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의 유래
《증일아함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후 중생을 교화하시기 위해 인도지역을 두루 돌아다니셨습니다. 우전국의 우다야나 라고 하는 왕은 부처님께서 그 곳에 머물러 계시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세존(世尊)을 찾아가 예배하고 법을 물었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께서 다른 곳으로 설법하러 가서 석달이나 오시지 않자, 우전국의 왕은 너무나도 부처님이 뵙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조각하는 사람에게 전단향나무로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을 조각하도록 하여, 부처님께 하듯이 매일 불상에 예배드리며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부처님께서 돌아오셨을 때, 왕은 다음과 같이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뵙고 싶을 때, 불상을 만들어 모시고 부처님을 생각하며 예배하면 어떻습니까?"
왕의 말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어 허락을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불상숭배의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예배 대상은 불상과 탑이다. 탑은 부처의 열반을 상징하는 것으로 불교 초기부터 제작되었다고 하나 불상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쉬라바스티 성의 프라세나지트 왕과 카우비 성의 우다야나 왕이 불상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부처가 열반하자 그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부처의 형상을 만들어 허전함을 달랬다고 한다.
그러나 불상은 서기 1세기경인 인도의 쿠샨 왕조 때부터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석가모니가 기원전 544년 열반하였으므로 약 5백 년간은 불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무불상 표현시대’라고도 부르며, 부처 전생의 선행을 묘사한 본생도와 일생의 중요한 사건이나 가르침을 표현한 불전도,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탑 등이 경배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연꽃이나 보리수와 같이 상징적인 것들이 신앙화되었다. 청정한 연꽃은 부처의 탄생을, 보리수는 해탈을, 법륜은 불법을 설하여 영원히 전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또 불탑은 열반을 상징하였고, 부처는 불족적(佛足跡)이나 빈 의자로만 표현되었으며, 불사리와 치아가 진신(眞身) 그 자체로 숭앙되는 시대였다.
불상이 인간의 형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컸다. 인도 서북부 간다라 지방에 서방의 고전문화가 유입되면서 그리스 신상이 들어왔고, 이러한 신상의 영향으로 불상도 서구적인 모습을 지닌 것이 많이 제작되었다. 그렇지만 인도 중북부 마투라 지방의 불상은 인도 고유의 전통을 살려 신체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엄격함을 강조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한때
어머니이신 마야부인을 위하여
하늘나라 도솔천에 올라가신 일이 있었습니다.
태어나신 지 칠 일만에 세상을 뜨셨던
어머니에게 설법하기 위해서였는데
항상 주위에서 시봉하던 아난존자까지도
부처님께서 어디 가셨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이때 갑자기 부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부처님을 사모하는 애틋한 마음을 억누를 길 없던 우전왕은 우두전단향 나무로 불상을 조성하고,
또 파사익왕은 순금으로 불상을 조성하여 모셨다고 합니다.
이 때 조성한 불상이
이 세상에 등장한 최초의 불상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