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3월 26일, 이 날은 꽃샘추위도 아니면서 심한 바람떨이와 함께 비가 내렸다. 나는, 내 기분처럼 구질구질한 비를 맞으며, 행사장인 '안중근 의사 기념관'으로 들어가 방명록에 서명하고, 식장으로 들어섰다. 어둠컴컴한 실내에서 누군가가 지정석이 있다며, 자리를 안내했다. "와룡매환국식( 臥龍梅還國式)" 긴 문장으로 된 현수막이 안중근 의사 사진 위로 길게 걸려 있었다. 나는 길게 느껴지는 현수막의 글을 거듭 읽으면서 20년이 넘는 와룡매와의 긴 인연을 반추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도 눈앞에 다가온 추도식전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날은, 안중근 의사 89주기 추도식전이었다.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비롯한 3군의 장성들과 관계 장관 등이 참석하고, 일본에서도 와룡매를 봉납(捧納)하러 온 여남은 명의 스님들과 관계자 30여 명의 '봉납단'이 엄숙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안중근 의사 89주년 추도식'과 '臥龍梅還國式'이란 식전 분위가가, 물론 비 때문이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비 탓만은 아닌 다른 이유로 아주 음산하게 다가왔다. 실내 조명에 익숙해지자, 옆자리에 않아 있는 일본인들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 중에서도 대림사의 사이또 주지 스님과 가노 변호사를 알른 알아볼 수 있었다. 먼저 실내에 있었던 그들은 밖에서 들어오는 나를 벌써부터 알고 있었을텐 데도 안 체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나라에 찾아온 손님이니, 내가 먼저 아는 체를 하는 것이 도리였다. 나의 인사를 받는 사이또 주지스님의 안색(顔色)이 묘하게 일그러지면서 굳어갔다. 나는 곧 다시로가즈이(田代和生)가 지은 [바꿔치기하여 쓴 국서(國書)]라는 책 생각이 났다. 일본인 고야마(小山)한테서 선물 받은 책이었다.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16세기의 역사 사실을 일본에서는 '문록(文祿)의 난(亂)'이라 한다. 일본 천황제의 연호인 문록년에 조선인이 일으킨 난리라는 뜻이다. 또 다른 말로는 조선정벌(朝鮮征伐)이라고도 하는데, 이런 표현의 용어 사용은, 우리가 한일합방이라는 19세기말의 역사 사실이 '조선진출'이라는 말로 '발전' 하기도 한다. 같은 역사 사실에 이름 붙이기를 달리 하는 것은 그렇다 할 수 있지만, 국서를 바꿔치기 하여 외교활동을 한 일본의 과거는, 현대 일본인의 안목으로는 부끄럽고 몰염치한 짓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의 국서를 바꿔치기 하여, 국서가 조선에 오면 일본 왕이 조선국왕께 올리는 글이 되고, 일본에 가면 조선 국왕이 일본 황제께 드리는 글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는 별로 알려진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인들이 조상의 부끄러운 과거사임을 알고 그 동안 묻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로라는 일본인이, 국서를 바꿔치기 한 대마도의 중 현소(玄蘇)이야기를 굳이 책으로 낸 이유도 이런 것일 게다. 1990년 2월, 나는 당시 서울대학교 부설 재외국민교육원의 교육연구사로 일본국 센다이(仙台)시에 있는 한국교육원에 파견되었다. 일본 정부는. 그 동안에 인구 60여만 명쯤 되던 농공(農工)도시 센다이시를 광역화(廣域化)하여 인구 100만 도시인 정령시(政令市)로 승격된 다테마사무네(伊達政宗)의 땅에 파견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총련과의 세력다툼이 한창이던 1960년대부터 이곳에 센다이 한국총영사관을 두고, 소위 동북(東北)지방이라고 하는 그 관할하의 6개 현 중에서 5개 현에만 한국교육원을 두고, 한국어 교육을 중심으로 한 교육. 문화업무를 맡게 하였다. 그런데, 내가 센다이시에 부임하였을 때는 이미 두 현의 교육원을 폐하고, 센다이한국교육원에서 1정령시 3현을 맡도록 하고 있었다. 동북지방이란 이름은, 일본 4도(本州, 北海道, 四國, 九州)중 가장 큰 섬인 혼슈(本州)의 동북지방에 속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관동(關東), 오오사카(大版)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관서(關西)라 하는 식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분류 속에서의 동북지역이란 의미는, 일본 속의 원시지역에 가까운 미문명 지역의 대명사였다. 