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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 하나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에 서두에 한 할아버지가
어떤 할머니를 찾아갑니다.
배경은 요양원이었어요.
노인성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책 하나를 읽어줍니다.
책의 주인공인 노아는 시골에 사는
멋진 청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여름을 보내려고 온
부잣집 소녀인 랠리를 만나 첫눈에 반합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지요.
그런데 랠리의 부모님은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노아와의 만남을 싫어했습니다.
결국 둘은 울면서 이별을 맞이합니다.
7년이 흐르고 우연히 신문에서
노아의 소식을 본 랠리는 그를 찾아갑니다.
노아는 7년 동안 한순간도 그녀를 잊지 않았습니다.
랠리 역시 새로운 남자와 교제도 했지만,
노아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만난 둘은 자신들 안에 있었던 사랑의 감정이
다시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행복한 가정을 꾸립니다.
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할머니가 갑자기
할아버지를 뚫어 저라 쳐다봅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This is our story.(이건 우리 이야기에요.)
노아! 당신이군요!”
할아버지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합니다.
“맞아요. 랠리. 사랑하는 여보.”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지워졌던 기억이
사랑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온 거죠.
하지만 몇 분도 되지 않아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자신을 여보라고 부르고 있고,
왜 껴안으려고 하냐며 소리칩니다.
할아버지를 밀치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죠.
할아버지는 슬픈 표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아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할머니는 치매에 걸려서 자신이 누군지,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조차 몰랐어요.
그래서 매일 찾아오는 할아버지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했었죠.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할머니를 찾아옵니다.
심지어 자신을 밀쳐도 기다려줍니다.
저는 이 모습이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은 매일 주님을 잊고 지내는 저에게
찾아오시죠.
주님이 들려주시는
그분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이게 내 이야기구나’란 생각에
주님이 누군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주님을 잊고
제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게
치매에 걸린 랠리 할머니와
제가 갖는 공통점이었어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주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이 이렇게 크고 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주길 원하십니다.
이 시간이 바로 그런 시간이에요.
우리 모두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의 사랑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시면 어떨까요?
바로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을 통해서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사복음서 중에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조금 달라요.
앞선 세 개를 ‘공관 복음’,
즉 같은 관점으로 기록된 복음서라고 합니다.
공관 복음을 보면 비슷한 사건과 비슷한 순서로
기록되어 있어요.
반면, 요한복음은 특이하게도
공관 복음이 다루지 않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순서도 공관 복음과 약간 차이가 있어요.
요한복음의 저자로 알려진 ‘사도 요한’은
A.D. 80-90년 경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다른 복음서가 이미 다 기록된 후에 쓴 거죠.
그렇다면 요한은 왜 다른 복음서와 달리
늦게 기록한 것일까요?
요한복음의 기록 이유가
요한복음 20장 31절에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을 왜 기록했다고 합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고,
‘그 이름(예수)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밝힙니다.
초대교회가 세워지면서 많은 이단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신학적 정립을 위해
요한복음을 쓴 겁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도우려고
성령의 감동으로 쓴 게 요한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 실까요?
오늘 본문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가봅시다.
1) 예수님은 창조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요한복음의 서두인 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입니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어디서 본 말씀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창세기 1장 1절과 비슷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하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계셨다는 동사는 ‘미완료 시제’로 쓰였어요.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 되어지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원어적으로 해석하면
‘태초에 말씀이 계셔왔다.’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셔왔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예수 그리스도)이 어떤 일을 했는지 봅시다.
3절을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이 지어졌습니다.
주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인격적을 만났던 곳은
한 기도원이었습니다.
펑펑 울며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원을 내려오는데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가만히 있던 나무와 풀들이
좌우로 흔들리며 찬양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환상을 본 건 아니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풀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던 거죠.
그때 제 마음에 울리는 찬양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특히 2절을 계속 되뇌었는데요.
“숲 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여러분,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살아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 빛으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우리 본문 9-11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요한복음 1:9-11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은 참 빛이십니다.
그리고 그 빛이신 주님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모두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왜 오셨나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게 요한복음 3장 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세상은 그를 알지도 못했고,
심지어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건 쉽게 말하면 이와 같습니다.
어떤 가장이 집에 왔는데
자녀들이 아빠를 모른 채하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아무도 아빠가 온 걸 환영하지 않아요.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떠셨을 것 같나요?
얼마 전 이런 내용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고독사하는 노인들이 많아졌다’는 겁니다.
예전 같으면 자주 찾아뵙기도 할 텐데
그러지 못하니 가끔씩 연락만 드리는 겁니다.
그러다 이런 저런 이유로 연락도 뜸해지고,
결국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어르신들이
많아진 겁니다.
우리는 이런 뉴스를 보면서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 참 딱하네.’
‘자식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다.
어떻게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한테
저럴 수 있냐?’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향해 이렇게 하고 있진 않습니까?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오셨으나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주님을 모른 채 하는 건 아닙니까?
차가운 바람이 부는 문밖에
주님을 두고 계신 적은 없습니까?
저는 설교를 준비하며
이 부분에서 많이 회개했습니다.
주님은 매일 저에게 찾아오셔서
사랑의 스토리를 들려주시길 원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자꾸 주님을 밀어내고 있었죠.
‘몸이 아파요. 지금 바빠요. 힘들어요.’
라면서 말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이 사실을 깨닫자 눈물이 났습니다.
너무 죄송했어요.
여러분, 주님은 어둠 속에
신음하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있더라도 찾아오십니다.
