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심! 백홍석은 준결승에서 후야오위에게 대역전승을 거둬 결승에 올랐다 |
- BC카드배 결승전 전망 배태일 박사(美 스탠포드대, 한국기원 랭킹위원)
BC카드배 결승전이 눈앞에 다가왔다. 제4회째 맞이하는 이 세계기전은 여러 가지 혁신적인 제도를 마련하고 시작했다. 첫째로 아마추어에게 참여 기회를 주는 오픈 기전으로 시작했고, 둘째로 상금제를 처음 실시했고, 그리고 기전을 비교적 빠른 기간에 진행해왔다.
BC카드배는 2월 27일에 예선을 시작했는데, 불과 두 달이 채 안된 지금 결승을 앞두고 있다. 이처럼 기전을 빨리 진행하여야 바둑팬들이 흥미를 가지고 계속 관전할 수 있다. 기전을 질질 끌어서 진행하면서 언제 다음 단계가 진행되는지 바둑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주최측도 모르는 식으로 기전을 운영하면 바둑팬들이 흥미를 유지할 수 없는데도 많은 기전들이 이런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BC카드배의 빠른 진행을 다른 기전들이 본받을 필요가 있다.
빠르게 진행되는 BC카드배의 주최측에서 2010년 초에 휴직에서 복직한 이세돌에게 와일드카드 시드를 주어서 이세돌이 복귀 후에 곧바로 세계 타이틀을 딸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이세돌이 24연승의 경이적 기록을 세울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었다. 이세돌이 계속해서 작년에도 우승하였기에, 세 번 연속 우승하기를 기대했는데, 종당에 결승 진출자가 된 당이페이에게 져서 탈락하고 말았다.
금년의 BC카드배는 2012년에 불어닥친 거친 황사 바람이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어 중국 바둑의 놀라운 성장을 엿보여 한국바둑계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게 하는 공을 세웠다. 또한 한중의 고수들이 일찍이 탈락하여 예상치 못한 기사들이 부각되는 기회를 만들었다. 준결승에 오른 4명 중에서 박문요를 제외하고는 예상 밖의 기사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준 결승에 오른 4명의 기사들을 조명하고, 특히 결승에 오른 백홍석과 당이페이의 기록을 조명하면서 결승전을 전망해 보고자 한다.
나이 순으로 먼저 후야오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1982년 1월 18일에 출생한 중국 상해 출신으로 만 11세이던 1993년에 입단하였고, 일찍부터 촉망되던 기사였다.
후야오위는 2002년에 농심배에서 5연승해서 한국 바둑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07년에는 엘지배 결승에 올랐었는데 비교적 약체로 알려진 저우쥔쉰에게 져서 세계 타이틀을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었다. 이외에도 삼성화재배 4강에 3번씩이나 오르는 등, 여러 국제 기전에서 꾸준히 활약했는데, 2008년 이후로 별 활약이 없어서 잊혀져 가고 있다가 최근에 성적이 좋아지면서 BC카드배 준결승까지 올랐다.
금년 초에 열린 한중교류전에서 속기에 비교적 약한 중국 고수들인 구리, 콩지에, 씨에허, 저우루이양, 탄샤오, 등이 한국 기사들에게 많이 졌는데, 유별나게도 후야오위는 안형준, 나현, 진시영, 박정환, 김형우를 차례로 물리치고 5전 전승의 기록을 세웠다.
후야오위와 이세돌과는 인연이 깊은데, 그 이야기를 해보자.
후야오위가 원생 시절이던 1993년에 한중 원생 교류전의 중국 대표로 참가하여 부산에서 중국 팀이 승리를 거두었다. 중국 원생들이 한국에 온 김에 서울로 올라 왔고, 권갑룡 도장의 학생 대표들과 친선 게임을 가졌고, 후야오위는 자기보다 한 살 아래인 자그마한 이세돌과 대국하게 되었다. 후야오위는 한국 기원 원생 대표팀까지 이겼는데, 일개 도장의 대표쯤이야 하고 가볍게 생각하고 대국했는데, 웬걸, 이세돌에게 밀리기 시작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얼굴이 상기된 후야오위가 머리를 식힐 겸 세수하러 나왔다. 마침 복도를 지나던 동료가 어떻게 되가느냐는 질문을 하자, “프로 기사도 아닌 조그만 녀석이 얼마나 빨리 두고 예리하게 두는지 놀랐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식혔어도, 이미 기울어진 판세를 회복할 수 없었다. 후야오위는 돌을 던지고 말았다.