미문명의 땅인 만큼 그 나름의 일본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 있었으며, 또 400여 년간 세습되어 온 '다테(伊達)문화'가 살아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동북지방은 일본 속에서도 한국문화와 가장 먼 거리에 놓여 있는 듯한 인상(印象)이 상속(相續)되어 오고 있었다. 나는 부임하자마자 내 관할을 점검하면서 일본의 명승지인 '일본의 3경'으로 유명하다는 마쓰시마(松都)가 이삼십 킬로 되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쓰시마(松都), 인천 앞 바다에도 있는 '송도'가 내 사무실의 주변에 있고, 태평양을 만(灣)으로 한 마쓰시마에는, 부산 오륙도(五六島)의 섬 숫자가 다섯에서 여섯으로 변하듯이 일이백(一二百)의 섬이 오락가락하는 듯이 떠 있고, 섬에는 소나무가 전설처럼 돋아 있어 그것을 송도절경(絶景)이라 한다 하였다. 마쓰시마에는 즈이간지(瑞嚴寺)라는 절이 있었다. 마쓰시마 해안의 번화가에서 산 쪽으로 삼백여 미터를 들어가면, 이백여 미터의 삼도(杉道)가 끝난 곳에 절의 경내(境內).외(外)를 가르는 담장이 있고, 그 담을 끊어 일주문(一柱門)을 만들었는데, 일주문 지붕 아래에는 "瑞嚴圖福禪寺'라는 현판(懸板)이 달려 있다. 일주문을 들어선 곳에 정면으로 버티고 들어앉은 본당(本堂) 건물은 채색이 없어 아주 허름해 보인다. 일본에서는, 최고 장군인 도쿠가와를 안치한 도오쇼오구우(東照宮)보다 지위가 아래인 신사나 절에는 거의 채색(彩色)을 하지 않는다. 즈이간지도 그런 이유로 원목 그대로의 모습이어서 외견상으로는 허름해 보이지만, 꽤 큰 규모를 자랑하는 국보(國寶)이다. 이 절의 중심 신주(神主)는, 동북지방의 영주(領主)인 다테(伊達)이다. 다테를 안치하여 대찰(大刹)이 되었고, 이런 거물이 들어오게 되면 다른 신주는 거의 존재 가치를 잃게 된다. 본당 마당은 삼백여 평쯤 된다. 이렇게 좁은 마당 귀를 채운 신목( 神木)은 당연히 즈이간지의 명물이 될 수밖에 없다. 신목이란, 마당 양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홍. 백매의 와룡매를 이름한다. 와룡매는, 여러 개의 보호목으로 떠받들려 그 이름처럼 누워있지도 못하고 서 있어야 하지만, 400년이나 되었다는 노목으로의 위세와 함께 참배(參拜)객을 압도한다. 한국인에게는, 400년간 임진왜란 때의 왜장을 지키고 있다는 선입감이 있을 것이고, 일본인에게는 라이벌 국가인 한반도의 명물이 지켜주는 그들의 영웅 다테(伊達)가 더더욱 존경스러워지는 만족감을 얻을 것이다. 와룡매는, 잎이 무성한 잎철이거나 꽃철일 때는 모라도 나목(裸木)으로 있을 때 보게 된다면 더욱 징그러운 인상을 떨칠 수 없다. 줄기와 가지의 껍질이 부풀고 터져서 온통 벗겨진 데다가 언제나 습한 기후 탓으로 짓물러 있다. 한국의 사군자이던 매화나무가, 임진왜란의 왜장을 지키느라고 껍질마저 짓물러 버렸다는 사실이 처참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곧 와룡매에 대한 감상을 수필로 정리하여 센다이스를 중심으로 문학활동을 하고 있는 [일요수필(日曜隨筆)]에 기고하기로 하고, 그때 마침 한국의 수원농림학교(현 수원농생명과학고등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게 된 가미농고(加美農高)의 니까이도 지카라(二階堂力)교장에게 다음의 원고를 보여주었다. "가지가 용처럼 뻗어 가는 매화나무가 있다. 와룡매라 한다. 내가 와룡매란 이름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서울올림픽이 열리게 되어 해외에서의 유학생들이 왈칵 늘어난 1988년도였다. 3개월 과정의 단기 유학을 온 일본에서의 학생 몇이서 불쑥 찾아와 한국에도 와룡매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때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먹고 살기도 바쁜 터에 매화나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며, 속으로는 팔자 좋은 사람들이라고 혀를 찼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는 건성으로 응대하였어도 뒤에 다시 생각하니 학생들의 질문이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곧 여기저기에 수소문하여 와룡매라는 매화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매화나무를 전문으로 키우고 있다는 사람도 그런 매화가 있느냐고 오히려 내 덕을 보려 했다.