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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건너간 것들
이 홍사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매야 보배다.
아침을 먹다가 문득 떠오른 말인데, 물 건너 있는 재산은 재산이 아니라는 다른 말이다. 할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물 건너 있는 재산은 재산이 아니라고.
물 건너에 구슬이 서 말인데 어떻게 꿰매나?
숟가락을 쥐고 한참이나 생각했었다. 과연 내 재산인가? 정녕 내 재산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가? 숟가락을 쥐고 한참이나 생각했었다. 아내가 마주 앉았다면 핀잔을 들을 일이다. 나는 아침을 홀로 먹는다. 식구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새벽밥을 먹기 때문이다. 밥을 국이나 물에 말아서 혼자서 간단히 먹는다. 식구들과 같이 먹도록 아침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새벽에 혼자서 간단히 때운다. 사실은 아내와 마주 앉아서 밥을 먹을 자신이 없다. 언제나 불편한 밥상이다.
할아버지는 시대를 잘못 만나서 만주의 땅을 다 버리고 고향으로 몸만 돌아오셨다. 그게 일제 강점기였다. 시대를 잘못 만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미얀마 군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외국인은 미얀마로 들어갈 수가 없다. 더군다나 코로나가 창궐하여 어떻게 들어가더라도 자비로 검사를 하고 제 돈을 내고 열흘간 호텔에서 격리하다가 볼일을 잠깐 보고 다시 나오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또 보름간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 그런 상황이니 미얀마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나 보러 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내 재산의 대략 절반은 미얀마에 있다.
생각하면 환장할 일인데 이젠 덤덤하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오늘은 할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난다. 중국인들은 열이 있으면 하나로 장사를 시작한다고. 열 번을 망해도 살아날 수가 있기 때문이란다. 반면 한국인들은 하나가 있으면 빚을 끌어다가 열을 만들어 장사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한번 실패하면 쪽박을 차는데 그 무모한 짓을 서슴없이 시작한다고 혀를 차셨는데 그 말씀을 듣고 자란 손자인 내가 바로 그 꼴이 되었다.
미얀마에 투자한다고 무모하게 빚을 끌어다 댔다.
할아버지는 만주의 것을 다 버리고 나는 미얀마의 것을 다 버려야만 할 것 같다.
시대 탓이다.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던지, 민주화가 성공하던지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고 내가 투자한 재산만 찾아오면 되는데 그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지산동 삼거리 모퉁이 산자락에는 학의 서식지가 있다.
매년 학이 찾아와 멀리서 보면 솔밭이 푸른색이 아니라 하얀색으로 보일 정도로 많이 찾아온다. 학은 다른 말로 두루미라고 불리는 목이 긴 조류이다. 그러나 두루미와 학은 어감부터 다르다. 그곳을 자주 지나치면서도 나는 학을 눈여겨보지 못했다. 그곳을 이제는 개발하지는 못한다. 바위로 된 산이라 툭 튀어나왔고 그 바위산을 피해서 자연부락이 형성되었고 도로가 구부러졌지만, 시대는 달라지고 장비가 좋아져서 마음만 먹으면 그런 바위산을 날리고 도로를 직선으로 연결할 수가 있겠지만 이제는 조류보호지역으로 선정되어서 개발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도로가 굽었다고 개발을 운운하면 환경운동가들이나 자연보호 협회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에는 지산 삼거리의 송어횟집에서 약속이 있어서 걸어서 산모퉁이를 지나갔다. 때마침, 도로 건너 구미천에서 날아든 학이 서식지를 향해서 노을이 물든 하늘가를 선회하며 낮게 날아갔다. 유연하게 날개를 펴고 서식지를 향하는 그 학을 보고 문득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할아버지 생각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숙연해져서 학이 날아간 노을이 물든 하늘가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하얗고 고귀한 한 마리의 학이 떠올라 눈에 어른거린다. 어디서든, 기품을 지닌 학을 보아도 당연히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그렇다. 할아버지는 학이었다.
