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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서 난 아브라함의 자손. 信仰によって生きるアブラハムの子孫。( 2024년 9월 22일 주일예배)
본문 갈 3:7~14
갈 3:7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8 또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것을 성경은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9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10 율법의 행위에 근거하여 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주아래에 있습니다. 기록된 바"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계속하여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에 있다" 하였습니다. 11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그 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14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7. だから、信仰によって生きる人々こそ、アブラハムの子であるとわきまえなさい。8. 聖書は、神が異邦人を信仰によって義となさることを見越して、「あなたのゆえに異邦人は皆祝福される」という福音をアブラハムに予告しました。9. それで、信仰によって生きる人々は、信仰の人アブラハムと共に祝福されています。10. 律法の実行に頼る者はだれでも、呪われています。「律法の書に書かれているすべての事を絶えず守らない者は皆、呪わ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からです。11. 律法によってはだれも神の御前で義とされないことは、明らかです。なぜなら、「正しい者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からです。12. 律法は、信仰をよりどころとしていません。「律法の定めを果たす者は、その定めによって生きる」のです。13. キリストは、わたしたちのために呪いとなって、わたしたちを律法の呪いから贖い出してくださいました。「木にかけられた者は皆呪わ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からです。14. それは、アブラハムに与えられた祝福が、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異邦人に及ぶためであり、また、わたしたちが、約束された”霊”を信仰によって受けるためでした。
지난 주일에는 인생에서의 어리석음은 율법에 얽매이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주님의 말씀을 함께 들었습니다. 우리의 참된 지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서,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 안에 성령님의 권능과 능력으로 모든 일상과 인생 전체에 영원한 축복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영생하도록 충만한 지혜와 든든함으로 기쁘고 행복한 일상을 마음껏 누리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는 주님의 음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의 편지이지만,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시고, 지혜롭게 하시고, 또한 친히 말씀하셔서 우리에게 들려 주신 약속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모든 성경은 직접적으로는 인간들이 대필하였지만, 성령님의 감동을 통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이지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따라서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그 약속에 귀를 기울이고, 눈빛을 맞춰야 하는 것이지요. 성경을 읽으면서도, 혹은 예배와 찬송을 드리면서도 주님께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그분에게 시선을 맞추지도 않는다면 얼마나 세월을 낭비하고 헛되이 흘려 보내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설교를 많이 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대면하고, 소리내어 읊조리며 내 뼈와 살과 귀와 음성으로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예배는 사람의 설교를 들으러 오는 것이 최종목적이 아니라, 첫 시간부터 마지막 축도까지 예배하기로 구별한 이 장소에 자기 몸을 가져다 놓고 동참하는 것이 진정한 목적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일상을 믿음으로 살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하는 이의 마땅한 반응인 것이지요. 말씀을 읽기 위해서 일상 중에 일부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찬송과 예배하기 위해서 일주일의 스케줄과 일과를 조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이 변화되고, 존재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빛의 존재로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 5:14)
또한 빛의 자녀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8)
왜냐하면 육신의 욕망을 따라, 육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저주스러운 삶에서 완전히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렇게 해방해 주셨는지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바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오늘 본문은 그냥 읽으면 한 번에 감동이 오기는 쉽지 않는 구절입니다. 조금은 논리적인 판단이 필요하지요.
지난 주일에 읽었던 본문의 마지막 절에는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을까요? 6절을 새번역으로(자기 성경을 보시며)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운 일로 여겨 주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갈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을 의로운 일이라고 여기셨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로운 행실을 통해, 혹은 노력과 실력을 통해 의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태도와 모습을 보시고 인정하셔서 의인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주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 하나님의 약속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자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하신다는 약속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의 육신을 통해 태어나면 자동으로 후손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별된 선민의식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특권이라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이라는 민족의 정체성을 구별해 주기 위해 율법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곧 유대민족의 정체성, 즉 그들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지요. 이방인과 구별된 선민 이스라엘이라는 의식으로 하나님의 전 인류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위대한 구원의 약속을 제멋대로 왜곡하고 축소해 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하심으로 율법이 단지 유대민족의 고유한 정체성이나 자존감을 높이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영생하는 자의 자격조건을 해결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10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서 살려는 자는 누구나 저주 아래에 있다고 하셨지요. 적법하게 활용되는 율법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지만, 그 율법 자체에 휘둘리며 사는 것은 저주 아래에 사는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을 향해서 얕은 내리막길을 걷는 것과 같은 삶이지요.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이라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시대의 상식처럼 뿌리내리고 있는 자기의 존재감을 높이는 노력이 율법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적인 노력과 실력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 기분을 좋게 하며, 자기의 행복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모든 시대정신과 유행과 지식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자신의 행복과 축복을 바라며 사는 것 자체를 단순하게 죄악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육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행복과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여기며 사는 것이 곧 저주스러운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원하는 행복을 추구하느라 누군가에게 혹은 어딘가에 불행과 고통을 전가하는 것이 육신의 방법이기 때문이지요.
