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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재(克齋) 신익황(申益愰)1672년(현종 13)~1722년(경종 2) 명중(明仲) 평산(平山)
克齋先生文集卷之十二 / 附錄 / 年譜
顯宗大王十三年壬子閏七月十四日 巳時。先生生于仁同府西若木里第。先生先世。居開京。中移漢師。至五世祖察訪公。從仲父健宰仁同。因贅而家焉。子孫遂爲仁同人。
현종 13 1672 임자 康熙 11 1 윤7월 14일, 仁同府 서쪽 若木里 집에서 태어나다.
正宗大王十九年甲辰二月。士林奉安位版于崑山書院。先生曾王考眞靜公並享。○先是。結契。壬辰。構書堂。辛丑。建祠奉安。至是改題版。丙午。陞號改祝。
정조 8 1784 갑진 乾隆 49 - 崑山書院에 位版을 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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克齋先生文集卷之十三 / 附錄 / 崑山里社奉安文 辛丑○宋履錫 *宋履錫 1698 1782 冶爐 伯綏 南村
恭惟奮起南服。絶學是倡。涑水之篤。橫渠之勇。惟理與氣。不離不雜。隨之乘之。爰有苗𧖴。陶山旨訣。百世無疑。俗學易偏。過者尤迷。於惟我公。辭闢廓然。不有有道。孰正孰親。精思實踐。洞觀昭源。圖有通看。言有彙言。一室蕭然。寤寐賢聖。齋以克己。室以主敬。本旣立矣。行之沛然。簞瓢雖空。其樂靡遷。束帛雖箋。匪我思存。行孚家鄕。學子鼓篋。文穆成規。百年迺覿。天不憗遺。不畁以壽。俎豆之儀。輿誦已久。崑山有社。寔爲公刱。亦原厥初。有祖眞靜。積德累仁。迺有賢孫。世德作求。一廟宜安。襟珮坌至。永觀厥成。芬香始升。降格洋洋。遺風如聞。啓我無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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克齋先生文集卷之十三 / 附錄 / 常享祝文 丙午陞號後製○金㙆 *金㙆 1739 1816 義城 子野 龜窩
學究天人。論的道器。牖我髦士。百世椒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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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와(龜窩) 김굉(金㙆)1739년(영조 15)~1816년(순조 16) 자야(子野) 의성(義城)
龜窩先生文集卷之八 / 祝文 / 崑山書院常享文 丙子
德修眞靜。道賁邱園。遺風灑灑。永世不諼。
右眞靜公
學求天人。論的道器。牖我髦士。百世椒荔。
右克齋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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克齋先生文集卷之十三 / 附錄 / 崑山書堂上樑文 壬辰○申宅誠 *申宅誠 1741 1774 平山 子純
挹遺澤於前賢。不百年可見公議。責來效於後學。乃一日共立黨庠。樹之風聲。圖惟永久。顧玆七村一域。實爲大嶺名區。烏山洛水崒嵂而縈迴。南方風氣之所儲蓄。茂材豪擧詩書而弓馬。東國簪纓之相接聯。耆德之一代聲名。固難勝數。道學之百世矜式。抑有可稱。惟我克齋先生申公。光岳精英。將門生長。已在冲歲。革去跅弛之風。自立嚴程。漸就規矩之地。獨以聰明知思之所及。得古人遺意於陳編斷簡之中。惟其輕重內外之有分。謝早年科學於勇往直前之際。心法嚴而規模大。精粗盡而本末該。理氣性情之論。參差而爛熳。圖辨彙言之說。妙契而疾書。克字以題楣。必從性偏處克將去。敬庵又爲號。須信學成也敬始終。其得於己者精專。亦敎於人也誠切。家塾有訓。飭子弟養蒙之功。書齋立規。勉友生相觀而善。倣藍田而條約。將以富之敎之於斯。營菟裘而臨江。終欲藏焉修焉於是。確乎東岡之志不屈。忽焉少微之精云沉。一部遺書。蓋有待於玄晏。百年餘敎。庶不泯於靑丘。而可社祭於玆鄕。柰有甲令於當世。蓋今學校痼弊。只爲爭鬨閒逐之場。故以聖明文治。有此申嚴防設之限。若乃立廟而俎豆。固未敢焉。惟其作塾而誦弦。豈不美也。鄕里之言始發。遠近之意皆然。睠彼東江之原。縱有先生遺趾。卜此西山之麓。允愜後輩輿情。密邇梓桑。想像曾經杖屨。不出閭黨。便近多會襟紳。前父老措畫而有田。今士友經始而有事。矧伊崑山高阜。曾是元氏古基。奇峯秀壑。體勢拱環。更俯長江襟帶。