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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身泛泛水天間(일신범범수천간)-물 따라 하늘 따라 떠도는 이 몸
萬里太洋幾往還(만리태양기왕환)-만리길 태평양을 몇 번 오갔나
到處尋常形勝地(도처심상형성지)-어느 곳 가서든지 보잘 것 없고
萬里長在漢南山(만리장재한남산)-꿈속에도 내나라 한남산일세
願與三千萬俱爲(원여삼천만구위)-원하노니 삼천만으로 더불어
有國民暮年江海(유국민모년강해)-나라 있는 백성 되어 만년에는 자연으로
上歸作一閒人(상귀작일한인)-돌아가 한가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이승만(李承晩)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으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을까?
6.25를 며칠 앞두고 그때를 생각하면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긴 감회(感懷)로
이 글을 쓴다.
필자는 6.25한국전쟁의 폭격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이다.
비행기 폭격을 3번이나 당했다.
진주(晉州)를 점령한 인민군들이 집에 들어와 다발총을 겨누며 강제로 밥을 지어달라고 하였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갔다.
6.25를 회고하고 한국 현대사를 말할 때 이승만과 박정희 두 인물을 빼고 말할 수 없다.
필자는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 얼음처럼 차가운 마음으로 자존심을 걸고 두 인물을 평가한다.
좋던 싫던 한국 현대사는 두 인물을 빼면 역사를 말할 수가 없다.
이 장(章)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내용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에 어떤 인물인가?
개인에게 물으면 이승만을 보는 시각이 각각 다르다.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요 반일주의자 이기 때문에
친북좌파나 친일파 성향의 사람들은 “나쁜 이승만”으로 평가를 한다.
또 정치 집단이나 정치인들의 이념 성향에 따라서 “좋은 이승만 나쁜 이승만”으로
구분된다.
아래는 이승만에 대한 신문기사다.
필자가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1980년부터 이승만에 관한 기사를 눈에 보이는
대로 스크랩(scrap)하여 정리한 것이다.
물론 신문도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글을 쓰고 또 각신문사의 윤리강령과 이념성향에 따라 기사내용이 100% 중립이라 볼 수 없다.
그래도 가장 객관적(客觀的)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언론이기 때문에 신문에
기재된 “이승만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이승만 자료”를 정리해본 이유는
*대한민국은 건국기념일이 정해져 있지 않다.
임시정부기준으로 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선포일로 해야 한다 로
국론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건국대통령이 없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도 이승만이고
헌법에 명시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도 이승만이다.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제헌국회 초대 의장도 이승만이다.
그런데 좌파 우파의 이념대립으로 건국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좌파가 이승만을 인정 안하기 때문이다.
참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건국대통령의 기념관도 없다.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이승만별장뒤에 초라한 기념관이 있지만 아는 국민이 몇이나 될까
대덕 지방자치가 1시간 강연료로 1550만원을 쓰면서 종로구 이화장 옆에
건국대통령 기념관 지을 돈은 없는가?
건국대통령의 동상도 없다.
왜 광화문 광장에 조선시대의 세종대왕 이순신장군 동상은 세우면서 현실을 사는
국가인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동상은 없는가?
미국을 위시한 다른 나라에 다 있는 건국대통령 사진이 박힌 화폐도 없다.
흑석동 현충원 이승만 전 대통령 묘지에 건국대통령을 추모하는 범국민의 “추모비”
도 없다.
좌파 우파 이념 갈등으로 빚어진 사실에 “부끄럽게도 근본 없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외국 친구들과 자기나라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에
건국일 건국대통령에 대하여 무엇이라 설명할 것인가?
마치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게 태어나서 자기의 뿌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과 같다.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다.
어른들은 물론 자기 자녀들에게 물어 보아라 무엇이라 대답하는가?
그래서 가장 객관적인 언론(신문 TV)은 이승만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지
자료를 모아 본 것이다.
언론도 못 믿고 개개인도 의견이 다르면 그야말로 개판인 것이다.
신문기사는 무어라 말하고 있는가?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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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6.4. 서울신문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이승만의 정읍발언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있은 한 강연에서
그가 마음 속에 품어왔던 자율정부수립론 즉 남한 단독 정부를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를 바란다.】
▲1960. 4. 27. 동아일보
이승만 대통령 하야 담화문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계속---
▲1990.05.01. 도올 김용옥이 쓴책(필자가 읽은 책이다)
이승만은 꼴릴 힘도 없고 양갈보하고 산다
김욕옥이 쓴 책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243~245 페이지중 통나무
우리민족은 그노망끼 들대로 든, 후란체스카 갈보국모하고 꼴릴 힘도 없는
그 칠순 노인네를 민족의 영웅, 민족의 지도자, 항일투쟁의 심볼,
그리고 위대한 대통령으로 12년간이나 추앙했던 것이다.
오지리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난 웨이트레스(접대부),
후란체스카란 양갈보 하나 꿰차고 살았던 미국노인네!
(洋이란 서양사람의 뜻이고 갈보(蝎甫)란 조선조에서 천한계급의 여자를 불렀던
보통 칭호)
▲2006. 2. 28 국립도서관 유영익저 연세대학교출판부
이승만대통령의 재평가
이승만의 유가(儒家) 경전(經典) 공부의 경지는 최상급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이승만이 지은 시(詩)에는 당음(唐音) 고문진보(古文眞寶) 등의 문학서는 물론
사기(史記) 한서(漢書) 장자(莊子) 열자(列子)등 역사서와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가
두루 인용되어 있었다.