나의 뇌리에 할아버지와 학은 떼어놓을 수가 없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만주의 땅을 다 버리고 돌아와 가난했지만, 학처럼 고결하고 기품있게 살다 가신 분이었다.
을사년 보호조약이 체결되고 오 년 뒤인, 지금은 구미시의 변두리가 되어버린 해평면에서 1910년에 가난한 한학자이신 증조부의 맏이로 태어나셨다. 삼일운동 당시에는 겨우 아홉 살이셨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한국전까지 격동기를 고스란히 거치신 분이다.
할아버지의 격동기.
생각하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할아버지께선 일제 강점기인 젊은 시절 만주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결혼하고 아버지가 태어난 다음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몇 년 도인지는 모른다. 만주에 오래 계셨는데 그곳에서 담배 농사를 대대적으로 지으셨다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1932년생이시니 가장 수탈이 심했던 일제의 강점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연도를 계산해보면 할아버지 스물두 살에 아버지를 낳으신 것이다. 당시에 할아버지가 만주에서 담배 농사를 지으셨는데 밭이 얼마나 긴지 한 고랑을 갈고 돌아오면 한나절이라고 했다. 그 말은 할머니에게 들었지만, 어린 나이에 밭이 얼마나 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번 돈으로 독립운동의 자금을 대어주다가 일제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밭과 일꾼들을 버리고 볏짚 더미가 실린 마차의 볏짚 속에 들어앉아 감시망을 빠져 고향으로 돌아오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라곤 하지만 나는 어릴 적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거나 어리광을 부리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한집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나 증조부모의 생신날에 오시면 손님처럼 대하며 컸다. 할아버지는 따로 사셨다. 만주에서 데려온 작은 할머니 때문이었다. 할머니 둘을 데리고 한집에 살 수가 없는 까닭이었다. 만주에서 번 돈을 당신의 매제인 고모부 할아버지를 통해서 고향으로 보냈는데 중간에서 항상 배달 사고가 났다. 어디 땅을 사라고 얼마를 보내고 어디에 있는 땅을 사라고 얼마를 보냈는데 전부가 배달 사고였다. 고모부 할아버지는 평양을 내려오다가 노름방에서 그 돈을 탕진했다. 처음에는 따려고 들어가고 다음엔 본전이 생각나서 들어갔다고 했다. 독립운동자금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땅을 버리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땅을 샀으니 대농이 되었겠지,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했었고 집에서 기다리던 증조부는 아들이 돈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주변의 땅을 계약했는데 막상 와서 파악하니 전부가 배달 사고였다.
허허! 그 사람들 그거 참,
허탈해진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고작 그 한마디였다고 할머니에게 들었다. 할머니는 그 말씀을 평생 두고 하셨다.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고향의 한집에 살지 못하고 면 소재지 장터로 살림을 나셨다. 할아버지 친구분들이 이발소를 차리라고 하셨다고 들었다. 친일파가 하는 이발소에 가기가 싫어 대구까지 이발하러 가는 지인들이 제안했던 발상이다. 할아버지께서는 만주에서 입고 오신 외투의 내피, 호랑이 가죽으로 된 내피를 팔아서 이발소를 차리셨다고 했다.
따로 살았으니 친손자이지만 할아버지께 어리광을 부리지 못하고 자랐다.