蔀戶甍楹。桑麻連接。仍通大野雲煙。爰得斯干之松茂竹苞。宜有大壯之上棟下宇。服役以自願取食。何論時屈。擧贏趨事於相勸承風。又見材良匠善。事有待時然者。工亦不日成之。怳爾山川之改觀。荊榛已闢。隆然榱桷之如跂。風雨攸除。何莫非賢澤及人。游於是息於是。孰敢曰我勞從事。美哉[奐]。美哉輪。入於堂者先須得門。升於階則可知循序。撫芳躅於旣往。慨志業之不究中身。仰高山而同興。得意像於先立大者。雖未及摳衣而操几。可不知誦詩而讀書。自豪縱而入繩規。折節當若是。舍己見而從人善。勇遷爲如何。人材不競未曾若此時。實由不學之過。光陰可惜。勿謂有來日。須成可用之需。在吾庠設立之初頭。懲一世校院之淆雜。講學依觀齋規法。益加專心。財穀存梓役贏餘。須嚴輪掌。尊尙。自是公議。豈斯文終至晦湮。觀感出於常情。在吾黨尤爲親切。應有聞風而起慕。且見同氣而相求。是爲吾輩本圖。願與齊人共勉。聊陳偉唱。助擧脩樑。兒郞偉拋樑東。洙泗眞源洛水通。日暮櫂歌生遠渚。徽音千古感余衷。兒郞偉拋樑西。霜臺淸翠入雲齊。門牆密邇松楸蔭。忠孝家聲琬琰題。兒郞偉拋樑南。平郊西日聽農談。願將枕下幽泉響。散作人間春雨甘。兒郞偉拋樑北。巖院吳祠留賸馥。黌序相望莽蒼間。靑襟濟濟吾鄕國。兒郞偉拋樑上。山月江風無盡藏。欲敎胷次一般淸。須向靈臺消翳障。兒郞偉拋樑下。巋然同樂村中社。名存實擧望於斯。可見徽條楣揭也。伏願上樑之後。神呵不祥。地孕其秀。家誦戶弦之風作。入孝出悌之俗成。正學明而詖淫不行。蔚乎羽翼斯道。渝習警而繩墨自飭。脫然洗濯俗流。實工之暇。科業亦通。蓮桂之迭擢爭闡。賢才之興。治化以賴。山川之將雨出雲。同我所尊。多士終古。
書堂。實權輿於謀劂。故附于卷末。以示先父老殫心於斯文。而若里社及移建時樑頌。汗漫姑闕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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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선先傳했던->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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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산서원 崑山書院
위치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신유로 60 (약목면)
1773년(영조 49)에 묘우로 건립된 뒤 1783년(정조 7)에 신우덕(申祐德), 신익황(申益愰)을 봉안하고 서원으로 승격되어 강학을 한 곳이다. 그러나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빈터로 남아 있다가 최근 2004년 이 터에 다시 곤산서원이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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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집 제8권 / 묘갈(墓碣) / 부총관 증 병조 판서 신공 묘갈명〔副摠管贈兵曹判書申公墓碣銘〕
문(文)과 무(武)는 두 길이지만 무관(武官)으로 유자의 행동을 한 자가 있으니, 고(故) 부총관(副摠管) 신명인(申命仁)은 자가 존오(存吾)인데, 바로 그런 사람이다. 공은 본관이 평산(平山)이며 고려 태사 장절공(壯節公) 휘 숭겸(崇謙)이 비조이다. 태조가 동수(桐藪) 전투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숭겸은 기신(紀信)이 초나라를 속였던 것처럼 하여 충성을 바쳤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세습하였다. 휘 군평(君平)은 집현전 학사를 지냈으며 청렴하고 정직하였으며 절개를 드날렸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제정공(齊靖公) 휘 효창(孝昌)은 개국공신으로 녹훈(錄勳)되었으며 전서(典書)를 지냈다. 