▲2007.01.13. 조선일보
이승만 대통령 호(號) “우남(雩南)”의 뜻
우(雩)-기우제 우 남(南)-남녘남
고종 12년 때인 3살 때 한양(서울)으로 이사와 지금의 서울역 근처
우수현(雩守峴)에서 스무 살까지 살았다.
우수현(雩守峴)은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에 기우제를 지내는 마루턱이었다.
그의 아호 우남(雩南)도 이 시절을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우수현밑 남쪽의 오막살이 집에서 공부를 하면서 우수현의 "雩"자와 남쪽인
"南"자를 따서 "雩南"이란 아호를 지은 것이다.
우남(雩南)-우수현(雩守峴)의 남쪽에 살았다는 뜻이다
특별한 의미가 없는 호(號)다
특별한 의미가 없는데 의미가 있다.
▲2010.07.18. 동아일보
건국(建國)대통령 동상이 없는 나라
광화문광장에는 세종대왕상 이순신 장군상이 서 있는 조선왕조만 건재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냉전 질서가 자리 잡던 혼란기에 이승만 같은
걸출한 인물이 없었다면 과연 대한민국이 바로 서고 3년 전쟁에서 나라를 지킬
수 있었을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2010.07.19. 데일리안
“당신께서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건국하셨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45주기 추도식이 19일 서울 현충원에서 독립운동관련단체장
및 광복회원, (사)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회장 강영훈),
유족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2010.07.22. 조선일보
“이승만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이 없었다.”는
로버트 올리브의 말을 상기하며, 우리가 좋건 나쁘건 조상을 숭배하듯이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11.4.18. 조선일보 선인장 카페 매니저
건국의 이승만 4.19의 이승만 하나 될 때
이제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역사적 공로와 역사적 부채를 정당하게 평가 받으며
대한민국 현대사 속에서 제 자리를 찾도록 해 줘야 한다
▲2011.04.19. 조선일보
건국(建國)의 이승만'과 '4·19의 이승만' 하나 될 때
이승만 전 대통령이 4·19 혁명으로 하야한 후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눈을 감은
지도 46년이 흘렀다. 이제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역사적 공로와 역사적 부채를
정당하게 평가받으며 대한민국 현대사 속에서 제자리를 찾도록 해줘야 한다.
대한민국이 선진(先進)으로 가는 새 시대를 열려면 공산체제에 맞서 자유를 선택한
이승만의 건국을 평가하는 세력과 이승만의 독재에 맞서 민주를 외친 4·19세력이
화해를 넘어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가 돼야 한다.
▲2011.04.21. 조선일보
광화문 한복판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면 이승만 대통령 최고 업적 될 것
더이상 세상 사람들은 "철학이 없다" 고비웃지 않을 것
이인수 박사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하와이 망명 시절에 양자로 입적됐다.
전주이씨(李氏) 문중의 결정이었다. 대학을 졸업했고, 영어를 할 줄 알고, 미혼이고,
좋은 집안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맞는 사람이었다.
그 운명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2012.07.20. 동아일보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비 비문을 쓴 서예가 정하건 선생
“건국 대통령”이라 썼는데 정치권 반발 심해지자 “초대 대통령”으로 재작업
언젠가는 '건국'字 쓰여진묘비 다시 꺼내 세우고파
▲2012.08.22. 조선일보
아데나워와 이승만
독일에서 '독일 통일의 아버지'는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대한민국이 통일되면 통일의 아버지는 이승만 대통령이 되는 것이고
북한이 통일하면 김일성이 통일의 아버지다.
그것은 논리나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현실의 문제다.
▲2012.10.26. 조선일보
'족집게' 이승만… 일본의 美 침략·패망 모두 예견
최근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원장 류석춘)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중반
미국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립운동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영문 사료를 발굴해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태평양전쟁 기간 중 이미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독립 이후 세워질 한국 정부의 헌법제정과 선거 방법에 대해 구상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2013.02.08. 조선일보
개화기 한국에 왔던 선교사 중에서도 캐나다 출신 제임스 게일이 있었다.
서울 YMCA를 세우고 이승만의 미국 유학을 주선해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성장하는 데 힘을 보탠 것도 그였다.
▲2013.03.21. 조선일보
"左右 시선 말고, 인간 이승만을 보여 주고 싶었다"
"퇴임 후 15년 역사공부 결과물… 생전 이승만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로서
사명감이랄까
그의 정권, 권위주의 체제지 독재는 아니었다"
이승만 평전' 쓴 오인환 前 공보처 장관
▲2013.05.28. 조선일보
6·25 停戰직전… 이승만은 아이젠하워를 서로를 극도로 불신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에게 북진 통일을 위한 한국군 단독 작전 가능성을
시사하는가
하면, 정전협정에 찬성하는 국제 지도자들에게
'나약함을 공개적으로 자백한다(open confession of weakness)'고 비난했다.
정전 전후 아이젠하워 대통령 및 참전국 지도자들과 겪은 갈등이 실감 나게
드러나는 것이다.
▲2013.07.19. 경기일보
이승만 前 대통령 하와이서 별세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1965년 7월19일 하와이에서 별세했다.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영어 교사가 되었다가
1897년에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 협회’ 간부로 활약했다.
▲2013.10.05. 뉴시스
내 국적은 일본” 이승만 美체류시절 자필 국적표기
일본의 강제합병으로 식민지 국민으로 전락한 시점이기는 하지만 하와이 등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펼친 그가 신상 정보난에 국적을 일본으로
밝힌 것은 적잖이 흥미롭다.
