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에 잠든 고려혼
고려시대 부산 해운대는 어떤 지역이었을까? 고려왕조의 패망과 더불어 많은 공신들이 숨어든 곳이 부산 지역이다. 그리고 왜구의 끊임없는 노략질에 시달린 지역이기도 하다. 고려 공신들이 은거한 기록은 석대 지역을 중심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또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할 때 최영 장군이 부산포 일대에서 왜구를 섬멸하고 격퇴했다. 그래서 감만(戡灣-오랑캐를 이기다)마을에 무민사(武愍祠)를 지어 최영 장군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매년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 고려시대 왕족급 무덤과 그와 유사한 고분군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해운대 장산 일원에서 등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유적들은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지난 3월 18일 경북대 박천수 박물관장팀이 장산 물망골 무덤의 한 곳을 고려시대 것으로 판명함에 따라 이를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
박 관장이 밝혀낸 고려시대 무덤의 양식과 유사한 무덤을 장산 일원 탐사를 통해 세 곳의 장소에서 이미 찾은 바 있다. 한 곳은 반송여중 옆 석대산에 문인석이 양쪽으로 나열된 고분군이며, 또 다른 곳은 반여동 뒷산 두 곳의 고분군이다. 석대산에 있는 고분군은 고분의 배치가 일렬로 나란히 4구가 조성되어 있으며, 그중 한 곳에 문인석이 고분을 호위하고 있다. 문인석 역시 형태상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 시급한 유적관리 및 연구
지난 2021년 3월 11일, 옥숙표 장산습지보존위원장은 이 고분군과 문인석을 해운대구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고 해운대구청에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관리조차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문인석은 그 자체만으로도 문화재급이지만 문인석 하나가 품고 있는 미스터리가 있다. 고분에서 오른쪽에 서 있는 문인석의 목이 반듯하게 잘려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목과 어깨 부분 각각 세 곳에 구멍을 파서 이은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여기에 대해 문인석을 만들거나 운반하는 과정에서 목이 떨어져 나가자 구멍을 파고 서로이었다는 추측과, 애초부터 목과 몸통 부분을 잘랐다가 어떤 의미(?)로 다시 이어 붙였다는 등의 추측이 있다. 목이 떨어져 나간 단면이 너무 매끈한 점을 볼 때 정황상 문인석이 사고로 목이 부러진 것은 아니라고 추측이 된다. 그렇다면 인위적으로 목과 몸통을 분리한 다음 구멍을 내어 연결했다는 것인데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따로 언급해 보고자 한다.
반여동 고분군은 전형적인 고려시대 무덤 형태를 띠고 있다. 돌이 봉분을 에워싸고 돌담이 무덤 둘레를 휘감고 있다. 초록공원 위 고분군의 경우 고분군 주변이 더 연구가치가 높아 보인다. 아주 오래전에 고분군 옆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큰 돌탑 두 기(基)와, 전체 판독이 힘든 대형 자연형 비석이 바위 위에 떡하니 서 있다. 그리고 태산 같은 바위와 그 아래 천연동굴은 그 자체만 해도 주변을 신성스럽게 하고 있다.
◇ 유적이 몰고 올 고려시대 스토리
문제는 이런 고분의 덩치가 많이 크다는 점이다. 장산 물망골 고려시대 고분이 “규모상 최소한 왕족급의 무덤으로 본다”는 박 관장의 의견대로라면 석대산의 문인석이 놓인 고분은 물망골 무덤과 최소한 동급이거나 더 커 무덤 속 인물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반여동 고분군 역시 규모가 대단하다. 특히 반여 중리마을 뒷산의 고려시대 고분은 석축의 길이가 40여 미터에 달하는 압도적인 규모로 그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 해운대 지역으로 어떤 왕족급 인물이 찾아든 것일까? 혹 역사에 드러나지 않고 있는 인물이라면 그가 가져올 스토리가 사뭇 궁금하다.
앞으로 이들 고분군을 연구하면 고려시대 부산 해운대 지역에 대한 역사 및 지정학적 중요도까지 밝혀낼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당장이라도 이들 고분군과 주변 석물에 대한 관리와 연구가 시급해 보인다.
/ 예성탁 발행 ·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