휘 수하(壽遐)는 음보로 찰방(察訪)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처음으로 남쪽으로 내려와 인동(仁同)에 살았는데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계(誡)는 참의로 추증되었고 은거생활하면서 의로운 일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토적(土賊)이 제멋대로 노략질하면서 그 마을을 에워쌌으나 들어가지 않고 “어진 사람이 사는 곳이다.”고 하였다. 조부 우덕(祐德)은 참판으로 추증되었으며 젊어서 장여헌(張旅軒 장현광) 문하에서 공부하여 인정을 깊이 받았고 죽고 난 후에는 서원에 배향되었다. 부친 근(漌)은 부사를 지냈으며 판돈녕 부사(判敦寧府事)로 추층되었다. 첫째 부인은 성주(星州) 이상지(李尙志)의 따님이며, 둘째 부인은 첨정 야로(冶罏) 송발(宋潑)의 따님이다. 공은 송씨 소생으로 효종 경인년(1650, 효종 원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지가 특출하여 보통 아이와 달랐고, 학문과 재예가 숙성했으며, 또 서법(書法)에 정통하였다.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는 합격하였지만 성시(省試)에서만은 번번이 떨어져 마침내 붓을 던졌다. 숙종 계유년(1693, 숙종19)에 무과에 합격하여 내직으로는 선전관(宣傳官), 훈련주부(訓鍊主簿), 판관(判官), 도총도사(都摠都事), 첨정(僉正), 경력(經歷), 부정(副正), 오위장 일겸장(五衛將一兼將), 내금위장(內禁衛將), 금군 별장(禁軍別將),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ㆍ수어 중군(守禦中軍)을, 외직으로는 죽산 부사(竹山府使), 무산 부사(茂山府使), 나주 영장(羅州營將), 경주 영장(慶州營將), 안흥 방어사(安興防禦使), 경상 수사(慶尙水使)ㆍ남병사 겸 북청 부사(南兵使兼北靑府使), 전라 병사(全羅兵使)를 역임하였으니 그의 이력이다. 나이 86세 때인 영조 을묘년(1735, 영조11) 4월 1일에 정침에서 별세하였으며 인동부 서쪽 두만산(斗巒山) 기슭 정좌(丁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남필(南畢)의 따님이다. 공보다 먼저 죽었으며 묘는 공의 묘 남쪽 산기슭 축좌(丑坐)에 있다. 아들 익흠(益欽)이 원종공신이기 때문에 공을 자헌대부 병조 판서로 추증하였다.
공은 훤칠한 체구와 뛰어난 자질로 대단한 기량이 있었고 일찍부터 문학을 공부하였으며 내행(內行 집에 있을 때의 처신)도 겸비하였다. 무신년(1668, 현종9)에 어머니 상을, 경술년(1670, 현종11)에 아버지 상을 연이어 당하였다. 초상이 난 뒤부터 장례를 치르는 모든 절차에 정성과 예절을 다하였으며, 6년간 상제로 있으면서 하루같이 슬퍼하였다. 일찍 고아가 되고 만년에 영달하였으나 녹봉이 부모 생전에 미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매번 제삿날을 만나면 반드시 직접 음식을 마련하여 자신의 정성을 바쳤다. 매일 아침 가묘에 가서 문안 인사를 올렸는데 비바람이 와도 그치지 않았다. 여러 형제와 살면서 식사할 때는 반드시 밥상을 함께하고 재물은 곳간을 달리하지 않았으며, 또 이러한 마음을 친척과 돈독히 지내고 곤궁한 사람을 돌보아주는 데까지 미루어나갔다. 공이 관직에 있을 때는 어질고 분명하고 청렴하고 부지런하였다. 도둑을 징치(懲治)할 때는 엄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상하게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타이르고 농사에 힘쓰라고 인도하여 왕왕 교화시켜 선량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공이 무산 부사로 재직 시에는 성 안에 원래 우물이 없었으므로 성 서쪽에서 물을 길어와 저수지를 만들어 백성을 편하게 하였고 또 무기를 정비하고 저축을 늘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였다.