▲2013.03.19. 조선일보
이승만 외교가 獨立 보장한 카이로선언
(1943년 연합국 美·英·中이 한국 독립을 보장) 이끌어"
원로 역사학자 '백년전쟁 논란'에 일침…
"좌파 역사가들 김일성 무장투쟁만 神話化"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
▲2014.03.25. 조선일보
건국대통령기념관, 통일 위해서도 긴요
김일주 前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이 인기 검색어 상위를 점하고 있다. 종북 좌파들이 앵무새처럼 떠드는 '분단 원흉 이승만'의 오해가 풀릴 수 있을 것 같아 반갑다. 대한민국 중심의 통일만 된다면 이승만의 건국은 옳았고 김일성의 소련 위성국가는 틀렸다는 것이 만천하에 증명되기 때문이다.
▲2014.07.18. 조선일보
이승만이라면 동북아(東北亞) 어떻게 헤쳐갔을까
미국을 '의심하면서도 미국과 협력'하고
일본을 '경계하면서도 일본과 대화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이승만이라면
오늘 동북아를 어떻게 헤쳐갔을까.
▲2014.08.22. 조선일보
이승만을 난도질하고 유관순까지 죽인 좌파(左派) 역사학자들
▲2014.11.04. 조선일보
이승만과 김구. 1945년 8월 광복 후 이 두 거인(巨人)은 서로 등을 보이며
반대 방향으로 갔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으로,
김구는 '단독 정권(대한민국)' 수립 반대로.
그리고 70년이 흘렀다.
남은 것은 이승만 노선과 김일성 노선의 둘뿐
김구·김규식·남북협상파 노선은 휴전선 양쪽에서 다 사라졌다.
류근일 언론인, 뉴데일리 고문
▲2014.11.13. 조선일보
이승만, 4·19 부상 학생에게 “장하다” 격려했다
이승만 대통령 하면 '독재자'란 꼬리표가 따라붙는 국내와 달리, 미국 동포 사회에선
이승만 대통령 추모사업이 활발하다.
뉴욕서 '建國 대통령 재조명' 강연
▲2014.11.14. 조선일보
이승만의 선물 태평양(太平洋)은 우리 바다'
대통령에 오른 지 1년도 안 된 1949년 3월 18일 미국을 비롯한 12개국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지역 집단 안보 체제가 결성되자 이승만은 즉각
중국의 장개석 총통 및 필리핀의 키리노 대통령과 더불어 '태평양동맹'이
결성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6·25전쟁을 끝맺으며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해
1953년 마침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좌절한 태평양동맹을 한국과 미국 단위에서 구현한 외교적 쾌거였다.
▲2014.11.18. 조선일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친필로 쓴 '자유당중앙당부(自由黨中央黨部)' 글씨가 가장 눈에 띈다. 1951년 12월 자유당 창당 당시 직접 쓴 당사 현판 원본이다. 폭 46㎝, 길이 185㎝. 굵고 대범한 필획과 글자 짜임새에서 강한 권력의지가 엿보인다. 이동국 서예부장은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현장이었다는 점에서 사료 가치와 상징성이 크다"고 했다. 추정가 3500만원.
▲2014.11.19. 조선일보
이승만 대통령은 뛰어난 서예가다
부석사(浮石寺) 편액 이승만 대통령이 남긴 글씨다.
고성 청간정(淸澗亭) 대사관저 족자 화락(和樂) 파로호(破虜湖)
해인사 해인대도량(海印大道場) 등 전국적으로 많은 붓글씨가 남아 있다
▲2014.11.22. 조선일보
세계사적으로 봐야 '겨우' 윤곽이 보이는 리더, 이승만
"독재자 이승만, 미국 괴뢰 도당을 태평양 깊은 물에 장사 지냅시다!"
6·25전쟁의 좌익 치하에서 당시 열 살짜리 초등학생이었던 인보길 소년이 어른들의
꼬임에 빠져 목 놓아 외쳤던 웅변의 마지막 대목이다.
그로부터 오십 년이 흐른 지금 인보길 선생은 이승만 연구소를 창립하여 이승만의
업적과 사상을 연구하고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2015.01.03. 조선일보
이승만의 功過
민주주의 파괴자?
발췌개헌·사사오입개헌 등 국민들 빈축 산 것 있지만
'건국 공로자' 평가도 해야
▲2015.01.30. 조선일보
광복 직후 대통령 지지도 여론조사표
이승만 431
김구 293
여운형 78
이승만은 곧바로 6월 10~11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전국대회를 개최했다.
독촉국민회는 이승만의 독촉과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한 조직이었다. 이 대회에서 이승만은 총재에 추대되면서 우익 세력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부총재는 김구였다. 11일 이승만의 연설은 사실상 승전가와 같았다.
▲2015.02.13. 조선일보
한성감옥 갇혀 성경 읽던 '크리스천 이승만' 재조명
"우리 개신교계는 그동안 이승만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제 강연은 '이승만 없는 대한민국 건국' '기독교 없는 이승만'이 가능했을까,
생각할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욕먹을 각오 하고 시작한 일인데 의외로 호응이 큽니다."
▲2015.02.13. 조선일보
어째서 이승만과 박정희가 '歷史의 가해자'인가?
1965년생인 정청래 의원은 이승만 정권 때는 세상에 없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안타깝게도' 탄압받을 나이가 안 됐다.