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를 내세운 내쪽이 머쓱해져서 질문을 얼버무리게 되었고, 나는 곧 그런 이야기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작년 봄, 나는 센다이시에 파견되어 '다테문화권' 안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꼭 십년 전, 시즈오까(靜岡)현에서 익숙해졌던 '도쿠가와(德川)문화'는 이제 이방(異邦)문화였다. '다테고메(伊達米), 다테오토쿄(다테 영주처럼 멋진 남자)' 등의 어휘가 상용어로 쓰일 만큼 다른 세계의 문화를 갖고 있었다. 그 원형이 다테 마사무네(伊達正宗)였다. '伊達米'로 만든 일본인의 멋진 술이 정종(正宗)이듯이, 나 또한 멋진 남자(伊達男)가 되어야 했다. 그런 다테란 누구인가. 한국 사람이라면 1592년에 있었던 '文綠의 亂'(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이라 한다)을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토오 기요마사(加腹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少西行長)의 3인방 이름과 함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다테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나 또한 마찬가지여서 동북지방에 사는 것이 외국 속의 또 다른 '외국'에 사는 것 같다. 나는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곧 '즈이간지'로 달려간다. 마쓰시마에서 가장 큰 간판 밑을 지나니, 음습(陰濕)한 삼도(衫道)가 끝난 곳에 본전(本殿)이 있고, 그 앞마당 귀에 서 있는 홍. 백의 와룡매와 첫대면을 하게 된다. 흥분과 감동의 시간이 지나자, 어느 틈엔지 버겁진 용의 발이 내 몸을 감아 오른다. 가지를 떠받친 보호목은 와룡매을 눕지 못하게 하는 사역봉(使役棒)처럼 보인다. 보초 서기가 피로하여 좀 눕고 싶어도 누울 수가 없는 신세다. 강제 노동에 징용(徵用)된 세계 제 2차 전쟁 때의 외국인이나 다름없다. 400년 된 미야기현(宮城懸) 내의 와룡매는 모두 네 그루인데, 장소로는 세 군데에 보호되어 있다. 첫 번째 장소는 즈이간지이고, 두 번째는 센다이 시내의 '미야기 형무소' 안에 갇혀 있다. 한국의 와룡매가 죄수(罪樹)처럼 형무소에 갇혀 있는 것이다. 첫여름의 어느 날이었던가. 미야기 형무소를 공개한다는 신문 기사를 따라 죄수를 찾아간다. 그런데, 말만 공개였지 실제로는 제한된 공개였다. 재소자(在所者)들이 만든 물건을 판매하기 위하여 벌인 할인(割引)시장을 공개하는 행사였다. 일요일에 민간인의 자격으로만 행사장을 간 나는, 와룡매가 있는 감방 쪽을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공개된 곳에 있는 와룡송(臥龍松:일명 幡松)만 구경하고, 우리나라의 와룡매를 상품화한 그림엽서나 사 가지고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로 와룡매를 발견한 장소는 우연히 산보하던 곳이었다. 센다이시 서(西)공원을 돌다가 '다테가 조선으로부터 가져온...'이라는 예의 그 설명문과 함께 잡목(雜木)사이에 끼어 있는 또 한 그루의 '조선에서 가져 온 와룡매...'를 발견한 것이다. 와룡매가 이런 식으로 산식(散植)되어 있는 것이라면, 당시의 다테 군단은 얼마나 많은 매화를 캐 왔는지 모르겠다. 한국에는, 가또오 기요마사(加승淸正)가 한국의 호랑이를 다 잡아가서 그 씨와 함께 호랑이 정신까지 다 말라버렸다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 와룡매가 발견되지 않는 것도 혹 그런 때문인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센다이에 와서 많은 와룡매를 만나게 되니, 모국에 찾아와 와룡매를 찾던 유학생 생각이 난다. 건성으로 넘어간 그때의 일이 후회된다. 그들의 인적사항도 기억해낼 수 없는 게 더욱 안타깝다. 그래서 더욱 이곳의 와룡매를 한국에 가져가고 싶다. 後記: 그러고 일년이 지난 어느 날, 미야기현 가미농고의 니까이도오 교장한테서 기쁜 소식이 왔다. 내 소원대로 와룡매를 한국에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즈이간지에서 와룡매의 분양(分讓)허락을 받아, 이미 학교 실습지에다 와룡매를 육종(育種)하였다며, 육종이 성공하면 자매교인 한국의 수원농림학교에 기증하겠다 한다. 고마운 일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와룡매를 관상할 수 있다는 즐거움보다 400년 전의 전리품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일본인 교장선생님의 마음가짐이 고마운 것이며, 그보다 더 고마운 것은, 잃어버린 유학생들의 뜻이 이루어져, 나 혼자 안고 있던 마음 빚을 내려놓게 된 일이다. 