어리광은커녕, 어쩌다 제삿날 할아버지께서 오시는 날이면 꼭 손님 대하듯이 세숫물을 갖다 바쳐야 했다. 할아버지에게 이발 기술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이발소를 차려놓고 직공을 구해서 경영하셨는데 친일파들이 하는 이발소보다 잘 되었다고 들었다. 지금은 십 분의 일로 줄었지만, 당시에 해평면민은 만오천 명이 넘었으니 면치고는 큰 면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해평초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셨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해방 전 1회이시고 아버지는 해방 후 1회 졸업생이라고 하셨는데 내가 해평초등학교 48회 졸업생이니 할아버지와 마흔여덟 살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할아버지 연세가 기억이 잘 나지 않으면 내 나이에 48을 더해서 계산하곤 한다. 해평초등학교 1회로 여덟 명이 졸업했는데 그중에서 할아버지께서 한 분이셨다고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학교 기성회장을 하셨다. 당시에는 기성회장이 뭐 하시는 분인지 몰랐는데 삼일절날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인 행사에서 단상에 올라서 만세 삼창을 선창으로 외치곤 했다. 그 전교생 중에 손자가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감히 내가 범접하기 어려운 분이셨다. 나는 기대도 하지 않았거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다.
할아버지께서 집에 오시면 세숫물을 떠다 바치고 수건을 들고 기다려야 하는 손님이다. 어린 마음에 손님이지 나의 할아버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증조부모님께서 살아계셨다. 증조부모님과 한집에서 살았는데 증조부모님은 형만을 챙기셨다. 종손이라는 이유에서다. 쇠락한 종갓집 차남으로 태어난 나는 증조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외톨이로 자랐다.
당시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다 빡빡머리로 다녔는데 드물게도 나는 하이칼라를 하고 다녔다. 이발하는 날이면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장터의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이발소로 갔기에 직공들이 정성 들여 하이칼라를 해주었다. 그게 할아버지를 둔 손자가 받은 특혜라면 특혜였다.
당시에는 다른 아이들도 할아버지라는 존재와는 그런 소원한 사이로 알았다. 그런데 이웃에 사는 재학이는 자기 할아버지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는 것이 너무 이상했다.
할배야! 뭐 하노?
재학이는 자기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그게 너무 이상했다. 나에겐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만주의 땅을 버리고 돌아와 고향에 땅을 샀을 것이라 믿었는데 보낸 돈 전부가 배달 사고가 났으니 얼마나 허탈하셨을까?
그 사람들 그거 참!
이 한마디로 허탈한 가슴을 달래기에는 얼마나 애가 닳았을까?
미얀마에 집 장사를 시작한 것이 벌써 구 년이다. 주물럭거리면 자꾸 커지는 게 바로 투자다. 내가 바로 그랬다. 애당초 투자를 시작할 적에는 연립주택 하나를 지어보려고 시작했는데 땅값이 날로 치솟고 주택가격이 치솟아 빚을 끌어다 투자를 했다. 그게 실수였고 욕심이 화를 불렀다.
코로나가 퍼지자 미얀마에서 발이 묶였다.
한 달은 한국, 한 달은 미얀마에서 일했는데 코로나가 시작되자 내가 타고 돌아올 비행기가 어느 날 갑자기 운항이 중단되었다. 날마다 인터넷을 뒤적이며 돌아올 길을 찾았다. 하노이를 경유하는 비행기도 베트남에서 외국인 출입을 막았고 방콕을 경유하는 비행기도 태국 정부에서 환승을 막았다. 돌아올 길이 막막했다. 할아버지께서 만주의 땅을 다 버리고 볏짚 더미에 숨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가 있었다.
날마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인터넷으로 찾았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니 한국에서는 마스크 대란이 일어나서 생년월일과 요일을 정해서 약국에 줄을 서서 마스크를 산다고 들었다. 마스크가 무슨 수류탄이나 총알도 아니고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사야 한다니 기가 막혔다. 그래서 미얀마에서 마스크를 사 모았다.