“병아리 때 쫓기면, 장닭이 되어서도 쫓긴다”는 속담처럼, 후야오위는 프로가 되어서도 이세돌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2008년의 제6회 응씨배 32강전이었다. 후야오위가 종반까지 계속 우위를 유지했고, 관전하던 한국 기사들이 이세돌이 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세돌의 흔들기, 이세돌이 좌충우돌의 흔들기로 판을 어지럽게 이끌어가자 후야오위는 시간을 물쓰듯하며 장고를 하다가 응씨배 특유의 룰에 따라 세 번이나 시간을 연장했다. 응씨룰은 두 점씩 벌점을 먹이니, 무려6점, 그만 5집을 지고 말았다. 벌점 6집이 아니었으면 계가로 한 집을 이기는 셈이었다. 당시의 관전기들은 이세돌의 승리를 “마법의 흔들기”라거나 “거짓말 같은 역전승”이라고 표현했다.
박문요(퍄오원야오)는 조선족 중국인이며, 한국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박문요는 1988년 4월 25일에 만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가 일제시대에 만주에 이주했기 때문.. 일찍부터 신예 강호로 인정 받았고, 비슷한 나이의 천야오예 등과 함께 소표세대라고 불리었다. 일찍이 중국 랭킹 5위에도 올랐었지만, 라이벌급인 천야오예가 두 번의 세계 대회 준우승으로 9단으로 승단하며 추월했다, 그는 오랫동안 5단에 머물다 작년 2월에 콩지에를 물리치며 LG배에서 우승하여 9단에 올랐고 중국 최연소 세계 대회 우승 기록을 세웠다(이 기록은 금년 2월에 장웨이지에가 엘지배에서 이창호를 물리치고 우승함으로써 깨어졌다).
근래에는 퉈지아시, 스위에, 저우루이양, 탄샤오, 장웨이지에, 등의 90후 세대들에게 밀려서 중국 랭킹 10위권 밖으로 떨어졌다가, 최근 두 번 발표된 중국 랭킹에 9위로 올라왔다. 필자가 발표한 2012년 4월 랭킹에 의하면, 세계 랭킹 6위이고, 중국 기사들만 따지면, 씨에허, 천야오예, 탄샤오, 다음으로 4위에 해당한다. 최근의 활약상이 반영된 것이다.
▲ 백홍석, 준우승만 9번 했다. 내게도 기적이 오리라 믿는다 백홍석은 1988년 8월 13일에 출생했고, 권갑용 도장에서 훈련 받다가 2001년에 입단하였다. 아직 입단 병목 현상이 생기기 전이라 이른 나이에 입단한 편이다. 일찍이 2006년에 신예 기전인 SK배에서 우승했지만, 그 후에 준우승을 여러 번 하고 본격 기전에서 우승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2007년 십단전, 2007년 오스람배, 2008년 기성전, 2009년 십단전, 2011년 바둑왕전, 20011년 명인전에서 준우승하여서 이것만 해도 준우승만 6번이고 전체로는 9번이다. 비슷한 나이의 홍성지(1987년생)가 2008년에 물가 정보배에서 우승하는 것을 지켜 보아야 했고, 허영호(1986년생)가 한국 랭킹 4위까지 치고 올라가는 것도 지켜 보아야 했다. 이런 것에 자극 받았는지, 작년 1월에 22위이던 랭킹이 금년 5월에는 8위까지 치솟았다.
당이페이의 최근의 전적은 너무 뜻밖이라 그가 속해있는 중국 바둑계조차 놀라움을 자아내고 있다. “당이페이의 신비”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그의 이름 이페이(毅飞)가 한 번 비상한다는 “一飞”와 같은 발음이어서 “党毅飞의 一飞”라는 제목의 글이 등장하기도 한다. (飞는 飛, 날비자의 중국 간자이다.)