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니 백성은 그 은혜를 생각하였다. 임기가 차서 돌아가게 되자 백성이 머물기를 청했으나 그렇게 되지 못하여 송덕비를 세워 그리워하였다. 안흥에서 근무할 때는 바닷가에 태풍이 몰아쳐 백성이 피해를 입고 이산(離散)할 지경이 되자, 다른 지역의 곡식을 옮겨 오고 녹봉을 털어 구제하여 온 경내가 그 덕에 온전히 살게 되었는데 임금이 비단 옷감 한 벌을 하사하여 공을 총애하였다. 도적을 잡는 것이 귀신같다고 하여 경주 영장으로 특별히 임명되었으며, 또 안흥에서의 뛰어난 공적으로 구마(廐馬)가 추가로 하사되었다. 참으로 공이 일마다 정성을 다 기울이지 않았으면 어떻게 임금의 은혜와 포창을 받는 것이 여기에 까지 이르렀겠는가? 공이 수영(水營)에서 근무할 때는 군적(軍籍)을 조사하고 전함을 수선하였는데 이는 편안할 때일수록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첩이 관아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암행 어사가 행장을 수색하였는데 짐 꾸러미가 텅 비어 있어 매우 감탄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청빈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공이 함경도 감영에서 조정으로 돌아올 때 적신(賊臣) 유봉휘(柳鳳輝) 등이 나라의 근본을 흔들며 대신을 모함하고 착한 사람을 죽였으니 바로 신임사화이다. 당시 옥사(獄事)가 한참이고 이광좌(李光佐)가 추관(推官)으로 있었다. 공이 탄식하면서 “나 같은 무부(武夫)는 조정을 바로잡을 수 없으니 어찌 차마 여러 소인배들과 조정에 함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마침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무관으로서 이와 같으니 아마도 지난 역사에서 보기 힘든 자가 아니겠는가?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장암(丈巖) 정문경공(鄭文敬公)과 단암(丹巖) 민문충공(閔文忠公)이 서로 이어서 재상이 되었으며 공을 부총관으로 발탁하였다. 공이 조정에 나가 두 분을 모시고 정청(廷請)에서 유봉휘와 이광좌 등을 죽이고자 하였다. 한포재(寒圃齋) 이문충공(李文忠公)이 공을 장군 재목이라고 추천한 적이 있고, 이때에 병조 판서 조도빈(趙道彬)이 또 분명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연중(筵中)에서 건의하여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특별히 임명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광좌가 대간(臺諫)을 사주해서 공의 죄를 논해 파직시키도록 하였다. 수어 중군에 임명되었을 때 흉당이 은밀히 규합하여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자, 공은 마침내 세상에 뜻을 끊고 시골집으로 돌아와 매일 경전과 역사서로 즐기면서 후배를 이끌었는데 찾아와 배우는 자가 많았다. 간간이 짚신에 시골 사람 옷차림으로 밭고랑을 일구고 채마밭에 물을 주면서 마음대로 지냈다. 무신년(1728, 영조4)에 역란(逆亂 무신란)이 크게 일어나자 호남과 영남이 요동치자 공은 북쪽을 바라보면서 근심과 울분을 견디지 못하였다. 아들 익흠이 충주 영장으로 진영(陣營)에 가려던 차에 하룻밤 틈을 내어 3백 리를 달려와서 안부를 살피러 왔다. 공이 노하여 꾸짖기를 “너는 나라를 지키는 신하이다. 지금이 어떻게 문안 하러 올 때란 말인가. 빨리 진영으로 돌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익흠은 눈물을 흘리면서 인사를 올리고 진영으로 되돌아갔으며 마침내 공을 세워 훈신이 되었다. 의로운 방법의 가르침에서 또한 공이 품고 있던 마음을 알기에 충분하다.