그런 개인적 체험 없이도 '유대인의 히틀러 묘소 참배'니
'우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가서 절하는 것'에 비유하는 걸 보면 그의 능력은
한쪽으로 몹시 발달했다. 최보식 선임기자
▲2015.02.13. 조선일보
[강천석 칼럼] 어이없는 사람 어이없는 세상
새정치연합 정청래 최고위원의 경우는 비정상의 기준을 곱씹게 만든다.
자기네 당 문재인 대표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것을 비판하며
난데없이 히틀러와 일왕(日王)을 끌어왔다.
"독일이 유태인 학살에 사과했다 해서 히틀러 묘소에 참배할 수 있겠느냐"
"일왕이 우리에게 사과했다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고 일왕에게 절을 할 수 있느냐"고 했다.
▲2015.02.26. 조선일보
유엔(1948년 파리 총회) '대한민국 승인' 기적 뒤엔…
이승만·張勉 '바티칸 공략 作戰'
이승만 대통령은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 선언을 빌미로 '남북 분단의 주범'으로 몰렸었다. 하지만 냉전 붕괴 후 발굴된 새로운 사료는 오설(誤說)을 허물었다.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먼저 북한에 정부를 세울 것을 지시했다. 중국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 팔로군이 국민당군에 밀리자, 이듬해 5월 스탈린은 북한을 팔로군의 후방기지로 제공해서 분단을 고착화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2015.03.23. 조선일보
이승만 탄신 140주년·서거 50주기… '梨花莊 안주인' 조혜자씨
"좌파 진영이 '백년 전쟁'이라며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아버님(이승만)을 공격했지만,
이는 진보·보수의 대립이 아니라 대한민국 세력과 반(反)대한민국 세력의 대립이지요.
어찌 보면 아버님의 부정적 평가에는 역대 정부가 모두 연관됐던 셈이지요."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이 서거한 뒤로 오스트리아 친정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첫 손자를 얻고, 전직 대통령 부인에 대한 예우 법령이 만들어지면서
1970년 이화장에 들어왔다.
"어머님은 생활비를 내주며 보름마다 가계부를 확인했어요.
콩나물, 연탄집게, 냄비 꼭지 구입한 것은 물론이고, 팁 준 액수도 다 적혀 있어요.
전기료·수도료가 많이 나오면 빨간 줄을 그었어요.
'국민이 고생해서 낸 세금을 쓰는 것이니 꼭 아껴야 한다'고 했어요.
당시 못사는 서민들처럼 어머니는 속옷을 기워 입었어요. 저도 그랬고요."
▲2015.04.16. 조선일보
반공포로 2만여명 깜짝 석방… 韓·美 동맹 이끌어낸 '이승만의 승부수'
이승만, 정전협상 중 단행… 협정 깨질까 두려웠던 美, 상호 방위조약 '사인' 약속
▲2015.05.26. 조선일보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영어는 수준이 높았다.
그는 1941년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Japan Inside Out)'를 미국에서 출간했다.
이 책의 서평을 쓴 이는 '대지(大地)'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 벅 여사였다.
이승만은 책에서 군국주의 일본의 야심을 조목조목 진단하고 일본이 머지않아
미국도 공격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펄 벅은 '이 책은 무서운 책이다. 너무 큰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며 '모든 미국인이 읽어봐야 한다'고 썼다.
책 출간 넉 달 후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했다.
▲2015.06.23. 조선일보
건국(建國)의 의미와 공로자를 잊어서야…"
이승만 동상을 세우기 위한 모금에도 나섰다.
벌써 1만명 가까운 사람이 십시일반 2억7000만원을 기부했다.
건립 장소는 광화문이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위인(偉人)이고,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2015.06.04. 조선일보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설립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승만에게 미국 유학 추천서를 써 주다
▲2015.06.10. 조선일보
이 전집(全集) 사면 이승만 대통령 동상 드립니다
세종대왕像 조각가 김영원作 '이승만 브론즈 입상' 선물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만든 조각가 김영원의 작품.
광복 70주년을 맞아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조각상이 집집마다 한 점씩 놓였으면
좋겠다는 출판사의 소망을 듣고 작가가 무상으로 작품 원형을 기부했다고 한다.
▲2015.06.12. 조선일보
뉴욕서 이승만기념사업 펼치는 美 프라미스교회 김남수 담임목사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생애' 英譯, 도서관·교회등 10만권 배포 계획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누구냐' 물으니 제 아들도 잘 모르더라…
교포사회 젊은 세대 변화시켜야"
▲2015.07.02. 조선일보
우리 미래는 '제3의 불' 원자력에… 이승만 대통령 예견 들어맞아"
한국 표준형 원전 개발 주도… 정근모 前과학기술처 장관
▲2015.07.02. 조선일보
이승만 일본에 망명 신청 KBS가 이런 報道 하라고 시청료 내야 하나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본 망명 타진'이라는 생뚱맞은 뉴스를 내보냈다.
6월 22일자 일본 아사히신문은 '한국인 하면 떠오르는 인물'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배우 최지우에 이어 6위를 차지했다.
60여년 전 이승만의 반일(反日) 정책이 그만큼 일본인들 뇌리에 강하게 새겨진 때문이다.
▲2015.07.16. 조선일보
건국 대통령 이승만 50주기, 우리의 오늘이 이승만 없이 가능했는가
조국에 모든 것 바치고 빈손으로 떠난 거인, '고맙습니다' 말밖엔…
이승만 영결식장에서 한 미국인 친구가 울부짖었다.
