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1074) - 감에 얽힌 사연
해마다 이맘때면 곁방에서 농익어가는 홍시 감을 바라보며 작은 행복에 잠긴다. 올해는 과일작황이 예년만 못해 아쉬운 편, 그래도 단골로 이용하는 업소를 통해 주문한 감을 가지런히 진열하여 홍시로 익히는 재미가 쏠쏠하다.
인터넷에서 살핀 감의 모습
얼마 전 일본의 지인과 주고받은 메시지,
‘안녕하세요! 지난 주말에는 식물관련 통역 일이 있어서 자가운전을 하며 지방에 다녀왔는데 감이 널려 있어서 따왔습니다.’
내가 보낸 답신, ‘감 풍년이군요. 금년 가을 한국의 감과 사과 등 과일작황이 좋지 않답니다. 지난번 일본걷기 때 길가에서 500엔에 4개씩 파는 감 한 봉지 사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어진 회신, ‘아, 그러셨군요. 일본인들은 홍시 감을 잘 안먹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과일가게에서 4~5개에 1~2백 엔에 파는 홍시를 많이 사다가 플라스틱 통에 담아 냉동실에 넣어뒀다가 녹여가며 한겨울 두고두고 먹는 지혜가 생겼습니다.’
일본의 지인이 보내온 감 무더기 화면
엊그제 신문에서 감을 주제로 한 시인의 글을 접하였다. 그 내용,
‘감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허영자(許英子 1938~)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 이웃집 담벼락 위로 뻗은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보며 가을을 느끼곤 했는데, 요즘 도시인들은 감나무를 보기 힘들다. 어디 하나 뺄 곳 없이 순도 높은 시어들로 완성된 시. “떫고 비리던”이라니. 얼마나 생생한 표현인가. 덜 익은 감의 떫은맛에 “비리던”이 들어가 청춘의 아픔과 서투른 우여곡절이 연상되었다. 더 이상 떫고 비리지도 않은 내 피가 갑자기 약동하면서 빈속에 소주 한 병을 들이부은 듯 가슴이 쓰렸다. 어머니는 연시를 좋아하셨다. 작년 봄에 어머니를 잃은 뒤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어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자식은 부모가 죽어야 철이 들어요.”(2023. 11. 20 조선일보, ‘최영미의 어떤 시’에서)'
곶감과 호랑이 이야기로 우리 모두에게 친숙한 과일을 범인(凡人)은 한겨울의 별미로, 시인은 심오한 철학으로 새기누나.
* 수십 년 전 크리스마스 무렵 아내와 함께 고향의 명찰 선운사를 찾았다. 초등학교 소풍 길에 처음 들른 이래 이따금 찾는 고찰, 절 밑에서 하루 묵은 후 소풍 때 오가던 산길 따라 고향마을로 향하던 중에 길을 잃었다. 되돌아가기에는 먼 길이어서 시야에 잡히는 산 아래 길을 향해 산속을 헤매다가 사람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홀로 서있는 감나무를 발견하였다. 인적이 드문 호젓한 곳의 작은 나무에 매달린 감들이 한겨울 지나며 곶감처럼 쭈그러든 모습, 일찍 숙소를 나서 아침도 거른 체 산길 헤매다 한 움큼 따 먹은 곶감 맛을 그 누가 알랴. 가끔 농담처럼 되뇌는 말, '그때 따먹은 무공해곶감이 신약(神藥)이어서 지금껏 건강한 것 아닐는지.' 다가오는 겨울철, 모두들 건강하시라.
겨울로 접어드는 무심천 풍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