아들 둘 인데, 장남 익삼(益三)은 군수를 지냈으며, 차남이 바로 익흠이다. 딸 둘은 성찬징(成纘徵)과 김덕용(金德容)에게 각각 시집갔다. 하항(河沆)과 이두(李枓) 그리고 현감 조상완(趙尙緩)의 부인이 된 딸은 측실 소생이다. 손자로 부사인 흡(), 양자로 들어간 상(瑺), 박(璞)이 있고, 손녀는 이후승(李後承)에게 시집갔으며, 측실 소생은 이경림(李慶臨)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장남 소생이다. 학(), 손녀는 이경화(李敬和)와 장수범(張受範)에게 각각 시집갔으며, 측실 소생 혁()은 모두 차남 소생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많아서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이 집안에 있을 때는 의를 행하였고 관직에 있을 때는 치적이 있는 행정을 하여 실로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청렴과 검약으로 자신을 단속하였으며 복장과 음식 그리고 수레 등은 한미한 집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일찍이 자식에게 훈계하기를 “우리 형제와 숙질은 다섯 차례나 곤절(閫節 병사(兵使))을 맡았다. 가득차면 경계해야 하며 실속 없이 겉만 화려한 것을 억제해야 한다. 타고난 본바탕을 독실하게 해야지 본분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또 경생(經生)이나 학사(學士)도 잘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또 그 부침은 실로 세도가 쇠퇴하고 융성해지는 것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으니, 더욱 칭찬할 따름이다. 공의 묘는 아직도 비석이 없다. 5대손 주응(周應)은 나를 찾아와 공부하였으며 나에게 묘갈명을 구하는 것이 매우 간절하였다. 형편없는 글솜씨를 망각하고 삼가 그의 부탁에 부응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오, 공이여 / 於乎公乎
유자는 무관의 일을 하기 어렵고 / 儒不能武
무관은 유자의 일을 하기 어려운데 / 武不能儒
무관이면서 또 유자였으니 / 旣武旣儒
나의 명은 거짓이 아니라네 / 我銘不誣
[주-D001] 신공 : 신명인(申命仁, 1650~1735)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존오(存吾)이다.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다.[주-D002] 동수(桐藪) 전투 : 공산(公山) 전투라고 한다. 927년(고려 태조10)에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팔공산(八公山) 일대에서 후백제 견훤(甄萱)과 태조 왕건(王建) 사이에 벌어졌던 큰 전투. 당시 태조는 견훤의 군대에 포위당하여 사태가 매우 위급하였다. 신숭겸은 대장으로서 용모가 태조와 흡사하여 자신이 대신 죽겠다고 청하고는 태조 수레를 타고 나가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태조는 그 덕분에 위기를 벗어났다.[주-D003] 기신(紀信)이 초나라를 속였던 : 기신은 한(漢)나라의 장군이다. 한 고조(漢高祖)가 형양(滎陽)에서 포위당해 사태가 위급해졌을 때, 기신이 꾀를 내어 거짓 한왕(漢王)이라 칭하면서 초군(楚軍)을 속이고 고조(高祖)를 무사히 탈출시킨 일을 말한다.[주-D004] 인동(仁同) : 경상북도 구미시(龜尾市) 인동동(仁同洞)을 말한다.[주-D005] 서원에 배향되었다 :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에 있는 곤산서원(崑山書院)에서 신우덕(申祐德, 1581~1653)을 배향한 것을 말한다. 신우덕은 자가 여가(汝嘉)이며 20대에 장현광 문하에서 수학하였다.[주-D006] 성시(省試) : 지방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서울에 모아서 거행하던 등용 시험, 복시(覆試), 회시(會試)라고도 한다.[주-D007] 구마(廐馬) : 어용(御用)을 위하여 기르는 말. 일반 군마(軍馬)와 구별되며 임금이 공적(功績)이 있는 신하에게 하사(下賜)하는 물품으로도 쓰임.[주-D008] 유봉휘(柳鳳輝) : 1659~1727.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계창(季昌), 호는 만암(晩庵)이다. 우의정을 역임하였으며 소론 강경파에 속한다.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킨 주동자라는 노론의 탄핵으로 함경북도 경흥(慶興)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주-D009] 이광좌(李光佐) : 1674~174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상보(尙輔), 호는 운곡(雲谷)이다. 항복(恒福)의 현손이다.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소론에 속한다.[주-D010] 정문경공(鄭文敬公) : 정호(鄭澔, 1648~1736)로,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 시호는 문경이다. 정철(鄭澈)의 5대손이다.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 《장암집(丈巖集)》이 있다.[주-D011] 민문충공(閔文忠公) : 민진원(閔鎭遠, 1664~1736)으로,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 시호는 문충이다. 민유중(閔維重)의 아들이며 송시열의 제자이다. 좌의정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 《단암주의(丹巖奏議)》, 《단암만록(丹巖漫錄)》이 있다.[주-D012] 정청(廷請) :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백관이 궁정에 나아가 의견을 올리고 하교를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주-D013] 이문충공(李文忠公) : 이건명(李健命, 1663~1722)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이다. 좌의정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 《한포재집》이 있다. 시호가 충민(忠愍)인데, 여기서는 문충(文忠)이라고 하였으니 착오가 있는 듯하다.[주-D014] 조도빈(趙道彬) : 1665~1729.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낙보(樂甫), 호는 수와(睡窩)이다. 병조 판서와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임재완 (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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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참풍수지리학회
종교건축 및 고건축
崑山書院(곤산서원)
融芝(주정호) 추천 0 조회 91 10.07.31 19:43 댓글 5
崑山書院(곤산서원)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1134번지 소재
2010년 7월 31일 다녀왔습니다. (구미 영업하고 오던길에~)
곤산서원은 진정공의 증손자 이신 극재공(익황)의 제자들과 유림에서 건립 하여
진정공과 극재공을 모셔 왔는데 1871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훼철 되었다가
2003~4년 약목종중에서 이건 복원 하였다. 경도사와 영모제 그리고 외삼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도사에 두분의 신주를 모시고 영모제에는 진정공의 후손 다수의 신주를 봉안 하였다.