"내가 너를 알아! 내가 너를 알아! 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는지…
그것 때문에 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알아…."
▲2015.07.18. 조선일보
"이승만 대통령이 만든 민주주의 체제에 살며, 건국 대통령 폄훼하는 세태 안타까워"
이승만 전 대통령이 생전에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굳게 서서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내용이다.
▲2015.07.18. 조선일보
이승만 전기(傳記) 영문으로 번역 'SYNGMAN RHEE' 출간
"United we stand, divided we fall(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1945년 10월 17일, 환국(還國) 환영회에 나선 이승만이 5만 군중 앞에서 강조한
대동단결의 연설 내용이 입으로 전해지면서 이 유명한 구호가 탄생했다.
▲2015.07.18. 조선일보
風雨飄零之際(풍우표령지제)-비바람 휘몰아치듯 혼란한 시대
爲國言論暢達(위국언론창달)-국가를 위하는 언론을 창달하자
서울 흑석동‘조선일보 뉴지엄’에 걸려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
1960년 조선일보 창간 40주년을 축하하며 “언론창달” 휘호를 썼다.
▲2015.07.18. 조선일보
이승만 서거 50주기 어제 서울현충원서 행사
기념학술회의 같은 부대행사 한 건도 없어
정·관계 등 1000여명 참석… 野圈 인사는 거의 안 보여
기념학술회의 같은 부대행사 한 건도 없어
정·관계 등 1000여명 참석… 野圈 인사는 거의 안 보여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 우리의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1942년 6월 13일 미국 워싱턴에서 전파를 탔던 '미국의 소리(VOA)' 방송의
이승만 육성 녹음본이 17일 오후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 울려 퍼졌다.
▲2015.07.18. 조선일보
교민 유족이 소장한 원본 공개
"하야 후 호화생활 주장은 낭설“
이승만 前대통령, 곤궁한 말년… 생활비 대준 하와이 교민에 梨花莊 양도 문서
써줬다
▲2015.7.20. 조선일보
이승만, 하와이 망명 안해… 여행 후 돌아가려는데 당시 정부가 귀국 막아"
류석춘〈사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은
"이승만은 하야 후 하와이로 갈 때 2~3주 휴가를 보낸다는 생각이었다"면서
"미국에 망명을 신청한 적도 없고 스스로 망명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2015.7.21. 조선일보
그는 하와이서 대한민국 밑그림을 그렸다
1913년부터 본격 정착, 한인기숙학교 교장 지내고 잡지 만들어 세계정세 알려
전문가 "의무교육·농지개혁… 하와이 생활 때 노하우 담겨" "동포들 돈 횡령은
사실무근"
▲2015.07.21. 조선일보
정부 전복혐의 이승만… 사형 위기서 구해준 함태영
이 한성(서울)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돼 하와이 및 미주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면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승만은 1898년 정부 전복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고 1904년 7년 만에 석방됐다.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장은 조부 함태영(1873~1964)이 이승만의 감형에 기여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함병춘·1983년 아웅산 사건 때 별세)에게 들었다고 했다.
▲2015.7.21. 조선일보
'이승만 강연' 앞장 이호 목사
"이승만 박사가 1918년 이곳 하와이에 세운 한인기독학원은 한국 5000년 역사 최초의 남녀공학 학교입니다. 양반과 상놈, 남자와 여자가 같은 교실에 앉아 미래를 향한 희망을 키웠습니다. 한국 역사에 획을 그은 위대한 혁명입니다."
▲2015.07.02. 조선일보
KBS가 이런 보도(報道) 하라고 시청료 내야 하나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본 망명 타진'이라는 생뚱맞은 뉴스를 내보냈다.
이런 내용은 일본의 극우 성향 산케이신문이 1996년 4월 14일자에 이미 똑같이 보도한 바 있고 국내 언론들도 다음 날 짤막하게 인용 보도했다. 그 문서란 것도 당시 현지사를 지낸 다나카의 회고담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난 20년 사이에 한국이나 일본·미국의 공식문서에서 확인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국내외에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가 얼마나 많은가?
적어도 이 점을 점검했어야 한다.
▲2015.07.16. 조선일보
언론노조 KBS 본부 "명백한 징계 인사"
KBS가 논란이 된 '6·25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 타진' 관련 보도 책임자들을
교체했다.
▲2015.07.16. 동아일보
고 이승만 대통령 50주기 추모식 17일 서울현충원서 열려
▲2015.07.17. 조선일보
김무성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부의 자리로 앉혀야"
▲2015.07.18. 조선일보
6.25전야 이승만의 몸부림...미군 철수, 원조 거부
6.25와 이승만 대통령의 전쟁 리더십--두번째 발표
▲2015.07.18. 조선일보
이승만 대통령 下野 후 하와이에서 보낸 마지막 5년 2개월
"한국땅 밟고 죽는게 소원"… 歸國 여비 모으려 5달러 이발비도 아껴
옷 등 넣은 가방 4개만 들고 2~3주 쉴 생각에 하와이行
교민들이 생활비 보탰지만 독립운동 시절만큼 곤궁
정부 不許로 귀국 좌절되자 급격히 건강 나빠져 입원
병실 창문 밖 태평양 보며 "저쪽이 우리 韓人들 사는 곳"
▲2015.07.18. 조선일보
기념학술회의 같은 부대행사 한 건도 없어
정·관계 등 1000여명 참석… 野圈 인사는 거의 안 보여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 우리의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2015.7.20. 조선일보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서거 때까지 3년4개월 지내
그는 병실서도 늘 祖國 생각… 소원 물으니 "한국 돌아갈 여비요!"