다테문화와 한국문화가 잘 어우러져 앞으로 새로운 문화가 열릴 것 같다(일본어 日曜隨筆1991.11월호. 한국어 隨筆公苑 1992.봄호) 와룡매는 어김없이 한국에 건너왔다.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은, 이 사실을 1991년 9월 28일 조간(朝刊)에 와룡매의 사진과 함께 6단 기사로 환국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제목과 부제를 달았다. "宮城, 瑞嚴寺의 名木, 政宗과 관련된 매화 한국으로 환국, 400년 만에 농업고교의 교류로'接木' 중임" 그리고 "任선생은, 21세기를 향한 친선과 발전의 상징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등의 기사 내용은, 대림사의 주지 스님이 잘 알고 계신 내용이다. 그후 와룡매를 받은 수원농림고의 박한동 교장(수년 전에 별세하셨다 함)도 가미농고의 교장과 함께 가끔 센다이에 들러 나에게 와룡매의 성장 상태를 알려주곤 하였다. 1993년이 되면서, 나는 동북지방을 대변하는 가호꾸신뽀(河北新報)의 아끼다(秋田) 문화부장과 자리를 같이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는, 내가 '도래(渡來)민족설'을 꺼내기도 전에 원론적인 주장을 펴고 있었다. 그는 평 기자(記者) 시절에 신문사의 이름으로 [東北地方의 에미시(복夷;오랑캐족)들]이란 연재물을 쓴 고고학도였다. 백제와 고구려에서 첨단(첨단) 기술을 가지고 나온 유민(遺民)들이 오오사카 지방에 들어와 야마토(大和)정부를 세우자, 원주민들은 동북 쪽으로 몰리게 되고, 동북지방은 에미시의 소굴이 되어 점령군의 표적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본인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은 물론이지만 동북지방 또한 당신네 좡이 새로 세운 '나라'라는 게 아끼다 문화부장의 주장이었다. 나는 그의 주장에 완전히 미쳐버렸다. 잠자고 있는 미야기 지방의 한국 유물을 끌어내어 숨결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1993년 11월부터 가호꾸신뽀는 내가 쓴 [宮城, 한국의 숨결]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와룡매는 그 중의 중요한 제재(題材)가 되어 다시 유명해졌다. 교토(京都)의 팔중동백(八重冬栢)등 임진왜란 때 들여간 식물의 '반환붐'이 일어난 것도 그 후의 일이었다. 나는 5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1995년 2월에 귀국하였고, 1997년에는 서울 목동에 소재한 월촌중학교의 교감이 되었다. 그 학교의 학교운영위원 중에 큰 매원(梅園)을 갖고 있는 분이 계셨다. 매화가 좋아서 매원을 시작하였다는 그분은 내가 말하는 와룡매 이야기에 큰 관심을 보였다. 다음 해의 꽃철에는 수원농생명과학교를 찾을 수 있었다. 벌써 육칠년 생이 넘었을 와룡매는, 키를 훨씬 넘는 싱싱한 모습으로 방금 터질 것 같은 꽃망울을 부풀리고 있었다. 마침, 손 타는 장소에 있었다는 것을 온실 쪽의 안전한 장소에 이식(移植)한 탓으로 원래는 나무에 달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유래(由來) 표찰(標札)이 없는 게 아쉬웠지만, 내 입김으로 환국하게 된 매화라는 점에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나는 그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곧 {와룡매 그후}란 제목의 수필을 써서 [에세이 문학] 1999년 봄호에 기고하였다. 와룡매가 환국해 있다는 사실이 또 한 번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즈이간지 쪽도 그렇겠지만, 안중근 의사를 모신 대림사(大林寺)의 주지 스님은 이런 와룡매의 사연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분이다. 이미 환국(還國)이 되어 있다는 사실도 아주 잘 알고 계시다. 그런데도 그분은 자신의 큰 사업으로 와룡매 환국식을 추진하였다. 지하의 안 의사께서도 그걸 뭐 두 번씩이나 환국시키느냐고 생각하실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분은 이상한 짓을 한 것이다. 내가 이분의 일을 임란(壬亂) 후의 중 현소에 비유하는 것은 다소 무리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국서를 바꿔서 선린외교를 성공시킨 것이나, 남이 한 일을 모르는 체하며 선린(善隣)을 앞세우는 것은 상식이 아니다. 