한 달쯤 그 짓을 하다가 일주일 후에 한국으로 의료 용품을 실으러 가는 미얀마 국적의 화물 비행기가 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비행기는 인터넷으로 예약이 되지 않았다. 직접 항공사로 찾아가서 현금을 내고 예약을 했다. 한국으로 들어오면 언제 다시 미얀마에 갈 수가 있을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매니저와 직원에게 주의 사항을 단단히 일러주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비행기를 타고 보니 승무원들이 우주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방진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대수롭잖게 생각했는데 그걸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물론 기내식도 없었다. 여객기처럼 사람이 많이 탄 것도 아니고 스무 명 남짓이 거리를 두고 앉았다. 도착하니 인천공항은 썰렁했다. 인천공항에서 검역을 하고 빠져나오는데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들어오는 절차가 뭐가 그리 복잡한지 핸드폰에 동선이 찍히는 앱을 설치하고, 다음날 보건소에 가서 검사받고 음성판정이 나왔는데도 집에서 보름간 격리를 해야만 했다. 그게 작년 봄이다. 이렇게 오래 갈 줄은 몰랐다.
할아버지도 만주의 땅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나갈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셨을까?
설상가상 미얀마 군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외국인 입국 금지.
상황은 더 어렵게 꼬였다. 언제 나갈 수가 있을까? 내 재산 절반은 미얀마에 있는데, 애가 타지만 방법이 없다.
아버지께서는 언젠가 말씀하셨다.
얘야! 행여 외국에 나가서 일하거나 사업을 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살아가면서 그런 유혹을 받게 마련이다.
아버진 어떻게 아셨을까? 중장비에 손을 대고 이라크에 나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하자 아버지께서 그 말씀을 하셨다. 아주 옛날의 일이다. 나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잊고 살았다.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가 만주의 땅을 버리고 돌아오시는 상황을 직접 목격하셨기에 그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말씀을 잊고 살았기에 이런 사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보다 일찍 돌아가셨다. 할아버진 천수를 누리셨고 아버진 요절하셨다. 자식인 나로서는 상당히 가슴이 저린 일이다. 아버지를 떠올리니 또 숙연해지고 가슴이 저린다. 미얀마에 투자하기 전에 아버지 말씀을 한 번이라도 떠올렸어야 했는데.
늦었다.
물 건너 있는 재산은 재산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께선 아셨을까? 그 말씀을 상기했어야 했는데 아버지 말씀을 잊고 살아서 이 사단을 초래한 것이다. 빚을 그대로 안고 가려니 아자 부담이 만만치 않다. 미얀마에 투자한 것이 돌아와 빚을 갚을 시기를 예측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진퇴양난. 나는 수렁에 발이 빠졌다. 한 다리만 빠진 게 아니라 두 다리가 다 빠진 꼴이다. 미얀마에 들락거리는 동안 한국의 건설 경기가 사그라들었고 거래처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일감이 줄었다. 일감이 줄어서 매출금액은 매달 손익분기점에서 허덕이는 꼴이 되었다.
어제는 아들 녀석과 다투었다.
형편이 넉넉하다면 절대로 다투지 않고 넘어갈 일이다.
매일 커피를 마시러 가는 중고 자동차 상사에서 김 사장이 참한 차가 들어왔다고 구경이나 하고 커피나 마시자고 오후 늦게 연락이 왔다.
차? 무슨 차인가?
차에 대해서라면 마니아를 넘어서 광적인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같은 동네라서 걸어서 십 분 남짓 걸리는 곳인데 급한 마음에, 차를 끌고 갔다. 나를 염두에 두고 구한 차라고 했는데 차를 보니 확 끌리는 마음은 없고 마음에 반밖에 들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던 모델인데 연식이 오래된 구형 모델이었다. 차를 바꾸어야겠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차에 대해서는 나보다 잘 아는 아들 녀석에게 전화했다.
이런 차가 이런 가격에 나왔는데 차를 바꿀까?
녀석은 무슨 모델이고 몇 년식이고 주행거리가 얼마인지 물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대답했더니 적극적으로 반대한다며 알아서 하라고 난폭하게 전화를 끊었다.
이 자식 버르장머리하고는.
