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3월28일 내 어깨에 얹어진 빛나는 소위 계급장은 청춘의 훈장이자 삶의 가장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그 해 춘삼월 나와 동기생 12명은 청량리역에서 전곡역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속에서 묘한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흙먼지를 자욱하게 뒤집어쓴 군용 트럭을 타고 도착한 20사단 62연대, 그리고 수색중대는 나의 첫 임지이자 생사고락을 함께 할 제3 수색소대원들 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 곳이다. 여러분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게 되어 매우 영광입니다. 우리에게 부여된 소대의 임무완수를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취임사에서 내뱉는 내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소대원들의 얼굴에는 앳된 티가 가시지 않아 있었다. 당시만 해도 중학교만 졸업하고 입대한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거나 중퇴한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월남전의 참화를 겪고 돌아온 선임하사와 분대장의 깊게 파인 눈에는 풋내기 소대장인 나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우리의 임무는 비무장지대(DMZ) 내에서의 수색및 매복작전이었다. 철책문이 열리고 비무장지대로 들어설 때면 대북방송과 대남방송 소리만이 정적을 깨울 뿐 사방은 기이할 정도로 적막하고 평화로웠다.
우거진 숲과 이름모를 온갖 기화요초들이 지천으로 피어 향기를 뿜어냈고 노루와 토끼, 멧돼지들이 거니는 동물의 왕국이었다. 지천에 널린 더덕을 캐고 늪이 된 옛 논 밭에서 논우렁이를 잡아와 소대원들과 나누워 먹던 기억은 팽팽한 긴장속에서 맛본 작은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 가면 같았다. 무성한 수풀 너머로 언제 적의 총구와 맞딱뜨릴지, 발 밑의 흙 아래에 어떤 지뢰가 숨어있는지 몰라 늘 긴장하며 작전을 펼쳤다. 방심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매복작전의 큰 적은 졸음이었다.
첩첩한 어둠속에서 바람소리, 풀벌레소리만 들리는 적막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새벽에 서리가 내릴 때쯤 GOP 철책문을 통과할 때마다 우리는 소리없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다. 빛이 있으면 짙은 그늘도 있는 법, 최전방의 나날은 늘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었다. 부임한지 열흘이 채 되지 않았던 봄비 내리던 새벽에 모 일병의 월북사건으로 안개비가 자욱히 깔린 DMZ를 샅샅이 뒤지며 수색했던 허탈감, 수색중대장이 부대로 복귀하는 가을 어느 날 어디선가 노루 한 마리가 갑자기 튀어나와 미처 피할 시간도 없이 지프차에 치이고 말았다.
우리가 다가가 보니 길가에 쓰러져 몸을 떨고 있었다. 다리가 부러져 옴싹달싹 못했다. 커다란 눈망울만 껌벅이며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두려움과 고통이 함께 어려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살가망은 없는데요. 결국 중대장은 노루를 부대로 가져갔다. 당시 전방 생활은 늘 궁핍했고 병사들은 고기 한 점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우리는 노루고기를 먹게 되었다. 그런데 손질을 하던 중 누군가 조용히 말했다. 새끼를 밴 어미입니다.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배를 가른 노루 안에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작은 생명이 있었다.
아무 말없이 서있던 병사들의 얼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우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 다음 날 아침이었다. 중대 마당에서 일조점호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울려퍼졌다. 꽝! 순간 얼어붙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중대 병기계가 크레모아를 점검하다 오폭사고를 낸 것이었다. 제대를 며칠 앞둔 고참 병장이었다. 사고 현장은 전쟁터처럼 참혹했다. 사람의 형체 조차 남지 않았고 겨울 점퍼 조각만 전깃줄에 걸려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부대는 순식간에 초상집이 되었다.
그리고 내 가슴에도 평생 지워지지 않는 멍을 남겼다. 노루를 잡아 먹으면 재수가 없다는 군대의 속설은 어쩌면 생명을 경시한 자에게 내리는 엄중한 경고였는지 모른다. 그 이후로 우리 중대에서는 아무도 노루 고기를 먹지 않았다. GP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또 다른 아픔이 있었다. 어느날 밤 HID 특수부대 요원을 군사분계선까지 안내하고 엄호했다. 무사히 돌아오면 서울의 찬가를 대북방송으로 틀어주겠다고 약속을 남기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복귀하기로 한 날 북한군 구역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고 HID 요원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살아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나와 연대 정보주임은 가슴을 쥐어 뜯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 모진 풍파속에서도 행운의 여신은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1년 여간의 소대장 재임 기간 동안 우리 소대는 북한공작원과 단 한번도 조우하지 않았고 단 한건의 인명사고도 없이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적같은 일인가. 이별의 날 나는 소대원들 앞에서 마지막 고별사를 남겼다. 그동안 소대장과 생사고락을 함께해 준 전우 여러분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남은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꼭 고향의 품으로 건강하게 돌아기를 바란다.
나는 환송의 도열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과 손을 맞잡으며 뜨거운 포옹을 하였다. 거칠고 투박했던 병사들 손의 감촉이 아직도 기억 난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그 시절의 청춘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다. 그러나 DMZ는 지금도 내 기억속에서 끝나지 않고 있다. 반세기가 훨씬 넘은 지루한 세월이 흘러 이제는 백발의 노년이 되었지만 연천의 흙먼지와 DMZ의 풀 냄새 그리고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목숨을 맡겼던 그 시절 소대원들의 얼굴은 여전히 내 기억속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음을 나는 늘 기억하며 감사하게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