'50년 친구' 보스윅, 弔辭에서 "당신이 애국심 때문에 얼마나 고생… 잘 가시오"
5년2개월만에 돌아와 가족葬… 수십만 시민들 시청 몰려와 마지막 가는 '거인' 애도
▲2015.07.24. 조선일보
정치·경제·학계 50명, 建國 대통령 이승만을 말한다
이승만 前대통령 탄생 140주년 업적 술회한 '이승만을 말한다'
"6·25때 없어질뻔한 나라 지켜"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6·25 때 한국이 없어질 뻔했던 것을 지켜내고,
미국과의 외교를 통해 한국이 먹고살 수 있게 하고 부흥할 수 있도록 한 건국의
아버지입니다."(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
"대한민국의 상징인 세종로와 광화문, 즉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는 대한민국의 중심, 상징 거리에 우리 건국의 아버지인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김문수 전 경기지사)
▲2015.07.25. 조선일보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건국의 아버지' 홀대한 나라 치고 끝이 좋은 경우 난 못봤소
어느 나라나 건국일이 있고 건국 대통령이 있다.
심지어 건국의 아버지가 다섯 명이나 되는 나라도 있다.
이 '어느 나라나'에 포함되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2015.08.01. 조선일보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 탄생 140주년을 기념하고,
서거 50주기를 추모하는 우표가 미국에서 발행됐다.
▲2015.08.05. 조선일보
한국은 建國 대통령도 없는 지폐
영국 중앙은행은 지폐 속 인물을 주기적으로 바꾼다
내년에는 5파운드 지폐에 2차 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 총리를 새긴다.
미국 지폐에선 역대 주요 대통령들이 그 역할을 한다
일본은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일본을 세계적 열강으로 일으켜 세운 정치·사회·문화계의
거장들을 지폐 도안에 쓴다.
▲2015.08.10. 조선일보
한국 경제 시작은 이승만 박정희가 꽃피우다
대한민국 역사상 경제대통령 하면 흔히 박정희 대통령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승만과 기업가시대'(김용삼·북앤피플)는
"이승만의 경제개발계획을 박정희가 꽃피웠다"며
이승만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있다.
▲2015.08.14. 조선일보
20代 대학생 "이승만, 독재한건 사실아닌가",
70代 역사학자 "그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어"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에 절반만 공감한다.
해방 후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한 공로는 인정하지만 부정 선거와 개인 안위를 위해
다수를 희생한 독재자이기도 했다."(20대 대학생)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려다 보니 자기모순에 빠졌다.
당시 권위주의 대신 민주주의로만 나라를 운영했다면 우리 체제는 벌써 박살이 났을 것이다."(70대 경제사학자)
▲2015.08.17. 조선일보
"김구는 정치인이 아닌 '간디'와 같은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탁월한 정치가… 그의 功과 過는 7:3"
―이승만(李承晩)에 대한 평가는?
"반대편에 있었지만 존경받을 만하다. 탁월한 정치가였다.
남한 단독정부는 완성품이 아니고 이상적인 것도 아니었지만,
당시 현실에서 나름대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
공과(功過)를 7대3으로 본다."
▲2015.08.22. 동아일보
성공적인 국가의 초석을 놓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TV나 신문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나라, 그의 동상도, 그의 이름을 딴 공원도, 그의 업적을 보여줄 기념관 하나도 없는 나라,
이건 도저히 문명국이라 할 수 없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2015.08.28. 조선일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27일 전체회의를 열어 "지난 6월 24일 KBS 1TV '뉴스9'이 충분한 검증과 반론 기회 부여 없이 일본 야마구치현 자료를 근거로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망명 의사를 타진했다는 등 객관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내용을 일방적으로 내보내 공정성과 객관성을 위반했다"며 징계를 의결했다.
▲2015.08.28. 조선일보
이승만 대통령은 한시(漢詩)를 잘 짓는다
체역집(替役集, 한시모음집)에는 250수가 있다.
▲2015.09.02. 조선일보
36년 독립운동… '건국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기틀 마련
고종 황제 쿠데타 혐의로 옥살이… '독립정신' 책 쓰며 나라 미래 걱정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일본의 미국 공격 경고하기도
한반도 신탁통치에 가장 먼저 반대… 정부 수립 후, 초대 국회서 대통령으로
▲2015.09.03. 조선일보
이승만 독립운동 하기 위해 棺 사이에 숨어 상하이로 밀항
안창호 등 臨政요인들 모여 감격에 찬 '대통령 환영회'
당시 경무국장 김구가 경호 "가장 활기찼던 臨政 시기"
"국민아, 우리 임시 대통령 이승만 각하가 상하이에 오시도다.
국민아, 우리의 대통령을 따라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기에 일신하자."
▲2015.09.16. 조선일보
이승만 김구 대한민국 만든 두 國父 그들은 敵 아닌 협력자
이승만과 김구' 출간한 원로 언론인 손세일
▲2015.09.25. 조선일보
이승만과 김구, 擇一 아니다
최근 45년간의 연구를 집대성한 7권짜리 대작 '이승만과 김구'(조선뉴스프레스)를
출간한 원로 언론인 손세일씨는
"이승만과 김구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 국민국가를 창건한 정치 지도자"라고 했다.