별로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김 사장이 있는 앞에서 내색할 수가 없었다. 올해 들어서 벌써 차를 세 번이나 바꾸었다. 물론 전부가 중고차였다. 나는 새 차를 사 보지 않았다. 취득세와 등록세도 많이 내야하고 오래 탈 자신이 없어서 중고차를 선호한다. 희한하게도 살 때는 마음에 들어서 샀는데 막상 내 앞으로 이전하고 일주일을 타면 차의 결점이 보인다. 그러면 다른 차가 눈에 들어온다.
아들 녀석의 전화 때문에 기분이 좀 상해 있는데 아들 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야?
아버지! 차 바꾸지 마세요. 차를 또 바꾸어서 끌고 오면 확 부숴버리고 집을 나갈 거예요. 형편이 어렵다면서요.
바꾸자는 마음은 없었지만, 이 자식 말투가 괘씸했다.
야! 이 자식아, 아버지에게 협박하나?
언성이 높아졌는데 이미 전화는 끊겨 있었다. 통화내용을 들은 김 사장이 이빨이 빠진 호랑이라고 빈정거리며 지금 타는 차가 괜찮다며 타고 있는 차의 장점을 설명했다.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 차도 물론 한 달 전에 김 사장한테서 바꾼 차였다.
기분만 잔뜩 상했고 차를 구경하지 않은 것보다 못했다.
급하게 커피를 한잔 마시고 집으로 왔다. 버르장머리 없는 아들 녀석을 혼내주기 위해서다. 막상 집에 왔는데 상황은 역전이 되었고 벌집을 쑤신 꼴이 되었다. 아내와 딸까지 가세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차를 바꾸면 어쩌자는 것이었다. 아내는 무슨 취미가 그렇게 고약하고 실속이 없느냐고 핀잔을 주었고 딸이라는 년은 아들 녀석이 차를 부숴버리면 같이 합세하겠다고 아들 녀석을 응원했다. 아들 녀석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도 않았다.
아니, 바꾸겠다는 것이 아니라 물어본 것이잖아?
내 대답은 궁색하고 빈약했다.
말이 난 김에 좀 물어봅시다.
그 말을 하며 아내가 내 방으로 건너와서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런 상황이 되면 나는 꼬리를 내려야 한다. 진지한 상의를 할 적에 대하는 자세였다.
미얀마 상황이 어떻게 되느냐고 매니저와 연락이나 되느냐고 물었다.
남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 마라. 나도 괴로워!
그게 왜 남의 아픈 상처냐고, 그대는 괴롭더라도 보고 있자니 더 자신이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아내에게 보고할 것이 없다. 앞으로의 계획도 확실치가 않다. 보이는 대로다.
상황을 다 보고 있잖아?
사람은 시대를 잘 만나야 한다며 아내에게 할아버지께서 만주의 땅을 다 버리고 돌아오신 얘기를 늘어놓았다. 아내도 그 얘기는 할머니에게 들었다면서 할아버지 얘기를 하지 말고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라고 몰아세웠다. 제대로 궁지에 몰린 셈이다. 한 번도 미얀마 일에 관해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고 눈치만 살피던 아내였다.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므로 아내에게 할 말이 없다.
내가 답이 없다고 정색으로 말하자, 아내는 도대체 지금 빚이 얼마냐고 물었다.
집 안에서 경제주체는 나이므로 아내는 빚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모른다. 대략 얼마라고 하니 한 달에 이자가 얼마가 나갈 거라고 했다. 그런 말들을 하고 있는데 아들 녀석이 건너왔다. 나는 기분이 차분해져서 버르장머리 없음을 나무랄 상황이 아니었다. 아들 녀석은 제 엄마 옆에 앉아서 듣고만 있다가 거들었다.
그런데 아버지 차는 그렇게 바꾸는 게 아니에요.
너 인마 아버지에게 훈계할 거냐?
그게 아니고, 차는 내 형편에 두 단계를 넘어서는 새 차를 사서 오래 타야죠. 아버지 하는 걸 보면 여태 등록세 낸 것만으로도 차 한 대 값이 넘잖아요?
