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등 외 2편
이도훈
가끔 배는 등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날카로운 면으로 자르는 칼은
사실 칼등의 힘으로 두 동강을 얻는다
쉽게 나누어진 것은 칼날만 보았겠지만
시퍼런 칼날을 품고 버틴 것들은
칼등을 볼 수 있었을 것,
갈라진다는 것은 쉽게 나누어지는 족속들
어쩜, 날카로운 칼날이 아니어도
칼등의 위협으로 분열하는
세포와 같은 것.
우리는 칼등에 앉아 있는,
칼날 쪽으로 옮겨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존재들
결정짓는 것은 칼날이지만
선뜻 칼날에 설 수 없는 시야視野 같은 것.
쉽게 얻어지는 답들을 보며
등을 다시 한번 갈아가는 것.
등 뒤를 넘겨보던 호기심이
근심스레 연명해가는 줄타기 같은 것.
칼날이란
칼등의 비스듬한 양보이고
늘 칼날 쪽으로 미끄러지는 중이다.
모래가 비스듬한 해안을 따라 미끄러지고 쌓이듯
잘 여문 바람이 늦가을 매달린 것들을 옮겨 다니듯,
날카로운 결정 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중이다
등을 밀어 올리는 배부른 질문들은
배고픈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문
문을 보면 드나드는
존재의 크기를 알 수 있다.
아무리 긴 그림자를 가졌어도
막아서는 법이 없는 문.
손잡이가 달려있거나 달려있지 않은 것은
문을 드나드는 방식의 차이.
사람의 문은 늘 닫혀있었고
뱀의 문은 열려있었다.
윈도우,
안쪽은 넓어질수록 문은 좁아진다
클릭으로 친교하고 클릭으로 절교한다.
눈만 뜨고도 드나들 수 있는 문
똑똑 숫자를 식자하면
늘 닫혔던 습관이 회전문처럼 열렸다.
그 안은 집과 도서관과 무수한 각자의 현실들
문을 열면 또 다른 문
우연의 고리들이 달린 아이콘.
그 세상에서 우리는 늘 주인이었다.
허상의 집을 빠져나오면서 스르르
뱀의 허물처럼 닫히는 문
뱀은 자신의 몸에 여닫는 탈피의 문이 있다.
숫자 사이를 지나친 허물의 흔적
닫혀있는 문에 비친 고독의 버퍼링 중이다.
무심히 랙이 걸린다.
사과의 채굴
한 입 베어 먹고 잊은 사과에
개미 떼가 붙어있다
뜨거운 햇살이었다.
하얀 속살을
침이 흐르도록 베어 문 기억이 선명하다.
그새 사과는 꽤 많은 양의 채굴을 당한 듯 헐렁해졌다.
한쪽 무게를 잃은 지구 내부의
표본 같은 모습이다
사과는 얇은 껍질에 둘러싸인
달콤하고 신맛 나는 지층
햇빛의 각도를 재는 시시각각의 각도기쯤 될 것이다
아직 익지 않은 파란 쪽은
햇살을 피해 숨은 달의 뒷면 같은 곳이다
끝까지 먹이 치우지 못한 것들엔
저렇게 검은색 묻는다.
껍질이 허물었으면
그 알맹이를 남가지 말 일이다.
사과는 여름 내내 태양을 채굴한다.
그 일로 태양은 가끔 흐린 날이 되기도 한다.
그런 사과를 채굴하는
잡식의 존재들이 있다.
― 이도훈 시집, 『봄날은 십 분 늦은 무늬를 갖고 있다』 (도서출판 도훈 / 2022)
이도훈
2015년 월간 《시와표현》 등단. 2020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2018년, 2022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2021년, 2022년 송산도서관 상주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