더욱이 국제적으로 신사숙녀임을 자처하는 현대 일본인의 긍지(矜持)로 볼 때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것이다. 대림사(大林寺)는 미야기현 와까야나기쪼오(若柳町)라는 곳에 있다. 센다이시에서 70여 킬로쯤 북쪽으로 내려간 산간 마을에 있는 조그마한 절이다. 여기에는 사진틀에 넣은 안중근 의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 고장 출신으로 치바 도시치(千葉七十)라는 헌병이 있었다.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때에 헌병으로 근무하다가 하얼빈 사건으로 여순 감옥에 들어온 안의사를 지키는 간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안의사의 친필을 받아가는 것을 본 치바도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안의사가 형장으로 가기 직전이었다. 치바는 그때 비로소 평소에 마음먹고 있던 소원을 말했다는데, 그때 써준 글이 '군인본분위국헌신(軍人本分爲國獻身)'이다. 치바는 임종에 임하여서야 이 사실을 부인에게 말하였고, 부인은 이 글을 남편의 위패에 같이 두고 제사하였다. 치바의 위패가 같은 마을에 있던 대림사로 옮겨지면서 안의사의 이름이 일본 세상에 제대로 나타나게 되었다. 10년 전, 나는 센다이 한국교육원에 부임하여 대림사 주지스님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격하였다. 그리고, 매년 9월 둘째 일요일에는 안의사 추모제를 올리러 대림사를 찾았다. 많은 민단원들을 모시고 70킬로의 산간 마을을 찾는 게 큰 즐거움이기도 하였다. 대림사는 와룡매가 있는 마쓰시마와 함께 한국인의 관광코스가 되었다. 주지스님의 민간 외교 수완은 점점 발전하였고, 와룡매의 2차 환국은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계산되었던 듯하다. '바꿔치기 하여 쓴 국서'에 의하면 모리오까(盛岡)시에 '조선호두나무'라는 이름의 거목이 있었다고 한다. 현소의 수제자로 대를 이어 국서를 바꿔치기 한 현방(玄方)이 심은 것으로 해마다 엄청난 호두를 수확하였으며, 이 지역에서는 역사에 빛나는 스님 외교관으로의 업적을 기리며 수백 년 간을 보호하였던 나무라 한다. 대림사의 스님이 이런 역사 유적을 알고 계실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이런 것과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내가 와룡매의 환국을 시도하여 그것이 성공하게 되었을 때부터 이를 자기 손으로 환국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던 듯하다. 와룡매를 환국시킨 주인공이 귀국하고 여러 해가 흘러 버렸다. 주인공은 떠돌이 같은 공무원이고, 이제 어디론가 흩어져 관심밖에 살고 있을 것이란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도 관심이 이 있다 하여도 '한국의 영웅'을 내세우는 행사에 갖다 붙이면, 된다는 계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누가 알아주기를 기대하고 한 일도 아닌, 수필(隨筆)같은 이야기를 날치기하여 한국인을 농락하려는 듯한 의도가 밉고 가증스러운 것이며, 백년을 '따라다녀도' 이렇게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우리의 민간외교 현실이 원통한 것이다. 이미 8년 전에 수원농생명과학고등학교에 돌아와서 잘 크고 있는 와룡매를 또 한번 환국시키겠다는 것은 그 주지스님의 '정치외교'에 다름 아니다. 국서를 바꿔 쓴 일에 버금갈 수 있는 일본인의 부끄러움이다. 다시 건너온 와룡매 두 그루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내려다보이는 서울특별시 남산공원의 식물원 앞, 분수대가 긴 물줄기를 뿜기도 하는 철쭉꽃밭에서 잘 자라고 있다. 나는 그 기념 식목일에 다시 건너온 와룡매를 심느라 헛삽질이라도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후에도 6개월 정도를 더 그 성장을 눈 흘기며 지켜오다가, 지금은 하산하여 남산의 와룡매보다는 수원의 와룡매를 더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남산의 와룡매에 눈을 흘긴다는 것은, 숙명(宿命)처럼 되풀이 되는 역사의 흐름에 그런다는 것이지, 두 번 돌아온 와룡매가 미워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돌아온 와룡매는 모두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