두 사람은 독립운동 내내 협력 관계였으며 반(反)공산주의 이념에 철저했다.
1948년 남북 협상 과정에서 의견을 달리했지만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대한민국 건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2015.10.10. 동아일보
1953년 반공포로 석방
이승만 “반공포로 석방 막으면 행동 나설것” 美에 초강수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전에는
결코 휴전할 수 없다고 버티던 이 대통령이 취한 일종의 ‘벼랑 끝 전술’이었다.
결과적으로 휴전회담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한국 정부의 입지를 반전시키는
일대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2015.10.23. 조선일보
이승만의 40년 독립운동, 한반도 포기하려는 美 막아"
이승만 일기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진 것은 미군 장교 두 명이 즉흥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대로 두었으면 한반도가 전부 소련의 수중에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한국의 '상징적 중요성'에 대한 고려 때문에 그런 결정이 내려졌다.
한국의 '상징적 중요성'은 미국에서 이승만이 40년에 벌인 외교활동과 독립운동에
힘입은 것이었다."
▲2015.11.11. 조선일보
"이승만·김구 없었다면 대한민국도 없어"
손세일 청계연구소장
▲2015.12.17. 조선일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 누구 덕분인가요?"
"건국과정 진실 바르게 인식했으면"
"설령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과(過)가 크다고 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가진 국가를 세운 것만으로도 존경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대한민국과 이승만 대통령을 조롱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는 누구 덕분인가요?"
'대한민국의 탄생' 사진전 여는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
▲2016.01.15. 조선일보
이승만·박정희 평가, 이런 상식이 큰 흐름 되어야
한상진 '국민의당' 공동 창당준비위원장이 14일 4·19 묘역을 참배한 자리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어느 나라든 나라를 세운 분을 국부(國父)라고 평가한다"며
"우리도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한계가 있었지만…
▲2016.01.25. 조선일보
이승만의 결단 없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출범 외에도 반공포로 석방, 한·미동맹 체결, 평화선 선포,
6·25전쟁 후 산업 부흥 시도 등 국익을 위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동상을 세워야 할 인물인데 만년의 독재와 4·19혁명 때문에 어렵다.
이제 이승만에 대한 너무 각박한 평가는 극복할 때가 됐다.
하지만 '국부(國父)'라는 용어는 민주사회에 맞지 않다.
'이승만 국부 논쟁'은 생산적·합리적이지 않다."
▲2016.01.27. 중앙일보
국부(國父) 이승만, 통일되면 가능하다
.건국대통령 이승만(1875~1965)을 국부(國父)로 추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대개 보수·우파다. 진보·좌파에선 이런 목소리가 거의 없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한상진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이 이승만을 국부로 평가한 것이다. 그는 대표적인 진보파 사회학자다. 정치적으로는 김대중(DJ)에게 정서적 유대를 갖고 있다. 그런 인물이 ‘국부 이승만’을 언급한 것이다.
▲2016 1. 30 중앙일보
국부(國父) 논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功)7 과(過)3
지난 1월 14일 한상진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은 4·19 묘소를 참배하면서
이승만 대통령(1875~1965)을 국부(國父)로 평가했다.
대표적인 진보파 사회학자가 대표적인 우파 지도자 이승만에게 그런 호칭을 바친 것이다.
▲2016.03.26. 조선일보
경인여대(총장 김길자)는 25일 인천시 계산동 캠퍼스 잔디광장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우남 이승만 박사의 대리석상 제막식을 가졌다
▲2016.04.28. 조선일보
이승만은 초월(超越) 군림(君臨)형 신익희는 무실력행(務實力行)형'
▲2016.10.11. 조선일보
대한민국 國父는 이승만"
"어느 나라나 건국 과정에서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그 나라가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국부(國父)'라고 합니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같은 사람이지요.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그런 사람입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
▲2017.03.21. 조선일보
"약점 많았던 이승만 정부, 그래도 품격은 있었다"
"백지상태서 민주주의 정부 세워 亂世 극복 위해 애썼던 지도자 이승만
본보기 삼되 관료주의 탈피해야…
이승만 정부 그리고 공유정부…' 낸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
▲2017.07.13. 조선일보
한·미 동맹 없이 휴전 없다는 이승만의 對美 필사 투쟁
작전명 에버-레디(Ever-ready)를 아십니까
에버-레디(Ever-ready)는 6·25전쟁 중이던 1953년 5월 유엔군사령부가 극비리에 수립한
작전 계획이다. 중공군 격파 작전이 아니다.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를 붕괴시키고
미국말을 안 듣는 이승만 대통령을 감금하는 작전이다.
▲2017.08.28. 조선일보
이승만의 건국'만 깎아내릴 수 있다면
"임시정부은 파벌 싸움터" 조롱하다 '48년 대한민국 출범' 부정 위해
좌파, '1919년 건국 임시정부와 동거 택해…
강요 말고 국민여론 수렴해야
▲2017.09.27. 조선일보
35권짜리 '이승만전집' 내년부터 차례로 출간
'이승만전집발간위원회' 발족, 雩南 저작물 묶어 2026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1875~1965)
박사가 남긴 저작물을 한데 모은 '이승만전집'이 발간된다.
▲2017.11.13. 조선일보
이승만 맥아더와 두 사람은 서로 코드가 잘 맞았지만 그들의 말로는 불명예
▲2017.12.22. 조선일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현판에 적힌 글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에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총사령관이
참석하였다
1945년 9월 시작된 미군정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끝난다.
