2번당과 3번당 사이의 팀킬 놀이. 놀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수치스럽다.
그런데도 수치를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관행' 쯤으로 생각하는 게 2번당 사람들의 '관행' 같은 것이니까.
그들은 요즘 서로 만나 희희낙락한다.
수치를 모르는 존재의 전형을 찾으라면 그들을 우선 지목하면 되리라 생각한다.
얼마나 더 쪼개지고 찢어져야 그 악습을 버리게 될까.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마치 무슨 정설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는데, (2번당이 진보인가는 알 수 없으나)
세계의 유수한 진보 정당 가운데
대한민국 2번당처럼 쪼개지고 박살나기를 되풀이한 정당은 없는 것 같다.
*
불시에 테러를 당했으면서도,
결국은 몇푼 구독료 때문에,
독자를 황제처럼 떠받들 수밖에 없는 가난한 잡지사나 기자로서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할 수밖에 없었던 그 비운의 그 기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김부겸 당선자 측 한 인사는
“언론의 제목 장사야 그렇다 치고, 제대로 내용도 확인해보지 않고
같은 당 정치인을 조리돌림하는 일부 지지자에게 실망을 금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더민주의 또 다른 당직자는
“조금이라도 자신들을 비판하면 온갖 정치적 상상력을 동원해 상대방을 작살내는 행태에 두려움을 느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시사인 2016-5-24)
이 대목에 대한 친노의 소감은 어떤 것일 수 있을까.
나의 관점에서는 티 잡기 어려운 말씀 같다.
'친노, 이것들'을 제쳐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게
특히 더민주당의 현실인지라,
두려움 이전에 염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 염증의 축적이 더민주당이나 지지자들의 지향에 보탬이 될까, 뺌이 될까.
이런 행동이 애당행위일까, 해당행위일까.
폭언의 주인공들은 아마 문재인을 이른바 '사랑하는' 사람들일 듯한데,
그들의 이런 짓이 과연 문재인을 사랑하는 것일까,
문재인을 해꼬지하는 것일까.
문재인을 살리는 행위일까, 문재인을 죽이는 행위일까.
문재인 경우,
지난 한 해 내내, 결국은 3번당으로 내뺀 그들로부터
오만 막말 다 들어가면서도 입을 꽉 다문 채 어떻게든 원만한 해결을 하려고 애썼다.
요즘도 당대 정치판 최악, 최저질, 최유치의
더러운 입인 박지원으로부터 그때마다 인간이라면 차마 할 수 없을
온갖 추잡한 소리 모두 듣고 있지만 문재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문재인이 김종인의 저지선을 뚫고 광주 진입을 감행하기로 했을 때,
박지원은 문재인 자서전의, 존재하지도 않은 어떤 내용을 들먹이며,
광주에 오려면 그 대목에 대한 사과부터 하고 오라 ,
문재인의 이번 네팔행을 두고,
박지원은 '도 닦고 오라', 하고 빈정거렸지만,
문재인은 입도 벙긋 하지 않았다. 문재인은 바보일까, 현자일까.
*
그리고 또 말씀 올려야 할 것 같다.
논리 고갈의 필연적 산물인 테러의 첫째 속성은 비열인데,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이 테러행위에 대해 더민주당 내외에서
어찌하여 비판 한 줄기도 없는가.
더구나 그야말로 사지에서 생환한 당 중진이 명색 동지들로부터
이토록 치사한 곤욕을 당하고 있는데,
당내외에서 어떤 비판도 나오지 않은 그것은 결국은 비열한 테러행위에 대한
묵시적 동조였다.
되풀이되고 있는 묵시적 동조의 예를 2번당에서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신만 죽지 않으면 침묵. 그것이 2번당의 고유 문화 같다.
또는 이른바 '관행'.
가까운 예 하나만 더 들어보겠다.
이해찬, 정청래 컷오프.
그때 그 난도질을 기획한 몇과 그 아류들은
표정 관리를 하느라고 애를 먹고 있었고,
그 바람에 한 건 했다는 그들의 득의만면은 더 눈에 띄게 되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그 폭거에 동의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 아연, 내면에서 들끓고 있는 분노를 표현한 사람은,
이미 나의 다른 글에 적어둔 바 있지만,
적어도 나의 시야 안에서는 사실상 하나뿐이었다.
결국 자신들이 동의할 수 없는 폭거 행위에 대해 묵시적 동조를 한 셈이다.
줄곧 되풀이되고 있는 매우 관행적인
이런 현상에 대한 나의 비판을 부정할 수 없다면
더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자성 능력을 상실한 파렴치 집단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당대 최악의 파렴치 집단인 친박. 그들과 다를 바가 없을 듯하고,
만일 그렇다면 그 종말도 이미 정해져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의지 대상으로 관심하고 있는 바로 그 2번당이 말이다,
*
굳이 나의 평가를 이야기하자면,
시사인의 이 기사는, 그 결여까지 포함하여,
더민주당과 그 지지 세력에게 교과서가 될 만하고,
이 기사를 쓴 이오성 기자에게는 밥 한 끼라도 대접해야 하고,
이런 기사를 실은 시사인의 독자 배가 운동에 손을 보태야 한다.