신익황(申益愰)선생에 대하여
1672(현종 13)∼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명중(明仲), 호는 극재(克齋).
아버지는 수사 명전(命全)이며 그의 조상은 원래 개성에서 살다가 중간에 서울로 옮기고,
5대조 때 경상북도 인동으로 옮겼다.
일찍이 박번(朴蕃)에게 글을 배워 진작 학문의 성취를 보았고,
21세에 향시에 합격한 뒤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재주를 아껴 병조에서 과거에 응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사양하였고,
그 학덕으로 인하여 37세 때 천거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또, 46세 때에는 천거에 의하여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가 되었으나
왕에게 나아가 사은(謝恩)하고 바로 돌아왔다. 그의 학문은 이현일(李玄逸)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27세 되던 해 5월에 이현일을 광양의 배소로 찾아본 것을 시초로, 여러 차례 면대하여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전후 열 차례의 서면 질의를 통한 학문적인 문의가 있었다.
이들 질문과 토의의 내용은 유학 전반에 걸쳐 광범하게 행해졌으나,
특히 문제삼은 것은 당시 학계의 주요관심사였던 이(理)와 기(氣),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문제였다.
이현일을 만나기 이전의 그는 이들 문제에 대하여 이황(李滉)의 설보다는 이이(李珥)의 설에 기울어져 있었다.
즉, 이와 기를 분개(分開)하여 보기보다는 혼륜(渾淪)한 입장에서 보았고,
사단과 칠정은 근원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사단은 칠정의 선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기의 발동(發動)에 있어서도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 아니라,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에 찬성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이현일과의 학문적 교섭을 통하여 점차 이황·이이의 사상을 동등한 차원에서 인정하려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거기에서 더욱 철저한 논의를 거쳐 마침내 확연히 이이를 버리고
이황의 견지를 찬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를 한갓 무정의(無情意)·무조작(無造作)의 추상적인 사물(死物)이 아니라,
은연 중에 능동(能動) 능발(能發)을 간직한 것이라 하고, 이와 기를 확연히 둘로 갈라서 보고,
이와 기가 한 물건(理氣爲一物)이라고 보는 이이의 주장에 반대하여,
“이와 기를 구별하지 않고 한 물건이라고 하면,
마침내 욕(欲)을 이라 하고 기를 성(性)이라고 인정하게 된다.”고 하고,
“이와 기를 확연히 나누고 이가 선한 것임을 알 때 비로소 윤리가 성립된다.”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설에 있어서도 사단이 칠정의 일부분,
즉 칠정이 발하여 절도에 맞게 된 것(中節)이라는 주기설(主氣說)을 반대하고,
사단과 칠정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사단은 도심이고, 칠정은 인심이라고 하였다.
그가 학문적으로 교유한 사람으로는 권두인(權斗寅)·권두경(權斗經)·이재(李栽)·정사신(丁思愼)·권중도(權重道) 등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었다.
그가 죽은 뒤 43년이 지난 1765년(영조 41)에 아들 염(琰)으로 인하여 사헌부대사헌에 추증되었고,
1784년(정조 8)에 사림들이 모여 그의 위패를 곤산서원(崑山書院)에 봉안하였다.
편저에는 《극재집》·《운곡도산휘음 雲谷陶山徽音》·《경재집해 敬齋集解》·
《이기성정통간도 理氣性情通看圖》·《동국승경와유록 東國勝景臥遊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