이승만과 맥아더는 서로 잡은 손이 상징적이다.
▲2018.01.23. 조선일보
이승만의 건국과정 배우니, 현대사 다시 보게 돼"
이승만 학당' 4기 2030 수강생들
"중고교 때 배운 이승만 대통령은 '독재자'나 '통일 정부 수립을 반대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애국 지도자였던 김구 선생과 대비되는 인물이었어요.
그런데 이 대통령은 한국 전쟁 때 반공 포로를 석방하는 '벼랑 끝 외교'를 하면서까지
한·미(韓美) 방위 동맹을 맺어 자유 한국을 지켰다는 걸 알고 다시 보게 됐어요."
▲2018.06.01. 조선일보
제헌국회, 문을 열다
198표 중 188표로 의장 된 이승만 "국회는 3·1 국민대회 계승"
▲2018.06.08. 뉴데일리
6.25침략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대통령이 도쿄의 맥아더 장군을 깨워 호통친 첫 마디
미국이 내 말을 안 들어 전쟁 났다 당장 달려와 이 나라를 구하라!
▲2019.03.20. 조선일보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가 지난 16일 방송된 KBS1 TV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미국의 '괴뢰'라고 지칭하며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신탁통치에 찬성했으면 분단도 없었을 것"이라는 발언도 전파를 탔다.
▲2019.03.21. 조선일보
이승만이 괴뢰라고 말한… 도올의 '역사 정치'는 위험하다"
KBS 김용옥 강의에 포문 "反이승만으로만 현대사 바라봐"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가 KBS TV에서 "이승만은 미국 괴뢰"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강의한 내용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선동적 표현도 문제지만 이승만에 관한 사실 자체가 허위라는 지적이다. 80년대 베스트셀러 '해방 전후사의 인식' 필진으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을 지낸 김명섭(56·연세대) 교수는 "역사의 일면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반(反)이승만적 관념에 갇혀서 과거를 해석하는 '역사 정치'의 폐해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2019.03.21. 조선일보
이승만이 괴뢰?… 도올의 '역사 정치'는 위험하다"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가 KBS TV에서 "이승만은 미국 괴뢰"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강의한 내용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선동적 표현도 문제지만 이승만에 관한 사실 자체가 허위라는 지적이다.
KBS 김용옥은 "反이승만으로만 현대사 바라봐"
김명섭 교수
▲2019.03.25. 조선일보
향군, "김용옥의 '이승만 묘지서 파내야' KBS발언은 반국가적 범죄행위...강력규탄"
대한민국재향군인회(향군)는 지난 16일 KBS 1TV가 방송한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도올 김용옥 교수가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발언한 것과 관련,
"국가정체성에 대한 역사를 왜곡하고 대한민국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고 있는 한미동맹을
훼손하는 것은 반국가적 범죄행위"라고 25일 밝혔다.
▲2019.04.11. 조선일보
이승만 “공산주의는 가장 어리석은 물건”
이승만은 1921년 11월 12일 서재필· 정한경 등과 한국독립 대표단을 꾸렸다.
하지만 미국은 참석을 허가하지 않았다.
일본이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 등의 이유였다.
▲2019.04.13. 조선일보
이승만 빼고 대한민국 역사 쓰는 그들, 김일성 빼고 북한 역사 쓸까
대통령 취임사 '통합' '공존' '동반자' 사라지고 '증오' '복수' '적개심' 판쳐
강천석 논설고문
이승만 시집 체역집(替役集)에 있는 시
어부(漁夫)
人間萬事餘 歸釣舊磯魚 迹江湖闊 生涯煙雨疎 一樽山影碧 孤棹月光虛
鷗鷺同尋約 水雲無定居 寒楓霜落後 晩荻露凉初 曲罷滄浪靜 夢醒暮噓
可師嚴七里 與子屈三閭 白日竿頭盡 斜風葦所如 興亡付笑指 窮達任居諸
名利尋常事 嗟乎富貴墟 衣蓑猶勝錦 駕艇欲忘車 疑乃聲中趣 也應不在漁
세상 모든 일 끝내고 낚시터에 돌아와 고기를 낚네.
종적은 강호에 거칠 것 없고 성근 비 연기에 유유한 생활.
갈매기 해오라기 같이 찾자던 약속 수운 간에 정처가 없네.
찬 서리에 단풍은 다 지고 저물어 억새밭에 첫 이슬 내릴 때
노래가 끝나니 물결은 자고 꿈을 깨니 저녁 물든다.
칠리뢰 엄자가 스승이라면 굴삼려는 내 친구일세.
하루가 낚싯대 끝에 지고 바람에 조각배는 제 맘대로.
흥망이야 웃어넘기고 궁하고 잘 됨이야 운명에 맡기네.
명리는 있을 수 있는 것 부귀도 헛된 것이지.
도롱이가 비단옷보다 낫고 거룻배 타고 수레를 잊었노라.
이 노래 부르는 것은 응당 고기에 뜻 둠은 아닐레라.
이 시에선 은퇴한 어부의 생활을 읊고 있다.
엄자는 후한때 세상사를 잊고 숨어 산 낚시군이고 굴원은 전국시대의 험난한
삶 속에서 끝내 좌절하고 멱라수에 몸을 던진 비극의 시인이다 엄자와 굴원에
스스로를 비교하며 인생사 흥망 명리 부귀를 모두 잊었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낚시를 즐기는 모습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