그런데 절독 선동을 포함한 저질 테러였다.
적반하장이고 배은망덕이라 해야 할 것 같다.
도대체 이만한 비판마저 수용할 수 없고,
이런 정도의 건들림마저 견뎌낼 수 없다면서
어찌 사람사는 세상을 이룩해내는 전사가 될 수 있을까.
사람사는 세상은 결코 쉬운 목표가 아닌데,
결코 쉽지 않은 그 목표는 선병질적, 말초적 민감으로 가능할 수 없다.
쇠심줄이 되어,
태산처럼 은인자중, 와신상담의 세월을 각오한다 해도
실현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사는 세상이다.
이미 익히 경험한 것이지만 사람사는 세상을 방해하는
민주주의의 적들, 얼마나 집요하고 얼마나 잔인한가.
사람마저 숱하게 죽여놓고도 뻔뻔스럽게 정의로운 척하고 있는 게 그들이다.
그런데 겨우 이런 정도의 기사에
그토록 부르륵 끓어오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을 대적해낼 수 있을까.
이런 친노. 극복이 불가능하다면 파문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친노가 살고 사람사는 세상이 이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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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을 회상하여 나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노무현이 손녀와 함께 있는 사진들이다.
(내가 고르고 싶었던 사진은 아이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달리는 것인데,
찾아보니까 그 사진의 JPG 파일이 없다.)
이 아이에게서 할아버지를 빼앗아간 그들에 대해 치열한 분노와 증오, 느낀다.
그러나 분노나 증오는 답이 아니다.
더구나 대개는 높은 교육 수혜자로서,
필요할 때는 애써 서민 코스프레를 해내느라 애를 먹어야 할 만큼
'고귀한' 생활을 누려 왔는데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선과 악, 똥과 된장을 분별할 능력이 없는 그들도 불쌍한 희생자들이다.
그들을 포함하여, 만민이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꿔야 한다.
노무현의 가치인 사람사는 세상의 본질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이야, 정말 미안하다ㅠㅠ. 그러나 너의 할아버지는 정의의 투사가 되어
아직도 사람사는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 유쾌하게 전투 중이시다.
할아버지가 네게 원더우먼 흉내를 내보이시던 거, 기억하고 있니?
여기에 함께 놓아두려고 찾아보았는데 내 눈에 띄지 않는다.
너는 가지고 있겠지? 지금 할아버지는 원더우먼이고 수퍼맨이다.
네가 조금 더 자라면 할아버지가 지금 어떤 모습인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자라라. 거센 바람, 찬서리에도 너끈하게 견뎌낼 만큼 아주 튼튼해야 한다.
너는 그렇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의 너의 훌륭하신 할아버지가
사랑하던 바로 그 아이이기 때문이다. 알았지?)
*
정치에 대한 발언은 될 수 있는 대로 다시는 않으려 했다.
아무 소용도 없는 나 자신의 발싸심.
그다지 유쾌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살아가자.
그런 다짐도 했다.
그런데 세월호 의인으로 불리는 김관홍의 부음을 들은 뒤,
참 아픈 마음으로 그의 동영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양계초의 <방관자를 꾸짖노라>가 새삼스런 모습으로 되살아났고,
더불어 정말 의인이나 志士(지사)로 보이는 그를 위해,
또는 그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또는 그나 그와 같은 사람들을 기어코 죽이고야 마는 참 지옥 같은
이 세상을 위해 아무 소용없는 발싸심이라도 해봐야지 하는 마음이 되어
결국 이런 글에 대한 궁리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궁리는 비행 시간(환승 대기 포함) 15시간쯤이나 떨어져 있는
이곳에 와서까지 포기하지 못한 채 매달리고 있게 되었는데,
이야기가 길어지면(이미 예정보다 훨씬 더 길어졌지만) 전언의 효용이 떨어진다.
기왕 소리를 내기로 한 거, 유효한 고막에 가 닿도록 노력을 해보기는 해봐야지.
그래서 어떻게든 줄이려 애쓰고 있는데 그게 쉽지 않다.
더 하고 싶은 말 뚝, 끊어내고, 오늘 이 어설픈 논증 시도, 나의 결론을 적겠다.
친노 극렬분자는 물론 소수다.
그러나 이슬람이나 친박 극렬분자도 소수지만,
바로 그 소수에 의해 전체 조직의 성격은 규정된다.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시사인이나 김부겸에게 테러를 가한 사람은
소극적 동조자까지 포함한다 해도, 그들은 소수다.
그러나 그 테러는 소수의 그들에 의한 테러가 아니라 친노의 테러로 규정된다.
그래서 소수의 준동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수든, 다수든, 친노의 형편없는 경박과 단견과 천박(淺薄)의
구체적 상징인 친노 포비아를 사실적으로 불식하지 않을 경우,
친노는 진짜 대세가 될 수 없고,
친노가 주류일 수밖에 없는 2번당은
언제나 2등의 낙수(落水) 효과나 즐긴다고 즐기며,
영원히 2번당 노릇이나 하고 있을 수밖에 없고,
더불어 국민은 영원히 조폭보다 못한 1번당 치하에서
지옥 한국의 가련한 민초 노릇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고,
김관홍 같은 참 어이없는 희생자는 또 나올 수밖에 없다.