저와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모태 신앙인으로 자라왔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위해 작곡자로
평생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음악을 공부합니다.
음대에 합격하고 원하는 찬양팀에도 들어갑니다.
세상 가요계에서 작업도 했지만,
다시 소명을 따라 CCM 앨범을 제작합니다.
피땀을 흘려가며 준비한 1집이 나왔는데
처참하게 망했습니다.
추운 겨울, 지친 마음으로
작업실에 앉아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노력이 꺾이자
원망만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버렸어.
내가 이렇게 노력했는데 주님은 나를 버렸어.’
이때 갑자기 요한복음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나서
성경을 열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는데 한 말씀에 꽂혔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보혜사 성령님이 오신다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죠.
그 자리에서 펑펑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온 노래가 우리가 잘 아는
<성령이 오셨네>입니다.
이분은 작곡가 김도현씨 입니다.
그 후 삶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허무한 인생에 성령이 오시자 바뀌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우릴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분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이 은혜를 깊이 깨닫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배웠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 함께 본문 12,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2, 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영접한다는 말은 전(全)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로마의 황제도, 헤롯 대왕도,
성경 연구가였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예수님을 마음으로
모시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알긴 하지만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인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4절 이하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편지가 나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이런 자들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긴 겁니다.
영적으로 ‘이 정도면 괜찮아.
난 좋은(Good) 신앙인이야.’라고
만족하며 사는 그들에게 주님이 경고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19, 20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요한계시록 3:19, 20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길 원하십니다.
문을 여는 방법은 ‘회개’입니다.
지난날 인생의 주인이 ‘내’가 되어
어둠 속에 살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문 앞에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을 보십시오.
그분의 노크 소리가 들리십니까?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면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어떤 축복이 있을까요?
영생을 얻습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죠.
이 땅에서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에겐 천국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부자는 평생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죽고 나서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 불에 떨어집니다.
포도주를 물처럼 먹던 그에게
이젠 물 한 방울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나사로는 거지로 살면서
평생 가난하고 힘들게 보냈습니다.
아무도 그를 품어주지 않았던 인생이었지만,
죽고 나니 천국에서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재의 삶에 지치고 힘드십니까?
남들은 저렇게 잘 나가는데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인 것 같은지 불안하십니까?
코로나로 인해 경제가 어려워지고,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이 극심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오히려 천국을 기업으로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날을
기대하며 살길 축복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는 두렵지 않습니다.
인생의 풍파가 와도 겁낼 게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가 쓴 시 시편 23편을 보면 그렇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동시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지키고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딸이
최신형 스마트폰을 친구에게
자랑하며 보여줬습니다.
친구는 이리저리 만지다가 그만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뜨렸고
액정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저라면 당장 친구에게 뭐라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다’며 스마트폰을 챙겨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빠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에서 욕먹고
얼굴에 금이 가는 일이 생긴다고
좌절하거나 분노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아빠 믿고 담대하죠.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아빠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자신을 던지셨어.’
주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 펄펄 끓는 용광로에도
몸을 던지실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길 바랍니다.
저에게 이번 한주는 전쟁과도 같았습니다.
가족들 모두가 코로나에 감염되어
격리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열과 함께 목이 부어서
침도 삼키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격리 둘째 날 새벽 아들이 칭얼거려서
만져봤더니 몸이 너무 뜨거운 겁니다.
체온계로 재어보니 40.9도였습니다.
깜짝 놀란 저는 곧바로 일어나
물수건을 챙겼습니다.
같은 증상으로 고생하던 아내 역시
부리나케 해열제를 먹였습니다.
아픈 아들이 끙끙거리는데
칼로 찌르는 것 같은 목의 통증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아프더라도
아들이 치유되길 기도했습니다.
2, 3일간 아들의 열이 내리기까지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의 열이 내리길 기도하며
옆에서 계속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얼굴이 퉁퉁 부었고,
목도 더 아팠습니다.
그래도 아들이 건강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견딜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아니 이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불 가운데 지날 때도
함께하신다고 약속했습니다.
물이 우리를 침몰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것도
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사랑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이 찢기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지만
이 땅에 있는 자신의 자녀들이
죄로 인해 죽어가는 것을 위해
모든 아픔을 감내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얼마나 반응하며 살고 있습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코로나 증세가 점점 심해져서
병원에 연락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더군요.
“원래 점점 아프다가
제일 아픈 정점을 찍고 나면 괜찮아집니다.”
여러분, 코로나도 언젠가 지나갑니다.
인생의 어둠의 시기도 그렇습니다.
가장 어두운 시간이 지금인가요?
가정의 불화로 고통 속에 있습니까?
건강의 악화로 몸과 마음이 지쳤나요?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계십니까?
어둠이 짙어질수록
새벽을 알리는 수탁의 울음소리가
가까이 들립니다.
새벽이 오면 동물들은 두 종류로 나뉩니다.
박쥐와 같은 야행성 동물은
다시 어두컴컴한 동굴로 돌아갑니다.
반면, 독수리와 같은 주행성 동물은
다시 비상하려고 날개에 시동을 겁니다.
이처럼 어둠에 있는 자녀는
빛이 와도 어둠으로 달려갑니다.
좌절과 낙심,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반면, 빛의 자녀들은 여명을 비취는 때를 따라
날아갈 준비를 합니다.
빛이신 주님이 오시면
우리의 인생을 더 힘찬 도약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영생의 축복을 누리며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인생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영통 사랑제일교회 | 2022년 3월 27일 함요셉 목사님의 주일 예배 설교 영상 입니다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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