녀석의 말을 무시했다.
지금 형편이 안 좋아. 그래야 중고차 상사의 업자도 먹고살잖아? 인마!
당신이 지금 그 사람들 걱정할 때예요?
아내가 또 거들었다.
사는 게 재미가 없어서 그래. 내가 술을 먹나 노름을 하나? 돈이 왕창 드는 것도 아니고 그런 재미는 취미로 봐주면 안 되나? 나가거라. 좀 쉬고 싶다.
나는 침대 위로 몸을 던져 누우며 말했다. 이야기를 그만하고 싶다는 태도였다. 아내와 녀석은 마지못해 일어났다. 아내는 문을 나서며 기어이 한마디를 뱉었다.
빚은 우째 갚을라 카노.
대답을 원하는 말이 아니었다.
구슬은 서 말이 있는데 꿰맬 수가 없다. 꿰매기는커녕, 물 건너 있는 구슬이 잘 있는지 볼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할아버지는 만주의 땅을 다 버리고 돌아오시면서 기분이 어땠을까? 고향으로 보낸 돈은 배달 사고가 났고 얼마나 황망하고 허망했으면, 그 사람들 그거 참! 이 한마디로 평생 입을 닫았을까?
잠이 오지 않았다.
며칠 전 미얀마 매니저로부터 카톡이 날아왔다. 이 녀석은 한국에서 십일 년을 근로자로 왔었는데 한글이 쉽다며 익혀서 웬만한 소통은 한글로 가능하다. 띄어쓰기와 오자가 있지만, 내가 알아서 짜깁기로 읽으면 무슨 뜻인지 소통이 된다.
보내온 카톡에는 나라 형편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집 밖으로 못 나오도록 철저히 통제하고 있단다. 그 카톡 끝에 지금 중간 집에 세 들어 있는 사람들이 이번 달까지만 살고 이사한다고 했다. 중간 집이란 팔리지 않은 연립주택 중에서 이 층에 있는 집을 말한다. 그 집세를 받아서 매니저와 가사도우미 생활비로 쓰고 있었는데 그 집이 이사한다니 막막했다. 생활비를 보낼 방법도 없다. 막막하다. 최소한의 생활비는 있어야 하는데 그 집에서 나오는 돈으로 생활했었는데 막막했다. 방법이 없어서 아직 답신을 보내지 않고 뭉개고 있다.
상황은 최악이다.
처음 당하는 일이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라고 답신을 보내야 하는데 생각나는 방법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용하다는 곳에 가서 물어보고 싶기라도 한 심정만큼이나 답답하다. 지난달에는 머리를 삭발했다. 하도 답답해서 머리를 쥐어뜯다가 군대 가는 심정으로 삼 년만 버티자는 생각에서 삭발했다. 넉넉잡아 삼 년이 지나면 해결이 안 되겠나 싶었다. 머리를 깎으니 정장을 입을 일이 희한하게도 자주 생겼다. 정장을 입고 문상도 가야하고 꼭 참석해서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 결혼식도 가야 했다. 정장을 입으면서 야구모자를 쓸 수는 없었다. 가는 곳마다 머리를 왜 깎았느냐는 인사를 쇄도했다. 엊그제 교도소에서 출소했다는 농을 하고 넘어갔다.
이제는 누가 사정을 알고 미얀마 일에 관해서 물으면 짜증이 난다. 대답하기도 귀찮거니와 미얀마 생각을 하기도 싫기 때문이다.
물 건너갔어.
남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 마라.
친구들이 물으면 이런 대답으로 일축한다. 시간을 돌릴 수야 없지만 이런 결과를 예측했었다면 절대로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을 비워야지 다짐하지만 그게 잘되지 않는다. 문득문득, 투자 시기의 미친 짓을 생각하면 버릇처럼 혼자서 머리를 쥐어뜯는다.
이제는 삭발해서 쥐어뜯을 머리도 없다.