세월호 같은 원통한 일을 또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고,
1번당의 세상은 무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친노 포비아 불식인데, 그다지 어려운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아주 쉽다고, 아예 그렇게 말하겠다.
다음 행동강령 정도로 그 목표를 이룩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당연한 것일 부족함, 물론 안다. 그러나 부족함은 서로 메우면 된다.
우리가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1) 정의로운 척하지 말자. 썩은 사회에서 썩지 않은 인간은 쉽지 않다.
좀 덜 썪었다는 것이 조금 더 썪은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는 될 수 없다.
2) 문빠, 노빠를 자처하지 말자.
폐쇄적인 그 자처로 당신의 어쩐지 허약함을 드러내는 것 외에는 얻는 건 없다.
3)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노빠, 문빠 표시를 내지 말자.
배타적인 그 표시가당신을 고립시키는 것밖에는 얻는 건 역시 있을 수 없다.
4) 문재인대통령이니 하고 외치는 게 문재인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문재인을 욕보이는 짓이라는 것을 뼈에 새기자. 狂神은 瀆神이다.
개독된 기독, 가련한 그들을 스승으로 모시자.
5) <뭉치면 죽고 헤치면 산다>. 끼리끼리 패를 지어 놀지 말고,
흩어져 비노, 반노의 바다로 스며들어,
노무현의 가치를 말이 아닌 실천으로 보여주어 감동하게 하자.
6) 친노, 친문 비판에 대해 설령 틀린 것이라 할지라도 경청하고,
친노를 주제로 하는 토론에는 수동적이 되자.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설득력은 떨어진다. 말로는 설득되지 않는다.
말이 아닌, 당신의 속 깊은 행동과 실천으로 상대방을 설득하자.
당장 설득이 안 될 경우, 기다리자.
사람은 쉽사리 변하지 않고 역사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
7) 상대방은 결국은 함께 갈 동지라는 것을 인식하자.
배제는 공동선이 될 수 없다.
어떻게든 포용하여 하나 되는 것을 지향하자.
배제는 자해다. 어떻게든 포용해야 하고, 포용할 수 없는 대상은 없다.
설령 1번당이나 3번당의 골수라 할지라도,
그들에 대한 포용 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함께 할 수 있고,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은 사람사는 세상의 대전제다.
그러나 구체 절대 불가능도 있다. 그런 종자들은 확실하게 죽이자.
좋은 거 좋다는 미적지근은 죽도 될 수 없고, 밥도 될 수 없다.
필요한 만큼 독하자. 여우의 지혜와 사자의 용기를 익혀, 실천하자.
8) 서두르지 말자.
그들이 권력을 즐기고 있던 기간에 이미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개똥 신세가 된 이명박의 747이나 박근혜의 국민행복시대와는 달리,
친노의 가치, 또는 지향인 사람사는 세상은 사람 세상이 계속되는 한,
영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친노는 길게 보고, 멀리 갈 준비를 해야 한다.
*
김관홍. 당신
추모식장에서 당신 막내의 천진함은 노무현 추모식 제전에서
노무현의 손녀를 연상하게 하여 더 이프고, 더 미안했다.
노무현이 그랬듯이, 김관홍, 당신도 죽어 불사의 상징이 되어,
우선 나로 하여금 이렇게 움직이게 했다.
나의 청정 Haven으로 만든 이 블로그의 자기 소개글도 조금쯤이나마
전투적으로 바꾼 것도 당신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이다.
또 지게 된다 할지라도 싸워는 봐야지, 싸울 수 없다면 그런 흉내라도 내봐야지.
이상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 어쨌든 인간 종자로 태어났으니 말야.
그래서 이 발싸심을 또 시작했다.
물론 부족한 것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 더 공을 들였다.
당신을 위한 젯상에 진설하는 나의 제수이기 때문이다.
이 제단에는 박주민을 비롯하여,
나와는 그 시대적 존재 가치가 현격하게 다른
여러 사람의 눈물과 다짐과 약속도 있다.
그들의 그 눈물, 그 다짐, 그 약속이 헛된 게 아니리라, 믿는다.
나는 내세를 믿지 않지만, 만일 그런 게 있다면,
거기서 노무현을 찾아, 만나, 이쪽 세상 이야기하며 즐겁게 지내시기 바란다.
당신의 명복과 당신 유족의 평안을 함께 빈다.
[출처] 친노포비아 불식없이, 더민주당 미래없다|작성자 게으른 농부
퍼 옮긴이의 덧붙임 국제적 사기꾼으로 발돋음 해야 할 명박이는 국민의 실핏줄에 빨대를 꼽고 쪼옥~~쪽! 빨아데는"사기꾼의 신"으로 등극한다. (사기꾼의 신, 이명박의 747 = 7(칠)수 있는 4(사)기는 전부 7(칠)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