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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7장
1. 다니엘이 받은 네 짐승의 환상(1-8)
우리는 쉽게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십자가를 기피하고,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흘리신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그 피의 능력을 의지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피의 능력을 의지하고 믿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의 것은, 그 어떤 것도 두렵지가 않다는 말이 됩니다.
곧 세상에서 어떤 힘든 상황에 빠져도, 그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피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이미 이 세상과는 상관없는,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상관이 없다는 것은,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복을 누리는 자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그것이 자기의 불행의 씨앗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삶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을 무서워하는 이유도, 결국 그 어려움 때문에, 자신의 행복이 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는 재미도 사라지고, 인생의 보람도 없어지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인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사람이 되는 것은, 앞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미 성취된 일입니다.
단지 우리는 그 사실을 어느 순간에, 주님의 피를 알게 됨으로서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를 믿는 순간, 하나님 나라가 그 마음에 자리하게 되고, 그 때부터 모든 소망은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을 하나님 나라와 연관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인생보다는, 이 땅에서의 인생을 더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땅에서의 인생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한 인생은, 세상이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모두 세상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이 세상의 것이 있어야, 내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한, 세상에서 벗어난 삶을 살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피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강한 힘을 원합니다. 돈이 사람들의 힘이고,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이 힘이고, 자녀가 출세하는 것도 힘입니다. 돈 없고 승진 못하고, 자녀가 잘되지 못하는 것을, 최고의 불행으로 여깁니다. 이런 이유로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없고 볼품없고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뒤를 따라간다는 것을 거부해버리고 맙니다. 말은 주님의 피를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은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현대 신앙인들의 주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모습이 보여지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본문은 다니엘이 꾼 꿈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이 꿈을 꾸었는데, 네 마리의 짐승이 등장하는 꿈입니다. 세 마리는 사자, 곰, 표범과 같은 모습인데, 마지막 네 번째는 열 뿔이 달린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는 짐승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이 꿈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하십니까? 세상이 처해 있는 형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짐승이 세상을 정복하고, 세상은 짐승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지금 세상의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꿈에 나타난 네 짐승은 모두가 강하고, 무서우며, 세상을 다스리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강한 힘을 소유하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짐승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짐승에게 있기 때문에, 짐승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짐승 이야기는 4장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이 짐승의 대우를 받는 이야기와 연결지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짐승의 대우를 받는 것은, 바벨론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큰 나라의 힘을 의지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힘은 그 어떤 힘도, 하나님에 의해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땅의 것을 의지하는 것이, 곧 짐승의 대우를 받는 이유였습니다. 결국 짐승의 속성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게 하고, 힘을 얻기 위해서, 인생을 살도록 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힘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이, 모두 짐승에 다스려지고 있는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자기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보려는 것이, 모두 짐승의 종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자기의 힘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이것이 짐승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9절부터 보면, 짐승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나라가, 인자 같은 이로 인해서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짐승의 나라가 제아무리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고, 보기에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국은 주님에 의해서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주님의 피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주님의 피를 믿고 의지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일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고, 세상에 타협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으며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복의 근원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아는 것으로, 이미 복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2. 두 권세(9-14)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고, 하나님 외에는 내 힘으로 삼는 것이 없는 것이라고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이것만큼은 여러분들이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일에 항상 동의하는가? 나는 하나님 외에는 내 힘으로 삼는 것이 없는가?’ 이것만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나는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스스로 고백하게 됩니다.
성도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에 대해서 가치를 두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그런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믿어왔고, 교회 일도 남들 못지 않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는 다른 사람보다 못하게 살아야 하느냐는 생각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 무엇이냐’는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피조물’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을 때, 인간은 피조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피조물은 자신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결정하고, 창조주에게 그 가치에 맞는 대우를 해줄 것을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피조물이라는 것은 창조주의 마음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할 때, 자신에 대한 가치를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에서 교회 일을 열심히 하고, 또는 장로와 권사 등을 교회의 일꾼이고 기둥이라고 말합니다. 직책과 열심에 의해서, 그 사람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교회는 달리 기둥이라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목사도 교회의 기둥이 아닙니다. 교회는 어느 특정 인물에 의해서, 유지되고 존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의 단체이지, 결코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교회는 결코 쇠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내걸고, 예배를 드리는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이 지켜주고 보호하신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그 어떤 가치도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멸망하시는 그 일까지도, 창조주께서 하시는 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꿈을 통하여, 세상은 멸망당한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꾼 네 마리의 짐승은 세상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 중에서 네 번째 짐승은 가장 강대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멸망해 버리신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멸망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일을 먼 나중의 일로만 여기기 때문에, 세상이 망한다는 것에 대해서 별 느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녁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 될 것 같습니까? 오늘 당장 세상이 멸망당해도, 전혀 아쉬운 마음없이 멸망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혹시 지금까지 자기가 열심히 살아온 세상의 것에 대해서, 아쉬워하는 것은 없습니까?
롯과 함께 소돔과 고모라에서 도망치던,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쉽다는 것입니다. 그 아쉬운 마음이, 지금 우리들의 마음으로 자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마음이 세상에 붙들려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멸망을 아는 자는, 세상에 붙들려 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멸망할 것이니까,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현실에 충실하면서 살아가지만, 단지 세상에 붙들리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자기를 살린다고 생각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 마음이, 그 나라와 그 의를 향해 있던 성도라면, 세상에 대해서 아쉬워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기독교인입니다.