육신적이고 사악한 행복은 희소한 것을 얻었을 때 좋아지는 기분을 추구합니다. 다시 말해 남들은 갖지 못한 것을 소유하거나, 누림으로 기뻐하고 재미있어 하는 것이지요.
소위 명품이라는 것은 원래 장인의 손길과 튼튼하고 좋은 재질로 만든 제품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명품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작품이라고 하는데요. 그런 명품을 갖기 원하는 이들 중에는 그 물건을 사용함으로 얻는 유익함보다는, 단지 남들이 갖지 않은 것을 갖고 있다는 즐거움으로 쾌락을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쾌락을 욕망하는 것이 곧 저주 아래 놓이는 것이지요. (제가 명품을 좋아하거나 좋게 평가하는 이들의 생각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명품에 대한 의식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런 사악하고 저주스런 인식은 존재합니다. 마치 유대민족이 율법을 신봉하듯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탐욕의 시대정신이 율법처럼 우리를 저주 아래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저주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희생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시대정신의 저주에서, 상식과 유행이라고 포장된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복을 받았다는 것은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적 영역이 유대인에서 이방인에까지 확장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조상 대대로 받은 율법을 지킨다고 우기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과 자존심을 내세우던 그릇된 상식을 무너뜨리신 약속입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육신적인 노력이나 혹은 재력과 실력 등으로 얻은 것들로만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고, 즐겁게 하며, 자존심을 세울 있다는 착각을 무너뜨리셨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축복이란... 율법처럼, 어떤 법칙처럼 세워져서 자신을 얽매는 시대의 상식과 유행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런 율법, 혹은 가치관이 자신을 얽매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저주 아래에 산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죄 가운데 사는 것을 즐겁고 재미 있어 하고, 심지어 옳다고 하며 변명하기까지 하는 것이지요.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롬1:1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1:28)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1:32)
우리가 사는 현실의 시대정신과 올바른 가치관, 그리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모든 인식들은 그 자체로는 죄가 아닙니다. 율법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사는 우리의 거룩함을 지킬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사람들이 율법을 통해 자기를 과시하고, 이기적인 방법으로 악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가치관과 상식도 사람들의 탐욕적이며, 쾌락에 젖은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오용되는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축복을 얻는다는 것을 단순히 육신적인 즐거움과 행복, 혹은 성공적인 인생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는 것으로 축소할 수 없는 것이지요. 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개인적으로 들려 주시고 말씀하셨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내가 바로 그 성취의 열매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2-3)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금 완성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고 순종하여 이루어진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을 받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로 얻고 누리는 복은 자신의 힘으로 쟁취하고 얻어내야 할 축복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이끌어 가시며 완성하시는 축복입니다. 나는 그저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선물처럼 주어지는 일상을 통해 그 축복을 발견하고 받아서 누리는 기쁨을 실감 나게 체감하며 사는 것이지요.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 것은 현실적인 유익의 유무나 혹은 많고 적음으로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어떤 괴로움과 답답함에도 가장 먼저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한 주간의 첫날을 구별하여 예배하는 순종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어지는 모든 삶에서 주님께서 하시고 계시는 일에 주목하는 것이지요. 나는 그저 주님께서 맡기신 일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공부하고, 만나고, 먹고, 마시고 일상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1)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그 교리가 주는 유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서 살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는 것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영생하는 존재의 가치를 회복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더 이상 시대의 정신이나 상식, 그리고 유행이 규정하는 정도의 가치를 가친 인간이기를 거절해도 좋다는 뜻입니다. 이 땅의 가치가 폭풍처럼 몰아쳐 와도 주님과 함께 타고 있는 믿음의 방주에서 안심해도 좋다는 뜻이지요. 저와 여러분이 이런 기막히게 기쁘고 가슴 뛰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을 믿고 기억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하십시오. 족보를 산 것도 아니고, 육신의 유전자를 교환하거나, 아니면 육체적인 무엇인가를 이식 받은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의 율법을 모두 완수했기 때문도 아니지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믿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나의 축복이고, 이 시대의 율법과도 같은 상식이나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는 든든하고 견고한 믿음의 방주에 저와 여러분이 함께 타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말씀과 기도, 그리고 한 주간의 첫날에 예배를 온전히 지킨 후, 선물처럼 주어지는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4시간 주님의 임재 가운데 예수님과 동행함으로 행복해하고 기뻐하며 안심과 평강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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