당이페이는 1994년 6월 17일 생으로 2007년에 입단했다. 그리고 조용했다. 중국의 90후 세대들인 퉈지아시, 장웨이지에, 저우루이양, 탄샤오, 등이 두각을 나타낼 때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작년 성적도 그저 그런 편, 46승 36패, 탁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중국의 신예 강자들이 70% 근방의 승률을 내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성적이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세계대회에서 16연승을 거두더니 결국엔 제4회 BC카드배 결승에 올랐다. 다메섹(다마스커스)으로 가는 중에 회심한 바울처럼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 제4회 BC카드배 4강 진출자 랭킹 점수 그래프 아래 그림에 이들 네 명의 작년 1월 이후의 랭킹 점수 변화가 그려져 있다. 중국 기사들의 점수는 필자의 세계 랭킹 점수이고, 백홍석의 점수는 한국기원 공식 랭킹 점수이다. (한국 기사들의 경우에는 한국기원 공식 랭킹 점수를 세계 랭킹 점수로 발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 4명의 랭킹 점수가 다 올라가고 있는 추세이다. 물론 BC카드배에서 낸 좋은 성적이 최근의 점수 상승에 기여했다.
후야오위는 고참 기사로서 그의 점수가 꾸준히 유지되다가 최근에 올라갔다. 흔히들 20대 후반이면 기력이 약해진다고 생각하는데, 후야오위의 점수 변화를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과거에 한국의 70년대 생 고수들이 잘 나가다가, 더 강한 훈련을 받은 80년대 생들이 입단하면서 상대적으로 랭킹이 떨어진 것과도 같다. 이건 일종의 착시현상이지, 20대 후반이 되어서(나이 때문에) 실력이 떨어졌던 것이 절대 아니다.
안조영이 30세가 넘어서도 2010년에 11위까지 올라갔고, 그 때의 그의 점수는 전성기 때의 점수와 비슷했다. 요즈음은 90년대생들이 입단 병목 현상으로 많은 활약을 할 수 없었기에, 80년대생 고수들의 랭킹이 30세가 가까운데도 상승한다.
박문요 또한 한 동안 슬럼프에 빠졌지만,, 작년 1월 이후로는 계속 점수가 늘어가는 추세를 볼 수 있다. 백홍석은 2011년 1월에 9274점이었는데, 불과 16개월 사이에 261점이 늘어서 5월 랭킹 점수가 9535점이다. 상위권 기사의 점수가 이렇게 빨리 는 것은 그 예가 많지 않다. 박정환, 김지석, 강동윤, 김승재, 등이 이처럼 빨리 는 적이 있었다. 당이페이가 작년에 얼마나 평범했냐는 것은 세계 랭킹 점수 변화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올해 들어서 사람이 달라졌다. 그의 점수는 로켓처럼 상승하고 있다.
▲ 중국선수 당이페이, 작년까지 그야말로 평범한 성적이었다 당이페이보다 훨씬 경륜이 높고, 꾸준히 정상권을 유지해온 박문요가 결승에 오르지 못한 것, 아직 덜 익은 당이페이가 결승에 오른 것은 백홍석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당이페이의 행운이 계속된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고, 당이페이의 “一飞”가 “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잭 니콜슨이 주연한 1975년 영화)처럼 좌절로 끝날 수도 있다. (너무 심한 비유인가?!)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온다는 속담이 있다. 백홍석은, 랭킹 점수 변화가 보여 주듯이, 지난 1년여 동안 꾸준히 실력을 쌓아온 결과로 BC카드배 결승까지 올라왔다.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는 말도 있듯이 거친 황사 돌풍이 불어 닥친 2012년에 백홍석이 영웅으로 탄생하는 기회를 잡기 바란다.
소속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 번 결승전은 한국과 중국의 대결이지만, 세대 관점에서 보면 90후 세대와 이전 세대 기사들 간의 경쟁이다. 백홍석이 타이틀을 따서 황사 돌풍에 실망한 한국 바둑팬들에게 위로를 줄 것인지, 아니면 당이페이가 박정환과 장웨이지에를 뒤이어 90후 세대의 세 번 째 세계 기전 타이틀 보유자가 됨과 동시에 최연소 세계 타이틀 보유자가 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어떻든 또 하나의 영웅이 태어날 것이다.
[글 | 배태일 박사]
○● 결승 5번기 | 백홍석 VS 당이페이 5월 12일 제1국 : 해설 한종진 (오후 1시 오로대국실) 5월 13일 제2국 : 해설 박정상 (오후 1시 오로대국실) 5월 15일 제3국 : 해설 송태곤 (오후 1시 오로대국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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