11절 ‘그 때에 내가 작은 뿔이 말하는, 큰 목소리로 말미암아 주목하여 보는 사이에,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시체가 상한 바 되어, 타오르는 불에 던져졌으며’
옛적부터 계신 이가 짐승을 죽인다는 것은, 세상 나라를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것은, 내가 제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라는 것은 내가 있음으로 해서, 나라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라의 멸망은 곧 나의 멸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멸망하시겠다는 것은,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모두 멸망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도 선한 존재가 못되고, 선한 존재가 아닌데, 나에게 가치를 둔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올 때, 항상 죄인으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심판을 받은 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13-14절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12절에서는 짐승이 빼앗김을 당하는데, 14절에서는 인자 같은 이에게, 영원한 권세를 주신다고 합니다. 곧 빼앗김을 당하는 권세와 영원한 권세가 등장을 합니다.
빼앗김을 당하는 권세는 세상의 권세입니다. 지배하고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사람들은 이 권세를 얻기 위해서 힘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권세는 빼앗겨 버릴 권세라고 합니다.
반면에 영원한 권세는 지배하고 다스리는 권세가 아닙니다. 생명에 대한 권세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권세가 예수님께 있는 것입니다. 세상 권세를 믿지 말고, 예수님의 권세를 믿자는 것은, 세상권세에는 우리를 살리는 권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죽은 자도 살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죽은 자도 살리는 예수님의 권세를 믿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괜찮다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죽음을 겁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것을 겁내지 않습니다.
사라지고 빼앗겨 버릴 권세에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죽은 자도 살리는 영원한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분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성도라면 모두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왜 영원하지 않는 세상에 붙들려서 살아갑니까?
세상 나라가 멸망하는 것이, 먼 미래의 일로만 막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내가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에 붙들려 살았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지도 못하는 세상의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영원한 인자의 나라, 죽은 자도 살리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 나를 붙드시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산다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기 바랍니다.
3. 환상의 해석(15-28)
지난 시간에 세상에는 두 권세가 있는데, 하나는 빼앗기고 사라질 권세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권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권세는, 모두 다 짐승의 나라인 세상에서, 지배하고 다스리는데 필요한 권세이지만, 그것은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권세이고, 주님이 가지고 이 땅에 오실 권세가 영원한 권세인 것입니다.
그 권세를 바라보면서, 세상에 기대를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들이 성도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것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권세가 아니고, 오직 영원한 하나님 나라만을 바라보고 사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한가지 특징을 가지게 됩니다. 그 특징은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겁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자신의 앞으로 인생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자녀가 공부를 잘하지 못할 때, 불안해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자녀의 앞으로의 인생이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입니다. 세상에서 살고자 할 때, 자연히 세상이 요구하는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될 것이고, 그 요구조건을 갖추지 못할 때, 자연히 불안함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불안함은 남들보다 뒤떨어지고, 세상의 힘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함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성도들과 상관이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에게 이런 불안함이 있고, 염려가 있다면,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성도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배워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이 꿈을 꾸는데 네 짐승이 나오고, 그 짐승들은 강하고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짐승을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죽이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는데, 그 꿈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본문입니다. 다니엘의 꿈은 한마디로, 이 땅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해주는 꿈입니다.
17절부터 보면, 네 짐승은 네 왕인데, 큰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힘센 한 왕이 일어나서, 성도들을 박해하고 짓밟게 되는데, 그 기간이 한때, 두때, 반때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 왕을 이길 수 있는 분이 오셔서 심판을 하시는데, 그때 그 나라가 망하고, 영원한 나라가 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니엘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장래 일은, ‘너는 장차 핍박을 받는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그것을 이기고 승리하시는 분이 오셔서, 그 나라를 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미 믿음을 거부하고 박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에 의해서, 이 땅은 거짓된 교회로 가득 차게 되었고, 그 거짓된 교회에 의해서 참된 성도들이, 무시당하고 조롱 받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굳이 세상을, 이렇게 믿음을 지키기 힘든 환경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속에서도,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성도를 통해서,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구분은 자기 백성을 통해서,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심판하는 구분입니다. 그 힘든 때가 한때, 두때, 반때 동안, 계속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한때, 두때, 반때란 무엇입니까? 이것을 합하면 세때 반이 됩니다. 세때 반의 의미는 요한 계시록 11:8-9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그리고 11절에 “삼일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한때, 두때, 반때란 주님이 당하셨던 십자가의 수난을, 그대로 이어 받는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주님이 당하신 그 수난의 길에, 동참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일반 후에는 모든 고통이 끝나고, 하나님의 음성속에 하늘에 올라간다는 것이, 곧 성도에게 주어진 장래일입니다.
26-27절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
본문에서도 심판이 시작되면, 세상 권세는 빼앗기고, 천하 나라의 위세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붙인바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장래입니다. 우리는 이 장래 일을 분명히 알고,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심판 속에 들어갈 운명입니다. 영원히 남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했던 성도들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세상을 내가 살아가야 할 장소가 아니라, 심판의 장소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불안하다는 것은 인간이 죄인된 결과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반응은 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디 있느냐?’고 찾으실 때,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최초로 두려움을 가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아담의 두려움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곧 장래 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이제 아담의 장래는 그 여자의 후손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그 아내를 하와, 곧 생명이라고 이름하였던 것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장래가 여자의 후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후손을 기대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것은, 세상에서 번성하고 크게 되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그것이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가 바라볼 것은 생명 되신 예수님입니다. 세상의 권력이, 돈이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온천하를 주고도, 생명과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면, 세상을 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며 살기 바랍니다. 세상은 심판이고, 영원한 것은 주님의 나라인 것을 분명히 하고, 천국을 보장받은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