할아버지께서도 삭발하시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
할아버지께서는 만주를 다녀오시고 또 한 번 살림을 탕진하는 일이 일어났다.
육십 년대 초반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고 군의원에 출마신 것이었다. 당시에는 고무신 선거였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삼 년간 집안의 술독에 술이 떨어지는 말이 없이 채웠다고 했다. 표를 가진 면민이면 누구나 마음대로 와셔 마셨다고 했다. 술이 있는데 안주가 없을 수야 있겠는가? 할머니와 어머니는 손님들을 극진히 대접했다고 했다. 마당은 늘 잔칫집 분위기였다고 들었다.
집안에 일하던 소까지 팔고 외양간은 비었고 할아버지는 간발의 차이로 낙선했다는 것인데 아버지는 빈 외양간에 불을 지르고 홧김에 집을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게 내가 갓 태어나고 일어난 일이라 했다.
질곡 없는 삶이 있으랴?
할아버지 생의 리듬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할아버지에 비하면 그래도 나는 아직 좀 나은 편이다.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고 미얀마 군부에서 양보하여 외국인 출입이 자유로워지면 나가서 물 건너간 것들을 공이라 생각하고 헐값에 팔아도 빚을 반이나마 갚겠지. 그러면 숨통이 좀 트이겠지.
할아버지는 참 초연하게 사셨다. 고결한 한 마리 학처럼 사신 것이다. 비루한 삶을 물고 구차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천수를 누리셨다. 요양원이나 병석에 눕지 않고 참 깨끗하게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날도 혼자서 남의 부축을 받지 않고 병원을 다녀와서 작은할머니가 있는 장터로 가지 않고 할머니가 있는 집으로 오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예감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저녁을 잡수시면 할머니에게, 평생 못 할 짓을 해서 자네에게 미안하네, 그 말씀을 진지하게 하셨다고 했다. 할머니는 내심 이 양반이 갈 때가 되었구나 직감하셨고, 평생 가슴에 맺힌 한이 그 한마디에 다 풀렸으며, 오히려 두 여편네를 데리고 눈치를 보며 사느라, 심리적으로 고생이 심했을 거라는 동정심이 들었노라고 했다. 그날 밤 사랑채에서 할머니 옆에서 주무시다가 할아버지는 신음 한마디 하시지 않고 평온하게 명줄을 놓았다. 새벽에 연락받고 달려가니 피도 한 방을 흘리지 않고 배설물도 하나 없이 평온하게 잠이 든 모습이었다. 할아버지의 주검을 보고 나는 한 마리의 학을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전생에 학이었구나. 학으로 돌아가신 거야.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는 늘 손님 같았는데 돌아가시니 나의 할아버지가 분명했다. 나는 학의 친손자였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으므로 장례식은 형과 상의해서 선산에 모셨다. 장례를 마치고 생각하니 나는 친손자가 확실했다.
할아버지의 질곡을 떠올리면 나는 미얀마 일에 초연해질 수가 있다. 만약 미얀마에 투자하지 않았다는 다른 곳에 눈을 돌려 더 이상하게 꼬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게 내 운명이라 생각하고 초연해져야지. 할아버지처럼 무덤덤하게 살아야지. 물 건너간 것들은 조금이라도 찾으면 다행이고 못 찾으면 운명이라고 치부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가슴을 쥐어뜯고 용을 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초연하게 기다리자.
한 마리 학이 아침부터 눈에 어른거린다.
할아버지다.
내 기억의 빛바랜 앨범에는 할아버지는 고결한 한 마리 학으로 인화되어 있다.
그렇다. 학의 서식지는 바로 내 가슴인 모양이다. 물 건너간 것들을 건져오지 못해도 학처럼 살다 가야지. 할아버지는 나의 전범이고 나는 할아버지의 손자였다.
아! 물 건너간 것들.
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데 만져보니 쥐어뜯을 머리카락이 없는 삭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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