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칼뱅의 생애와 사상]
칼뱅과 현대 서구문화의 형성(2)
종교 차원에서 인정해 준 경제적 행동주의
앞 장에서는 17세기에 비정통과 정통을 막론하고 칼뱅주의 안에서 경제적으로 역동적인 태도가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상세히 정리했다. 칼뱅주의 노동관은 이제 대부분 세속화되었다. 태도는 남았지만, 그 태도의 기저에 깔렸던 종교적 대의는 잊혔다. 칼뱅주의는 세속적 노동관으로 흘러가는 이런 추세를 1550년부터 1680년 사이에 인식했을 것이다. 칼뱅 본인을 포함하여 초기 칼뱅파 저술가들에게 '부르심'은 한 사람이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었고, 세속적인 직업으로의 부르심은 그저 부차적인 의미일뿐이었다. 그런데 잉글랜드 왕정복고 때는 하나님의 영원한 부르심보다는 세상 속에서 직업으로의 부르심을 주로 강조했다. 하나님의 영원한 부르심이 부르심의 본질인 것은 여전한데도 이 신학적 토대보다 세상에서 하는 일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부르심'이나 '소명'의 개념을 세속화하려는 현대적 동향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서구 문화에서 대다수 사람을 특정 활동 영역으로 부른 이는 하나님이 아니다. 사회나 내면의 목적의식에 부름을 받아 특정한 활동 영역에 들어선다. 서구 문화에서 많은 사람이 이런저런 행동주의에 투신하는데, 이런 성향은 부분적으로 청교도 선조들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스티븐 포스터(Stephen Foster)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고 한 세기 동안 뉴잉글랜드를 확장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청교도의 경제적 태도는 상당부분 칼뱅주의 노동관 덕이라고 지적한다. 로버트 벨라는 현대 미국인들의 개인주의와 헌신을 조사하면서 "소명 또는 부르심이라는 개념을 자기식으로 다시 소화하는 것"이 미국 문화를 새롭게 고치는 열쇠라고 말한다. 부르심에 관한 칼뱅주의 사상은 새로운 세속의 옷을 입고도 아직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드러낸다. 이 사상은 칼뱅 본인은 아마 알아보지 못할 형태로도 살아 있다. 북아메리카의 '번영 신학'이 바로 그것이다. 번영 신학에 관해서도 잠시 후 간략히 살펴볼 계획이다.
칼뱅주의 노동관이 북아메리카에 끼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1831년에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미국 설교가들이 "저세상에서 영원한 지을 얻는 것에 관심이 있는지, 아니면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는 것에 관심이 있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미국 종교사를 연구한 책에서 시드니 알스트럼(Sydney Ahlstrom)은, 19세기에 뚜렷한 동향이 나타났고 이 흐름이 20세기에 더 뚜렷해졌다고 말했다. 부를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표징으로 간주하는 흐름이 생긴 것이다. 19세기 후반 미국 금융계를 지배했던 두 사람만 언급하자면,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는 부를 자신의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으로 간주했고,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는 '부의 복음’을 이야기했다. 개인과 국가의 부를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징표로 여겼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발흥한 '번영 신학'은 왜곡된 칼뱅주의 노동관의 필연적 결과로 볼 수 있다. 프레더릭 프라이스(Frederick Price)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이 운동을 대변했다. “우리는 번영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삶의 전 영역에서 번영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번영은 물질적·재정적 번영이다." 의미심장한 제목이 붙은 글로리아 코플랜드(Gloria Copeland)의 책 《하나님의 뜻은 번영이다God's Will is Prosperity》(1978)와 노벨 헤이스(Norvel Hayes)의 《지금 번영하라! prosperity now!)pr》(1986)에서도 같은 주제가 울려 퍼진다. 개인적 번영과 국가적 번영의 밀접한 관계를 '번영 신학'과 '되살아난 미국 민족주의'의 동맹 관계로 보는 이들이 많다. 현대 미국 종교 문화에서 이처럼 중요하고 확장성 강한 발전이 이루어지는 데 칼뱅주의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일단 칼뱅의 간접적 영향을 확실히 입증할 수 있을 정도로 둘의 접촉점은 충분한 것 같다. 칼뱅이 부에 달라붙어 있던 종교적·사회적 낙인을 없애 줬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여전히 칼뱅주의 노동관의 가장 의미 있는 기념물을 칼뱅이 활동했던 제네바시에서 찾으려 할 것이다. 어쩌다들른 방문객들도 은행과 기타 금융기관 건물이 제네바 도심에서 가장 높이 솟아 있는 것을 바로 눈치 챌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칼뱅과 자본주의의 관계는 생각보다 훨씬 미묘하고 역사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것은 칼뱅 본인보다는 제네바 공화국의 필요와 제도와 정책이 원인일 것이다. 칼뱅은 자본주의를 장려하러 나서지 않았고, 원래 있었거나 발전 중이던 제네바의 경제정책과 제도와 태도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해 준 것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기업 문화에 부여된 새로운 자극은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칼뱅의 사상이 낳은 의미 있는 결과이자, 칼뱅주의가 무엇이고 거기에 수반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둘러싼 대중의 인식이 낳은 의미 있는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이 종교 사상가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현대 서구 문화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셈이다.